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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수……
의심 없는 옥련의 부친이 한 광고다.
[여보 보이, 이 신문을 가지고 날 따라가면 우리 부친이 십 류의 상금을 줄 것이니 지금으로 갑시다.]
[내가 상금 탈 공은 없으니 상금은 원치 아니하나 귀양(貴孃)을 배행하여 가서 부녀 서로 만나 기뻐하시는 모양 보았으면 나도 이 호텔에서 몇 해 간 귀양을 모시고 있던 정분에 귀양을 따라 기뻐하고자 합니다.]
옥련이가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뻐하여 보이를 데리고 그 부친 있는 처소를 찾아가니 십 년 풍상에서 서로 환형(換形)이 된지라, 서로 보고 서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라. 옥련이가 신문 광고와 명함 한 장을 가지고 그 부친 앞으로 가서 남에게 처음 인사하듯 대단히 서먹한 인사를 하다가 서로 분명한 말을 듣더니, 옥련이가 일곱 살에 응석하던 마음이 새로이 나서 부친의 무릎 위에 얼굴을 폭 숙이고 소리 없이 우는데, 김관일의 눈물은 옥련의 머리 뒤에 떨어지고, 옥련의 눈물은 그 부친의 무릎이 젖는다.
[이애 옥련아, 그만 일어나서 너의 어머니 편지나 보아라.]
[응, 어머니 편지라니, 어머니가 살았소.]
무슨 변이나 난 듯이 깜짝 놀라는 모양으로 고개를 번쩍 드는데, 그 부친은 제 눈물 씻을 생각은 아니하고 수건을 가지고 옥련의 눈물을 씻으니, 옥련이가 그리 어려졌던지 부친이 눈물 씻어 주는 데 고개를 디밀고 있더라. 김관일이가 가방을 열더니 휴지 뭉치를 내어 놓고 뒤적뒤적하다가 편지 한 장을 집어 주며 하는 말이,
[이애, 이 편지를 자세히 보아라. 이 편지가 제일 먼저 온 편지다.]
옥련이가 그 편지를 받아 보니, 옥련이가 그 모친의 글씨를 모르는지라. 가령 옥련이가 정신이 좋으면 그 모친의 얼굴은 생각할는지 모르거니와, 옥련이 일곱 살에 언문도 모를 때에 모친을 떠났는지라. 지금 그 편지를 보며 하는 말이,
[나는 우리 어머니 글씨도 모르지. 어머니 글씨가 이렇던가.]
하면서 부친의 앞에 펼쳐 놓고 본다.
상장
떠나신 지 삼 삭이 못 되었으나 평양에 계시던 일은 전생 일 같삽. 만리타국에서 수토불복(水土不服)이나 되시지 아니하고 기운 평안하시온지 궁금하옵기 측량 없삽나이다. 이곳의 지낸 풍상은 말씀하기 신신치 아니하오나 대강 소식이나 알으시도록 말씀하옵나이다. 옥련이는 어디 가서 죽었는지 다시 소식이 묘연하고, 이곳은 죽기로 결심하여 대동강 물에 빠졌더니 뱃사공과 고장팔에게 건진 바 되어 살았다가 부산서 이곳 친정 아버님이 평양에 오셔서 사랑에서 미국 가셨다는 말씀을 전하여 주시니, 그 후로부터 마음을 붙여 살아 있삽. 세월이 어서 가서 고국에 돌아오시기만 기다리옵나이다.
그러나 사랑에서는 몇십 년을 아니 오시더라도 이 세상에 계신 줄을 알고 있사오니 위로가 되오나, 옥련이는 만나 보려 하면 황천에 가기 전에는 못 볼 터이오니 그것이 한 되는 일이압. 말씀 무궁하오나 이만 그치옵나이다.
옥련이가 그 편지를 보고 뼈가 녹는 듯하고 몸이 스러지는 듯하여 가만히 앉았다가,
[아버지, 나는 내일이라도 우리집으로 보내 주시오. 날개가 돋쳤으면 지금이라도 날아가서 우리 어머니 얼굴을 보고 우리 어머니 한을 풀어 드리고 싶소.]
[네가 고국에 가기가 그리 바쁠 것이 아니라 우선 네가 고생하던 이야기나 어서 좀 하여라. 네가 어떻게 살아났으며 어찌 여기를 왔느냐?]
옥련이가 얼굴빛을 천연히 하고 고쳐 앉더니, 모란봉에서 총 맞고 야전병원으로 가던 일과, 정상 군의의 집에 가던 일과, 대판서 학교에서 졸업하던 일과, 불행한 사기로 대판을 떠나던 일과, 동경 가는 기차를 타고 구완서를 만나서 절처봉생(絶處逢生)하던 일을 낱낱이 말하고, 그 말을 마치더니 다시 얼굴빛이 변하며 눈물이 도니, 그 눈물은 부모의 정에 관계한 눈물도 아니요, 제 신세 생각하는 눈물도 아니요, 구완서의 은혜를 생각하는 눈물이라.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 같은 불효의 딸을 만나 보시고 기쁘신 마음이 있거든 구씨를 찾아보시고 치사의 말씀을 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관일이가 그 말을 듣더니, 그 길로 옥련이를 데리고 구씨의 유하는 처소로 찾아가니, 구씨는 김관일을 만나 보매 옥련의 부친을 본 것 같지 아니하고 제 부친이나 만난 듯이 반가운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은 옥련의 기뻐하는 마음이 내 마음 기쁜 것이나 다름없는 데서 나오는 마음이요, 김씨는 구씨를 보고 내 딸 옥련을 만나 본 것이나 다름없이 반가우니, 그 두 사람의 마음이 그러할 일이라. 김씨가 구씨를 대하여 하는 말이 간단한 두 마디뿐이라.
한마디는 옥련이가 신세지은 치사요, 한마디는 구씨가 고국에 돌아간 뒤에 옥련으로 하여금 구씨의 기치를 받들고 백년가약 맺기를 원하는지라.
구씨는 본래 활발하고 거칠 것 없이 수작하는 사람이라 옥련이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애 옥련아, 어― 실체(失體)하였구. 남의 집 처녀더러 또 해라 하였구나. 우리가 입으로 조선말은 하더라도 마음에는 서양 문명한 풍속이 젖었으니, 우리는 혼인을 하여도 서양 사람과 같이 부모의 명령을 좇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부부 될 마음이 있으면 서로 직접하여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나 우선 말부터 영어로 수작하자. 조선말로 하면 입에 익은 말로 외짝해라 하기 불안하다.]
하면서 구씨가 영어로 말을 하는데, 구씨의 학문은 옥련이보다 대단히 높으나 영어는 옥련이가 구씨의 선생 노릇이라도 할 만한 터이라. 그러나 구씨는 서투른 영어로 수작을 하는데, 옥련이는 조선말로 단정히 대답하더라.
김관일은 딸의 혼인 언론을 하다가 구씨가 서양 풍속으로 직접 언론하자 하는 서슬에 옥련의 혼인 언약에 좌지우지할 권리가 없이 가만히 앉았더라.
옥련이는 아무리 조선 계집아이이나 학문도 있고 개명한 생각도 있고, 동서양으로 다니면서 문견(聞見)이 높은지라. 서슴지 아니하고 혼인 언론 대답을 하는데, 구씨의 소청이 있으니, 그 소청인즉 옥련이가 구씨와 같이 몇 해든지 공부를 더 힘써 하여 학문이 유여한 후에 고국에 돌아가서 결혼하고, 옥련이는 조선 부인 교육을 맡아 하기를 청하는 유지(有志)한 말이라. 옥련이가 구씨의 권하는 말을 듣고 조선 부인 교육할 마음이 간절하여 구씨와 혼인 언약을 맺으니,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獨逸國)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 옥련이는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받지 말고 남자와 동등권리를 찾게 하며, 또 부인도 나라에 유익한 백성이 되고 사회상에 명예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할 마음이라.
세상에 제 목적을 제가 자기하는 것같이 즐거운 일은 다시 없는지라. 구완서와 옥련이가 나이 어려서 외국에 간 사람들이라. 조선 사람이 이렇게 야만되고 이렇게 용렬한 줄을 모르고, 구씨든지 옥련이든지 조선에 돌아오는 날은 조선도 유지한 사람이 많이 있어서 학문 있고 지식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찬성하여 구씨도 목적대로 되고 옥련이도 제 목적대로 조선 부인이 일제히 내 교육을 받아서 낱낱이 나와 같은 학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려니 생각하고, 일변으로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제 나라 형편 모르고 외국에 유학한 소년 학생 의기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구씨와 옥련이가 그 목적대로 되든지 못 되든지 그것은 후의 일이거니와, 그날은 두 사람의 마음에는 혼인 언약의 좋은 마음은 오히려 둘째가 되니, 옥련 낙지(落地) 이후에는 이러한 즐거운 마음이 처음이라.
김관일은 옥련을 만나 보고 구완서를 사윗감으로 정하고, 구씨와 옥련의 목적이 그렇듯 기이한 말을 들으니, 김씨의 좋은 마음도 측량할 수 없는지라.
미국 화성돈의 어떠한 호텔에서는 옥련의 부녀와 구씨가 솔밭같이 늘어앉아서 그렇듯 희희낙락한데, 세상이 고르지 못하여 조선 평양성 북문 안에 게딱지같이 낮은 집에서 삼십 전부터 남편 없고 자녀간에 혈육 없고 재물 없이 지내는 부인이 있으되, 십 년 풍상에 남보다 많은 것 한 가지가 있으니, 그 많은 것은 근심이라.
그 부인이 남편이 죽고 없느냐 할 지경이면 죽지도 아니한 터이라. 죽고 없는 터이면 단념하고 생각이나 아니하련마는, 육만 리를 이별하여 망부석이 될 듯한 정경이요, 자녀간에 혈육이 없는 것은 생산을 못 하였느냐 물을진대 딸 하나를 두고 아들 겸 딸 겸하여 금옥같이 귀애하다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잃었더라.
눈앞에 참척을 보았느냐 물을진대 그 부인은 말없이 눈물만 흘리더라. 눈앞에 보이는 데서나 죽었으면 한이나 없으련마는, 어디서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니 그것이 한이더라.
마침 까마귀 한 마리가 지붕 위에 내려앉더니 까막까막 깍깍 짖는 소리가 흉측하게 들리거늘, 부인이 감았던 눈을 떠서 장팔 어미를 보며 하는 말이,
[여보게, 저 까마귀 소리 좀 들어 보게. 또 무슨 흉한 일이 생기려나베. 까마귀는 영물이라는데 무슨 일이 또 있을는지 모르겠네. 팔자 기박한 여편네가 오래 살았다가 험한 일을 더 보지 말고 오늘이라도 죽었으면 좋겠네. 요사이는 미국서 편지도 아니 오고 웬일인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설움 없이 탄식하는 모양은 아무가 보든지 좋은 마음은 아니 날 터인데, 늙고 청승스러운 장팔 어미가 부인의 그 모양을 보고 부인이 죽으면 따라 죽을 듯한 마음도 있고 까마귀를 쳐죽이고 싶은 마음도 생겨서 마당으로 펄펄 뛰어내려가서 지붕 위를 쳐다보면서 까마귀에게 헛팔매질을 하며 욕을 한다.
[수여― 이 경칠 놈의 까마귀, 포수들은 다 어디로 갔노. 소금장사― 네 어미.]
조선 풍속에 까마귀 보고 하는 욕은 장팔 어미가 모르는 것 없이 주워섬기며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니, 그 까마귀가 펄쩍 날아 공중에 높이 뜨더니 깍깍 지르며 모란봉으로 향하거늘, 부인의 눈은 까마귀를 따라서 모란봉으로 가고, 노파의 욕하는 소리는 까마귀 소리를 따라간다.
우자 쓴 벙거지 쓰고 감장 홀태바지 저고리 입고 가죽 주머니 메고 문 밖에 와서 안중문을 기웃기웃하며 편지 받아 들여가오, 편지 받아 들여가오, 두세 번 소리하는 것은 우편 군사라. 장팔의 어미가 까마귀에게 열이 잔뜩 났던 차에 어떠한 사람인지 자세히 듣지도 아니하고 질부등거리 깨어지는 소리 같은 목소리로 우편 군사에게 까닭 없는 화풀이를 한다.
[웬 사람이 남의 집 안마당을 함부로 들여다보아. 이 댁에는 사랑 양반도 아니 계신 댁인데, 웬 젊은 녀석이 양반의 댁 안마당을 들여다보아.]
[여보, 누구더러 이 녀석 저 녀석 하오. 체전부는 그리 만만한 줄로 아오. 어디 말 좀 하여 봅시다. 이리 좀 나오시오. 나는 편지 전하러 온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 없소.]
[여보게 할멈, 자네가 누구와 그렇게 싸우나. 우체 사령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하니 미국서 서방님이 편지를 부치셨나베. 어서 받아 들여오게.]
[옳지, 우체 사령이로구. 늙은 사람이 눈 어두워서…… 어서 편지나 이리 주오. 아씨께 갖다 드리게.]
우체 사령이 처음에 노파가 소리를 지를 때는 늙은 사람 망령으로 알고 말을 예사로 하더니, 노파가 잘못한 줄을 깨닫고 말하는 눈치를 보더니 그때는 우체 사령이 목을 쓰고 대어든다.
[이런 제어미…… 내가 체전부 다니다가 이런 꼴은 처음 보았네. 남더러 무슨 턱으로 욕을 하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말 좀 물어 보고 갈 터이오.]
하면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대어들며, 편지 달라 하는 말은 대답도 아니하니, 평양 사람의 싸움하러 대드는 서슬은 금방 죽어도 몸을 아끼지 아니하는 성정이라.
노파가 까마귀에게 화풀이할 때 같으면 우체 사령에게 몸부림을 하고 죽어도 그 화가 풀어지지 아니할 터이나, 미국서 편지 왔다 하는 소리에 그 화가 다 풀어졌더라. 그 화만 풀어질 뿐이 아니라, 우체 사령의 떼거리까지 받고 있는데, 부인은 어서 바삐 편지 볼 마음이 있어서 내외하기도 잊었던지 중문간에로 뛰어나가서 노파를 꾸짖고 우체 사령을 달래고, 옥련의 묘에 가지고 가려 하던 술과 실과를 내어다 먹인다.
우체 사령이 금방 살인할 듯하던 위인이 노파더러 할머니 할머니 하며 풀어지는데, 그 집에서 부리던 하인과 같이 친숙하더라.
노파가 편지를 받아서 부인에게 드리니, 부인이 그 편지를 들고 겉봉 쓴 것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의심을 한다.
[아씨, 무엇을 그리하십니까?]
[응, 가만히 있게.]
[서방님께서 부치신 편지오니까?]
[아닐세.]
[그러면 부산서 주사나리께서 하신 편지오니까?]
[아니.]
[에그, 어서 말씀 좀 시원히 하여 주십시오.]
[글씨는 처음 보는 글씨일세.]
본래 옥련이가 일곱 살에 부모를 떠났는데, 그때는 언문 한 자 모를 때라. 그 후에 일본 가서 심상소학교 졸업까지 하였으나 조선 언문은 구경도 못 하였더니, 그 후에 구완서와 같이 미국 갈 때에 태평양을 건너가는 동안에 구완서가 가르친 언문이라, 옥련의 모친이 어찌 옥련의 글씨를 알아보리요. 부인이 편지를 받아 보니 겉면에는,
한국 평안남도 평양부 북문내 김관일 실내 친전
한편에는,
미국 화성돈 ○○○호텔
옥련 상사리
진서 글자는 부인이 한 자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만 ‘옥련 상사리’라 한 글자만 알아보았으나, 글씨도 모르는 글씨요, 옥련이라 한 것은 볼수록 의심만 난다.
[여보게 할멈, 이 편지 가지고 왔던 우체 사령이 벌써 갔나. 이 편지가 정녕 우리집에 오는 것인지 자세히 물어 보았더면 좋을 뻔하였네.]
[왜 거기 쓰이지 아니하였습니까?]
[한 편은 진서요 한 편에는 진서도 있고 언문도 있는데, 진서는 무엇인지 모르겠고, 언문에는 옥련 상사리라 썼으니, 이상한 일도 있네. 세상에 옥련이라 하는 이름이 또 있는지, 옥련이라 하는 이름이 또 있더라도 내게 편지할 만한 사람도 없는데…….]
[그러면 작은아씨의 편지인가 보이다.]
[에그, 꿈같은 소리도 하네. 죽은 옥련이가 내게 편지를 어찌 하여…….]
하면서 또 한숨을 쉬더니 얼굴에 처량한 빛이 다시 난다.
[아씨 아씨, 두말씀 말고 그 편지를 뜯어 보십시오.]
부인이 홧김에 편지를 박박 뜯어 보니 옥련의 편지라.
모란봉에서 지낸 일부터 미국 화성돈 호텔에서 옥련의 부녀가 상봉하여 그 모친의 편지 보던 모양까지 그린 듯이 자세히 한 편지라.
그 편지 부쳤던 날은 광무 육년(음력) 칠월 십일일인데, 부인이 그 편지 받아 보던 날은 임인년 음력 팔월 십오일이러라.
부산 절영도 밖에 하늘 밑까지 툭 터진 듯한 망망대해에 시커먼 연기를 무럭무럭 일으키며 부산항을 향하고 살같이 들어닫는 것은 화륜선이다.
오륙도, 절영도 두 틈으로 두 좁은 어구로 들어오는데 반속력 배질을 하며 화통에는 소리가 하늘 당나귀가 내려와 우는지, 웅장한 그 소리 한마디에 부산 초량이 들썩들썩한다. 물건을 들이고 내는 운수 회사도 그 화통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을 보내고 맞아들이는 여인숙에서도 그 화통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화륜선 닻이 뚝 떨어져서 삼판 배가 벌떼같이 드러난다. 부산 객주에 첫째나 둘째 집에는 최주사 집 서기 보는 소년이 큰사랑 미닫이를 열며,
[여보시오, 주사장. 진남포에서 배 들어왔습니다. 우리 짐도 이 배편에 왔을 터이니 사람을 보내 보아야 하겠습니다.]
최주사는 낮잠을 자다가 화륜선 화통 소리에 잠이 깨어 일어나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터이라. 서기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앉았다가 긴치 않은 말대답하듯,
[날 더러 물을 것 무엇 있나.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소년은 서기 방으로 가고 최주사는 큰사랑에 혼자 앉았더라.
최주사는 몇 해 동안에 재물이 불 일어나는 듯 느는데 그 재물이 늘수록 최주사의 심회가 산란하다. 재물을 모을 때는 욕심에 취하여 두 눈이 빨개서 날뛰더니 재물을 많이 모아 놓고 보니 재물이 그리 귀할 것이 없는 줄로 생각이라. 빈 담뱃대 딱딱 떨어 물고 물부리를 두어 번 확확 내불어 보더니 지네발 같은 평양 엽초 한 대를 담아 붙여 물고 담배연기를 혹혹 내불면서 무슨 생각을 하다가 혼자말로 탄식이라.
[재물. 재물. 재물이 좋기는 좋지만은 제 생전에 먹고 입고 지낼 만하면 그만이지. 그것은 그리 많아 쓸데 있나. 몸 괴로운 줄 모르고 마음 괴로운 줄 모르고 재물만 모으려고 기를 버럭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흥, 어리석은 것도 아니야. 환장한 사람이지. 풀 끝에 이슬 같은 이 몸이 죽은 후에 그 재물이 어찌 될지 누가 알 바 있나. 적막한 북망산에 돈이 와서 일곡이나 하고 갈까. 흥, 가소로운 일이로고.
내 나이 육십여 세라. 인생 칠십 고래희라 하였으니 내가 칠십을 살더라도 이 앞에 칠팔 년 동안뿐이로구나.
아들은 양자.
딸은 저 모양.
어― 내 팔자도 기박하고.
옥련이나 살았더면 짐짓이 마음을 붙였을 터인데, 그런 불쌍한 일이 있나. 오냐, 그만두어라. 집안일은 잘 되나 못 되나 서기에게 맡겨 두고 평양 가서 딸도 만나 보고 미국 가서 사위나 만나 보고 오겠다.]
마침 문간이 들석들석하더니 무슨 별일이나 있는 듯이 계집종들이 참새떼 재잘거리듯 지껄이며 사랑 마당으로 올라 들어오는데 최주사는 혼자 중얼거리고 앉아서 귀에 달은 소리는 아니 들어오던지 내다보지도 아니한다.
마루 위에서 신 벗는 소리가 나더니 사랑지게문을 펄쩍 열며,
[아버지, 나 왔소.]
하며 들어오는데 최주사가 정신이 번쩍 나서 쳐다보니 딸이라.
[이애, 이것이 꿈이냐. 네가 어찌 여기를 왔느냐.]
[내가 날개 돋쳐 내려왔소.]
하며 어린아이 응석하듯, 웃으며 나오는 모습이 얼굴에 화기가 돈다.
최주사는 꿈에라도 그 딸을 만나 보면 근심하는 얼굴만 보이더니 상시에 저러한 얼굴빛을 보고 최주사 얼굴에도 화기가 돈다.
[이애, 참 별일이다. 네가 오기는 뜻밖이로구나. 여편네가 십 리 길이 어려운 처지인데 일천오백 리 길에 네가 어찌 혼자 왔단 말이냐.]
[옥련이 같은 어린 계집아이도 육만 리나 되는 미국을 갔는데 내가 이까짓 데를 못 와요. 진남포로 내려와서 화륜선 타고 왔소. 아버지, 나는 개화하였소. 이 길로 미국에나 들어가서 옥련이나 만나 보고 옥련의 남편 될 사람도 내 눈으로 좀 자세히 보고 오겠소. 아버지, 나를 돈이나 좀 많이 주시오. 옥련이가 좋아하는 것이 있거든 사서 주겠소.]
최주사가 옥련이 살았단 말을 듣더니 딸을 만나 보고 반가운 마음은 잊었던지 몇 해 만에 보는 딸에게 그 동안 잘 있었느냐, 못 있었느냐, 말은 한마디 없고 옥련의 말만 묻고 앉았다가 그날 저녁에는 흥김에 밥을 아니 먹고 술만 먹으며 횡설수설하다가 주정이 나서 그 후 최부인더러 짐짓 자랄 때에 잘 굴었느니 못 굴었느니 하며 삼십 년 전 일을 말하고 앉았다가 내외간 싸움이 일어나서 마누라는 자식도 없는 늙은 년이 서러워서 죽고 싶으니 살고 싶으니 하며 울고 청승을 떨고 있고.
딸은 내가 아니 왔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터인데, 하면서 이 밤으로 도로 가느니 마느니 하는 서슬에 온 집안이 붙들고 만류하여 야단났네.
최주사가 그 딸이 가느니 마느니 하는 것을 보고 취중에 화가 나서 혀꼬부라진 소리로 마누라에게 화풀이를 한다.
[응, 마누라가 낳은 딸 같으면 저럴 리가 만무하지. 모처럼 온 계집을 들어앉기도 전에 도로 쫓으려 드니.]
마누라는 애매한 책망을 듣고 청승을 점점 더 떨고 딸은 점점 불리한 마음이 더 나서 친정에 왔던 후회만 하고 최주사의 주정은 점점 더하는데, 온 집안이 잠을 못 자고 안마루 안마당에 그득 모였으나 최주사의 주정을 감히 말릴 사람은 없는지라.
최주사는 아들이 섣부른 소리로 최주사더러 좀 참으시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최주사가 취중에 진정 말이 나오던지,
[이애, 주제넘게 네가 내 집 일에 참견이 무엇이야.]
하며 핀잔을 탁 주더니 최주사의 아들은 양자 들어온 사람의 마음이라, 야속한 생각이 들어서 캄캄한 바깥마당에 나가서 혼자 우두커니 섰다가 담배 한 대를 붙여 물고 나올 작정으로 서기 방으로 들어간다.
서기 방에서는 문서를 닦느라고 두 사람이 마주앉아서 부르고 놓고 하다가 최주사의 아들이 담뱃대 찾는 수선에 주 한 개를 달깍 더 놓았더라. 주 놓던 사람이 아차 하며 쳐다보더니 젊은 주인이라. 다른 사람이 서기 방에 들어가서 수선을 그렇게 피웠으면 생핀잔을 보았을 터인데 주인의 아들인 고로 핀잔은 고사하고 담배 한 대 더 꺼내 주노라고 쌈지 끈 끄르는 사람이 둘이나 된다. 문서책 한 권이 보기에는 대단치 아니한 백지 몇 장이로되 그 속에 있는 것만 하여도 어디를 가든지 부자 득명할 재물 덩어리라.
최주사의 아들이 최주사를 야속하게 여기던 마음이 쑥 들어가고 조심하는 마음이 생겨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웃는 낯으로 어머니, 그리 마시오. 누님 그리 마시오 하며 애를 쓰고 돌아다니는데 최주사가 곤드레만드레하며,
[그만 내버려두어라. 그것들 방정 실컷 떨게…….]
하더니 사랑으로 비틀비틀 나가서 쓰러지더니 콧구멍에서 맷돌질하는 소리가 나도록 코를 곤다.
그 이튿날 아침에 최주사가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더니 마누라와 딸과 아들까지 불러 앉히고 재미있는 모양으로 말을 떠드는데 마누라는 어젯밤에 있던 성이 조금도 아니 풀린 모양으로 아무 소리 없이 돌아앉았더라.
[아버지, 어젯밤에 웬 술을 그렇게 많이 잡수셨습니까?]
최주사는 그 전날 밤에 사랑으로 나가던 생각은 일어나나, 처음에 주정하던 일은 멀쩡하게 생각하면서 생시치미를 뗀다.
[응, 과히 취하였더냐. 주정이나 아니하더냐. 오냐, 살아 생전에 일배주라니 내가 주정을 하면 몇 해나 하겠느냐, 허허허.]
웃음 한마디에 온 집안이 화기가 돈다. 최주사가 그날은 술 한 잔 아니 먹고 아들과 서기에게 집안일 분별하더니 딸을 데리고 미국 들어갈 치행을 차리더라.
물 속에 산이 솟고 산 아래는 물만 있는 해협을 끼고 달아나는 화륜선은 어찌 그리 빠르던지. 눈앞에 보이던 산이어늘 하면 뒤에 가 있다. 부산항에서 떠나서 일본 대마도 마관, 신호, 대판을 지내 놓고 횡빈으로 들어가는데 옥련 어머니 마음에는 그만하면 미국 산천이 거의 보이거니 생각하고 하루에도 몇 번인지 화륜선 갑판 위에 올라서서 배 가는 곳만 바라보고 섰다.
이 배같이 크고 빠른 것은 다시 없으려니 하였더니 그 배는 횡빈에서 닻을 주고 태평양 내왕하는 배를 갈아타니 그 배는 먼저 탔던 배보다 더 크고 빠른 배라. 그러한 배를 타고 더디 간다 한탄하는 사람은 옥련의 부녀를 만나 보러 가는 최주사의 부녀뿐이더라. 앉았으나 섰으나, 잠이 들었으나 깨었으나, 타고 앉은 배는 밤낮 쉴새없이 달아나는데, 지낸 곳에 보이던 일본 산천은 자라목 움츠러드는 듯 점점 작아지더니 태평양을 들어서면서 산 명색이라고는 오뚝이만한 것 하나도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물과 하늘뿐이라.
푸르고 푸른 하늘을 턱턱 치는 듯한 바닷물은 하늘을 씻어서 물이 푸르러졌는지, 푸른 물결이 하늘에 들이쳐서 하늘에 물이 들었는지, 물빛이나 하늘빛이나 그 빛이 그 빛이라.
배는 가는지 아니 가는지, 밤낮 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선 것 같은데, 그 크던 배가 만리창해에 마름 하나 떠다니는 것 같다.
최주사 부녀가 갑판 위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가 최주사의 딸이 응석을 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딸의 덕에 이런 좋은 구경을 하시는구려. 내가 없었더면 아버지께서 여기 오실 까닭이 있소?]
[허허허, 효성은 딸이 하나 보다. 나도 딸의 덕에 이 구경을 하고 너도 옥련의 덕에 이 구경을 하는구나. 네가 네 남편이 미국 있다는 말을 들은 지가 팔구 년이 되었으나 미국 간다는 말도 없더니, 옥련이가 미국 있다는 말을 듣고 대문 밖에도 못 나가던 위인이 미국을 가니 자식에게 향하는 마음이 그러한 것이로구나.]
하면서 딸을 물끄러미 보는데 최주사의 딸이 그 부친의 말을 듣다가 무슨 마음인지 눈물이 돌며 눈자위에 붉은빛을 띠었더라.
최주사가 그 딸의 눈물 나는 모양을 보더니 또한 무슨 마음인지 눈에 눈물이 돈다. 딸의 눈물은 아버지가 양자한 아들을 데리고 뜻에 맞지 못하여 아비는 아들의 눈치를 보고 아들은 아비의 눈치를 보던 그 모양이 생각이 나서 딸자식 된 마음에 그 아버지 신세를 생각하고 나오는 눈물이요, 최주사의 눈물은 그 딸이 일청전쟁 난리 겪은 후에 내외간에 이별하고 모녀간에 소식을 모르고 장팔 어미만 데리고 근심하고 고생하던 일이 불쌍한 생각이 나서 나오는 눈물이라. 서로 눈물을 감추고 서로 위로하다가 다시 옥련의 이야기가 시작되며 웃음 소리가 난다.
[아버지, 우리 오던 곳이 어디며, 우리가 향하여 가는 곳은 어디요. 해를 쳐다보아도 동서남북을 모르겠소그려.
이편을 바라보아도 물뿐이요, 저편을 바라보아도 물뿐인데 물 밖에는 하늘 외에 또 무엇이 있소. 아버지 아버지, 우리가 일본 횡빈에서 떠난 후에 이 물이 넘쳐서 세상 사람 사는 곳은 다 덮여 싸여서 물 속으로 들어갔나 보오. 처음부터 아니 보이던 산은 어찌하여 많이 보이는지 모르겠소마는 우리 눈으로 보던 산까지 아니 보이니 그 산이 어디로 갔단 말이오.]
[글쎄, 나도 모르겠다. 완고로 자라서 완고로 늙은 사람이 무엇을 알겠느냐. 부산 소학교 아이들이 모여 앉으면 별소리가 다 많더라마는 무심히 들었더니 지금 생각하니 좀 자세히 들었으면 좋을 뻔하였다. 어 그 무엇이라던가.
수박같이 둥그런 땅덩이에서 사람이 산다 하니 수박같이 둥글 지경이면 이편에서 저편이 보이겠느냐. 그런 것을 물으려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완고의 애비더러 묻지 말고 신학문 배운 네 딸 옥련이더러 물어 보아라.]
하며 최주사의 얼굴에 즐거운 빛을 띠었는데 옥련이 같은 딸 둔 최주사의 딸도 얼굴에 웃음빛을 띠고 그 부친을 쳐다본다.
최주사의 부녀가 구경을 하다가도 옥련의 이야기요, 음식을 먹다가도 옥련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천지간에 자식 사랑하는 정은 옥련의 모친 같은 사람은 다시 없을 것 같다.
태평양에서 미국 화성돈이 멀기는 한량없이 멀건마는 지구상 공기는 한 공기라. 태평양에서 불던 바람이 북아메리카로 들이치면서 화성돈 어느 공원에서 단풍 구경을 하던 한국 여학생 옥련이가 재채기를 한다.
[누가 내 말을 하나 보다. 웬 재채기가 이렇게 나누. 에그 내 말 할 사람이야 우리 어머니밖에 누가 있나.]
하면서 호텔(주막)로 들어가다 만리타국에서 부녀가 각각 헤어져 있기는 서로 섭섭한 일이나, 김관일이 다니는 학교와 옥련이가 다니는 학교가 다른 고로 학교 가까운 곳을 취하여 옥련이가 있는 호텔과 김관일이 있는 호텔이 각각이라.
옥련이가 저 있는 호텔로 가다가 돌아서서 그 부친 김관일의 호텔로 가더라. 호텔 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우체 군사가 김관일에게 오는 전보를 들이더니 보이가 손에는 전보를 받아 들고 한편으로 옥련이를 인도하여 김관일의 방으로 들어간다.
옥련이가 그 부친에게 인사하기를 잊었던지, 들어서며 하는 말이,
[아버지, 전보가 어디서 왔습니까?]
김관일도 옥련이더러 말할 새도 없던지,
[글쎄, 보아야 알겠다.]
하면서 전보를 뚝 떼어 보더니 발신소는 미국 상항 우편국이요, 발신인은 최항래라. 전문에 하였으되,
‘딸을 데리고 간다. 상항에서 배 내렸다. 내일 오전 첫차를 타고 가겠다.’
기쁜 마음에 뜨이면 분명한 사람도 병신 같은 일이 혹 있는지, 김관일이가 전보를 들고,
[응, 무엇이냐, 최항래. 최항래. 최항래가 네 외조부의 이름인데. 이애, 옥련아, 이 전보 좀 보아라.]
옥련이가 선뜻 받아 들고 자세히 보니 그 어머니가 온다는 전보라. 부녀가 돌려 가며 전보를 보는데 옥련의 기뻐하는 모양은 죽었던 어머니가 살아와도 그 외에 더 기뻐할 수는 없겠더라.
그날 그때부터 옥련이는 그 어머니가 타고 오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일각이 여삼추라. 생각으로 해를 보내고 생각으로 밤을 보내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었더라. 옥련이가 혼자 기차를 타고 그 어머니 마중을 나간다. 상항에서 화성돈으로 오는 기차는 옥련의 모친이 타고 오는 기차요, 화성돈에서 상항으로 가는 기차는 옥련이가 타고 가는 기차이라.
원래 그 기차가 쌍선이 아니던지, 단선의 철도에서 오고 가는 기차가 시간을 어기었던지, 두 기차가 서로 충돌이 되었더라. 기차가 상하고 사람이 무수히 상하였는데 그 중에 조선 복색한 여편네 송장이 있는 것을 보고 옥련이가 그 어머니 죽은 송장이라고 붙들고 운다. 흑흑 느껴 울다가 제풀에 잠을 깨니 남가일몽이라.
전깃등은 눈이 부시도록 밝고, 자명종은 열두시를 땅땅 친다. 옥련이가 그 어머니를 과히 생각하는 중에서 그런 꿈이 된 줄 알고 마음을 진정하였더라.
옥련이의 모친이 옥련이를 생각하는 마음과 옥련이가 그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비교할 지경이면 누가 우등생이 될는지. 인간에 그런 사정은 하느님이나 자세히 알으실까.
그렇게 서로 간절하던 옥련의 모녀가 화성돈에서 만나 보는데 그 모녀가 좋아하는 모양을 볼진대 옥련이가 미칠지 옥련의 어머니가 미칠지, 둘이 다 미칠지 염려할 만도 하더라.
최주사의 부녀가 화성돈에서 삼 주일을 묵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떠나던 전날은 일요일이라. 최주사와 김관일과 구완서와 옥련의 모녀까지 다섯 사람이 모여 앉았는데 그날은 다른 말은 별로 없고 옥련의 혼인 공론이 부산하다.
최주사 부녀는 조선 풍속이 골수에 꼭 박힌 사람이라. 내 사정만 주장하고 옥련이와 구완서를 데리고 조선으로 가서 혼인을 지낸 후에 즉시 미국으로 돌려보내겠다 하고, 김관일이는 싱긋싱긋 웃으면서 구완서만 힐끔힐끔 보고 앉았고, 옥련이는 아무 말 없이 술병을 들고 외조부 앞에 술을 따르며 앉았고, 구완서는 최주사 부녀의 말 끝나기를 기다리고 앉았는데, 최주사의 부녀는 말대답하는 사람이 다 될 것같이 옥련이와 구완서를 데리고 갈 생각으로 말한다.
구완서가 옥련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옥련의 모친을 보며 자기의 질정하였던 마음을 설명한다.
[옥련같이 학문자질이 있는 따님을 두시고 날같이 용렬한 사람으로 사위를 삼으려 하시는 것은 감사하기 측량 없습니다. 그렇게 감사한 일을 생각하면 오늘이라도 말씀하시는 대로 좇을 일이오나 아직 어린 서생들이 혼인이 무엇이오니까.]
하면서 다시 옥련이를 돌아다보며 허허 웃더니,
[여보게 옥련, 지금은 우리가 동무이지, 귀국하면 내외가 될 터이지. 우리가 자유로 결혼하자 언약을 맺은 사람이라. 언약을 맺어도 자유, 언약을 파하여도 자유, 어느 때로 행례할 기약을 정하는 것도 자유로 할 일이라. 나도 부모 구존한 사람이요, 그대도 부모 구존한 터이라. 부모가 미성년한 자식에게 명령할 일은 공부 잘하여라, 나라를 위하여라 하는 것이 부모 된 이들의 도리요 직분이라.
지금 우리가 고국에 돌아가면 공부에 방해도 적지 아니할 터이오. 혈기 미성한 사람들이 일찍 시집 가고 장가 드는 것은 제 신상에 그렇게 해로운 것은 없는지라. 그러나 우리가 제 일신의 이해를 교계하는 것은 오히려 둘째로다.
여보게 옥련. 우리가 공부를 하여도 나라를 위하여 하고 살아도 나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이 옳은 일이라. 여보게 옥련, 자네 마음 어떠한가. 어서 시집이나 가서 세간살이나 재미있게 하면 그것이 소원인가. 자네 소원이 만일 그러할진대 우리 기왕 언약이 아무리 중하더라도 나는 그 언약보다도 더 중요한 국가를 위한다는 생각이 있으니 자네는 바삐 귀국하여 어진 남편을 구하여 하루바삐 시집 가서 자네 부모의 소원대로 하게.]
그 말 한마디에 옥련의 모친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에그, 천만의 말도 하네. 내 말 끝에 옥련이더러 그렇게 말할 것 무엇 있나. 말은 내가 하였지, 옥련이가 무슨 입이나 떼었나. 나는 지금부터 구완서를 내 사위로 알고 있어. 에그, 사위라 하면서 이름을 불렀네. 아무러면 허물 있나. 여보게 이 사람, 자네 옥련이더러 너의 부모 소원대로 하라 하니 우리 소원이야 하루바삐 구완서를 내 사위 삼고픈 소원 외에 또 무슨 소원이 있나. 지금 혼인을 하면 공부에 해로울 터이면 두었다가 아무 때나 하지.]
하며 횡설수설하는 것은 옥련의 모친이 구완서가 혼인 언약을 깨뜨릴까 염려하는 말이더라.
최주사는 완고의 늙은이라. 구완서의 하는 말을 들은즉 버릇없는 후레자식도 같고, 너무 주제넘은 것도 같은지라. 최주사의 마음에는 옥련이 같은 외손녀를 두고 어디를 가기로 구완서만한 외손섯감을 못 고르랴 싶은 생각뿐이라. 또 최주사가 일평생에 돈 많고 기 펴고 지내던 사람이라. 자기 마음대로 하면 옥련이를 곧 데리고 나가서 극진한 신랑감을 골라서 기구 있게 혼인을 잘 지내고 싶으나 한 치 건너 두 치라, 외손의 혼인부터는 내 마음대로 하기가 어려운 생각이 있어서 딸의 눈치도 보다가 사위의 눈치도 보며 헛기침만 하고 앉았다.
김관일은 본디 구완서의 기개를 아는 사람이라. 말없이 앉았다가 그 부인더러 간단한 말로 옥련의 혼인은 아는 체 말자 하면서 옥련의 얼굴을 거들떠보니 옥련이는 머리 위에 꽃을 꽂고, 눈썹은 나비를 그린 듯한데 눈은 내리깔고 앉았으니 무슨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옥련이를 낳은 옥련의 부모라도 뜻은 알 수 없겠더라.
옥련이와 구완서는 몇 해 동안이든지 공부 성취하도록 고국에 돌아가지 않기로 작정하였고 혼인은 본래 작정대로 귀국하는 이후에 성례하기로 옥련의 모친까지 그 작정을 좇아 허락하고 그 이튿날 부산으로 떠나간다.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드는 정거장에서 오후 기차 시간을 기다려서 상항 가는 기차표 사는 사람은 최주사 부녀요, 입장권 사서 들고 최주사의 부녀더러 이리 가오, 저리 가오, 시간이 되었소, 기차가 떠나겠소, 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최주사의 부녀를 석별하러 온 김관일의 부녀요, 정거장에 잠깐 나왔다가 학교에 동창회가 있다 하면서 기차 떠나는 것을 못 보고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구완서요, 철도 회사 복색을 입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기차를 살펴보는 사람은 장거수라. 시계를 내어 보더니 손을 번쩍 들며 호각을 부는데 호르륵 소리 한마디에 기차가 꿈쩍거린다.
기차 속에서 눈물을 머금고,
[옥련아, 아버지 모시고 잘 있거라.]
하는 사람은 옥련의 모친. 기차 밖에서 목메인 소리로,
[어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안녕히 가시오.]
하며 눈물을 씻는 사람은 옥련. 삿보를 벗어 들고 손을 높다랗게 쳐들고 기차 속에 있는 최주사를 바라보며,
[만리고국에 태평히 가시오. 대한민국 만세.]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김관일. 싱긋 웃으며 턱만 끄덕 하고 김관일의 부녀 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최주사이라.
기차의 연기 뿜는 고동 소리가 점점 잦으며 기차는 구루마같이 달아난다. 기차는 점점 멀어지고 연기만이 남아서 공중에 서렸는데 눈물이 가득한 옥련의 눈이 기차 연기만 바라보고 섰다.
[이애 옥련아, 울지 말고 들어가자. 오래 섰으면 철도회사 사람에게 핀잔보고 쫓겨난다. 몇 해만 지내면 나도 귀국하고 너도 귀국할 터인데 그렇게 섭섭하게 여길 게 무엇이냐. 네가 일본과 미국으로 유리 표박하여 부모의 사생을 모르고 있을 때를 생각하여 보아라. 지금은 부모를 만나 보았으니 좀 좋은 일이냐. 이애 옥련아, 우리 이 길로 공원에 나가서 바람이나 쏘이고 구경이나 하자.]
하면서 옥련이를 데리고 공원으로 들어가니 석양은 만리요, 상항은 보이지 아니하더라.
옥련이가 어머니를 이별하고 섭섭하여 하는 모양이 실성을 할 것 같은지라, 그 부친이 중언부언하여 옥련이를 위로하고 각기 호텔에 돌아가더라.
옥련이가 난리중에 그 부모를 잃고 타국으로 유리할 때에 그 부모가 다 죽은 줄로 알고 있던 터이라.
일본 대판 정상 군의 집에 있을 때 지내던 일을 말할지라도 학교에 가면 공부에만 정신이 쓰이고 집에 돌아오면 정상 부인에게 정도 들었고 조심도 극진히 하였고 동무를 대하면 재미있게 놀아도 보았는데 그럭저럭 부모 생각도 다 잊었으니, 미국에 온 지 사오 년 만에 천만의외에 그 부친을 만나 보고 그 어머니 생존한 줄을 알았는데 하루바삐 그 어머니 얼굴을 보고 싶으나 일변으로 생각하면 그 어머니가 살아 있는 것만 기뻐하여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던 옥련이가 그 어머니를 만나 보고 작별하더니 얼굴에 근심빛뿐이라.
귀에는 어머니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눈에는 어머니 모양이 보이는 듯하다. 평양성 난리 후에 그 어머니가 고생한 이야기 하던 것과 화성돈 정거장에서 그 어머니 떠나던 일은 옥련의 마음속에 사진같이 다 박혀 있다. 옥련이가 지향없이 혼자말로,
[우리 어머니는 어디쯤이나 가셨누. 아버지도 여기에 계시고 나도 여기 있는데 어머니 혼자 우리나라로 가시는구나. 내 몸 둘이 되었으면 하나는 아버지 뫼시고 있고 하나는 어머니 뫼시고 있고지고. 우리 어머니가 평양성 중에서 십 년 동안을 근심중으로 지내시고 또 혼자 평양으로 가시는구나. 나를 생각하시느라고 병환이나 아니 날까.]
옥련이가 그렇게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어머니 마음은 어떠할꼬. 옥련의 어머니는 남편도 이별하고 그 딸 옥련이도 이별하였으니 그 이별은 겹이별이라. 그 근심이 오직 대단할 것 아니언마는 옥련의 모친 마음이 그렇지 아니하고 도리어 기쁜 마음뿐이라.
출전:만세보(1906.7.22~1906.10.10)
갯마을
-오 영 수
서(西)로 멀리 기차 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면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있다.
더깨더깨 굴딱지가 붙은 모 없는 돌로 담을 쌓고, 낡은 삿갓 모양 옹기종기 엎딘 초가가 스무 집 될까말까? 조그마한 멸치 후리막이 있고, 미역으로 이름이 있으나, 이 마을 사내들은 대부분 철 따라 원양출어(遠洋出漁)에 품팔이를 나간다. 고기잡이 아낙네들은 썰물이면 조개나 해조를 캐고, 밀물이면 채마밭이나 매는 것으로 여느 갯마을이나 별다름 없다. 다르다고 하면 이 마을에는 유독 과부가 많은 것이라고나 할까? 고로(古老)들은 과부가 많은 탓을 뒷산이 어떻게 갈라져서 어찌어찌 돼서 그렇다느니, 앞바다 물발이 거세서 그렇다느니들 했고, 또 모두 그렇게들 믿고 있다.
해순이도 과부였다. 과부들 중에서도 가장 젊은 스물셋의 청상이었다.
초여름이었다. 어느 날 밤, 조금 떨어진 멸치 후리막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려 왔다. 여름 들어 첫 꽹과리다. 마을은 갑자기 수선대기 시작했다. 멸치떼가 몰려온 것이다. 멸치떼가 들면 막에서는 꽹과리나 나팔로 신호를 한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막으로 달려가서 그물을 당긴다. 그물이 올라 수확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짓이라고 해서 대개는 잡어(雜魚)를 나눠 받는다. 수고의 대가다. 그렇기 때문에 후리를 당기러 갈 때는 광주리나 바구니를 결코 잊지 않았고 대부분이 아낙네들이다. 갯마을의 가장 풍성하고 즐거운 때다. 해순이도 부지런히 헌옷을 갈아입고 나갈 차비를 하는데, 담 밖에서 숙이 엄마가 숨찬 소리로,새댁 안 가?
같이 가요, 잠깐…….
다들 갔다, 빨리 나오잖고…….
아따, 빨리 가먼 짓 먼첨 받나 머!
하고 해순이가 사립 밖을 나서자, 숙이 엄마는,
아이구 요것아!
눈앞에 대고 헛주먹질을 하면서,
맴(흩)치마만 걸치면 될 걸…… 꼬물대고서…….
망측하게 또 맴치마다. 성님(형님)은 정말 맴치마래?
밤인데 누가 보나 머, 철벙대고 적시노먼 빨기 구찮고…….
사실 그물을 당기고 보면 으레 옷이 젖는다. 식수도 간신히 나눠 먹는 갯마을이라 빨래가 여간 아니다. 그래서 아낙네들은 맨발에 흩치마만 두르고 나오는 버릇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로 해서 또 젊은 사내들의 짓궂은 장난도 있다. 어쩌면 사내들의 짓궂은 장난을 싫찮게 받아들이는 갯마을 여인들인지도 모른다.
해순이와 숙이 엄마는 물기슭 모래톱으로 해서 후리막으로 달려갔다. 맨발에 추진 모래가 한결 시원하다. 벌써 후리는 시작되었다. 굵직한 로프줄에 후리꾼들이 지네발처럼 매달렸다.
─`데에야 데야.
이켠과 저켠에서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면 로프는 팽팽해지면서 지그시 당겨 온다. 해순이와 숙이 엄마도 아무렇게나 빈틈에 끼여들어 줄을 잡았다. 바다 저만치서 선두가 칸델라 불을 흔들고 고함을 지른다.
당겨 올린 줄을 뒷거둠질하는 사내들이, 데에야 데야를 선창해서 후리꾼들의 기세를 돋우고, 막 거간들이 바쁘게들 서성댄다. 가마솥에는 불이 활활 타고 물이 끊는다. 그물이 가까워 올수록 이 데에야 데야는 박자가 빨라진다.
─`데야 데야 데야 데야.
이때쯤은 벌써 멸치가 모래톱에 헤뜩헤뜩 뛰어오른다. 멸치가 많이들면 수면이 부풀어 오르고 그 물 주머니가 터지는 때도 있다. 이날 밤도 멸치는 무던히 든 모양이다. 선두는 곧장 칸델라를 흔든다. 후리꾼들도 신이 난다.
─`데야 데야 데야 데야.
이때 해순이 손등을 덮어 쥐는 억센 손이 있었다. 줄과 함께 검잡힌 손은 해순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내버려두었다. 후리꾼들의 호흡은 더욱 거칠고 빨라진다. 억센 손은 어느새 해순이의 허리를 감싸안는다. 해순이는 그만 줄 밑으로빠져 나와 딴 자리로 옮아 버린다. 그물도 거진 올라왔다.
─야세 야세.
이때는 사내들이 물기슭으로 뛰어들어 그물 주머니를 한곳으로 모아 드는 판이다. 누가 또 해순이 치마 밑으로 손을 디민다. 해순이는 반사적으로 휙 뿌리치고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멸치가 모래 위에 하얗게 뛴다. 아낙네들은 뛰어오른 멸치들을 주워 담기에 바쁘다. 후리는 끝났다. 멸치는 큰 그물 쪽자로 광주리에 퍼서 다시 돌(시멘트)함에 옮겨 잡어를 골라 낸다. 이래서 멸치가 굵으면 젓감으로 날로 넘기기도 하고, 잘면 삶아서 이리꼬를 만든다.
해순이는 짓을 한 바구니 받았다. 무겁도록 이고 아낙네들과 함께 돌아오면서도 괜히 가슴이 설렌다. 짓보다는 그 억센 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누굴까? 유독 짓을 많이 주던 막 거간이나 아니던가? 누가 엿보지나 않았을까? 망측해라!
해순이는 유독 짓이 많은 것이 아낙네들 보기에 무슨 죄나 지은 것처럼 부끄럽기만 했다. 그래서 해순이는 되도록 뒤처져 가기로 발을 멈추자, 숙이 엄마가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너 운 짓이 그렇게도 많에?
해순이는 얼른 뭐라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주니까 받아 왔을 뿐이다.
흥 알아봐서, 요 깍쟁이…….
아낙네들이 모두 킥킥대고 웃는다. 뭔지 까닭 있는 웃음들이다. 짐작이 있는 웃음들인지도 모른다. 해순이는 귀밑이 화앗 달았다. 숙이 엄마네 집 앞에서 해순이는,
성님, 내 짓 좀 줄까?
숙이 엄마는,
준 사람에게 뺨 맞게…….
그러면서도 바구니는 내민다. 해순이는 짓을 반이 넘게 부어 주었다. 해순이는 아랫도리를 헹구고 들어와서 자리에 누웠으나 오래도록 잠이 오질 않는다, 그 억센 손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돌아오지 않는, 어쩌면 꼭 돌아올 것도 같은 성구의 손 같기도 한, 아니면 또 징용으로 끌려가 버린 상수의 손 같기도 한`─`그 억세디억센 손…….
해순이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써 본다. 눈을 감아 잠을 청해 본다. 그러나 금하는 음식일수록 맘이 당기듯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놓치기 싫은 마음`─`그것은 해순이에게 까마득 사라져 가는 기억의 불씨를 솟구쳐 사르개를 지펴 놓은 것과도 같았다. 안타깝고 괴로운 밤이었다.
창이 밝아 왔다. 해순이는 방문을 열었다. 사리섬 위에 달이 솟았다. 해순이는 달빛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뇌어 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눈시울이 젖는다. 한숨과 함께 혀를 한번 차고는 문지방을 베고 누워 버린다. 달빛에 젖어 잠이 들었다. 누가 어깨를 흔든다. 소스라치고 깨어 보니 그의 시어머니다. 해순이는 벌떡 일어나 가슴을 여미면서,
우짜고, 그새 잠이 들었던가베…….
시어머니는 언제나 다름없는 부드럽고 낮은 소리로,
얘야, 문을 닫아 걸고 자거라!
남편 없는 며느리가 애처로웠고, 아들 없는 시어머니가 가엾어 친 딸 친어머니 못지않게 정으로 살아가는 고부간이다. 그러나 이날 밤만은 얼굴이 달아 올라 해순이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의 시어머니는 언젠가 해순이가 되돌아오기 전에도,
얘야, 문을 꼭 걸고 자거라!
고 한 적이 있었다. 그날 밤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그의 시어머니다. 어쩌면 해순이의 오늘은 이 얘야, 문을 꼭 닫아 걸고 자거라……는 데 요약될는지도 모른다.
해순이는 보재기[해녀(海女)] 딸이다. 그의 어머니가 김가라는 뜨내기 고기잡이 애를 배자 이 마을을 떠나지 못했다. 그래서 해순이가 났다. 해순이는 그의 어머니를 따라 바위 그늘과 모래밭에서 바닷바람에 그슬리고 조개껍질을 만지작거리고 갯냄새에 절어서 컸다. 열 살 때부터는 잠수도 배웠다. 해순이가 성구에게로 시집을 가기는 열아홉 살때였다. 해순이의 성례를 보자 그의 어머니는 그의 고향인 제주도로 가면서,
너 땜에 이십 년 동안 고향 땅을 못 밟았다. 인제는 마음놓고 간다. 너도 인젠 가장을 섬기는 몸이니 아예 에미 생각을랑 마라…….
고깃배에 실려 그의 어머니는 물길로 떠났다.
해순이에게 장가들기가 소원이던 성구는 그만치 해순이를 아꼈다. 성구는 해순이에게 물일도 시키지 않았다. 워낙 착실한 성구라 제 혼자 힘만으로도 넉넉지는 못하나마 그의 홀어머니와 동생 해서 네 식구는 먹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해순이는 안타까웠다. 물옷만 입고 나가면 성구 벌이에 못지않을 해순이었다. 어느 날 밤 해순이는,
물때가 한창인데…….
신풀이가 하고 싶나?
낼 전복을 좀 딸래…….
전복은 갈바위 끝으로 가야지?
그긴 큰 게 많지…….
그만둬!
가요…….
못 간다니…….
집에서 별 할 일도 없는데…….
놀지…….
싫어, 낼은 가고 말 게니…….
이래서 해순이가 토라지면 성구는 그만 그 억센 손으로 해순이를 잡아당겨 토실한 허리가 으스러지도록 껴안곤 했다.
고등어철이 왔다. 칠성네 배로 이 마을 고기잡이 여덟 사람이 한 패로 해서 떠나기로 됐다. 이런 때[원양출어(遠洋出漁)]는 되도록이면 같은 고장 사람들끼리 패를 짠다. 같은 날 같이 갔다가 같은 날 같이 돌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고기잡이 마을에는 같은 달에 난 아이들이 많다. 이 H 마을만 하더라도 같은 달에 난 아이가 다섯이나 된다. 좋은 날씨였다. 뱃전에는 아낙네들이 제가끔 남편들의 어구며 그 동안의 신변 연모들을 챙기느라고 부산하다. 사내들은 사내들대로 응당 간밤에 한 말이겠건만, 또 한번 되풀이를 하곤 한다. 돛이 올랐다. 썰물에 갈바람을 받아 배는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사내들은 노를 걷고 자리를 잡는다. 뭍을 향해 담배를 붙이려던 만이 아버지는 깜박 잊었다는 듯이 배꼬리로 뛰어오면서 입에 동그라미를 하고 제 아이 이름을 고함쳐 부른다. 아이 대신 그의 아내가 치맛자락을 걷어 쥐고 물기슭을 뛰어들며 귀를 돌린다.
꼭 그렇게 하라니!
멀요?
엊밤에 말한 것 말야!
알았소!
오직 성구만은 돛줄을 잡고 서서 마을 한 모퉁이에 눈을 박고 있다. 거기 돌각담에는 해순이가 손을 뒤로 붙이고 섰다. 갓 온 시집이라 버젓이 뱃전에 나오지 못하는 해순이었다. 성구는 이번 한철 잘하면 기어코 의롱(依籠)을 한 벌 마련할 작정이었다. 배는 떠났다.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그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기대가 깃들어 있을 망정 조그마한 불안의 그림자도 없었다.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를 믿고, 바다에 기대어 살아온 그들에게는, 기상대나 측후소가 필요치 않았다. 그들의 체험에서 얻은 지식과 신념은 어떠한 이변에도 굽히지 않았다. 날[출어일(出漁日)]을 받아 놓고 선주는 목욕 재계하고 풍신과 용신에 제를 오렸다. 풍어(豊漁)도 빌었다. 좋은 날씨에 물때 좋것다, 갈바람이라 무슨 거리낌이 있었으랴!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 솜구름이 양떼처럼 피어 오르는 희미한 수평선을 향해 배는 벌써 까마득하다. 대부분의 사내들이 고기잡이로 떠난 갯마을에는 늙은이들이 어린손자나 데리고 뱃그늘이나 바위 옆에 앉아 무연히 바다를 바라보고, 아낙네들이 썰물에 조개나 캘 뿐 한가하다.
사흘째 되던날, 윤노인은 아무래도 수상해서 박노인을 찾아갔다. 박노인도 막 물가로 나오는 참이었다. 두 노인은 바위 옆 모래톱에 도사리고 않았다. 윤노인이 먼첨 입을 뗐다.
저 구름발 좀 보라니?
음!
구름발은 동남간으로 해서 검은 불꽃처럼 서북을 향해 뻗어 오르고 있었다.
윤노인이 또,
하하아, 저 물빛 봐!
박노인은 보라기 전에 벌써 짐작이 갔다. 아무래도 변의 징조였다. 파도 아닌 크고 느린 너울이 왔다. 그럴 때마다 매운 갯냄새가 풍겼다. 틀림없었다. 이번에는 박노인이 뻔히 알면서도,
대마도 쪽으로 갔지?
고기떼를 찾아갔는데 울릉도 쪽이면 못 갈라고…….
두 노인은 더 말이 없었다. 그새 구름은 해를 덮었다. 바람도 딱 그쳤다. 너울이 점점 커왔다. 큰 너울이 올 적마다 물컥 갯냄새가 코를 찔렀다. 두 노인은 말없이 일어나 헤어졌다. 그들의 경험에는 틀림이 없었다. 올 것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다. 무서운 밤이었다. 깜깜한 칠야, 비를 몰아치는 바람과 바다의 아우성`─`보이는 것은 하늘로 부풀어 오른 파도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바다의 참고 참았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휜 이빨로 물을 마구 물어뜯는 것과도 같았다. 파도는 이미 모래톱을 넘어 돌각담을 삼키고 몇몇 집을 휩쓸었다. 마을 사람들은 뒤 언덕배기 당집으로 모여들었다. 이러는 동안에 날이 샜다. 날이 새자부터 바람이 멎어 가고 파도도 낮아 갔다. 샌 날에 보는 마을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이날 밤 한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 윤노인이었다. 그의 며느리 말에 의하면 돌각담이 무너지고 파도가 축담 밑까지 들이밀자 윤노인은 며느리와 손자를 앞세우고 담 밖까지 나오다가 무슨 일로선지 며느리에게 먼첨 가라고 하고 윤노인은 다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른다. 바다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듯 잔물결이 안으로 굽은 모래톱을 찰싹대고, 볕은 한결 뜨거웠고, 하늘은 남빛으로 더욱 짙었다. 그러나 고등어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은 더 큰 어두운 수심에 잠겼다. 이틀 뒤에 후리막 주인이 신문을 한 장 가지고 와서, 출어한 많은 어선들이 행방불명이 됐다는 기사를 읽어 주었다. 마을은 다시 수라장이 됐다. 집집마다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났다. 울음에도 지쳤다. 울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설마 죽었을라고.
이런 희망을 가지고 아낙네들은 다시 바다로 나갔다. 살아야 했다. 바다에서 죽고 바다로 해서 산다. 해순이는 성구가 돌아올 것을 누구보다도 믿었다. 그 동안 세 식구가 먹고 살아야 했다. 해순이도 물옷을 입고 바다로 나갔다.
해조를 따고 조개를 캐다가도 문득 이마에 손을 하고 수평선을 바라보곤 아련한 돛배만 지나가도 괜히 가슴을 두근거리는 아낙네들이었다. 멸치철이건만 후리도 없었다. 후리막은 집뚜껑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 그대로 손볼 엄두를 내지 않았다. 후리도 없는 갯마을 여름밤을, 아낙네들은 일쑤 불가에 모였다. 장에 갔다 온 아낙네의 장시세를 비롯해서 보고 들은 이야기`─`이것이 아낙네들의 새로운 소식이요 즐거움이었다. 싸늘한 모래에 발을 묻고 밤 새는 줄 몰랐다. 숙이 엄마가 해순이 허벅지를 베고 벌렁 누우면서,
에따, 그 베개 편하다…….
그러자 누가,
그 베개 임자는 어데 갔는고?
아낙네들의 입에서는 모두 가느다란 한숨이 진다. 숙이 엄마는 해순이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면서,
- 에에야 데야 에에야 데야 / 썰물에 돛 달고 / 갈바람 맞아 갔소.
하자 아낙네들은 모두,
- 에에야 데야 / 샛바람 치거던 / 밀물에 돌아오소 / 에에야 데야.
아낙네들은 그만 목이 메어 버린다. 이때,
떼과부년들이 모아서 머 시시닥거리노?
보나마나 칠성네다. 만이 엄마가,
과부 아닌 게 저러면 밉지나 않제?
칠성네도 다리를 뻗고 펄썩 앉으면서,
과부도 과부 나름이지 내사 벌써 사십이 넘었지만, 이년들 괜히 서방 생각이 나서 자도 않고……
말도 마소. 이십 전 과부는 살아도, 사십…….
시끄럽다, 이년들아, 사내녀석들 한 두름 몰아다 갈라 줄 테니…….
성님이나 실컷 하소…….
모두 딱따그르 웃는다. 이래저래 여름이 가고 잡어가 많이 잡히는 가을도 헛되이 보냈다. 모자기, 톳나물, 가스레나물, 파래, 김 해서 한 무렵 가면 미역철이다. 미역철이 되면 해순이는 금보다 귀한 몸이다. 미역은 아무래도 길반쯤 물 속이 좋다. 잠수는 해순이밖에 없다. 해순이가 미역을 베 올리면 뭍에서는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오라기를 지어 돌밭에 말린다. 미역도 이삼월까지면 거의 진다. 어느 날 밤, 해순이는 종일 미역바리를 하고 나무둥치같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쯤이나 됐을까? 분명코 짐작이 있는 어떤 압박감에 언뜻 눈을 떴다. 이미 당한 일이었다. 악!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 숨결만 가빠지고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사내의 옷자락을 휘감아 잡았다. 세상없어도 놓지 않을 작정 하고`─`그러나 해순이의 몸뚱어리는 아리숭한 성구의 기억 속으로 자꾸만 놓여 가고 있었다. 그렇게도 휘감아 잡았던 옷자락이 모르는 새 놓아졌다.
─`아니 내가 이게…….
해순이는 제 자신에 새삼스레 놀랐다. 마치 꿈속에서 깨듯 바싹 정신이 들자 그만 사내의 상고머리를 가슴패기 위에 움켜쥐었다. 사내는 발로 더듬어 문을 찼다.
그 방에 누꼬?
시어머니의 잠기 가신 또렷한 소리다. 해순이는 가슴이 덜컥했다. 그러나 입술에 침을 발라 목을 가다듬었다.
뒷간에 갑니더!
그리고는 사내의 상고머리를 슬그머니 놓아 주고 자국 소리를 터덕댔다. 이날 밤 해순이는 가슴이 두근거려 더는 잠을 못 잤다.
다음날도 미역바리를 나갔다. 숨가쁜 물 속에서도 해순이 머리 한구석에는 어젯밤 기억이 떠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성기를 건져다 시어머니에게 국을 끓여 드렸다. 시어머니는 성깃국을 달갑게 먹으면서,
얘야, 잘 때는 문을 꼭 닫아 걸고 자거라!
해순이는 고개를 못 들었다. 대답 대신 시어머니 국대접에 새로 떠온 따신 국만 떠 보탰다.
해순이는 방바위`─`바위가 둘러싸서 방같이 됐기 때문에`─`옆에서 한천(寒天)을 펴고 있었다. 이때 등뒤에서,
해순아!
해순이는 깜짝 놀라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후리막에서 일을 보고 있는 상수다. 해순이는 아랑곳도 않았다. 상수는 슬금슬금 해순이 곁에 다가앉으면서,
해순이, 내캉 살자!
상수의 이글거리는 눈이, 물옷만 입은 해순이에게는 온몸에 부시다. 해순이는 암말도 없이 돌아앉았다.
성구도 없는데 멋 한다고 고생을 하겠노?
……
내하고 우리 고향에 가 살자! 우리 집에 논도 있고 밭도 있다!
사실 그의 고향에는 별 걱정 없이 사는 부모가 있었고, 국민학교를 나온 상수는 농사 돌보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두 해 전에 상처를 하자부터 바람을 잡아 떠돌아다니다가 그의 이모 집인 이 후리막에 와서 뒹굴고 있다.
은야 해순아!
상수의 손이 해순이 어깨에 놓였다. 해순이는 탁 뿌리치고 일어났다. 그러나 상수는 어느새 해순이의 팔을 꽉 잡고 놓지 않는다. 실랑이를 하는데 돌아가는 고깃배가 이켠으로 가까워 왔다. 해순이는 바위 그늘에 허리를 꼬부렸다. 그새 상수는 해순이를 끌고 방바위 안으로 숨었다.
해순이, 우리 날 받아 잔치하자.
싫에 싫에, 난 싫에!
정말?
놔요 좀, 해가 지는데…….
그럼 내 말 한 번만 들어…….
머 말?
상수는 해순이 허리에 팔을 돌렸다. 해순이는 몸을 비꼬아 손가락을 비틀었다.
내 말 안 들으면 소문낼 끼다!
머 소문?
니하고 내하고 그렇고 그렇다고…….
……?
내 머리 나꾸던 날 밤에…….
해순이는 비로소 알았다. 아무도 모르는 오직 마음속 깊이 간직해둔 비밀을 옆에서 엿보기나 한 것처럼 해순이는 그만 발끈해지자 허리에 꽂은 조개칼을 뽑아 들었다. 서슬에 상수는 주춤 물러났다. 해순이는 칼을 눈 위에 올려 쥐고,
내한테 손 대면 찌른다!
손 안 댈게 내 말 한 번만……
소문 낼 텐 안 낼 텐?
안 낼게 내 말…….
나 보고 알은척 할 텐 안 할 텐?
그래 내 말 한번만 들어 주면……
상수는 칼을 휘두르는용 제한기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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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줄 전문 소설 전문 2010/02/10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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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봐.]
[…….]
[여봐, 자?]
[…….]
나는 여자를 버려두고 담배에다 새로 불을 붙였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는 여자가 먼저 약속을 어겨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밤이 한결 더 조용해진 것 같다.
─빨리 불 끄고 자요.
아까 여자는 슈미즈 바람이 되자마자 재촉을 해댔다.
─이봐, 난 네가 여자기 때문에 돈 주고 사온 게 아니야.
여자는 이불 깃을 턱으로 끌어 올리더니 한참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혼자 있기가 뭣해서 부른 것뿐이니까 여기서 밤을 지내주기만 하면 돼.
여자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당신은 좀 이상한 분이군요.
─대신 나보다 먼저 자서는 안 돼.
여자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눈을 감아버렸다. 삼백 원이면 싸다고 생각했다 몇 번 여자를 불러보았다. 그녀가 깨어 있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그때마다 눈을 보시시 뜨고 나를 돌아다 보았다. 목 아래 깔린 그녀의 머리숱이 보였다. 나보다 먼저 잠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이 여자는 자기 몸 값쯤으로 계산한 모양이었다. 그건 좀 곤란하다. 내 쪽이 그녀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마음을 꼭 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구석에 놓아둔 휴대용 녹음기와 카메라가 좀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흔히 이런 여자들은 아침에 먼저 일어나 가버리기가 쉽고, 대개 그때의 손버릇은 좋지 않게 마련이다.
마침내 여자가 자고 있다. 나는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금방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역시 나는 고향을 찾아들었고, 그래서 조금은 흥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여행에 대한 미지근한 책임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까 낮에 차에서 너무 자버린 때문인가? ─남 기자, 본적이 전남 C읍이었지요?
어느 날 느닷없이 문화부장이 나에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마는…….
C읍이 나와 관계되는 것은 이력서와 호적 초본뿐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잘됐습니다, 남 기자. 이번에 고향엘 좀 다녀오시오.
뜻밖의 호의였다.
나는 조금 의아스런 얼굴을 지었다.
나는 문화부 기자 가운데서 근무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문화부장과 각별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장의 호의가 수상쩍었으나 어쨌든 잘됐다 싶었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어디나 좀 훌훌 한 차례 떠돌아다니고 싶던 참이었다.
─한 며칠 묵으면서 이걸 좀 이야기로 만들어 오시오.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부장은 C읍에 승천(昇天)한‘줄광대’가 있다고 하더라면서, 상당히 근거가 있는 이야기여서 재미있는 기사 거리가 될 수 있을 테니 좀 자세히 취재를 해오라는 것이었다.
─좀, 어려운 일이군요.
─그럼 남 기잘 포상 여행이라도 시켜주는 줄 알았소?
─그게 아니라 거짓말 같은 걸 참말로 만들어 오라니 말입니다.
─허허……. 남 기잔 문학적 센스가 있는 사람이니까 잘 해낼 겁 니다.
나는 부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문학적인 센스라는 말엔 입 속이 썼다. 그것은 내가 문학을 지망했으면서도 한 편의 작품도 쓰지 못했다든지 하는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우선 나에게는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건 전부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에 어떤 소설적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이 없었다.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하면 멀쩡하게 조리가 정연하던 생각의 흐름이 갑자기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말도 적합지가 않다. 나의 머릿속은 혼란이라는 말로 딱 잘라서 규정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결국 내가 소설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였다. 부장이 나에게 문학적인 센스가 있다고 한 것은 단지 내가 문과를 나왔다는 이유에서였을 뿐 나를 비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비위가 더 상했다. 그러나 나는 대답했다.
─어떻든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지근한, 말하자면 포상 여행이 아닌 출장 여행으로 나는 어젯밤 서울역에서 7시 야간 열차를 탔고, 아침 5시에는 광주에 도착했다. 서울은 저녁이었고 광주는 아침이었다. 그러니까 밤은 서울과 광주 사이에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줄곧 잤다. 어쩌다 눈을 떠보면 창 밖에서 어둠이 서울 쪽으로만 몰려가고 있었다.
광주에 내려서 대강 아침을 먹고 다시 C읍행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도 나는 잤다. 그저 잤다고만 할 수는 없겠다. 다른 사람들은 자지 않고 있다든지 유리창을 흐르고 있는 것은 밤 대신 낮이라는 것 등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유리창을 흐르고 있는 것이 서울 쪽이면서 광주 쪽이라는 것도……. 산비탈 신작로를 비스듬히 기운 전봇대들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가면서 잇대었다. 차가 그 전신주 사이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비키면서 달렸다. 겨울 한 철 깜박 잊혀진 산골의 주름살 같은 논배미들도 지나갔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자동차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아무렇게나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버스는 광주를 출발한 지 네 시간 만에 터덜터덜 C읍으로 들어섰다. 20년 만에 나의 고향이라고 하는 땅을 밟는데 불과 열네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나는 정말로 C읍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社支局이라도 찾아볼까 했으나, 나는 언뜻 눈에 먼저 띈 이 여관으로 들어와 내처 낮잠만 자버렸던 것이다. 잠이 깨어난 것은 시계가 다섯 시를 지난 뒤였다. 그러니까 지금 잠이 오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한꺼번에 너무 많이 자버린 탓일 게다. 하기는 난 서울 집에서도 일요일이면 밤과 낮을 뒤집어 살기가 일쑤였다. 낮에 잠을 자고, 밤을 뜬눈으로 지내느라면 나는 다른 사람의 두 곱을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그 시간만은 내가 다른 사람을 이기고 있다는 쾌감까지 덧붙었다. 어쨌든 지금 여자는 자고 있다.
[여봐!]
나는 다시 여자의 뺨에 손바닥을 대고 흔들었다. 아까부터 여자에게 물어보려던 말이 지금 막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까 저녁 무렵 잠이 깨었을 때 얼굴이 답답해서 세수를 좀 하쟀더니 물이 없다고 했다.
─가뭄에다 시골이 되어 그렇답니다
주인 여자는 행장 거지로 내가 위쪽에서 온 사람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물을 길어다 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적갈색으로 녹이 슨 수도를 가리켰다. 날이 어두워지니까 여자가 이번에는 촛불을 켜들고 왔다. 파리똥이 까맣게 오른 30와트 전구에는 아직 불이 닳지 않고 있었다.
─시골이 되어서 늘 그렇답니다.
별로 답답해 하는 것 같지도 않은 얼굴로 전구를 쳐다보았다. 나는 저녁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거리로 나와버렸다. 여자를 한 사람 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C읍의 형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에게나 물을 수도 없었고, 찾아갈 만큼 기억에 남아 있는 이름도 없었다.
].]
사내의 얼굴에 번쩍번쩍한 골이 몇 개 일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아…….]
나는 다시 당황해서 터무니없는 탄성을 발하고 나서 주렁주렁 매달린 소형 녹음기와 카메라만 맥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난 선생이 뭘 하시는 분인지 알 만합니다.]
사내는 자기의 잿빛 얼굴에서 그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워버리기가 퍽 아까운 듯이 보였다.
조금 뒤에 나는 중국 음식점 이층에서 국물만 남은 우동 그릇을 몇 번씩이나 휘저으면서 망연스레 창문을 내라보고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 대한 임무는 여기서 대강 끝내버려야 나머지 기간을 좀 편히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아무거나─ 그 아무거나인 것을 무슨 심각한 르나 부인은 그 소리를 듣고 죽었던 부모가 살아온 듯이 기쁜 마음에 마주 소리를 질렀더라.
[사람 좀 살려 주오…….]
하는 소리가 아무리 부인의 목소리라도 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