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갑산
그 겨울도 엄청 추웠다.
그 엄청 추운 북녘의 산허리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 갔다. 주로 미군 병사들. 한국전쟁 때의 장진호 전투 당시 이야기다.
옛날에 우리 나라에서 귀양지 중 제일 가기 싫어했던 삼수갑산이 바로 거기다.
이 땅에서 가장 추운 곳인 그 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약 70년 전이다.
몹시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 그 혹독한 추위에 전투 중에 죽어 간 미군 병사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도 적진에서 날아오는 총탄보다도 그 칼날같은 매서운 바람이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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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갑산과 김소월의 시
삼수갑산
삼수갑산 내 왜 왔노 삼수갑산이 어디뇨
오고 나니 기험타 아하 물도 많고 산첩첩이라 아하하
내 고향을 도로 가자 내 고향을 내 못가네
삼수갑산 멀더라 아하 촉도지난이 예로구나 아하하
삼수갑산이 어디뇨 내가 오고 내 못 가네
불귀로다 내 고향 아하 새가 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내 못 가네
오다가다 야속타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김소월(1902~1934)('김소월시전집', 문학사상사, 2007)
삼수갑산(三水甲山) (O)/ 산수갑산(山水甲山) (X)
: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한 산골이라 이르던 삼수와 갑산.
(함경북도 북서쪽, 개마고원 인근 마을 이름)
조선시대 귀양지.
* 삼수갑산을 가다 - 매우 힘들고 험난한 곳으로 가거나
어려운 지경에 이르다.
*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속담)
- 자신에게 닥쳐올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라도
어떤 일을 단행할 때 쓰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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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갑산의 개요
갑산’은 함경남도 북동쪽 개마고원의 중심부에 있는 지역이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특유의 풍토병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불편한 곳이다. ‘甲山(갑산)’이라고 쓰는 것만 보아도 큰 산이 겹겹이 쌓여 있는 오지임을 알 수 있다. 지명에 큰 산이 있어 산세가 험한 지역임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갑산’은 산세가 험하여 접근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삼수’처럼 추워서 살기가 불편한 지역이다. 이렇게 보면 ‘삼수’와 ‘갑산’은 험한 오지라는 점, 매우 추운 지역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들 지역은 험한 오지인 데다가 추운 지역이어서 예전부터 중죄인(重罪人)을 귀양 보내는 적소(謫所, 귀양지)로 손꼽혔다. 이 지역으로 한 번 귀양을 가면 다시 살아 돌아오기 어려웠다.
험한 오지이고, 추운 지역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하여 ‘삼수’와 ‘갑산’이라는 지명은 쉽게 어울려 쓰인다. 이것이 ‘삼수갑산’이다. 공통적 특성을 지니는 두 지역을 아울러서 그 특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삼수갑산’은 ‘험하고 추운 산골’, 더 나아가 ‘유배지’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이 ‘삼수갑산’은 ‘가다’와 어울려 주로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어찌어찌하겠다”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어찌하겠다”식으로 쓰인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나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라는 표현은 무릅쓰거나 각오해야 할 최악의 상황을 강조하여 결연한 의지를 밝힐 때 쓰는 말로 아주 굳어진 느낌이다. 이러한 표현에서 ‘삼수갑산’은 ‘몹시 어려운 지경’이나 ‘최악의 상황’이라는 비유적 의미를 띤다.
이렇게 보면, ‘삼수갑산’은 ‘험하고 추운 산골’, ‘유배지’라는 의미 외에 ‘어려운 지경이나 상황’이라는 또 다른 비유적 의미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수갑산(三水甲山)’을 ‘산수갑산(山水甲山)’으로 발음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삼수’와 ‘갑산’이 남한에서 보면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어서 잘 모르는 터에, ‘삼수(三水)’가 ‘경치’를 뜻하는 ‘산수(山水)’라는 단어와 어형이 유사하여 그쪽으로 쉽게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음하고는 ‘경치가 수려한 곳’으로 생뚱맞게 해석한다. ‘삼수갑산(三水甲山)’을 ‘산수갑산’으로 발음하는 것은 자음 발음을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로 ‘풍비박산(風飛雹散)’에 대한 ‘풍지박산’, ‘복불복(福不福)’에 대한 ‘복걸복’이나 ‘복질복’ 등을 더 들 수 있다. ‘바람이 날고 우박이 흩뿌리는 것’이니 ‘풍지박산’이 아니라 ‘풍비박산’이고, ‘복’ 아니면 ‘복이 아닌 것’이니 ‘복걸복’이나 ‘복질복’이 아니라 ‘복불복’인 것이다. 잘못된 발음은 의미까지 바꾸어 놓을 수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발음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수갑산 [三水甲山] - ‘삼수’와 ‘갑산’은 북한 지명이다. (그런, 우리말은 없다, 2005. 10. 8., 조항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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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 한국전쟁 당시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함경남도 장진군 지역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중국군 제9병단에 속한 3개 군단 병력과 벌인 전투이다. 영어로는 ‘장진(長津)’의 일본어 독음인 ‘초신(ちょうしん)’을 가져와 초신호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나 초신호 작전(Chosin Reservoir Campaign)이라고도 한다. 김일성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까지 진격해갔던 유엔군이 12만 명에 이르는 중국군에 포위되어 격전을 벌이다가 흥남으로 철수한 사건이다.
배경과 원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뒤 패퇴를 거듭하던 한국군과 미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면적인 반격으로 전환했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으며,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그러자 김일성 정권은 산악지대인 평안북도 강계로 달아나 그곳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중국은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을 창설해 북한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했으며,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뒤 동부전선을 맡은 미 제10군단의 군단장 알몬드(Edward Mallory Almond) 중장은 부대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시켰다. 국군 제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진격해서 10월 10일 함경남도 원산을 점령한 뒤 두만강 유역까지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부전호와 압록강 유역의 혜산진 방면으로 진격했고,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은 개마고원의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11월에 들어서면서 중국군과의 전투가 본격화되면서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했던 유엔군은 청천강 유역으로 물러났다. 동부전선에서도 11월 8일 무렵부터는 중국군이 전투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몬드 중장은 휘하의 부대들에게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더욱 신속히 진격할 것을 명령했고, 11월 21일 미 제7사단 제17연대는 압록강 유역의 혜산진까지 진출했다.
발발과 전개과정
미 제1해병사단은 함흥에서 장진군을 거쳐 강계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진격했는데, 11월 11일에는 황초령(1,206m)을 지나 장진면 고토리에 이르렀고, 11월 15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 도달했다. 그리고 11월 19일에는 장진호 서북쪽에 있는 서한면 유담리까지 나아갔다.
낭림산맥 동쪽에 있는 장진군은 희색봉(2,185m)·아득령(1,479m)·유린산(1,925m)·문암산(1,852m) 등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해발고도 1천 미터 이상의 고원지대이다. 이 지역은 10월이 되면 벌써 눈이 내리고 겨울날씨가 시작되는데, 겨울철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져 중강진(中江鎭)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꼽힌다. 미 제1해병사단의 사단장인 스미스(Oliver Prince Smith) 소장은 겨울철 추위가 닥쳐오자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하갈우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곳에 활주로를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제7연대와 제5연대를 유담리 일대로 전진 배치하고, 제1연대는 하갈우리와 고토리를 잇는 후방의 보급로를 담당하게 했다. 장진호 우측의 동하면 신흥리와 후동리 일대에는 알몬드 중장의 명령에 따라 미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병력을 중심으로 편성된 페이스 특수임무부대가 미 제1해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그러자 중국군은 제9병단에 속한 3개 군단 병력(12만명)을 장진호 일대로 집중시켰다. 내륙으로 깊숙이 진출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을 제압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진출한 국군과 미군의 퇴로를 차단해서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1월 11일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건너온 중국군은 산지를 따라 은밀히 이동해 11월 20일 무렵에는 유담리 인근에 집결했다.
미 제1해병사단은 낭림산맥을 넘어가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2사단·한국군 제2군단 등과 청천강 상류 지역에서 연합 작전을 벌이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11월 24일 덕천·영원 지역을 담당하던 한국군 제2군단이 중국군에 크게 패하면서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군은 11월 27일 밤부터 인해전술로 장진호 일대의 미군을 에워싸고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11월 27일 밤부터 다음날까지 계속된 중국군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하갈우리·유담리·고토리를 잇는 연결도로가 차단되면서 미군은 고립되었다. 특히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부대장인 매클레인(Allan MacLean) 대령마저 전사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알몬드 군단장은 미 제1해병사단의 사단장인 스미스 소장이 장진호 일대에 배치된 유엔군 병력에 대해 통합 지휘권을 갖게 했다. 그리고 유담리에 있는 병력의 일부를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를 지원하고, 하갈우리와 고토리를 잇는 도로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유담리에 있는 해병 제5연대와 제7연대도 중국군에 포위되어 병력을 이동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스미스 소장은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에게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29일 영국 해병대의 41특공대 소속인 드라이스데일(Douglas B. Drysdale) 중령이 지휘하는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가 29대의 전차와 141대의 차량을 이끌고 고토리에서 하갈우리로 향했다. 그러나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일부 병력만 하갈우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11월 30일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유담리에 있던 제7연대와 제5연대는 12월 1일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미 공군이 전폭기를 동원해서 네이팜탄을 퍼부으며 이들의 철수를 지원했으나,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제7연대와 제5연대는 12월 4일이 되어서야 하갈우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장진호 우측에 주둔하던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도 12월 1일 하갈우리로 물러났다. 그러나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의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 공군의 오폭으로 네이팜탄이 행렬 한가운데에서 터지면서 철수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천여 명이 전사했고, 3천여 명의 부대원 가운데 385명만이 부상을 입지 않은 상태로 하갈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결과와 영향
하갈우리에 집결한 미 제1해병사단은 완성된 활주로를 이용해 12월 2일부터 4천여 명에 이르는 부상자들을 일본으로 후송했다. 부상자들 가운데 3분의 1 가량은 동상 환자였다. 그리고 12월 6일 수송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뒤 1천여 대의 차량을 이용해 12월 7일 고토리로 철수했으며, 알몬드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흥남으로 이동했다. 12월 11일 흥남에 도착한 미 제1해병사단은 흥남철수작전에 따라 제10군단 휘하의 다른 부대들과 함께 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다.
11월 27일부터 시작된 장진호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유엔군은 1만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사망자 1,029명, 실종자 4,894명, 부상자 4,582명, 동상 등 비전투 요인에 의한 사상자 7,338명). 이러한 피해는 미군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어서 당시 언론들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피습 이후에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전으로 평하기도 했다. 미국은 1996년부터 유해발굴단을 북한에 파견해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을 벌였다.
한편 중국군도 장진호 전투에서 4만8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숫자는 19,202명에 이르렀고, 동상 등의 비전투 요인으로 발생한 사상자 숫자도 28,954명이나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진호전투 [Battle of the Chosin Reservoir, 長津湖戰鬪]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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