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야 시대의 시문학
나종혁
(진로연 소장 겸 연구 교수)
삼한 시대(三韓時代)
삼한 시대(三韓時代, 기원전 2세기~서기 3세기)는 7세기 7백여 년을 존속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3한 3개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삼국 시대 이전 원삼국 시대(原三國時代)라고도 한다. 삼한의 기원은 청동기 시대 한반도 남부 지역 소재 진국(辰國,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경)에 기원하며, 진국과 함께 중국(衆國)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한반도 이남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중국은 진국 주변의 소국들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진국은 삼한 시대 이전의 한반도 이남 지역 연맹체로서, 청동기 시대 및 초기 철기 시대에 걸쳐 있었다. 진국은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맹체로서, 이후 삼한 제국과 가야 연맹체의 모태가 되었다.
삼한 시대에는 마한, 진한, 변한 3한 외에도 한반도 북부 지역에 부여(기원전 2세기~서기 494년, 고구려 합병), 옥저(기원전 3세기~서기 3세기, 고구려 합병), 동예(기원전 1세기~서기 6세기, 신라 합병)가 있었다. 삼한 시대 마한은 백제의 전신이고, 진한은 신라의 전신이며, 변한은 가야의 전신이다. 삼한의 3한은 마한 총 54개 부족 국가, 진한·변한 총 24개 부족 국가로 총 78개의 부족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한 시대 문화적 특성은 씨족 사회의 성격을 유지하되, 문명적으로 철기 문화에 이르렀으며, 정치적으로 마한, 진한, 변한 총 78개 부족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시기 삼한 시대 전역에는 당시 매장 문화로서 고인돌이 축조되었다.
마한(馬韓, 기원전 2세기~서기 8년)은 삼한의 한 나라로서 총 54개의 부족 국가 연맹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한은 삼한 지역 3개국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부족 국가 연맹체였다. 지역적으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걸쳐서 54개 부족 연맹체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후에 삼국 시대 고대 국가 백제가 되었다. 백제의 전신으로서, 청주 한(韓) 씨 족보상으로는 마한의 초대왕 기원전 2세기 무강왕부터 마한의 말기왕 기원전 33년~기원전 17년 계왕에 이르기까지 청주 한 씨가 왕조를 형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외에 다른 역사적 근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한 금성 나(羅) 씨 원시조 나 씨 3형제가 삼한 시대 마한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전라도 이남 지방으로 추정되는 다른 지방으로 이동했다는 금성 나 씨 원시조설이 존재하고 있으나, 이 역시 원시조설이며 역사적 근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마한은 후에 고대 국가 백제가 되었다.
진한(辰韓,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은 삼한의 3개국 가운데 한 나라로서, 총 12개국의 부족 국가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역적으로는 강원도, 경상북도 지역에 걸쳐 있었다. 진한은 한반도 이남 진국의 계승국이자 신라의 전신이었으며, 『삼국사기』에는 고조선 유민들이 진한의 원주민을 구성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중국 진(秦)나라가 멸하고 진나라 유민들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마한을 거쳐 진한에 와서 정착했다는 설도 있다. 진국을 이어받은 진한은 한반도 이남의 원주민들과 고조선 유민들 그리고 진나라 유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새로운 외래 유민들이 합세하면서 토착 언어가 변형되었다고 한다.
변한(弁韓, 기원전 1세기~서기 42년)은 삼한의 3개국 가운데 한 나라로서, 진국을 계승했으며, 삼국 시대 또는 가야를 포함한 사국 시대(四國時代) 고대 국가 연맹체 가야의 전신이었다. 경남, 전남, 남해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밀양, 고성, 사천, 고령, 하동, 창원, 김천, 함안, 거제 지역에 이르는 총 12개국 부족 연맹체였다. 변한에서는 철기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가야 시대(伽倻時代)
가야(伽倻, 加耶, 서기 42년~562년)는 부족 국가 연맹체로서 삼한 시대 변한의 후신이었다. 가야의 성립 시기는 서기 1세기 42년 금관가야를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금관가야 이전의 변한 지역 구야국(狗倻國) 등의 소국들을 기준으로 가야의 성립 시기가 기원전 1세기로 소급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 가야는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6세기까지로 대략 7세기 7백여 년으로 흥망 시기가 확대된다.
가야라는 국가 명칭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적 특성으로 우리말 고유어 ‘가람’에서 유래해서 ‘가라’(伽羅, 加羅)를 거쳐 ‘가야’로 바뀌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가야 연맹체는 금관가야(金官伽倻), 대가야(大伽倻), 아라가야(阿羅伽倻), 고령가야(古寧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소가야(小伽倻)의 총 6가야로 이루어져 있었고, 덧붙여 비화가야(非火伽倻)라는 제7의 가야국이 있었다고 한다.
금관가야(서기 42년~532년)는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체로서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 국가였다. 전기 가야 연맹은 총 12개 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기 가야 연맹은 이전의 변한 연맹체와 중첩되기도 한다. 전기 가야 연맹은 서기 400년 4세기 말~5세기 초에 세력을 상실했다. 금관가야는 6가야의 전기 제1 가야였으며, 초대왕 수로왕부터 말기왕 구형왕에 이르기까지 김해 김(金) 씨가 왕조를 이루었다.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金首露)는 가야 지역 구지봉 태생 6동자의 첫째로서, 금관가야의 시조가 되어 제1대 수로왕(재위 기간: 42년~199년)이 되었다. 금관가야는 일본에 철을 수출할 만큼 철기 산업이 발달해서 ‘쇠나라’라고 불렸다고 한다.
대가야(서기 42년~562년)는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체로서 후기 가야 연맹의 중심 국가였다. 후기 가야 연맹은 총 22개 국이었으며, 영남 지역 16개 국과 호남 지역 6개 국으로 구성되었다. 대가야는 6가야의 후기 제1 가야였다. 대가야의 시조는 구지봉 태생 6동자의 둘째이자 김수로의 동생 이진아시(伊珍阿豉)이며, 대가야 초대왕(재위기간: 42년~177년)이었고, 대가야의 말기왕은 도설지왕(재위 기간: 재위 연도 미상~562년)이었다. 구지봉 태생 6동자 가운데 다른 형제들이 모두 김 씨였다는 데서, 이진아시 역시 김 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가야의 성 씨가 당시 원어로 쓰여져 한자어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다. 6동자 6형제 가운데 오직 대가야의 이진아시만이 고유의 이름을 고집했다는 것은 대가야의 언어적 성격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신라의 한화정책에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사례이다. 신라가 그나마 향찰로 유지되던 우리말 고유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발음과 표기로 전환하는 당나라의 한화 정책(漢化政策)을 따랐지만, 그 예외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에서는 가야금이 발명되어, 우륵(于勒)이 가야금 12곡을 지었다.
아라가야(서기 42년~561년경)는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체로서 6가야의 하나였으며, 구지봉 태생 6동자의 셋째 김아로(金阿露)가 시조였다.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으며, 서기 400년까지 금관가야가 전기 가야 연맹체의 중심을 이루고, 대가야가 후기 가야 연맹체의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아라가야는 서기 540년에 전성기를 이루며 가야 연맹체의 중심국이 되었다. 이 시기와 같은 시기로 비정되는 함안 성산산성에서는 목간 3백여 점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아라가야는 안라국(安羅國)이라고도 불렸다.
고령가야(서기 42년~532년 이전)는 경북 상주 함창읍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체로서 6가야의 한 나라였다. 구지봉 태생 6동자의 넷째 김고로(金古露)가 시조이며, 가야 연맹체 6가야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했다.
성산가야(서기 42년~532년 이전)는 경북 성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체로서 6가야의 하나였다. 구지봉 태생 6동자의 다섯째 김벽로(金碧露)가 시조이며, 고령가야와 대가야 사이에 두 번째로 높은 북쪽에 위치했다.
소가야(서기 42년~562년경)는 경남 고성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체로서 6가야의 하나였다. 구지봉 태생 6동자의 막내 김말로(金末露)가 시조였으며, 6가야 가운데 가장 남쪽 지역에 위치해 남해안을 중심으로 해상 운송로 역할을 했다고 한다.
6가야 외에도 비화가야(非火伽倻, 比只國, 서기 42년~555년)는 경남 창녕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체로서 6가야 이외에 제7의 가야라고 할 수 있다. 건국 설화의 옥전왕(玉田王)이 시조이다. 경북 경주 안강 지역까지 포괄했으며, 낙동강 주변에 위치한 하천 교역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비화가야는 옛 문헌에 따라서는 고령가야를 대신하여 6가야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이상의 삼한 시대와 삼국 시대에서 삼한 시대 이전 진국에서 삼한 시대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분화되었고, 이들은 삼국 시대 백제, 신라, 가야로 각기 계승되었다. 삼국 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의 3개국 외에도 가야국이 가야 연맹체로 존재했다는 데서 삼국 시대를 ‘사국 시대’(四國時代)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가야사(伽倻史) 연구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면서 삼국 시대를 넘어서서 가야를 독립적인 고대 국가로 다루는 사국 시대를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삼국 시대에는 가야 연맹체 외에도 제주 탐라국(耽羅國)과 울릉도 우산국(于山國)이 따로 있었다. 여기서 가야사(伽倻史) 연구의 중요성은 삼국 시대의 변동과 가야의 흥망이 어떤 관련을 갖는가 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4세기 말 고구려가 남진 정책으로 낙동강 하류 임나가라(任那伽羅)를 급습하면서 시대적 전환점을 이루었다. 고구려의 임나가라 공격으로 가야는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동시에 백제는 가야를 통한 해상 교역로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와 정반대로 신라는 가야를 대신해서 세력을 확대해서 추후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된 것이다. 가야사 연구의 또 다른 중요성은 삼국 시대 제국들의 흥망은 남진 정책과 관련이 깊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백제가 남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리고 가야에까지 영향력을 끼치면서 백제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강행하면서 가야에까지 정벌을 나가면서 급격히 세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신라는 가야로의 남진 정책을 추진했지만, 백제와 고구려로의 북진 정책을 꾸준히 시행했고, 그러므로 가야로의 남진 정책으로 인한 위험성을 백제와 고구려로의 북진 정책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삼국의 역사는 북진 정책의 성공이며, 남진 정책의 실패와 파멸이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 무리하거나 과도한 남진 정책은 실패의 길이고 파멸의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역사적 정책은 아무리 불가피한 정책이라도 스스로 자멸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가야사 연구의 중요성은 삼국의 가야 남진 정책의 공과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이다.
청주 한 씨가 삼한 시대 마한의 지배 세력으로 한 씨 왕조를 형성했다는 주장은 족보상의 기록에 한정되며, 마한의 왕릉과 주요 유물들은 주로 나주 지역에서 발굴되거나 나주 부근에 소재하고 있다. 그러나 마한의 중심지가 청주나 충청 지역에서 후에 나주 지역으로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상 마한은 충청 지역뿐만 아니라 진한 지역까지 영향력을 크게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성 나 씨 족보 외의 원시조설은 가야 기원설과 삼한 기원설이 있으며, 가야 기원설은 구언왕이 시조이고, 삼한 기원설은 나 씨 3형제가 시조이다. 두 가지 시조 기원설은 삼한 기원설이 원시조에 해당하고, 가야 기원설은 중시조에 해당한다. 청주 한 씨와 마찬가지로 금성 나 씨의 기원설도 족보나 족보 외의 기원설에 한정될 뿐이다.
가야 시대의 시문학
서기 1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가야 시대는 농업과 철기 산업이 발달해서,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해안 지대에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철기가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던 해상 무역의 시대였다. 해상 무역의 중개지로서 가야는 가야 지역의 철기와 토기뿐만 아니라, 낙랑국과 백제의 수출 중개 기지 역할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낙랑국의 생산품을 중개하거나 백제의 대외 교역의 창구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가야는 한반도 전역의 대외 무역 기지였다고 할 수 있다.
가야는 6가야를 중심으로 경북, 경남, 전남 지역을 수평으로 분할해서 가야 연맹체를 이루며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다. 철기 외에 토기 문화가 발달했으며, 금속 세공술도 뛰어나서 일본에까지 전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화려한 해상 무역과 철기 문화의 발달은 당연히 가야 연맹체가 문화적으로도 번성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가야 시대의 시문학은 다음과 같다. 가야 시대 고대시로는 1세기 42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 「구지가」(龜旨歌)가 있다. 본 서사시는 김해 지역 구지봉(龜旨峯)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야 시대 고대문에는 가야 시대 이전 삼한 시대 이전 진국 시대 기원전 3세기경 「양아리 석각」이 있고, 가야 시대 서기 42년~561년경 아라가야(阿羅伽倻, 安羅國) 시대 「아라가야 함안 토기 ㄱㅈ 명문」이 있으며, 서기 42년~561년경 아라가야(阿羅伽倻, 安羅國) 시대 「아라가야 함안 청동 거울 ㅂ 명문」이 있다. 가야 시대 이전 삼한 시대 이전 진국 시대 양아리 석각에는 우리나라 한글 문자 가운데 자음 14자가 바위에 ㄱ부터 ㅎ까지 새겨져 있으며, 가야 시대 아라가야 함안 토기와 청동 거울에는 ㄱ과 ㅈ 그리고 ㅂ이 새겨져 있다. 또한 6세기 이전 가야 시대 「합천 가야 매안리비 명문」이 있다. 가야 시대 가야의 대표적인 목간은 「김해 봉황동 논어 목간」이다. 이 학습용 교재 목간에는 『논어』 「공야장」 편의 ‘인’(仁)에 도달함에 대한 공자의 대화가 실려 있다. 가야 시대 전성기였던 6세기 중엽 가야 시대와 신라 시대 중첩기에는 3백여 점의 아라가야 함안 성산산성 목간들이 발굴되어 그 가운데 238점의 판독 가능한 목간들이 확인되었다.
그 밖의 가야 관련 시문들은 다음과 같다. 562년 가야 시대 신라 시대 신라인 미실 작 8구체 향가로서, 가야로 원정을 떠나는 화랑도 김사다함을 보내는 미실의 이별의 시 「송사다함가」(送斯多含歌)가 있고, 6세기 562년~564년경 가야 시대 신라 시대 진흥왕조 화랑 김사다함 작 10구체 향가로서, 가야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김사다함이 미실을 그리워하는 시 「청조가」(靑鳥歌)가 있다. 신라의 장군 이사부(伊史夫)의 가야 정벌과 함께 신라의 화랑 김사다함의 가야 원정은 가야가 멸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8세기 702∼737년경 신라 시대 성덕왕조 작자 미상 작 실전 향가 「해가」(海歌)는 우리나라의 고대 가요이다. 9세기 875년경 통일 신라 시대 최치원(崔致遠) 작 칠언 절구 고대시 「가야산 독서당」(題伽倻山 讀書堂)이 있으며, 이 한시는 가야산을 배경으로 하며, 일명 「둔세시」(遁世詩)라고도 불린다. 875년경 통일 신라 시대 최치원(崔致遠) 작 팔언 이행시 「벽송정」(碧松亭)은 가야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875년경 통일 신라 시대 최치원(崔致遠) 작 칠언시 「희랑 화상에게 증정하다」(贈希朗和尙)는 가야의 불교 계승을 논하고 있다. 875년경 통일 신라 시대 최치원(崔致遠) 작 통일 신라 시대 전 최치원 석각 「합천 홍류동 석각문」이 있다. 본 석각문의 소재지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이다. 895년 통일 신라 시대 진성왕(眞聖王) 9년 승 훈(僧訓) 원작 「오대산사 길상탑사•곡치군 탑지」는 소재지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일주문 앞 길상탑이다. 879년 통일 신라 시대 헌강왕 5년경 작자 미상 고대 가요 이익 실전 향가 「처용가」(處容歌)는 가야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2022년 6월 21일 나종혁(羅鍾赫) 원작 캘리그라피 「가야」 명문은 가야를 한글 캘리그라피로 썼다.
그 밖에도 『삼국유사』에서 전래되는 가야 구지봉 건국 신화와 최치원이 『석이정전』에서 기록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전래되는 가야산 출생 신화가 가야의 두 가지 건국 신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금관가야 건국 설화 김수로·허황옥전도 전래되고 있다. 최치원의 『석순응전』(釋順應傳)에서는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月光太子)를 회고하고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는 임나가라(任那伽羅)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으며, 실제로 4세기 말에 고구려가 낙동강 하류까지 남진해서 임나가라를 공격했다는 역사적 기록도 있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편」 오가야조와 「탑상편」 피사석탑조 등 여러 문헌에서 가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끝> <2026년 9월 30일>
* 참고 자료: 삼한 및 가야 관련 사전적 자료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