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마음의 시인
<이수화(李秀和)>
1939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1963년〈現代文學〉誌로 데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서울詩낭송클럽 대표
글 김광한
1982년 <시문학상>, 78년 <방송 극작가상>, 93년 <포스트모던 작품상>,시나리오상, T.V드라마상 등 수상시집 「모창사 비곡」「暮窓史 悲劇」「隱喩集」「그윽한 슬픔의 經典」외 다수
*신발끈을 묶으며
<이 수화>
끈이 있는 신발을 신어야겠습니다.
시간이 좀 더 걸리고
뻐걱이는 허리를 굽혀야 하는
불편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졸라 맨 발목에서 숨이 콱콱 막히고
굵은 땀방울이 발등을 흐를지라도
거친 들길을 걸을때에는
험난한 산길을 오를때에는
끈이 달린 신발을 신어야겠습니다.
어지간한 비틀거림에는 끄덕도 하지 않고
힘에 겨워 넘어지고 쓰러질 때에라도
*젊은 날의 인연을 굽이굽이 돌아서...
이 수화형! 건강하시죠?
인생을 살다보면 한때 정다웠지만 이해관계의 터널에서 멀어지다 보면 몇십년이 지나도 못만나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짧은 인생에 얼마나 많은가. 이수화(李秀和)시인이 그런 사람이다.이형과 함께 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낡고 헤어진 몇십년전의 일기책을 다시 뒤져보는 수밖에 없지만 다행히도 언뜻언뜻 생각이 나는 그 당시의 기억이 아직 살아있어서 그걸 정리해보는 것이다.우리의 삶도 많이 지나갔고 남은 날들이 그리 길지 않을 것같은 예감이 들어서 몇자 적어본다. 강산이 몇바퀴 바뀐 시절의 이야기를 하자면 몇몇 등장 인물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의 삶속에서 즐거웠고, 분노했고 좌절했고 방황했던 이야기들이 주축을 이루는 수밖에 없을듯하다.
1970년대 중반,서울 종로 5가 대학천 골목에 아리랑이란 잡지사와 그 건물 5층에 여원이란 잡지사가 있었다.발행인은 책장사를 오래해서 큰 돈을 검어쥔, 잡지와는 전혀 무관한 상인이었다.그때가 우리들의 젊은 날들이었다.이 수화시인을 만난것은 그곳이었다. 그의 인상은 깨끗했고 조선 선비같았다. 그리고 섬세한 성격에 매우 정의감이 강하고 나쁜 음모에는 절대 가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이수화시인과 나는 여원잡지사의 기자로서 글도 쓰고 취재도 다니는 등 바쁜 날들을 보냈는데 정작 기사를 쓰는 일에 바쁜 것이 아니라 저녁마다 골목에 지천으로 늘어선 술집을 드나들기에 여념이 없었던 탓이다.
이형과 나와 그리고 오찬식(소설가)선배 그리고 목사가 된 김학진 등 요즘 말로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거의 매일 어울려서 술을 마시는 재미에 월급은 뒷전이었다. 그 당시 편집장으로 있던 분은 실력보다 권모슬수, 그걸 권모술수란 차원높은 이야기를 붙이기보다 얕은 꾀가 많은 분이었다.지금 누구라면 금방 알 사람이었다.잡지의 공적인 개념보다 경영자의 비위를 맞추고 동시에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데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이분은 자신의 학력이 비천하다는 것이 컴플렉스가 되어서 학력높고 능력있는 기자나 편집인들이 그의 제거 대상이었다.상무나 경영자에게 어떻게 아부를 했던지 손바닥이 얇아진 분이었다.
이분은 남의 슬픔을 자신의 기쁨으로 만든 몇 안되는 분이었다.남을 실업자로 만들고 자신은 잘가는 색시집에서 양주를 마시던 그분,,,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는지.그럼 자식들이 안되는데...
이분에게 우리는 제거 대상 일호에 속했는데 처음 오찬식 선배가 잘려져 나갔고 그 다음이 내 차례, 또 이수화시인 등개인적으로 친해도 이익에 반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제거하고 그 자리에 자신을 따르는 무식한 기자들로 메꾸었다.살아온 환경이 그를 고급스럽게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그는 잡지계의 작은 독재자였다.제나 내나 같이 월급 받으면서...
오찬식 선배는 이분에게 인간답게 살라고 충고를 하다가 잘렸는데 너무도 화가나서 그를 소재로 소설까지 썼다. 그것도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잡지에...최 치졸전이란 제목으로.나역시 이분에게 <당신 그렇게 살면 안돼!>하면서 삿대질을 하다가 잘려서 직장이 별로 없었던 당시 실업자 생활을 이골나게 한적이 있다.남산을 비롯해서 남한산성 등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들을 보냈다.하루가 왜 그리도 긴지..이수화선생도 얼마 못가서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
이것이 첫 인연이었다. 그후 내가 독서신문의 편집장으로 갔을때 이수화선생에게 원고청탁을 했었고 그때 받은 <모창사 비곡(暮窓史悲曲)>이란 시집이 아직도 남아있다.그후 내가 가는 잡지사마다 이수화시인을 불러들여서 얼마 안되는 원고료를 드리기도 했고 그것은 인관관계를 엮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50이 넘어서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고 나는 정말 내가 생각해도 많은 소설을 썼다.그리고 이 소설들을 이수화선생에게 보내서 감평을 받기도 여러번 했다.나는 은근히 이수화 선생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으나 이분은 반골적인 요소가 많아서 일일히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주어 마음속으로 섭섭해했던 기억이 난다.그리고 그 후 10여년이 흘러서 어떤 출판사에서 무슨 상을 만들겠다고 했다.이수화선생과 만난것이 그때였고 당시 조지훈 문학상을 만들기로 했으나 미수로 그친적이 있다.
그리고 작년 3월에 이양우선생의 문예춘추 행사에서 정말 오래간만에 다시 만났다.나도 60이 넘고 그분은 벌써 70입구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여전히 하얀 얼굴에 밝은미소 그리고 반골스런 성품에 정의감과 다정다감한 그 모습이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아직도 동안이고 잔잔한 선비의 형용을 잃지 않은 것은 세월의 바람을 가볍게 넘겨버린 그 관용과 착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그때 우리는 30여년전 편집장을 하면서 못되게 굴던 분이 시인이 되겠다고 하는 말에 함께 웃었다.시인이 되기전에 회개부터 해야한다고...
그분도 잘 살고 있는지...
우연히 어느 책에 실린 신발끈을 다시 묶으며란 시를 발견하고 아! 이수화시인은 바로 이런 점이 젊음을 유지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누가 이야기를 해도 한번도 얼굴 찌푸리지 않고 대답해주고 남들에게 결코 마음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고 한 길로 간 그의 올곧은 인생,그를 추천했던 미당 서정주 선생은 그에게 얌전한 색시라고 했다.
그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시를 썼다.삶의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것들도 있고 사회비판적인 것도 있고 아무튼 그의 시의 메뉴는 그의 나이만큼 다양하다.그러나 이제 이수화시인이나 우리 모두가 기을을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이 수화시인의 가을의 노래가 와닿는다.이형!777에 9942 맞아요?진주 아파트...
*가을의 노래 / 이수화
잎이 진다. 이 가을에는 오래 살아온 생가(生家) 아궁이에 낙엽을 지피고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싶다.
지금은 여름내 풀을 뜯던 일소들도 시나브로 살이찌는 아롱사태와 그리고 깊은 산곡(山谷)에 피는 도라지꽃 그 고요한 목숨의 한때를 생각하기 위하여 나의 사유(思惟)는 이 가을에 수정알처럼 빛나야겠다.
잎이 진다. 아침을 나서는 생활의 문턱에도 이름 모를 일년생(一年生) 초본식물(草本植物)이 잎을 떨구고, 가족들의 정갈한 내의(內衣)는 초록(草綠)의 스킨다브스 잎보다도 두터워졌다.지금은 한갖 사라진 영화(濚華)로움도 언제나 오뇌(懊惱)하던 젊음의 밤들도,그리운 추억처럼 소중한 때이려니 잎이 지는 산자락 나무숲에 흙이 되어서, 나는 은총(恩寵)의 따사로운 섭리(攝理)이고 싶다.
잎이 진다. 이 가을에는 우리가 살아갈 누리에 낙엽이 져도 나의 기도(祈禱)는 낙엽과 더불어 흙이 되리니- 아아. 지닌 것이 없어도 충만(充滿)한 가슴이여. 이 가을 오래 살아온 생가(生家)아궁이에 낙엽을 지피고,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