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미국의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작가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을 중심으로 유대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겪었던 참상을 그렸다.
숨어 살아야 했던 유대인을 쥐, 나치를 고양이로 표현하는 등 우화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
『쥐』 이후 미국 독립 만화의 위상이 달라졌을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1986년 전미 도서비평가협회가 선정한 그 해의 베스트 25권 가운데 한 권으로 지명됐으며, 1992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국내에는 1994년 정식 발매되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다.
어느 날 집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일본어 교과서를 넘겨보고는 대뜸 “피아노”라고 말했다.
‘피아노’는 가타카나로 쓰여 있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글자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워하며, ‘피아노’ 말고도 ‘테니스’, ‘고히(커피)’ 같은 단어들을 더 읽어 보였다.
할머니가 일본어를 읽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이야기는 평소에도 많이 들었던 터였다.
할머니의 여동생을 본명 대신 ‘하루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할머니가 그 시기를 ‘살았다’라는 사실이 와 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일제가 할머니의 의식 속에 심어놓은 가타카나는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새겼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이것이 내가 할머니를 통해 처음으로 느꼈던 일제 억압의 증거였다.
1986년 1권이 출간된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에도 할머니와 비슷한 인물이 등장한다.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이다.
블라덱은 폴란드계 유태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이다.
아트 슈피겔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나치의 만행에 대한 블라덱의 증언을 바탕으로 『쥐』를 그렸다.
『쥐』는 블라덱 슈피겔만의 회고록이자, 아트 슈피겔만 본인의 자서전이다.
『쥐』는 1권인 『아버지에게 맺혀 있는 피의 역사』와
2권 『여기서 나의 고난은 시작됐다』로 구성되어 있다.
2권의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나의 고난은 시작됐다”는 말은 아버지가 하긴 했지만 아트 슈피겔만이 할 수 있는 말로도 읽힌다.
점잖고 똑똑한 신사였던 아버지가 잔혹한 도살장에서 살아남으며 얻은 트라우마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태어난 아트 슈피겔만도 고통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고난이 아우슈비츠 생활이었다면, 아트 슈피겔만의 고난은 아버지와의 관계였던 셈이다.
아트 슈피겔만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블라덱이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묘사한다.
블라덱은 건강과 잡동사니 수집에 집착하고 재혼한 여인을 끊임없이 흉보는 괴팍한 노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트 슈피겔만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다투고 돌아온 어린 아트 슈피겔만에게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높으면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였기 때문이다.
밤에는 무슨 꿈을 꾸는지 밤새 비명을 질러 수없이 많은 날을 잠에서 깨기도 했다.
성인이 된 그는 『쥐』를 그리기 위해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한다.
8년간이나 이어진 창작과정은 더디고 고통스럽다.
서툴고 답답하고 때론 분노와 고성이 오가는 부자간의 대화는 조금의 편집도 없이 그대로 지면에 실렸다.
틀어져버린 관계까지 아우슈비츠의 산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과거와 자신의 현재를 적절히 오가며, 아트 슈피겔만은 아우슈비츠가 유태인 2세대를 어떻게 망쳐놓았는지 담담히 보여준다.
『쥐』는 아버지 블라덱이 어머니 아냐와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시작한다.
호남자였던 블라덱은 여러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부유한 집안의 딸 아냐와 결혼한다.
첫 아들 리슈를 낳고 행복한 나날도 잠시 독일에서 창궐한 나치의 암운이 폴란드까지 드리운다.
1939년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자 블라덱은 징집 당했다가 무사히 돌아온다.
하지만 1941년 본격적으로 유태인을 게토화 하는 정책이 실시된다.
아우슈비츠 가스실에 대한 소문도 블라덱 가족이 이주한 소스노비에츠까지 전해진다.
아냐의 집안은 점점 가세가 기울어 블라덱은 의류, 보석류, 음식 장사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유태인들은 스로둘라라는 작은 마을로 다시 이주한다.
노인과 대가족 등 노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선별’ 작업이 이루어진다.
블라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가족이었던 아냐의 집안은 사람이 한 명 두 명 줄어들기 시작한다.
블라덱과 아냐는 아들 리슈를 안전하다고 믿었던 곳에 보냈지만 결국 그를 잃고 만다.
유태인들은 아우슈비츠로 점점 더 끌려가기 시작한다.
결국 스로둘라는 텅 비어버리고, 벙커에 숨는 등 나치의 감시를 피해 도망치던 블라덱과 아냐 부부도 헝가리 이주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아우슈비츠에 수용된다.
블라덱은 제1수용소에, 아냐는 제2수용소에서 절박하게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며 하루하루 살얼음 같은 나날을 견딘다.
종전이 다가오자 독일은 유럽 전역의 유태인들과 포로를 독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마지막 죽음의 행진에서마저 살아남은 블라덱은 마침내 스위스 국경에서 미군에게 발견돼 자유를 얻는다.
아냐 역시 수용소에서 알게 된 헝가리 여자의 보호를 받아 무사히 폴란드로 돌아온다.
아트 슈피겔만은 모든 등장인물을 동물로 묘사하여 의인화시켰다.
유태인은 쥐, 나치는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다.
‘톰과 제리’, ‘미키마우스’ 등에서 묘사됐던 고양이와 쥐 사이의 억압 관계가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사실 유태인들은 아트 슈피겔만 이전에도 종종 ‘쥐’에 비유되어 왔다.
아트 슈피겔만은 1971년 『쥐』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준비하다가, 제3제국에서 제작한 선전영화에서 게토 주변에 모여 있는 유태인이 갑자기 하수도 주변에 모여 있는 쥐로 바뀌는 장면을 목격한다.
카프카의 『가수 조세핀』에 나오는 『쥐 가족』 역시 유태인을 은유한 것이다.
쥐는 인간들이 바퀴벌레만큼 혐오하는 동물이다.
어둠 속에 숨어 사는 쥐들은 고양이의 감시를 피해 바깥으로 나올 때면 돼지 가면을 쓴다.
돼지 가면은 당시 유태인들이 어떤 심정으로 폴란드인 행세를 해야 했는지 강렬하게 전달한다.
고양이(나치)들의 학살로 겹겹이 쌓인 쥐(유태인)들의 시체를 보며 우리가 느끼는 생리적 혐오감은 유태인들이 겪어야 했던 모멸적 시선과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된 블라덱이 아트 슈피겔만의 앞에서 흑인을 “깜둥이”라고 욕하는 순간 『쥐』를 통해 차곡차곡 쌓이던 연민은 갈 곳을 잃는다.
아트 슈피겔만의 아내가 “마치 나치가 유태인 얘기하듯 흑인을 대한다”고 비난해도, 블라덱은 “검둥이는 유태인과 비교할 수도 없다”고 단언한다.
블라덱의 이야기는 ‘그리고 블라덱은 아냐와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며 우화처럼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