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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한 십자가. すべての人のための十字架。( 2025년 2월 16일 주일예배)
본문 히브리서 2:5~9
히 2: 5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성경 어딘가에서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기억하여 주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7 주님께서는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그에게 씌워 주셨으며, 8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기로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9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5. 神は、わたしたちが語っている来るべき世界を、天使たちに従わせるようなことはなさらなかったのです。6. ある個所で、次のようにはっきり証しされています。「あなたが心に留められる人間とは、何者なのか。また、あなたが顧みられる人の子とは、何者なのか。7. あなたは彼を天使たちよりも、/わずかの間、低い者とされたが、/栄光と栄誉の冠を授け、8. すべてのものを、その足の下に従わせられました。」「すべてのものを彼に従わせられた」と言われている以上、この方に従わないものは何も残っていないはずです。しかし、わたしたちはいまだに、すべてのものがこの方に従っている様子を見ていません。9. ただ、「天使たちよりも、わずかの間、低い者とされた」イエスが、死の苦しみのゆえに、「栄光と栄誉の冠を授けられた」のを見ています。神の恵みによって、すべての人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のです。
지난 주일에는 복음의 강력하고 견고한 권능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현실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수많은 유혹과 속임, 그리고 설득력은 있으나 교활하고 허망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마치 홍수처럼 밀려오는 이런 세속적인 생각들에 휘둘리거나,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게 하시는 강력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로 복음의 약속이라는 권능입니다. 역사 위에 견고하고 찬란하게 서 있는 이 복음의 약속을 저와 여러분이 분명히 붙들고, 언제나 든든하고 활기찬 기쁨의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온전한 인간으로 오셨음을 논증하는 내용인데요. 우리가 꼭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특정한 종교에 속한 이들에게만, 혹은 특별한 지식과 정보를 의지를 갖고 받아 들인 이들에게만 특권이나 이권을 할당하기 위한 조건을 내건 계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은 1차적으로는 그 복음을 믿는 자를 향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1-3)
그리고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예언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렘 32:40)
그러므로 성경의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약속이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축복하겠다는 기복적이고 종교적인 조건부 언약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은 그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셔서 복음을 완성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인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의 9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예외로 두거나, 제외되는 이가 없이, 그야말로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인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시편 8편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시편 8편에 등장하는 ‘사람’과 ‘인자’는 애초에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구절은 아니었습니다. 보통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로 창조해 주신 것에 감사하는 내용인데요.
히브리서 기자는 7절에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니”라고 인용하는데요.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성경에는 이 구절이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을 오용한 것이 아니라, 고대 히브리어로 적혀 있던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적인 존재인 천사로 번역된 구절을 인용하면서 구세주께서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강림하신 것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조금 복잡하게 느껴지실 수 있겠는데요. 성경이 이미 기록해 놓은 구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오셔서, 모든 인간들의 영적인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셨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과정에 있는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일부의 조건을 갖춘 이들에게만 한정적으로 허용되는 제한적인 계약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 말씀이 정말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가진 믿음의 진리가 이단 종파의 현란한 논리와 혹은 세속적인 사이비 종교와 어떤 설득력이 있는 주장들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약속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왜곡하고,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아무런 힘도 없이 나약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설득력도 없고 매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단지 믿기만 하여 구원에 들어간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해하기 좋은 교리를 말하거나, 설득력이 있는 논리들을 가지고 복음을 왜곡하고 오염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영지주의자들의 교리해석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영적인 세계와 육신적인 세계는 완전히 갈라져 있으며, 영적인 것은 완전히 선하지만, 육신적인 것은 완전히 악하다고 주장했지요. 영지(그노시스, 霊知), 즉 영적인 지식이 최고의 선이며, 육신의 지식과 그 활동은 모두 추악하고 멸망에 이르는 것이라는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모든 것은 구원을 받은 일에 전혀 쓸모가 없는 것으로 단정해 버립니다. 이들의 주장을 들으면 성경도 마찬가지로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을 분리해서 영적인 것만을 추구해야 구원의 자격이 있는 것처럼 오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영지주의적인 생각과 논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면서 구원에 대한 생각도 오염되고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단적인 예로 영지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매우 극단적인 금욕이나, 극단적인 방종으로 행동했습니다.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은 육신은 악한 것이기에 육신의 욕구나 즐거움에 대해서 억누르고 배척함으로 영적인 순결함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되도록 육체에 고통을 주며, 금식과 금욕으로 그 어떤 즐거움도 죄악시 하였습니다.
반대로 극단적인 방종을 일삼은 사람들은 육신적인 탐욕과 정욕을 남용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어차피 영적인 지혜를 소유함으로 영혼이 정결하기만 하면 육체는 아무리 더러워지더라도 썩어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무절제하게 살아도 영적인 지혜만 소유한다면 구원을 받고 영생하는 일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이든 방종하는 이들이든… 영지주의적 사고방식에 속은 교인들이 가진 공통적인 생각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어떤 노력이나 실력을 통해 영적인 지식을 가진 일부만이 구원에 합당한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 그 때부터 교회는 이런 이단적인 생각과 복음의 약속을 분별할 필요를 인식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복음을 믿고 따를 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복음의 약속은 우리의 노력이나 실력, 혹은 지적인 수준에 의해서 변질되거나, 혹은 변화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의 약속을 표현하고 전하던 문화적 환경과 혹은 지리적인 여건들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과 그 후대에 헬라어로 기록된 성경, 그리고 영어와 한글, 일본어로 표현되는 세부적인 것들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믿는 공동체의 분위기나 정서 등은 조금씩 차이를 가질 수 있지요.
하지만, 복음의 약속은 그 어떤 문화권이나, 환경이나, 기후, 혹은 사람들의 생활형편에 의해서 변형될 수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는 영지주의라는 세속적 가치관이 복음을 믿는 이들의 생각을 변질시켰습니다. 오늘날에는 과학적 사고와 진화론적 세계관이 복음을 믿는 이들의 생각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에 이해되고 납득되어야 믿을 수 있다는 태도와 자세가 마치 종교처럼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인간이 가진 지식의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면 믿을 수 없다는 태도인 것이지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그렇게 치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함부로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요 7:52)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도 이런 저런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걸림돌이 되어서 복음의 약속을 그저 종교적 교리로 취사선택이 가능한 종교적 지식의 하나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완전한 인간이셨지요. 요한은 말합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2)
요한이 고백하는 “육체로 오셨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사셨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오늘 본문에서 확고하게 증언하려는 것도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의 존재로 살아계셨기 때문에 이 땅의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 것에 대해서 성경(마 18:23-27)은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 18:23-24,27)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했다는 것은 도무지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나 실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속죄의 제물로 바치신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인류가 겪고 있는 모든 한계와 괴로움을 고스란히 체험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계략에 속아 멸망으로 가는 길에서 건져내시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가 거룩하지 않는 길을 가며, 결국 멸망의 지옥에 합당한 길로 밀어 넣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참소하고 고발하기에 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신실함을 말씀하시자 사탄은 이렇게 댓구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 1:9,11)
많은 사람들이 욥기를 읽으면 욥이 사탄에게 시험과 고난을 당한다고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탄이 감히 하나님의 뜻과 그 판단을 시험하려고 시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다고 여기시며, 온전하고 정직하다고 말씀하시는 ‘인정하심’과 ‘뜻’에 훼방을 놓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욥의 고난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께 있어서의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욥의 고통과 괴로움은 곧 하나님의 괴로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현실적인 좋은 일들도 형통이며 축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임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일이며, 그야말로 축복과 형통인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욥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그는 형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고통의 끝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또한 야곱의 아들 요셉도 굴곡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종으로 팔렸습니다. 조금 살림이 펴지는가 싶었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종살이까지 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
여기서 애굽 사람의 집에 있다는 것은 요셉이 애굽사람의 종으로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형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형통한 사람이 받는 풍성함이 진정한 부유함입니다. 잠시 잠깐 죄인과 악한 자가 부요함을 누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를 위해 쌓은 재물입니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잠 13:22)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 잠시 천사보다 나약한 존재로 두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육체를 입고 사는 우리의 연약함과 사악함과 한심함, 그리고 추악함을 정결하게 하시려는 위대한 계획의 일부였던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사상 중에 하나에 몰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적 납득 되고 이해가 가는 가치관을 자유의지로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에 세뇌되어 자기도취에 빠져 사는 몰상식한 일도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그 어떤 누구도 멸망하거나, 지옥에 대한 막연한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에 빠져 자신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없도록 빛을 비추는 것이 곧 복음을 믿고 전하는 일입니다. 꼭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혹은 보다 많은 즐거움을 위해서, 아니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만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약속을 믿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와 같은 처지에 공감하시고 체감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 길을 열어 주시고, 축복을 채워 주시고, 형통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모든 어려움과 문제와 장애물들이 사라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자기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경쟁하며 사는 생활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동행하며, 그 은혜의 임재 안에서 매일 살아가는 일상인 것을 믿습니다. 그 일상 가운데 발견되는 진정한 평안과 행복이라는 빛나는 보석 가운데 형통하게 우리가 살고 있음을 또한 믿습니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혹은 실력에 따라서 축복의 무게가 결정된다고 속이고, 매일 하나님의 형상을 꾀어 지옥의 문으로 밀어 넣는 사탄의 달콤한 유혹을 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 보혈과 복음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나를 형통케 하시려 동행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들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도 내 안에서 나의 모든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에 함께 하시는 주님과 친밀하게 형통한 자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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