▶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머물면 머무는 게 아니다
‘약심유주 즉위비주-만약 머문다면 사실은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은 끝없이 변한다. 젊음이 늙음으로, 고움이 미움으로, 건강이 질병으로 변한다. 부귀가 빈천으로 명예가 치욕으로 변한다. 희·락·애(喜樂愛)가 노·애·오(怒哀惡)로 변한다. 기쁨·즐거움·사랑이 성남·슬픔·미움으로 변한다. 나뭇잎이, 흐르는 강물 위에 내려앉으면 사실상 앉은 게 아니다. 강물 따라 끝없이 흘러가므로 앉아도 앉은 게 아니다. 우리 몸과 마음도 그러해서 일촌광음(一寸光陰)도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시공에서 시간을 공간을 붙잡고 잠시도 놓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잡을 수 없다. 중력은 공간을 휘고 업력은 시간을 휜다. 자신의 존재가 시공에 변화를 가한다. 일종의 재귀성(reflexivity)이다. 업은 시간 속으로 인간을 집어던진다. 종자식은, 중력을 만드는, 힉스입자에 대응한다. 업력을 만든다. 그 결과 천변만화 변화가 생긴다.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
우리 몸·마음도 머무르지 않아
불교 무아론은 인간의 고통이
구조적인 문제임을 깨닫는 것
(세상은 끝없이 변하는데 혼자 정체되어 있으면, 현상유지를 하는 게 아니라 뒤처지는 것이다. 그래서 머물면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돈을 재투자 하지 않으면 인플레이션에 의해 가치가 줄어든다. 마음도 그렇다. 끝없이 변하는 세상에 맞추어 같이 변하지 않으면, 머무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퇴보하는 것이다. 약심유주 즉위비주이다. 루이스 캐롤은 이걸 모든 사람이 항상 달리는 상태에 있는 ‘이상한 나라’로 묘사했다.)
욕망은 이루어도 충족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망에 머물면 머무는 게 아니다. 끝없이 욕망에 떠밀려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종당에 기다리는 건 고통의 바다이다. 난폭한 태풍과 사나운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이다.
가까스로 욕망을 이루더라도 기대하던 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 얼마 안 가 다른 욕망으로 질주하는 이유이다. 욕망을 품는 마음(행)과 이루어진 욕망을 평가하는 마음(受)이 다르다. 즉, 우리 뇌에서 욕망을 관장하는 부분과, 호오(好惡)를 관장하는 부분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어느 한 쪽에 이상이 생기면 해당 기능에 이상이 생긴다. 욕망하는 부분이 망가지면, 좋아하는 일이 발생하면 좋아하지만,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좋아하는 부위가 망가지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성취가 되어도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마음은 하나가 아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수많은 부위(팀)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욕망을 관장하는 부위와 호오(好惡)를 관장하는 부위 등 여러 부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종종 욕망의 충족은 만족(好)을 가져오지 못한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려면 욕망 자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무아론(無我論)이다. 무아론은 ‘인간의 고(苦)란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것은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수수께끼 같은 선불교적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위·무위라는 양변을 초월한 제3의 길이다.
아(我)와 무아(無我)에 대한 논쟁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논쟁이다. 둘의 정체성과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첨예한 논쟁은, 의식이 생긴 후에 생긴 문제이다.
마가렛 대처는 ‘개인만 있고 사회는 없다’고 했고, 에밀 뒤르켐은 ‘개인은 없고 사회만 있다’고 했다. 뒤르켐에 의하면, 개인이 가진 생각·감정은 대부분 사회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이게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전체주의가 된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대중에게는 자기 생각이 없다. 자기 생각인 줄 아는 생각도 사실은 남의 생각이다’라고 했다. 선동술의 근본법칙이다.
개인과 사회의 문제가 종교적으로 나타나면 영혼이다. 개체의 영원성에 빠지면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지만(아트만 론), 사실은 단 하나의 큰 영혼만 있다고 하게 되면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된다. 일종의 영적 군집론 또는 영적 사회주의이다.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의 영의 조각으로 보는, 기독교 신비주의도 이와 유사하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