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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호는 호남성(湖南省)에 위치한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이다. 한 때 중국 최대의 담수호였으나, 4개의 하천에서 흘러드는 퇴적물과 장강의 진흙 및 모래의 유입으로 수역이 점차 축소되어 강서성 파양호에 이어 이제는 제2의 담수호로 바뀌었다.
후베이(湖北)와 후난(湖南)은 동정호를 기준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수원은 남쪽에서 유입되는데, 상수(湘水)와 자수(資水), 원수(沅水), 예수(澧水) 네 곳의 지류에서 유입이 된다.
악양루는 중국 호남성 웨양 시의 고적 웨양고성 서문의 윗쪽에 있다. 아래 쪽으로는 동정호가 보이며, 앞으로는 군산을 북쪽으로는 장강에 접한다. 악양루는 강남사대명루의 하나로 손꼽힌다. 당시 오나라는 촉나라의 유비와 형주를 다투고 있었는데, 215년 노숙은 동정호의 파구(巴丘)에 주둔하며 수군을 훈련시키고, 파구성을 세우면서 열군루(閱軍樓)라는 망루를 지어 수군이 훈련하는 모습을 참관하였다. 이것이 동정호의 시초이다.
716년 당나라 때 악주의 태수 장열(張說)이 이곳을 수리하여 다시 세우면서 악양루라고 이름을 고쳐짓고, 그때부터 문인재사들의 시를 읊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1044년 송나라 때 등자경(藤子京)이 이곳 태수로 좌천되면서 퇴락해진 누각을 증수하게 되는데, 그때 범중엄을 초청하여 유명한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짓게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80년 청나라 광서제 때 다시 중건한 것으로 누각의 높이는 20미터에 삼층 목조 건물로 되어 있다. 원래 악양루는 군사용 건축물이었다. 적벽대전 후 삼국이 정립할 즈음에 오나라의 대장 주유(周瑜)가 이곳에서 병사한 후 노숙(魯肅)이 여기서 수군을 조련했다. 서쪽으로 촉나라 관우를 견제하고 북쪽으로 위나라 조조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인 이곳에, 215년 대장 노숙은 성을 쌓고 누각을 세웠다. 이 누각은 수군을 훈련하고 검열하기 위한 열군루(閱軍樓)였는데 이것이 악양루의 효시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800여년 전의 일이다.
이후 점차 군사적 용도가 폐기되고 문인 학자들의 유람 승지로 변모했다. 동정호 가에 세워진 이곳의 경치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장열(張說, 667~731)이 716년 이곳으로 좌천되어 열군루를 확장, 중수한 이래 이백, 백거이, 유우석 등 무수한 시인들이 여기에 와서 많은 시를 남겼다. 이백의 시 <하십이와 악양루에 오르다(與夏十二登岳陽樓)>가 ‘악양루’란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문헌이다. 예로부터 워낙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동정호인지라 그 명성만은 여전하다. 특히 두보가 57세(768년)에 지은 〈등악양루(登岳陽樓)〉는 동정호를 불후의 명승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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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登岳陽樓
杜甫
昔聞洞庭水 석문동정수
今上岳陽樓 금상악양루
吳楚東南坼 오초동남탁
乾坤日夜浮 건곤일야부
親朋無一字 친붕무일자
老病有孤舟 노병유고주
戎馬關山北 융마관산북
憑軒涕泗流 빙헌체사류
악양루에 올라
두보
예전부터 동정호를 소문으로 들었더니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네
오나라, 초나라가 동쪽과 남쪽에 갈라섰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호수에 떠 있도다.
친한 벗에게선 편지도 한 장 오지 않고
늙고 병든 몸만 외로운 배 안에 있네.
고향 관산 북쪽에선 전쟁 일어났다니
그저 난간에 기대어 눈물 흘릴 뿐.
[通釋] 예전부터 사람들이 동정호의 기상이 웅장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왔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악양루에 올라 완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과연 동정호의 물은 드넓어서 동남쪽으로 吳와 楚를 가르고 있는 것이 보이고, 호수 그 자체로 天地를 이루어 해와 달이 그 속에서 출몰하는 듯하다. 이러한 승경(勝景)을 보고 있자니 문득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친한 친구들은 소식이 끊어졌고, 나는 늙고 병든 채로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서 여기저기를 떠다닌다. 듣자니 장안과 낙양 부근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는데, 언제쯤 이 전쟁이 그치고 나라가 평안해져서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난간에 기대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린다.
[解題] 이 시는 登臨詩(등림시)로 대력(大曆) 3년(768) 늦겨울에 지은 것이다. 당시 두보(杜甫)는 57세였다. 그해 正月에 그는 기주(夔州)를 떠났는데, 병란(兵亂)으로 인해 길이 막혀서 江陵·公安 등지를 표박(漂泊)하였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공안(公安)을 거쳐 세모(歲暮)에 악양(岳陽)에 도착하였고, 이 시는 그때 악양루에 올라 지은 것이다. 악양루는 호남성(湖南省) 악양현(岳陽縣)의 서문(西門)에 있는 누대(樓臺)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정호의 풍경은 예부터 절경으로 꼽혀왔다.
시의 전반부는 동정호의 경치를 묘사하였는데, 그 기세가 읽는 이를 압도하며 특히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오초동남탁 건곤일야부)’ 두 句는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이 되었다. 동정호에 대해 말로만 듣다가 악양루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는 분명 감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후반부 4구를 보면 당시 杜甫는 가련하고 슬프기 그지없다. 杜甫는 장안에서 곤궁하게 살 때 이미 폐병을 얻었고, 서남쪽으로 표박(漂泊)할 때 다시 풍비(風痹)를 앓은 까닭에 오른쪽 팔은 쓰지 못하게 되었고 왼쪽 귀는 멀었다. 당시 그의 온몸은 병들어 있었고 촉(蜀)을 나온 후에는 식구들이 모두 배를 타고 떠다니는 신세였다. 이렇듯 전쟁 통에 피란하여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악양루에 올랐기 때문에 기쁨보다는 서글픈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시 전반부의 장엄함이 마지막 구의 서글픔을 증폭시키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나 杜甫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 슬퍼하고 한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국가의 안위(安危)와 관련지으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포부를 드러내고 있다. 杜甫의 시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그의 강렬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시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역주
역주1> 岳陽樓(악양루) :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악양시(岳陽市) 서쪽에 있는데, 당(唐) 개원(開元) 초 장설(張說)이 악주자사(岳州刺史)가 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송(宋)나라 때 중수(重修)했다. 악양루가 동정호(洞庭湖)를 내려다보고 있어 등람(登覽)의 명승지가 되었다.
역주2>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 동정호는 중국의 동남부에 걸쳐 넓게 퍼져 있는 호수이다. 오초(吳楚)는 지금의 江蘇(강소)·浙江(절강)·安徽(안휘)·江西(강서)·湖南(호남)·湖北省(호북성) 지역이다. 동정호의 동쪽 일대가 吳나라 방면이며, 남쪽 일대가 楚나라 방면이다. 坼(탁)은 ‘나누어지다’, ‘찢어지다’의 뜻이다.
역주3>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과 더불어 동정호의 장활(壯闊)하고 웅위(雄偉)한 기세를 묘사한 것이다. ≪水經(수경)≫ 湘水注(상수주)에 “동정호의 물은 그 둘레가 500여 리에 이르며, 해와 달이 그 속에서 뜨고 지는 듯하다.[洞庭湖水廣圓五百餘里 日月若出沒其中]”고 하였다. 건곤(乾坤)은 天地이다.
역주4> 無一字(무일자) : 소식이 없다는 뜻이다.
역주5>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 중원(中原)에 전쟁이 있음을 이른다. 대종(代宗) 대력(大曆) 3년(768) 8월에 토번(吐蕃)이 靈武(영무)·邠州(빈주) 등지를 자주 침략하였는데, 9월에 대종이 郭子儀(곽자의)에게 명하여 병력 5만을 이끌고 봉천(奉天)에 주둔하여 방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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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가 아는 이태백도 관인의 자세에서 벗어나 악양루에서 자유로운 풍류를 노래했다. 「친구와 악양루에 올라서(與夏十二登岳陽樓)」는 유배길에 마음이 무겁던 차에 악양루에 올라 확 트인 동정호를 바라보면서 수심을 떨쳐 버리고 호탕한 술자리를 벌이며 취흥에 빠져드는 시선(詩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與夏十二登岳陽樓(여하십이등악양루)
李白(이백)
樓觀岳陽盡(누관악양진),川逈洞庭開(천형동정개)。
雁引愁心去(안인수심거),山銜好月來(산함호월래)。
雲間連下榻(운간연하탑),天上接行杯(천상접행배)。
醉後涼風起(취후량풍기),吹人舞袖迴(취인무수회)。
악양루에 올라 사방의 경치를 모두 둘러보니
강물은 아득히 탁 트인 동정호로 흐르네.
기러기는 내 맘 속 근심 끌고 날아가고
산은 밝은 달을 머금고 다가서네.
구름 속에서 걸상을 늘어놓고
하늘 위 인양 술잔을 주고받네.
취한 뒤 서늘한 바람 불어와
옷소매 흔들어 우리를 춤추게 하네.
○ 夏十二(하십이) :이백(李白)의 친구로 배항(排行)이 12이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 배항(排行) : 형제를 연령순으로 一, 二, 三의 번호를 붙여 부르는 일. 형제, 종형제(從兄弟), 재종(再從)형제, 삼종(三從)형제까지 더 나아가 족형제(族兄弟)까지 넓혀 붙이기도 한다.
○ 岳陽樓(악양루) :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악양시(岳陽市) 서쪽에 있는데, 당(唐) 개원(開元) 초 장설(張說)이 악주자사(岳州刺史)가 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송(宋)나라 때 중수(重修)했다. 악양루가 동정호(洞庭湖)를 내려다보고 있어 등람(登覽)의 명승지가 되었다.
○ 逈(향) : 멀다.
○ 洞庭開(동정개) : 동정호가 탁 트여 한없이 넓다. 동정호는 중국의 동남부에 걸쳐 넓게 퍼져 있는 호수이다.
○ 山銜(산함) : 달이 산 뒤에서 떠오르는 모습을 마치 산이 달을 머금었다고 한 것이다. 銜(함)은 입에 물다. 재갈.
○ 連下榻(연하탑) : 손님이 머물도록 걸상을 늘어놓음을 말한다. 榻(탑)은 걸상.
○ 行杯(행배) : 잔을 주고받으며 마시다.
○ 回(회) : 되돌아오다. 흔들거리다.
이 시는 전당시(全唐詩)에 실려 있으며 숙종(肅宗) 건원(乾元) 2년(759년) 이백의 말년 작품이다. 이백은 지덕(至德) 2년(757)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막부에 있었는데, 이린의 거사가 실패하자 함께 죄를 받아 귀주성(貴州省) 야랑(夜郞)에 유배되었다가 건원(乾元) 2년(759) 3월에 사면되어 호남, 호북 일대를 유람하였다. 당시 가을날 이백은 친구인 하십이(夏十二)와 함께 악양루에 올라 그곳의 경치에 감탄하며, 술을 마시는 모습을 누대가 높아 구름 속에 있으니 하늘에서 술을 마신다고 묘사하였다.
높은 누각에 올라 저녁 으스름진 호수를 바라보니 마치 구름 속에 앉아 하늘(仙境)에서 술을 마시는 듯한 기분을 느낀 듯하다.
거기다 나풀거리며 춤추는 무희의 자태가 취흥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신선경에 든 시인의 호탕한 풍류를 형상화했다.
이백의 얘기가 나왔으니 그 유명한 "장진주(술 권하는 시)" 를 한번 읇어 볼까요?
君不見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지수천상래 황하의 강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廻 분류도해불부회 바삐 흘러 바다로 가 다시 못 옴을
又不見 우불견 또한, 보지 못하였는가
高明鏡悲白髮 고당명경비백발 고당명경에 비친 백발의 슬픔
朝如靑絲暮如雪 조여청사모여설 아침에 검던 머리 저녁에 희었다네
人生得意須盡 歡 인생득의수진환 기쁨이 있으면 마음껏 즐겨야지
莫使金樽空對月 막사금준공대월 금잔에 공연히 달빛만 채우려나
天生我材必有用 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준 재능은 쓰여질 날 있을 테고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산진환부래 재물은 다 써져도 다시 돌아올 것을
烹羊宰牛且爲樂 팽양재우차위락 양은 삶고 소는 저며 즐겁게 놀아보세
會須一飮三百杯 회수일음삼백배 술을 마시려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岑夫子,丹丘生 잠부자,단구생 잠부자, 그리고 단구생이여
將進酒,君莫停 장진주,군막정 술을 마시게, 잔을 쉬지 마시게
與君歌一曲 여군가일곡 그대들 위해 노래 한 곡하리니
請君爲我側耳聽 청군위아측이청 모쪼록 내 노래를 들어주시게
鍾鼎玉帛不足貴 종정옥백부족귀 보배니 부귀가 무어 귀한가
但願長醉不願醒 단원장취불원성 그저 마냥 취해 깨고 싶지 않을 뿐
古來賢達皆寂莫 고래현달개적막 옛부터 현자 달인이 모두 적막하였거니
惟有飮者留其名 유유음자유기명 다만, 마시는 자 이름을 남기리라.
陳王昔日宴平樂 진왕석일연평락 진왕은 평락전에 연회를 베풀고,
斗酒十千恣歡謔 두주십천자환학 한 말 술 만금에 사 호탕하게 즐겼노라
主人何爲言少錢 주인하위언소전 주인인 내가 어찌 돈이 적다 말하겠나
且須沽酒對君酌 차수고주대군작 당장 술을 사와 그대들께 권하리라
五花馬,千金 裘 오화마,천금구 귀한 오색 말과 천금의 모피 옷을
呼兒將出換美酒 호아장출환미주 아이 시켜 좋은 술과 바꾸어오게 하여
與爾同銷萬古愁 여이동소만고수 그대들과 더불어 만고 시름 녹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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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거이는 이백 (李白)이 죽은 지 10년,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지금도 유명하다.
長恨歌(장한가, 백거이)
漢皇重色思傾國 한나라 임금님 경국지색을 사모하셔도
한황중색사경국
御宇多年求不得 용상에 오르신 지 오래도록 찾지 못하셨다.
어우다년구부득
楊家有女初長成 양씨 댁 아가씨 이제 다 장성하였건만,
양가유녀초장성
養在深閨人未識 규중에 깊숙이 있으니 아는 사람 없었다.
양재심규인미식
天生麗質難自棄 하늘이 내신 아름다움은 스스로 못 버리어,
천생려질난자기
一朝選在君王側 하루아침 뽑혀서 임금님 곁에 모셨다.
일조선재군왕측
回眸一笑百媚生 눈동자 굴려 웃으면 온갖 미태 생겨나니,
회모일소백미생
六宮粉黛無顔色 육궁의 미녀들은 모두 빛을 잃었다.
육궁분대무안색
春寒賜浴華淸池 봄추위에 내리신 화청궁 온천목욕.
춘한사욕화청지
溫泉水滑洗凝脂 온천물은 희고 고운 살결에 매끄러웠다.
온천수활세응지
侍兒扶起嬌無力 부축 받아 일어나니 힘없이 요염한 자태,
시아부기교무력
始是新承恩澤時 비로소 새로이 임금님의 사랑을 받은 때.
시시신승은택시
雲鬢花顔金步搖 구름 같은 머리칼, 꽃다운 얼굴, 황금 떨잠.
운빈화안금보요
芙蓉帳暖度春宵 부용꽃 방장에서 따뜻하게 봄밤을 지냈다.
부용장난도춘소
春宵苦短日高起 봄밤은 고단하구나, 해가 높다래서 일어나니.
춘소고단일고기
從此君王不早朝 이때부터 임금님은 조회에 나오지 않으셨다.
종차군왕부조조
承歡侍宴無閒暇 비위를 맞추고 잔치에 모시느라 틈이 없으니,
승환시연무한가
春從春遊夜專夜 봄에는 봄놀이, 밤에는 밤놀이 독차지했다.
춘종춘유야전야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의 아름다운 여인들은 삼천 명.
후궁가려삼천인
三千寵愛在一身 삼천 명 몫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삼천총애재일신
金屋粧成嬌侍夜 황금 궁전에서 화장 마치고 기다리는 밤,
금옥장성교시야
玉樓宴罷醉和春 백옥 누각에서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옥루연파취화춘
姉妹弟兄皆列土 언니들과 오빠들도 모두 제후의 반열.
자매제형개열토
可憐光彩生門戶 놀랍구나, 대문에도 후광이 비쳤다.
가련광채생문호
遂令天下父母心 드디어 세상 부모들은 마음은
수령천하부모심
不重生男重生女 아들보다 딸 낳기가 더 귀중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부중생남중생녀
驪宮高處入靑雲 려산 이궁은 높아라, 구름 속에 들어갔다.
려궁고처입청운
仙樂風飄處處聞 신선의 음악은 바람 따라 곳곳에 들렸다.
선악풍표처처문
緩歌慢舞凝絲竹 느린 가락과 춤에 어우러진 피리 거문고,
완가만무응사죽
盡日君王看不足 임금님은 온종일 보시고도 싫증을 모르셨다.
진일군왕간부족
漁陽鼙鼓動地來 어양의 북소리 대지를 울리며 다가오니,
어양비고동지래
驚破霓裳羽衣曲 '무지기와 깃옷' 곡조는 놀라서 깨어졌다.
경파예상우의곡
서안에 가면 당나라 현종하고 양귀비가 놀았다는 화청궁이라는곳이 있는데 거기가면 '장한가' 라는 뮤지컬이 공연된다, 중국 사람들한테는 대단한 인기가 있다.
♡동정호는 호북성과 호남성의 경계에 위치하며 동정호를 기준으로 호북과 호남의 지명이 정해졌다.
심 산
악양동역▲
중국은 어딜 가나 이렇게 춤을 춘다.건강에 유익한 문화인듯 싶다.▲
악양루 가는 길,동정호▼
동정호의 섬, 군산도▲
악양루▼
악양루 옛모습 ,현재와 차이가 없다▲
범중엄과 등종량의 동상▲
화려한 지붕모습▲
악양루기▼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천하의 근심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 이 말은 북송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군사가, 탁월한 문학가이자 교육가인 범중엄 (范仲淹 989~1052) 이 천고의 명작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남긴 명언이다. 이 구절은 중국정신의 일부가 되어 중국 문명의 찬란히 빛나는 보배와 같은 정신유산으로 남아 있다는 평을 듣는다. 주희는 범중엄을 유사이래 천하 최고의 일류급 인물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동정호의 악양루는 3층으로 이뤄졌는데 3층의 가운데 벽에 모택동이 초서로 쓴 두보의 '등악양루'가 걸려 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