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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뉴스: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 북한괴뢰 무장공작단이 어둠을 타고 감히 서울까지 와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급거 출동한 군경 수색대는 포위망을 폈으며 북악산을 깃점으로 북한산 비봉 노고산 등 북쪽으로 쫓기는 살인배들을 잡기 위해~ (동영상) 생포된 김신조: 우리 31명의 임무는 박정희 모가지 뗄 임무고~ (계속) 생포된 무장간첩 김신조가 죽은 일당들을 하나 하나 확인했습니다.
내래이션: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틀 뒤에는 (1968.1.23)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됐다(동영상),
내래이션1: (1968년 10월 30일) 경상북도 울진과 삼척에 60여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해서 양민을 학살하고 난장판을 벌인다는 급보에 접하자 당국은 을종사태를 선포했으며 ~(자막) 1969.06.12 흑산도 간첩선 침투, 1969.12.11 KAL YS-11기 납치사건, 1970.06.05 해군방송선 납치사건,
내래이션1: (동영상) 서울에서 부산에서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민과 학생과 그리고 남녀노소 모두가 무찌르자 공산도배 타도하자 김일성을 외치면서 불길처럼 뛰쳐나왔습니다 (고뇌하는 박정희 대통령 1971년 12월 27일), 날로 고조되는 한반도의 긴장감 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2월 27일 (극비極秘) 비밀메모를 전달한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사백 네 번째 역사저널 그날 입니다. 공영방송 50주년 기획-잘 살아보세 오늘 마지막 시간인데요. 계속되는 북한 도발에 박정희 대통령이 극비로 메모를 전달을 하지요.
이시원/배우: 극비 메모라니 벌써부터 궁금해요, 뭘까요? 혹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내 목을 따오라고 했으니까 김일성 목 따와라? 이런 메모 아니었을까요?
최원정: 모가지에는 모가지
최태성/한국사 강사: 그렇게 요구할 수도 있겠지만 극비로 시작되는 비밀 쪽지의 내용은 무엇이었냐면, “1975년까지 사거리 200킬로미터의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 라는 내용이었거든요. 요거 쓴 때가 71년도니까 4년만에 이걸 개발하라는 건데 그래서 탄생한 것이 이것! (모형: 대한민국 최초의 미사일 백곰), 우리 기술로 최초로 만든 미사일 백곰입니다, 백곰~ (미사일 발사 동영상),
이시원: (스튜디오 무대) 원래 이 사이즈인 거예요? 너무 작아서
허준/방송인: 아니에요, 저기 직접 보여주시긴 했습니다만 조금 걱정이 되는 게 저 정도면 백곰이 아니라 백구가 아냐? 실제 미사일 백곰은 12미터가 넘어요.
최태성: (태상호씨를 향해) 최소 12미터는 만드셨어야지~
이시원: 근데 이름이 백곰이잖아요. 백곰은 하얀색이어야 되는 거 아녜요, 왜 국방색이죠?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최태성: 관련된 얘기는 잠시 후에 얘기는 이따가 해드릴 게요,
이시원: 근데 지금 북한이 어떻게 보면 도발을 직접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미사일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개발한다. 떵떵거려도 되는 거 아닌가요, 왜 뭣하러 극비로 만들어요?
태상호/군사전문기자: 그럴 수도 있는데 지금 우리의 국가 위상과 1970년대에 대한민국의 국가 위상은 차이가 있었어요. 우리는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세계 10위 안에 군사대국이고 우리가 눈치 안 봐도 되잖아요. 그땐 안 그랬습니다.
최태성: 지금도 눈치는 좀 보지요.
최원정: 아무튼 비밀리에 쪽지에 명령을 하달하는 건데 그 내용을 보니까 기한이야 우리가 목 박을 수 있지만 사거리까지도 딱 200킬로미터로 정한 이유가?
태상호: 200킬로미터가 되어야 되는 이유가 그때 당시 主敵 개념이 확실했잖아요. 우리의 제일 강한 적이 어디 있습니까?
허준: 북한입니다.
태상호: 북한에서도 어디입니까?
허준: 평양
태상호: 평양을 타격 해야 하는데 사거리가 안 나오면 이게 우리의 전략무기(전쟁수행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군사기지, 산업시설 등의 목표를 공격하는 데 쓰는 무기)인데 전략무기를 휴전선까지 부쳐야 되는 거죠. 근데 휴전선에 우리의 전략무기를 부치면 적의 공격무기에 쉽게 파괴 당할 수 있겠죠. 그래서 최대한 서울 이남 서울 남부지역이나 남양주 축선 정도에서 발사할 수 있게 할려면 200킬로미터 정도의 사거리가 나와야 하는 거죠.
최태성: 적의 심장부를 때릴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한 거였네요 (서울-평양간 직선거리 195킬로미터)
이시원: 근데 그 당시에 200킬로미터 개발하라 그러면 그게 나름 어려운 기술개발이었을 것 아녜요. 그거 4년만에 개발하는 게 가능한가요?
허준: 이때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총도 못 만들었어요.
이시원: 총도 못 만들었는데 지금 미사일을 만든다는 거예요?
태상호: 쉽게 얘기해서 우리나라 전군이 가지고 있는 우리가 손에 들고 싸울 수 있는 무기 중에 우리가 만든 무기는 하나도 없었어요.
최원정: 어떡하면 좋아?
최태성: 진짜 총도 못만들었어요?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그 당시에는 우리의 총이나 이런 것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쓰던 것들, 이런 것들을 받아야 새로운 총들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때 까지만 해도 M1소총을 계속 쓴 거죠. M1소총(미국의 半自動 小銃으로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서 주로 사용)은 2차, 세계대전, 6.25 한국전쟁 이때 썼던 소총들이 이때도 썼고 사실은 80년대도 썼습니다. 80년대~90년대 예비군 훈련에 M1소총이 그때도 있었어요. 그런 상황이었는데 미사일을 만들어라. 도대체 왜 잘 살아보세 시리즈의 마지막을 이걸로 할까. 미사일로 할까 이건 사실은 웬만한 기술로는 만들기가 힘들고 또 웬만한 재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기가 나가지 않고 이 자리에서 터지면 큰 일 나거든요. 무기라는 건 정말 최고의 정밀 집약적인 부분들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70년대에 중화학공업을 하면서 국방산업을 한다라는 것 이게 잘 살아보세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지 않을까.
최태성: 거의 구석기 시대에 휴대폰 만든다는 이야기잖아요?
이시원: 근데 이게 성공하기만 한다면 우리나라가 그만큼 한 단계 도약하는 거잖아요. 이것 꼭 해야 되는 거 맞죠?
태상호: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1970년대에 지대지 미사일을 자국에서 개발해서 제대로 전력화 한 나라는 6개국 뿐이 없었어요.
이시원: 그럼 우리나라가 7번째?
태상호: 백곰계획이 성공을 해서 7번째 백곰 미사일을 우리가 가지면 세계 7번째 국가가 되는 건데 地帶地?
최태성: 지대지 미사일이 뭔지 설명해 주세요.
태상호: 지대지 미사일은 말 그대로 땅에서 발사를 해서 땅의 목표를 맞춰서 무력화 시킨다.
최태성: 그러면 地帶空 미사일은?
태상호: 지대공은 땅에서 발사를 해서 공중에 있는 표적을 맞춰서 무력화시킨다.
이시원: 미사일은 원래 땅에서 쏘는 거잖아요?
최원정: 艦對地도 있고 空對地도 있고!
태상호: 무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이제 보니 무기박사?
최원정: 내 마음에서 상대방 마음으로 쏘면 心對心~
이시원: 미사일 중에서 지대지 미사일이 있는 거네요.
최태성: 무기 얘기하니까 허준씨 너무 신나지요?
최원정: 오늘 진행을 하면서 너무 어려울 것 같아 가지고 태상호 기자님께 특별 과외를 부탁드렸어요. 그래서 다녀온 곳이 있습니다.
--------------전쟁기념관/서울 용산구--------------
최원정: 이곳이 대한민국 국군발전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인데~
태상호: 1970년대 초반은 사실은 대한민국 방위산업은 암울한 시기였어요. 자국산 총기 하나 만들지 못한 국가였어요.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ADD)를 방문해서 첫번째 사업이 바로 번개사업입니다. 1970년 8월 6일 국방과학연구소가 개소를 하죠. 71년 11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명령을 합니다. 각종 총기를 그리고 12월 30일 까지 박격포, 대전차 지뢰 등 무기를 국산화 할 수 있게 試製品을 만들어서 가지고 와라.
최원정: 번개사업 이란 게 번개처럼 날카롭게 공격해라 이런 의미인가요?
태상호: 처음엔 아까 그런 의미가 다분히 들어가 있을 수 있었을텐데요. 그런 의미 보다는 단기간에 모든 걸 너무 빨리 하다 보니 번개불에 콩을 구워먹는다 그런 사업이다.
내레이션: 1971년 국방과학 연구소는 제1차 번개사업으로 소총, 박격포, 수류탄 등 모두 7종의 무기 시제품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최원정: 그 중의 하나가 이런 소총이죠.
태상호: 특히 오늘 볼 건 M2카빈 試製品 1호 총기입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딱 1정입니다.
최원정: 지금부터 보게 될 총기 빨리 가보죠. 저를 기다리고 있는 바로 오늘의 주인공(M2카빈 소총),
태상호: 저는 이 총을 볼 때마다 감동을 느껴요.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에 딱 1정 남아있는 총을 제가 직접 본다는 것도 있구요. 드디어 공개! 대한민국 방위산업 자립의 신호탄을 쏜 역사적인 총 1호 시제품, 또 이 총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 국군이 자국산 소총으로 무장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진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카빈 M2試製品 製作番號 1番 韓國自動車工業協同組合員 聯合生産
최원정: 설렙이 지금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어요.
태상호: 번개사업이 진행이 되면서 試製品이 만들어져서 바로 이런 총들이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된 거죠.
최원정: 신진은 ShinJin은 뭐예요?
태상호: 자동차 업체 혹시 아시나요? (신진자동차 공업에서 제작한 개머리판)
최원정: 신진회사에서 만든 거요? 이게 지금 전체가 다 국산화 부품들인가요? (부품별로 별도 회사에서 생산해 조립 무기에 사용된 부품 100% 국산),
태상호: 맞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완전히 국산화해서 시제품을 가져 오라고 했기 때문에 에피소드를 보면 도면도 없고 逆設計를 해야 되니까 그래서 설계자들은 미친듯이 설계를 하고 일부팀들은 미군부대 앞을 돌아다니면서 관련 부품이 혹시 참고할 수 있는 게 없나 찾으려 다녔다고 해요. 그만큼 만들기 힘들었던 거죠.
최원정: 우리의 근성으로 만들어진 일반인에게 공개된 지 얼마되지 않았다 면서요?
태상호: 맞습니다. (2022년 작년 처음 공개된 M2 카빈의 대한민국 1호 시제품)
최원정: 저희는 직접 이걸 마주하고 있습니다. 유례없는 일이 아닌가요.
최윤관/전쟁기념관: 이렇게 가까이 보시는 것은 역사저널 그날이 최초입니다.
최원정: 너무 감사합니다.
이시원: 너무 자랑스럽네요. 역사저널이 최초로 카빈 총을 본 거잖아요.
최원정: 한국 현대 무기의 시조를 제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온 겁니다. 유물로서의 가치가 대단하다고 하더라구요.
최태성: (최원정씨에게) 갈 때 같이 좀 가요, 혼자 가지 말고
태상호: 박정희 대통령이 첫번째 시험 삼아서 내린 명령을 기일 전에 시제품을 만들었잖아요.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뭐라고 했느냐면 11월 15일 받았으니까 12월 24일날 시험사격을 했거든요. 시험 사격에서 우수하게 통과를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나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거야 그러니 이게 그 뜻이 뭡니까?
최원정: 빨리 만들어라.
태상호: 다음은 미사일을 가져와라, 빨리 가져와라.
최원정: 번개사업이 성공하면서 대통령이 또 다른 명령을 내린다면서요.
태상호: 이번에는 더 어려운 난제를 줍니다.
최원정: 미사일?
태상호: 맞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새로운 사업이 백곰사업이에요.
최원정: 백곰사업, 백곰이 미사일 이름인 거죠?
태상호: 맞습니다.
최원정: 그런데, 기자님, 저는 미사일 얘기하면서 가슴이 웅장해지긴 하는 데 미사일이 작구나. 처음엔 규모가 작았나 보죠.
태상호: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여기가 어디입니까. 실내 전시장 아닙니까? 모형이라서 축소해 놓은 거구요. 실물을 보러 가시죠. 얼마나 크고 웅장한지~
최원정: (전쟁기념관 야외) 이게 실제 크기 백곰인가요?
태상호: 백곰 자체가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백곰하고 똑 같은 나이키-허큘리스(Nike-Hercules-미국에서 개발한 사거리 140킬로미터 지대공 미사일로 백곰 미사일의 모델이 됨) 미사일입니다.
최원정: 제가 아까 전에 시시하다고 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위력이 어마 어마하네요. 미사일이라는 게 지금은 최첨단 과학기술들이 집약적으로 들어간 거잖아요.
태상호: 모두 최첨단 기술을 넣을 수 있는 것은 다 넣어서 만든 게 바로 백곰 미사일, 미사일은 바로 공학의 집성체다. 모든 공학이 미사일 안에 다 들어간다고 하더라구요.
최원정: 국내에서 우리 자체적으로 개발한 미사일, 대한민국 공군하고 딱 서있는데 위용에 압도당합니다. 멋 있어요.
허준: 처음 뵙는 분들이 항상 궁금해 하는 게 왜 백곰이에요?
이시원: 그러니까요, 그리고 이왕 이름 지을 거면 좀 더 멋있고 무섭게 지어야 되는 거 아녜요? 백곰하면 웬지 콜라 마실 거 같잖아요.
최태성: (이시원에게) 백곰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잖아요.
최원정: 그럼 어떤 이름을 추천하세요?
이시원: 호랑이! 청룡!
박태균: 곰도 불곰!
이시원: 하야치도 안찮아요.
최원정: 시원씨가 추천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백곰이냐고 저기가?
이시원: 백곰이 연상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최태성: 설명해 드릴게요. 왜 백곰이냐면 사실은 저 무기와는 별개에요. 전혀 관련이 없구요. 저 미사일을 만드는 연구원들이 그 당시 겨울이었나 봐요 눈이 엄청 와 가지고 미사일 만들어서 비행 연습하느라고 눈을 가득 뒤집어썼대요. 그게 마치 우리가 북극곰 같다 라고 해서 백곰이라고 지었다는 이름도 있구요. 당시 연구원들이 즐겨듣던 노래가 있었대요. 그 노래가 뭐냐면 가수 최희준의 나는 곰이다. 그런데 그 가사 어떤지 들려드릴 테니 한 번 들어보세요. 리듬~ 노래~ 나는 곰이다.
허준: 이런 노래가 있어~
------------최희준/가수: 와 하하하하~ 나는 곰이다 미련하다 못났다 놀려도 좋다 재주는 없다마는 할 것은 다 한다 태산이 높다 해도 못 오를 게 무어냐 험한 길 자빠져도 웃으면서 일어나 자빠져도 코를 다쳐도 울지 않겠다 산만보고 올라가는 나는 곰이다
최원정: 태산이 높다 해도 못 오를 게 무어냐 가사가 백곰 프로젝트에 딱 맞는데요.
최태성: 재주는 없다마는 할 것은 다 한다 (불가능해 보였던 미사일 개발 하지만 끝까지 매달렸던 연구원들),
이시원: 산만 보고 올라가는 나는 곰이다.
최태성: 그러니까
이시원: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최태성: 이제 어떻게 도움이 되십니까?
이시원: 그렇구나, 백곰이 맞는 것 같애요. 곰 노래 안 듣고 딴 노래 들었으면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땡벌이 되는 거예요.
최태성: 그러면 성공을 못 하겠네
허준: 그 노래를 하면 안 되지~ 나는 앞만 보고 간다.
태상호: 박정희 대통령이 특히 ADD 국방과학 연구원들한테 굉장히 많은 애정이 있었대요. 본인이 직접 가서 잘 하고 있나 하고 국방 무기에 대해서 무기개발에 대해서 많은 힘을 쏟았다고
허준: 그걸 애정이 있다고 표현한 건 부자연스런 표현이고 그걸 연구자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오신단다. 아이구~ 일동 탄식~ 아직 안 만들었는데~ 감시하러 오는 느낌이 들잖아요.
이시원: 중간평가 계속 여러번 하는 그런 느낌일 것 같애요.
태상호: 그럴 수 있는 게 1970년 대한민국에 대해서 모르셔서 그래요. 그때는 대통령이 어딜 가잖아요. 특별한 선물 같은 걸 줍니다.
최원정: 금일봉 같은
태상호: 아무나 못 구하는 시계 이런 걸 자개에 담아서 주기 때문에 오는 게 아주 싫지는 않았겠죠. 옛날에 대통령 시계를 딱 하나 차고 모션~ 이러면 경찰도 움칠하구 그래요.
최태성: 그건 미사일 개발에 진도가 나갔을 때 상황이죠. 진도가 안 나갔는데
최원정: 소총이야 조립하고 모방이라도 할 수 있지만 미사일은 금방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당장 미사일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 데 신참들이 어땠을까요?
태상호: 이거는 초등학생에게 미적분 풀라는 수준입니다.
최원정: 그렇죠?
태상호: 대부분 미사일 설계도를 대강 그리는 것도 일년 정도 걸린다고 그래요.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지대공 미사일 중에 패트리엇트 미사일 (Patriot missile-미국에서 개발한 지대공 미사일) 이라고 아시죠. 그걸 처음에 미국에서 개념 설계한 게 1969년 그리고 그걸 전력화한 게 1984년 입니다. 물론 지대공 미사일은 지대지 미사일 보다 복잡하긴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데 소총도 못 만드는 국가의 연구진들한테 4년만에 가져와라 아마 앞이 깜깜했을 겁니다.
이시원: 이건 mission impossible 중에 mission impossible 입니다.
최원정: 실제로 부담감은 엄청났었을 텐데 실제로 비밀 쪽지를 전달받은 분의 인터뷰가 KBS 자료실에 남아 있습니다.
--------------구상회 박사/1971년 당시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 거기에서 극비라고 해서 저를 줬어요. 손으로 쓰신 거에요. 사거리 200킬로미터 地帶地 誘導彈을 말이죠. 75년까지 만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1단계로, “자세한 것은 국방부를 통해서 문서로 시달될 것이다” 그리고 그거 (문서를) 소각해라. 미국이 그런 기술개발이라던가 모든 생산시설, 전문가들을 완벽하게 갖추고도 쓸 수 있는 무기를 만들려면 10년이 걸렸습니다. 배치까지 더군다나 유도탄(미사일)에 대한 생산 기반은 제로에요. 인력도 없고 전문가도 없고 그러니까 돈 밖에 없죠. 정부에서 줄 수 있는 건 그걸 4년 안에 만들라는 것은 참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죠.
이시원: 말도 안 되는 거였네요.
최태성: 황당한 걸 해냈단 말야 (그 황당한 일을 해낸 국방과학 연구소(ADD) 연구원들) 상상이 안가~
허준: KBS 사장님이 이번 편은 안보셨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극비(極秘)하고 역사저널 그날 시청률 10%, 2023년 이내
이시원: 그거랑 비슷해요
최원정: 지금 말이 안 된다는 거 이런 상황을 대통령이 몰랐었을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미사일 개발이 시급했던 다른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요?
박태균: 제일 중요한 건 요 시기에 주한미군 1개 사단 제7사단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계획이 제일 컸던 것 같애요 (1970.5.29. 경향신문 駐韓美軍 철수계획 착수)
최태성: 인원이 얼마쯤 될까요?
박태균: 그게 한 2만 명이 될 거에요(가장 큰 이유-1971년 주한미군 제7사단 2만명 철수), 문제는 한국군이 베트남 파병할 때 존슨 대통령이 한국군이 베트남에 있는 동안에는 주한 미군을 감축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혹시나 변화가 생기면 한국 정부와 의논을 하겠다. 그런데 전혀 의논 없이 그냥 7사딘이 나가 버린 거예요.
이시원: 요즘도 사실 미군 철수한다면 시끌시끌 하잖아요. 당시 갑자기 주한미군 2만명 철수는 굉장히 큰 잇슈 아닌가요?
허준: 단순히 2만명이 아니라 무기를 포함한 제7사단 전력이 빠지는 게 문제였죠.
최태성: 다 갖고 철수해요. 엄청난 전력이죠.
박태균: 닉슨이 대통령이 되고 보니까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하느라고 돈을 너무 많이 쓴 거에요. 곡간이 비어 있는 거에요. 안 되겠구나 결국 괌 독트린 (닉슨 독트린/1969년-미국 대통령이 괌에서 발표한 대아시아 정책)을 발표하면서 미국은 앞으로 우방 국가가 스스로 자기 방어의지를 가지고 지키는 나라에만 도와 주겠다. (닉슨 독트린 내용 中-미국은 직접적 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 개입을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국가들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 한다), 그렇지 아닌 나라는 도와 줄 수 없다 하면서 베트남에서의 단계적 철수를 괌에서 선언하는데 이게 괌 독트린인데 괌 독트린 하고 나서 1968년 여름에 박정희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는 데 그때 두 사람 대화록을 보면은 주한미군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언급을 안 해요.
허준: 제일 중요한 거잖아요.
박태균: 박정희 대통령도 궁금했는데 어쨌든 우리는 지금 베트남에도 우리 군대가 가 있고 안보가 중요하니까 그 얘기가 안 나와서 회담이 끝나고 나서 우리나라 모든 신문에 한국은 예외다. 한국은 괌 독트린으로부터 예외다. 그런데 갑자기 70년 3월에 일방적으로 닉슨 행정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1개 사단철수 한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거죠. 그리고서는 71년에 철수를 해버린 거에요. 사전에 통보도 안해주고 존슨 대통령이 한 약속도 안 지키고 이렇게 되니까 야~ 이거 안 되겠구나. 이때 처음 나온 얘기가 自主國防입니다. 상황 자체가 이렇게 돌아가니까 우리도 우리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國防力을 가져야 된다. 이게 굉장히 강하게 나온 거구 어떻게 보면 ADD가 만들어진 아주 중요한 배경입니다.
최원정: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미국 안보에 있어서 한반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애요. 애치슨 라인 (1950-미국 국방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 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면서 북한의 남침으로 6-25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이 된 거잖아요. 비슷한 역사가 반복되고 있고
허준: 그런 기대를 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애요. 한국민들이 우리의 영원한 우방? 自主國防이란 단어는 우리 국민한테는 대대손손 영원히 남겨둘 명언이에요.
최원정: 웬지 허준씨 집 가훈이 자주국방 같애요.
허준: 저는 아이들 옷 살 때도 자주색이 아니고 국방색입니다.
일동: 폭소
박태균: 그래도 강대국 중에 제가 보기에는 제일 신의가 있는 나라가 미국이에요. 미국인데 문제는 이 상황이 굉장히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황스러운 것이고요. 미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렇게 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의지가 서로 안 맞았던 시기예요. 미국은 전비를 많이 써서 줄여야 되는 입장이니까 이 정도면 너희들 알아서 해야 되는 것 아냐 우리 군대가 베트남에 가 있는 것도 원래는 주한미군이 빠져서 베트남으로 가는 것 막을려고 가 있었던 거구 그래서 존슨 대통령이 약속해 줬는데 갑자기 빼가니 이건 뭐지 이런 상황이 되어 버린 거죠
허준: 그럼 우리도 똑같이 월남에 있는 군인들한테 3만 명 돌아와
박태균: 돈이 들어오니까~
최태성: 거기서 우리는 돈을 받아야지 그런데 지금 말씀하셨는데 이런 것도 있지만 개인적인 私感도 있었다는 애기도 있었다고 그러더라구요.
허준: 私感이요?
최태성: 네, 닉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을 썩 좋아하지를 않은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면 1966년에 닉슨이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어요.
최원정: 그 때는 대통령이 되기 전이죠.
최태성: 그 때는 닉슨이 대통령도 주지사도 떨어졌고 그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러 온 거에요.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투자를 했어야 했는데 밥도 같이 안 먹고 커피 한 잔 마시고 그냥 보내 버린 거예요. (박정희 대통령에게 만찬을 청했지만 커피 한 잔으로 끝나 버린 만찬), 근데 2년 뒤 1968년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이 된 거야.
이시원: 그러면 뒤 끝이 남죠.
허준: 대통령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최태성: 그렇지~ 그렇지~
최태성: 근데 1969년 8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닉슨 대통령을 만나러 미국에 갔네. 그랬더니 닉슨이 어디로 불렀냐 하면 그때 닉슨이 마침 자기 대학 동문회 모임이 있는 호텔에 묵고 있었나봐요 (고향 근처 동문회가 있던 호텔로 초청), 그리로 오라고 한 거예요.
이시원: 호텔로 오라구요.
최원정: 일국의 국가 원수인데 일정을 따로 잡아야지 뭐하는 겁니까.
최태성: 게다가 중요한 건 뭐냐면 거기서 밥을 먹어야 될 것 아네요. 밥을 먹으면 주로 만찬은 각료들하고 먹어야 될 것 아녜요. 그냥 친구들과 같이 밥 먹게 하고 합석을 시킨 거예요.
일동: (놀라면서 어이없음) 합석을 시켰다구요?
이시원: 이건 진짜 의도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무시한 거예요.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압박감이 굉장히 심했을 것 같애요. 낙슨 독트린 때문에 혼자서 스스로 방어도 해야 되지~ 미국하고 관계는 점점 틀어지고 있지,
내레이션: 1971년 12월,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한 달 뒤에 가진 연두기자회견에서 한미동맹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박정희 연두기자회견/1972년: 김일성이가 만일 무슨 구실을 잡아 가지고 전쟁을 도발했다. 자~ 미군은 다 돌아갔다. 한미방위조약도 없어졌다. 미국이 군대를 보내 가지고 그걸 막아 주겠냐.
태상호: 근데 이것 뿐만이 아니었어요. 미국이 자국의 탁구선수들을 중국에 보냅니다.
최원정: 핑퐁외교
태상호: 핑퐁외교가 시작된 건데 그 전까지는 우리가 舊소련을 뭐라고 했습니까. 舊소련을 鐵의 장막, 중국은 죽(竹)의 장막 이라고 불렀잖아요. 상호간의 교류가 없었는데 이제 핑퐁외교가 벌어진 거예요. 그전까지 미국은 중국을 쳐다 보지도 않았어요. 닉슨 독트린 이후로 양국의 교류가 시작이 된 거죠. 1972년 2월 양국의 지도자들이 만나서 회담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무역제한조치가 풀려요.
이시원: 이거 진짜 동네 형이 야~ 재랑 놀지마. 나랑 절대 원수야 절대 놀지마 해놓고 안 놀고 있는데 뒤로 가서 악수 한 거잖아요.
최원정: 우리 입장에서는 잘못된 만남인 거예요.
박태균: 그게 바로 닉슨이에요. 그런데 박정희 정부도 한편으로는 자주국방을 하면서 무기개발 쪽으로 가는 거구요. 다른 한편으로는 1973년 6.23선언을 발표를 해서 우리도 북한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들하고 수교를 맺을 수 있다 라고 하는 원칙을 바꾸면서 소련한테는 특히 손짓을 하게 됩니다. (6-23선언/1973년-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문호개방을 선언함), 1973년 소련 모스크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한국 선수단을 파견하고
허준: 우리나라도 제대로 된 외교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건 국가적인 생각이고 우리나라 국민으로 생각하면 뉴스에 간첩이 내려와서 우리나라 국민을 공격했다. 대통령 목을 따러 왔다 이런 이야기가 들여오고 미국은 중국이랑 손 잡고 이런 뉴스가 나오면 북한이 또 쳐들어오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거 아녜요?
이시원: 긴장도가 자꾸 올라가고 진짜 미사일 개발이 필수적인 국가산업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애요. 근데 그때 박 대통령께 불러드리고 싶은 노래가 있네요. 노래~ ”오빠 오빠 오빠 돈 많아? 오빠 오빠 오빠 기술있어?” 없잖아요. 미사일 제작비용 엄청나던데~개발비용 그 돈이 어디서 나요? 당시에 그 돈이 어디서 나요?
-------------(동영상), 요새 온라인상에서 핫한 댄스 영상: 오빠 오빠 오빠 돈 많아? 오빠 오빠 오빠 차 있어? 오빠 오빠 오빠 집 어디야?
패널 일동: (일단 웃자) 폭소
이시원: 정말 돈이 어디서 나와요?
최원정: 근데 우리가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동안 봐왔잖아요. 돈과 기술이 없어도 우린 뭔가 해냅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뭔가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이상용/방송인: (스튜디오에서),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장병 여러분, 뽀빠이 이상용입니다. 1968년 청와대 앞까지 무장공비가 왔다 갔다는 거 아시죠? 얼마나 놀랬겠어요. 전 지금도 가슴이 벌렁벌렁 합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누굽니까 그렇다고 해서 뒤로 물러설 국민이 아닙니다. 이럴수록 일치단결해서 똘똘 뭉쳐서 밀고 나가는 게 우리 국민입니다. 맞습니까?
패널 일동: 맞습니다.
이상용: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충성!! (거수경례)
패널 일동: (거수경례) 충성!!
최태성: (방위성금 상자를 들고 옴) 자~ 경례만 하지 마시고요
이상용: 이제 우리 국민들은 여기까지만 말씀 들여도 빠릅니다. 조금씩 넣으세요
최원정: 돈 넣으세요
이시원: 돈 넣어야 돼요? 진짜로 넣어야 돼요 지갑을 두고 왔는데~
최원정: 지갑이 없어서 못 넣겠습니다.
이상용: 방위성금 함인데요, 수표를 넣어도 괜찮아요. 묻지 말고 그냥 넣으세요.
박태균: 반지라도 넣을까요?
최태성: 좋아요, 그냥 넣으세요.
이상용: 여러분,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북한이 언제 쳐들어온다고 얘기하고 쳐들어 옵니까? 그냥 옵니다. 그래 우리는 준비를 해야 됩니다. 우리가 비행기 만들어야지요 무기 만들어야지요. 우리는 지금 無器가 없습니다. 無자 할 때 없을 無자를 썼습니다. 이럴수록 우리가 겨우 한다는 게 가발~ 이게 전부인데 비행기 만들어야죠. 배 만들어야죠. 폭탄 만들어야죠. 할 수 없잖습니까. 우리가 이럴수록 똘똘 뭉쳐서 十匙一飯으로 하나씩 이라도 모여서 힘을 합쳐서 힘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래서 온 국민이 참여했던 방위성금 모금운동), (동영상-방위성금 모금 패션쇼장), 성금을 모우려고 별 걸 다했습니다. (동영상-패션쇼 중 모금함을 들고 다니는 아이들), 이 분들은 누구? 어르신들이 지금 거리로 나오셨습니다. 병을 모우고 빈 상자와 폐지를 모우시는 어르신들,
최원정: (우리가 바로 방위성금 폐품 수집단!), 남녀노소가 없었군요.
이상용: 어머니들도 길에 나와서 성금을 모금했습니;다.
최태성: 남대문 쪽이다.
최원정: IMF 때 금 모우기 운동이 생각나요.
허준: 진짜 눈물 난다. 여기는 서울시내 한 복판이다.
이상용: 당시 신인 탤런트 故김자옥씨입니다. 연예인들이 지금 명동에서 방위성금을 걷고 있습니다. 아무 건물이나 막 들어갑니다. 약국도 들어가고 흔쾌히 성금을 내는 시민들~
최태성: 시원씨도 이 당시 있었으면 아마 했을 거예요.
이시원: 그러게요.
이상용: (청와대에서) 학생들이 모여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성금을 전달합니다.
뉴스: 6.28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 대표들로부터 방위성금을 헌납받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부산 남중학교 유승문군 등 77명의 학생 대표들은 전국의 학생과 교직원들이 모운 방위성금 7억 5천 9만원을 헌납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학생 대표들에게 액수도 크지만 금액보다도 국민학교 학생에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생들이 국토방위를 위해 모운 돈이니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기 위한 정성 어린 돈으로 생각하고 그 뜻이 헛되지 않도록 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태성: 코 묻은 돈으로 7억원을~
이상용: 제가 모금을 했었습니다. 제가 ROTC 탱크 소대장 출신인데 제가 모금운동했습니다. 그 당시 여의도 KBS 앞에서 왔다 갔다 했었는데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몰라서 돈 요만큼 가지고 헬리콥터 사세요~ 하고 돈 낸 사람도 있고 돈 대신 쌀로 낸 사람도 있어요. 어린이도 구멍가게 안 가고 껌 살 돈으로 우리 준 적도 있고 이렇게 우리 국민은 대담합니다. 이렇게 작은 것이 큰 것이다. 저도 작지만 큽니다. 쓸데 없이 크느니 알맞게 작자. 돈들 내셨어요?
박태균: 간첩 잡기 위해서 헬기도 사야 되고 실제로 그 당시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헬기와 구축함 요청을 하기는 합니다. 근데 베트남 전쟁 때 제대로 안 오잖아요. 우리가 돈을 벌어서 사야 되겠다. 근데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런 성금을 모우는 캠페인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 알려진 것으로는 68년 2월 정도부터 반공성금이라고 해서 걷기 시작을 하고 이게 1973년도 들어가면서부터 방위성금이 되었다는 건데 사실 저희가 학교에서 어렸을 때 방위성금 냈던 기억이 있지 않는가요.
허준: 전 안 냈어요.
이시원: 저도 안 냈어요.
최태성: 제가 반장이었기 때문에 제가 걷었어요.
최원정: 위문 편지는 썼어도 직접 돈을 낸 적은~ 아무튼 反共 이런 건 두 눈 부릅뜨고 열심히 했어요.
최태성; 포스터도 그려가면서 돈도 걷고 그랬어요.
허준: 이걸 국가적으로 방송에서도 하고 그런 거예요?
최태성: 엄청났죠.
이상용: 굉장했습니다. 돈 없는 사람은 할 수 없지만 이렇게 돈도 중요하지만 힘 마음 정신을 모았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우리 국민 대한민국입니다. 파이팅!!
최원정: 이 정도의 전폭적인 국민의 지지라면 백곰 프로젝트는 수월하게 할 수 있었겠네요.
태상호: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또 하나 있어요. 1970년 1월에 북한 해안에 설치되어 있는 신무기가 포착이 돼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장비는 당시 舊소련의 프로그(frog missile-사거리 60킬로미터의 소련의 지대지 미사일) 미사일입니다. .사정거리는 60킬로미터 정도, 지금 기준으로 아주 길지 않지만 그래도 60킬로미터고 그 안에 화학탄과 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어요. 만약에 북한 전방지역에서 서울로 그 무기를 투사를 하면 2분 안에 떨어집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 무기를 발사하면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수단도 없었습니다.
이시원: 서울이 불바다 되기 일보 직전인가요?
최원정: 일촉즉발의 도발에 대한 상황, 미사일 개발이 정말 시급한 데 이것도 북한 몰래 미국 몰래 주변국을 살피면서 해야 돼잖아요. 어찌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이것을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진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직접 들어보는 시간 가져볼까요?
-----------이광용/아나운서: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미사일 개발에 함께 하셨던 국방과학연구소 前소장 안동만 박사님입니다. 여러분,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안동만/前국방과학연구소 소장: 처음 1973년에 들어가니까 미사일은 한다고 그러는데 구체적인 내용도 안 가르쳐주고 그 다음에 우리나라에 샘플도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미사일 개발계획을 세우라고 그러는데 대학 갓 졸업하고 KIST에 일년 있다가 간 연구원이 어떻게 어떤 미사일을 할 건지에 대해서 참 막연했었어요.
이광용: 시쳇말로 맨 땅에 헤딩하신 거예요.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안동만: 그때 당시 SALT 협정 (전략무기제한협정-1970년대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전략무기제한협정) 이 발효함에 따라서 미국의 군수산업들이 문을 닫는 상황이었는데 그때에 바로 맥도날드 더글라스에서 나이키 허큘리스를 200킬로미터까지 연장을 해줄게 하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 대신에 돈은 2000만불 주면은 2년 동안에 설계를 해주겠다. 설계뿐 아니라 미사일 설계를 하면은 저기 백곰 밑에 부분이 동굴동굴한 게 네 개가 보입니다(미사일 하단의 1단 추진기관), 1단 추진기관은 미사일을 올려주는 역할을 하는 건데~
이광용: 지금 로켓과 비슷한 거죠.
안동만: 그렇죠, 올리고 나면 4초 만에 1단 추진체가 다 탑니다. 그 대신에 미사일 위에 있는 부분이 폭탄도 있고 2단이라고 하는데 2단은 빨리 갈 필요 없이 천천히 태워가면서 목적지까지 가도록 하는데 가는 방법이 유도조정으로 레이더로 쏘아줘 가지고 통신전파가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이광용: 여기로 가라 저기로 가라?
안동만: 그렇죠, 그 다음엔 저리로 가라 계속 지시합니다. 그러면 추진체 내에 있는 컴퓨터가 계산을 해서 날개를 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최태성: 백곰이 그게 돼요?
안동만: 백곰도 그게 됩니다 (백곰 미사일=유도탄)
이광용: 지금까지 집중 안 하셨어요? 그게 돼요, 그게 됩니다. 이게 우여곡절이 있어야지 스토리가 재미나죠.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요. 모두 국산화된 미사일을 처음 쏘아 올릴 때에 그 마음은?
안동만: 그래서 1978년 5월 로켓 모타 라는 걸 네 개를 묶었는데 다 해체되고 위 부분도 계속 날라가야 되는 데 못 날라가고 붕~ 떨어지고 말았어요.
이광용: 실패한 거네요?
안동만: 완전히 박살나는 실패를 한 번 경험을 했어요.
이시원: 박정희 대통령께서 오셔 가지고 항상 격려를 했다 하시는 데 받는 입장에서는 이게 격려가 아니거든요.
안동만: 아마 윗분들은 스트레스 엄청 받았겠죠. (박 대통령 방문 직원 격려-악수 사진등장),
최원정: 사진 있다.
최태성: 박 대통령과 악수하는 연구원이 본인이세요?
허준: 안 소장님 같은데?
안동만: 네, 이게 접니다.
허준: 많이 얼어 계시는 데요.
안동만: 바짝 얼 수 밖에 없죠. 대통령 참석 행사 네 번에서 두 번 실패하고 두 번 성공해서 이제는 행사해도 되겠다. 9월 달로 행사 날자를 잡고 그런데 미사일 발사 올라 가기 전에 시험발사 20초 동안에 카운트 다운을 하는 데 그 20초가 一刻이 如三秋 라고 똑 같아요. 그뿐이 아니고 쏘고 난 뒤 4초 만에 1단이 분리되고 2단으로 가서 8만 피트까지 올라가는 데 딱 성공하는 순간에 전부들 와~ 하고 박수치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허준: 느낌이 성공이다가 아니라 살았다
이광용: 진짜 생생한 뒷 얘기예요. 성공의 순간, 궁금하시죠?
뉴스: (동영상), 충남 안흥 발사시험장/1978년 9월 26일: 우리는 드디어 誘導彈 개발에 성공했다. 1978년 9월 26일, 유도탄 종합시험 기지에서는 自主國防의 새 기원을 이룩하는 한국형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세계적 관심을 불러 일으킨 장거리 유도탄은 동북아시아의 현존 세력균형의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관측을 불러 일으키면서~
내레이션: 대한민국 최초의 미사일 백곰, 5초 4초 3초 2초 1초 발사! 1978년 9월 26일, 백곰은 발사 소리에 맞춰 불기둥과 함께 솟아 올랐다. 사거리 180킬로미터 대한민국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발사는 푸른 상공을 날았다. 우리나라가 세계 7번 째로 탄도 미사일 보유국이 된 것이다. 충남 안흥시험장 언덕에서 이를 지켜본 박정희 대통령, 그토록 바라던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염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미사일 발사-벅차 오르는 성공의 순간)
일동: (박수) 멋있다.
최원정: 고로에서 쇳물이 나왔을 때 짜릿한 순간이었을 것 같애요.
이시원: 푸른 상공을 가르는 저 미사일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네요.
이광용: 안동만 소장님의 얘기를 들으니까 이 백곰 프로젝트의 성공에는 우리 ADD 연구진들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 꺾이지 않은 마음이 있었어요,
안동만: 백곰이 그런 것에서 가장 기본이 뭐냐 하면 전부 내가 만들어야 된다 수입해 가지고 포장만 하는 게 아니고 전부 우리가 만들어서 쓰는 것에 백곰의 기본적인 정신이 있습니다. 근데 미국 것을 갔다 쓰면서 백곰 다음에 미사일을 개발 할 때에 한 번 혼이 났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 마음대로 생산을 못하게 됐어요. 왜냐하면 그 부품이 미국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생산해서 쓸려면 너희가 미국한테 다 까발려라 그래서 실제로 미국에서 미사일 포대로 와서 일일이 시찰까지 했었어요. 그때 우리는 모든 걸 미국에 의존하면 안 되겠다. 모든 부품을 전부 국산화로 시작을 했고 그게 25년 지나면서 지금은 완전히 국산화가 돼서 바로 해외로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K-방산의 초석을 다지게 된 계기,
이광용: 미사일은 우리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의지가 아니었나. 오늘 뜻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국방과학연구소 안동만 소장님 고맙습니다.
태상호: 보시면 궁금한 게 있으시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원래 원하는 200킬로미터였는데 백곰 미사일은 사거리 180킬로미터로 20킬로미터가 줄어든 이유는 대한민국이 독자적으로 미사일을 개발한다. 그리고 그런 원천기술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라는 첩보가 미국에 전해졌어요.
최태성: 딱 걸렸네.
태상호: 그래서 미국 정부가 ADD를 방문합니다. 그래 가지고 200말고 180으로 사정거리를 줄이고 탄두의 문제도 500킬로그램까지 가지 말고 454킬로그램으로 줄여라 라고 제안을 했는데 압박이죠.
최원정: 미사일 개발이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미사일 개발 제한조치를 하는 거잖아요?
박태균: 그렇다니까요, 백곰을 공개적으로 하자마자 일본이나 소련 같은 경우는 바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죠. 그 당시에 아사히 신문은 핵하고 연결되는 것 아냐 하는 식의 보도가 나갔다 라는 거예요. 이미 76년, 77년쯤에 한국정부가 중수로를 구입한다 이런 얘기가 국내에는 안 알려졌지만 해외 신문에서는 조금씩 나기 시작을 했었거든요.
최원정: 대통령이 핵개발과 연결시키겠네 하는 계획이 애초에 있었을까요?
태상호: 많은 느낌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랬던 것 같애요. 그리고 증언이 있습니다. 개발에 참여했던 故홍영식 교수가 말한 바에 따르면 최종 목표는 핵탄두 라고 말은 안 하였지만 핵탄두 같은 것을 운반하는 로켓을 개발하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최종 목적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고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도 탄두를 교체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는 더 의심스러운 게 아까 백곰 미사일 보셨잖아요. 나이키-허큐리스와 똑같이 생겼거든요. 나이키-허큐리스가 탄두 장착이 가능한 미사일이에요.
이시원: 그래서 일부러 그것을 찍어서 해줄 수도 있겠네요.
태상호: 그렇죠, 만약에 우리가 핵 탄두를 집어넣을 수 있는 미사일을 우리가 개발한다. 그럼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 거죠.
최태성: 이런 것 때문에 음모론, 이 시대를 배경으로 소설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고 있습니까. 실제로 국방과학연구소를 김종필 총리가 방문을 해요. 방문해서 다과회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대요.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 내가 한 사람에 대해서 일억씩 주겠다. 이런 얘기를 했대요.
이시원: 저두 이번 저의 시청률이 6%가 넘으면 천만원씩 드릴게요.
최원정: 잠깐만~ 이시원씨 진짜로 지금 몇 명이야, 6천 만원
박태균: 약간 더 높여요 7~8%로
허준: 법적 구속력이 있는 발언입니까?
이시원: 저도 우리 역사저널 그날의 성공을 원하듯이 박 대통령도 진심이었다는 거죠.
허준: 얼굴 뻘게 지셨어.
-----------(동영상), K9 자주포, 천궁-11, K2 전차 등의 국산무기를 수출, 2022년 방산수출액 173억 달러 (약22조 8000억원), 사상 최대 기록달성, 백곰에서 시작한 대한민국의 방위산업, 50여 년만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우뚝 선 K-방산!
박태균: 미래 먹거리의 하나다 이런 얘기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스스로 외부로 부터의 여러 문제를 지키기 위한 억지력으로서의 우리를 발전시키면서 다른 나라의 방위력 강화, 평화에 기여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산업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시원: 진짜 오늘 대한민국의 방위산업의 역사를 되돌아 보았잖아요. 한반도의 역사와 닮은 게 있어요. 시조는 곰이야 웅녀와 백곰~
허준: 탱크-자주포 있잖아요. 불곰 프로젝트!
태상호: 지금 우리가 최근 뉴스를 보면 군의 초급간부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들에게 대우도 잘 해주고 방산무기를 만드는 연구원들이 가끔 가다 실패합니다. 백곰 사업도 몇 번 실패했었잖아요. 자신들이 열심히 해서 실패한 건 우리가 안아주고 격려해 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공영방송 50주년 기획- 잘 살아보세 시리즈로 쭉 진행해 왔는데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어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간을 통해서 긍지를 찾았다고나 할까요. 그런 시간이었죠.
이시원: 다들 우리나라의 사업들 보면 처음엔 미약했지만 끝엔 창대 하잖아요. 지금 찬란하지 않다고 해서 내 자신을 과소평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허준: 딱 저의 아버님 세대가 30, 40, 50년대생들이시잖아요. 지금으로 치면 할아버지들, 할머니들, 30,40,50년대생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대한민국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최태성: 누가 저희한테 혹시 기적을 믿으십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들여다 보시라 그것이 곧 기적 그 자체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최원정: 모두가 진정 잘 사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이번 주 시리즈 마무리 하겠습니다. 함께 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공영방송 50주년 기획-잘 살아보세 404회 ⑤ (작전명 백곰), 미사일을 개발하라 에서 정리).
요약
①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 북한괴뢰 무장공작단이 어둠을 타고 감히 서울까지 와서 난동을 부렸다. 급거 출동한 군경 수색대는 포위망을 폈으며 북악산을 깃점으로 북한산 비봉 노고산 등 북쪽으로 쫓기는 살인배들을 잡기 위해~ 생포된 김신조는 우리 31명의 임무는 박정희 모가지 뗄 임무고~ (계속) 생포된 무장간첩 김신조가 죽은 일당들을 하나 하나 확인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틀 뒤인 1968.1.23.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됐다, 1968년 10월 30일 경상북도 울진과 삼척에 60여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해서 양민을 학살하고 난장판을 벌인다는 급보에 접하자 당국은 을종사태를 선포했으며 1969.06.12 흑산도 간첩선 침투, 1969.12.11 KAL YS-11기 납치사건, 1970.06.05 해군방송선 납치사건,
② 서울에서 부산에서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민과 학생 그리고 남녀노소 모두가 무찌르자 공산도배 타도하자 김일성을 외치면서 불길처럼 뛰쳐나왔다. 날로 고조되는 한반도의 긴장감 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2월 27일 (극비極秘) 비밀메모를 전달한다. “1975년까지 사거리 200킬로미터의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 라는 내용이었다. 요거 쓴 때가 71년도니까 4년만에 이걸 개발하라는 건데 그래서 탄생한 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우리 기술로 만든 미사일 백곰이다,
② 지금의 우리 국가 위상과 1970년대에 대한민국의 국가 위상은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세계 10위권에 군사대국이고 우리가 눈치 안 봐도 되었다. 그땐 안 그랬다. 아무튼 비밀리에 쪽지명령을 하달한 건데 그 내용을 보니까 기한이야 우리가 못 박을 수 있지만 사거리까지도 딱 200킬로미터로 정한 이유는 그때 당시 主敵 개념이 확실했다. 우리의 제일 적은 북한 평양에 있다. 평양을 타격 해야 하는데 사거리가 안 나오면 이게 우리의 전략무기(전쟁수행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군사기지, 산업시설 등의 목표를 공격하는 데 쓰는 무기)인데 전략무기를 휴전선까지 부쳐야 된다. 근데 휴전선에 우리의 전략무기를 부치면 적의 공격무기에 쉽게 파괴 당할 수 있다. 그래서 최대한 서울 이남 서울 남부지역이나 남양주 축선 정도에서 발사할 수 있게 할려면 200킬로미터 정도의 사거리가 나와야 한다. 적의 심장부를 때릴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였다. 서울-평양간 직선거리 195킬로미터, 그 당시에 사거리 200킬로미터 미사일 개발하라 그게 나름 어려운 기술개발이었다. 그걸 4년만에 개발하는 건 불가능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총도 못 만들었다. 총도 못 만들었는데 지금 미사일을 만든다는 거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나라 전군이 가지고 싸울 수 있는 무기 중에 우리가 만든 무기는 하나도 없었다. 그 당시 우리의 총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쓰던 것들을 받아야 새로운 총들이 들어오는 때였다. 이때 까지만 해도 M1소총을 계속 썼다. M1소총 (미국의 半自動 小銃으로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서 주로 사용)은 2차 세계대전, 6.25 한국전쟁 때 썼던 소총들을 이때도 썼고 사실은 80년대도 썼다. 80~90년대 예비군 훈련에 그때도 M1소총을 썼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미사일을 만들라. 잘 살아보세 시리즈의 마지막을 미사일로 한 사실은 웬만한 기술로는 만들기가 힘들고 웬만한 재료 가지고는 안 된다. 무기라는 건 최고의 정밀 집약적인 부품들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70년대 중화학공업을 하면서 國防産業을 한다라는 것 이게 잘 살아보세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었다. 거의 구석기 시대에 휴대폰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이게 성공하기만 한다면 우리나라가 그만큼 한 단계 도약하는 것이다. 이것은 꼭 해야 되는 것이다.
③ 1970년대에 地帶地 미사일을 자국에서 개발해서 제대로 전력화한 나라는 6개국 뿐이었다. 근데 한국이 7번째다. 백곰계획이 성공을 해서 7번째 백곰 미사일을 가지면 한국은 세계 7번째 국가가 되는 거다. 地帶地 미사일은 말 그대로 땅에서 발사를 해서 땅의 목표를 맞춰서 무력화 시킨다. 地帶空 미사일은 땅에서 발사를 해서 공중에 있는 표적을 맞춰서 무력화시킨다. 미사일은 艦對地도 있고 空對地도 있다. 1970년대 초반 대한민국 방위산업은 암울한 시기였다. 자국산 총기 하나 만들지 못한 국가였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ADD)를 방문해 첫번째 사업이 바로 번개사업이다. 1970년 8월 6일 국방과학연구소가 개소를 한다. 71년 11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명령한다. 각종 총기를 12월 30일 까지 박격포, 대전차 지뢰 등 무기를 국산화 할 수 있게 試製品을 만들어서 가지고 와라. 번개사업이란 단기간에 모든 걸 너무 빨리 하다 보니 번개불에 콩 구워먹는다는 이름이 부쳐진 사업이다. 1971년 국방과학 연구소는 제1차 번개사업으로 소총, 박격포, 수류탄 등 모두 7종의 무기 試製品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④ 대한민국 방위산업 자립의 신호탄을 쏜 역사적인 총 1호 試製品, 이 총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 국군이 자국산 소총으로 무장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카빈 M2 試製品 製作番號 1番 韓國自動車工業協同組合員 聯合生産 번개사업이 진행되면서 試製品이 만들어지고 바로 이런 총들이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완전히 국산화해서 시제품을 가져 오라고 했기 때문에 에피소드를 보면 도면도 없이 逆設計를 해야 되니까 설계자들은 미친듯이 설계를 하고 일부팀들은 미군부대 앞을 돌아다니면서 관련 부품에 참고할 수 있는 게 없나 찾으려 다녔다. 그만큼 만들기 힘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첫번째 시험 삼아서 내린 명령을 기일 전에 시제품을 만들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뭐라고 했느냐면 11월 15일 받았으니까 12월 24일날 시험사격을 했다. 시험 사격에서 우수하게 통과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거다. 번개사업이 성공하면서 대통령이 또 다른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탄생한 새로운 사업이 백곰사업이다. 백곰은 미사일 이름이다. 백곰 자체가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백곰하고 똑 같은 나이키-허큘리스(Nike-Hercules-미국에서 개발한 사거리 140킬로미터 지대공 미사일로 백곰 미사일의 모델이 됨) 미사일이다.
⑤ 미사일은 최첨단 과학기술들이 집약적으로 들어간다. 모두 최첨단 기술을 넣을 수 있는 것은 다 넣어서 만든 게 바로 백곰 미사일, 미사일은 바로 공학의 집성체다. 모든 공학이 미사일 안에 다 들어간다. 국내에서 우리 자체적으로 개발한 미사일, 왜 백곰이냐면 사실은 무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미사일을 만드는 연구원들이 그 당시 겨울이었다 눈이 엄청 와 가지고 미사일을 만들어서 비행 연습하느라고 눈을 가득 뒤집어썼다. 그게 마치 우리가 북극곰 같다 라고 해서 백곰이라고 지었다는 설도 있고 당시 연구원들이 즐겨듣던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가 가수 최희준의 나는 곰이다. 그 노래 가사는: “와 하하하하~ 나는 곰이다 미련하다 못났다 놀려도 좋다 재주는 없다마는 할 것은 다 한다. 태산이 높다 해도 못 오를 게 무어냐 험한 길 자빠져도 웃으면서 일어나 자빠져도 코를 다쳐도 울지 않겠다 산만보고 올라가는 나는 곰이다” 태산이 높다 해도 못 오를 게 무어냐 가사가 백곰 프로젝트에 딱 맞다. 재주는 없다마는 할 것은 다 한다. 불가능해 보였던 미사일 개발 하지만 끝까지 매달렸던 연구원들, 산만 보고 올라가는 나는 곰이다.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나는 앞만 보고 간다.
⑥ 박정희 대통령은 특히 ADD 국방과학 연구원들한테 많은 애정이 있었다. 본인이 직접 가서 잘 하고 있나 하고 국방 무기에 대해서 무기개발에 대해서 많은 힘을 쏟았다. 소총이야 조립하고 모방이라도 할 수 있지만 미사일은 금방 어떻게 할 수 없다. 당장 미사일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 데 신참 연구원들이 어땠을까. 이거는 초등학생에게 미적분 풀라는 수준이다. 대부분 미사일 설계도를 대강 그리는 것도 일년 정도 걸린다. 우리가 잘 아는 지대공 미사일 중에 패트리엇트 미사일 (Patriot missile-미국에서 개발한 지대공 미사일) 이 있다. 그걸 처음에 미국에서 개념 설계한 게 1969년 그걸 전력화한 게 1984년 이다. 물론 지대공 미사일은 지대지 미사일 보다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데 소총도 못 만드는 국가 연구진들한테 4년만에 가져와라다. 이건 mission impossible 중에 mission impossible 이다. 구상회 박사는 1971년 당시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이었다. 극비라고 해서 메모를 받았다. 손으로 쓴 거다. 사거리 200킬로미터 地帶地 誘導彈을 75년까지 만들라고 했다. 처음에는 1단계로, “자세한 것은 국방부를 통해서 문서로 시달된다” 그리고 그 문서를 소각해라. 미국이 그런 기술개발이라던가 모든 생산시설, 전문가흫 완벽하게 갖추고도 쓸 수 있는 무기를 만들려면 10년이 걸렸다. 더군다나 한국은 유도탄(미사일)에 대한 생산 기반은 제로다. 인력도 전문가도 없고 정부에서 줄 수 있는 건 돈 밖에 없다. 그걸 4년 안에 만들라.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다. 그런데 황당한 걸 해냈다. 그 황당한 일을 해낸 국방과학 연구소(ADD) 연구원들이다.
⑦ 지금 말이 안 된다는 거 이런 상황을 대통령이 몰랐었을 리가 없는데 이렇게 미사일 개발이 시급했던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요 시기에 주한미군 1개 사단이 본국으로 철수계획, 1970.5.29. 경향신문 駐韓美軍 철수계획 착수, 1971년 주한미군 제7사단 2만명 철수, 문제는 한국군이 베트남 파병할 때 존슨 대통령이 한국군이 베트남에 있는 동안에는 주한 미군을 감축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혹시나 변화가 생기면 한국 정부와 의논을 하겠다. 그런데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전혀 의논 없이 7사딘을 그냥 빼가 버렸다. 단순히 2만명이 아니라 무기를 포함한 제7사단 엄청난 전력이 문제였다. 닉슨이 대통령이 되고 보니까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서 돈을 너무 많이 써서 곡간이 비었다. 안 되겠다. 결국 1969년 괌에서 대아시아 정책을 발표한다. 미국은 앞으로 우방 국가가 스스로 자기 방어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도와 주겠다. 미국은 직접적 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 개입을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국가들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그렇지 아닌 나라는 도와 줄 수 없다. 베트남에서 단계적 철수를 괌에서 선언하였다.
⑧ 괌 독트린 발표 후 여름에 박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는 데 그때 두 사람 간에 주한미군에 대한 얘기가 없었다. 박 대통령도 궁금했는데 어쨌든 우리는 지금 베트남에도 우리 군대가 가 있고 안보가 중요하니까 회담이 끝나고 나서 우리나라 모든 신문에 한국은 괌 독트린에서 예외다. 그런데 70년 3월에 닉슨 행정부에서 일방적으로 박 대통령에게 1개 사단철수한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거다. 그리고 71년에 철수를 해버린다. 사전에 통보도 없이 존슨 대통령이 한 약속도 안 지키고 이렇게 되니까. 이거 안 되겠구나. 이때 처음 나온 얘기가 自主國防이다. 상황 자체가 이렇게 돌아가니까 우리도 우리 스스로 지킬 수 있는 國防力을 가져야겠다. 이어서 ADD가 만들어졌다. 애치슨 라인은 1950년 미국 국방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면서 북한의 남침으로 6-25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이 되었다. 비슷한 역사가 반복되는 걸 아닐까, 그래도 강대국 중에 제일 신의가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문제는 이 상황이 한국 입장에서 볼 때는 당황스러운 것이고 미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렇게 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데 서로 시기가 안 맞았다. 미국은 전비를 많이 써서 줄여야 되는 입장이다. 이 정도면 너희들 알아서 해야 되는 것 아냐. 우리 군대가 베트남에 가 있는 것도 원래는 주한미군이 빠져서 베트남으로 가는 것을 막을려고 가 있었던 거다. 그래서 존슨 대통령이 약속해 줬는데 갑자기 빼가니 이건 뭐지 이런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닉슨과 박 대통령 간에는 개인적인 私感도 있었다는 애기가 있다.
⑨ 닉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을 썩 좋아하지를 않았다. 그 이유가 1966년에 닉슨이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다. 그 때는 대통령이 되기 전이다. 그 때 닉슨은 대통령도 주지사도 떨어졌고 그때 박 대통령을 만나러 왔다. 이때 박 대통령이 밥도 같이 안 먹고 커피 한 잔 마시고 그냥 보내 버렸다. 박 대통령에게 만찬을 청했지만 커피 한 잔으로 끝내 버렸다, 근데 2년 뒤 1968년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그러면 뒤 끝이 남는다. 닉슨은 박 대통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1969년 8월에 박 대통령이 닉슨 대통령을 만나러 미국에 갔다. 그랬더니 닉슨이 어디로 불렀냐 하면 그때 닉슨은 마침 자기 대학 동문회 모임이 있는 호텔에 묵고 있었다. 고향 근처 동문회가 있던 호텔로 초청, 일국의 국가 원수인데 일정을 따로 잡지 안 했다. 게다가 중요한 건 밥을 먹으면 만찬은 각료들하고 먹어야 될 것인데 그냥 친구들과 같이 밥 먹게 하고 합석을 시켰다. 이건 진짜 의도적으로 박 대통령을 무시한 거였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압박감이 굉장히 심했고 낙슨 독트린 때문에 혼자서 스스로 방어도 해야 되고 미국하고 관계는 점점 틀어지고 있지, 1971년 12월,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한 달 뒤에 가진 연두기자회견에서 한미동맹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⑩ 1972년 박정희 연두기자회견: 김일성이가 만일 무슨 구실을 잡아 가지고 전쟁을 도발했다. 자~ 미군은 다 돌아갔다. 한미방위조약도 없어졌다. 미국이 군대를 보내 가지고 그걸 막아 주겠냐. 근데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이 자국의 탁구선수들을 중국에 보낸다. 핑퐁외교 시작이다. 그 전까지는 우리가 舊소련을 鐵의 장막, 중국은 竹의 장막 이라고 불렀다. 상호간의 교류가 없었는데 이제 美-中共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전까지 미국은 중국을 쳐다 보지도 않았다. 닉슨 독트린 이후로 양국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1972년 2월 양국의 지도자들이 만나서 회담을 하였다. 그러면서 무역제한조치가 풀렸다. 우리 입장에서는 잘못된 만남인 거다. 그게 바로 닉슨이었다. 박정희 정부도 한편으로는 자주국방을 하면서 무기개발 쪽으로 간다. 다른 한편으로는 1973년 6.23선언을 발표해서 우리도 북한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들과 수교를 맺을 수 있다 라는 원칙을 바꾸면서 소련한테 손짓을 하게 된다. 6-23선언은 1973년-박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문호개방을 선언함, 1973년 소련 모스크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한국 선수단을 파견한다. 우리나라도 제대로 된 외교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으로 생각하면 뉴스에 간첩이 내려와서 우리나라 국민을 공격했다. 대통령 목을 따러 왔다 이런 이야기가 들려오고 미국은 중국이랑 손 잡고 이런 뉴스가 나오면 북한이 또 쳐들어오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긴장도가 자꾸 올라가고 진짜 미사일 개발이 필수적인 국가산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봐왔다. 돈과 기술이 없어도 우린 뭔가 해낸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뭔가 방법이 있었다. 이럴수록 국민이 일치단결해서 밀고 나가는 게 최상이었다. 방위성금 모금운동,
⑪ 북한은 언제 쳐들어온다고 얘기하고 쳐들어 오지 않았다. 그냥 쳐들어 온다. 우리는 준비를 해야 된다. 우리는 지금 武器가 없다. 우리는 비행기 무기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온 국민이 참여했던 방위성금 모금운동, 성금을 모우려고 별 걸 다했다. 남녀노소 없이 어머니들도 길에 나와서 성금을 모금했다. 6.28. 청와대에서 학생 대표들이 박 대통령에게 직접 성금을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77명의 학생 대표들은 전국의 학생과 교직원들이 모운 방위성금 7억 5천 9만원을 헌납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학생 대표들에게 액수도 크지만 금액보다도 국민학교 학생에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생들이 국토방위를 위해 모운 돈이니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기 위한 정성 어린 돈으로 생각하고 그 뜻이 헛되지 않도록 쓸 것이라고 말했다. 간첩 잡기 위해서 헬기도 사야 되고 실제로 그 당시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헬기와 구축함 요청을 하기도 하였다. 근데 베트남 전쟁 때문에 제대로 안 왔다. 우리가 돈을 벌어서 사야 되겠다. 근데 돈이 없다. 그래서 이런 성금을 모우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지금 알려진 바로는 68년 2월부터 반공성금이라고 걷기 시작을 하고 이게 1973년도 들어가면서부터는 방위성금이 되었다. 전폭적인 국민의 지지로 백곰 프로젝트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⑫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1970년 1월에 북한 해안에서 신무기가 포착이 된다. 그 무기는 舊소련의 프로그(frog missile-사거리 60킬로미터의 소련의 지대지 미사일) 미사일이었다. 사정거리 60킬로미터 정도, 지금 기준으로 아주 길지 않지만 그래도 60킬로미터고 그 안에 화학탄과 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 만약에 북한 전방지역에서 그 무기를 서울로 발사하면 2분 안에 떨어진다. 우리는 그 무기를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수단도 없었다. 서울이 불바다 되기 일보 직전이다. 일촉즉발의 도발에 대한 상황, 미사일 개발이 정말 시급한 데 이걸 북한 몰래 미국 몰래 주변국을 살피면서 해야 된다. 어찌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이걸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안동만/前국방과학연구소 소장은 처음 1973년에 들어가니까 미사일은 한다고 그러는데 구체적인 내용도 안 가르쳐주고 샘플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사일 개발계획을 세우라고 그러는데 대학을 갓 졸업하고 KIST에 일년 있다가 간 연구원이 어떻게 어떤 미사일을 연구할 건지에 대해서 참 막연했었다. 시쳇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거였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 당시 SALT 협정 (전략무기제한협정-1970년대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전략무기제한협정) 이 발효함에 따라서 미국의 군수산업들이 문을 닫는 상황이었는데 그때에 바로 맥도날드 더글라스에서 나이키 허큘리스를 200킬로미터까지 연장을 해줄게 하는 제안을 받았다. 그 대신에 2000만불 주면은 2년 동안에 설계를 해주겠다. 백곰 미사일 밑에 부분이 동굴동굴한 게 네 개가 있다(미사일 하단의 1단 추진기관), 1단 추진기관은 미사일을 올려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로켓과 비슷하다. 미사일을 올리고 나면 4초 만에 1단 추진체가 다 탄다. 그 다음에 미사일 위에 있는 부분이 폭탄도 있고 2단이라고 하는데 2단은 빨리 갈 필요 없이 천천히 태워가면서 목적지까지 가도록 하는데 가는 방법이 레이더로 쏘아줘 가지고 유도조정으로 통신전파가 왔다 갔다 하는 거다. 그 다음엔 저리로 가라 계속 지시한다. 그러면 추진체 내에 있는 컴퓨터가 계산을 해서 날개를 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거다. 백곰이 그게 된다 (백곰 미사일=유도탄),
⑬ 1978년 5월 로켓 모타 라는 걸 네 개를 묶었는데 시험발사에서 다 해체되고 위 부분도 계속 날라가야 되는 데 못 날라가고 붕~ 떨어지고 말았다. 완전히 박살나는 실패를 한 번 경험을 했다. 아마 윗분들은 스트레스 엄청 받았겠다. 대통령 참석 행사 네 번에서 두 번 실패하고 두 번 성공해서 이제는 행사해도 되겠다 싶어서 9월 달로 행사 날자를 잡았다. 1978년 9월 26일, 유도탄 종합시험 기지에서는 自主國防의 새 기원을 이룩하는 한국형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세계적 관심을 불러 일으킨 장거리 유도탄은 동북아시아의 현존 세력균형의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관측을 불러 일으켰다. 대한민국 최초의 미사일 백곰, 5초 4초 3초 2초 1초 발사! 1978년 9월 26일, 백곰은 발사 소리에 맞춰 불기둥과 함께 솟아 올랐다. 사거리 180킬로미터 대한민국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발사는 푸른 상공을 날았다. 우리나라가 세계 7번 째 탄도 미사일 보유국이 된 것이다. 충남 안흥시험장 언덕에서 이를 지켜본 박 대통령, 그토록 바라던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염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미사일 발사 올라 가기 전에 시험발사 20초 동안에 카운트 다운을 하는 데 그 20초가 一刻이 如三秋 같았다. 쏘고 난 뒤 4초 만에 1단이 분리되고 2단으로 가서 8만 피트까지 올라가는 데 딱 성공하는 순간에 전부들 와~ 하고 박수치고 만세를 불렀다. 1978년 9월 26일 충남 안흥 발사시험장에서 우리는 드디어 誘導彈 개발에 성공했다. 고로에서 쇳물이 처음 나왔을 때 짜릿한 순간이었다. 백곰 프로젝트의 성공에는 ADD 연구진들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 꺾이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백곰의 가장 기본은 전부 내가 만들어야 된다. 수입해 가지고 포장만 하는 게 아니고 전부 우리가 만들어서 쓰는 것에 백곰의 기본적인 정신이 있다. 미국 것을 갔다 쓰면서 미사일 개발 할 때에 한 번 혼이 났었다. 그게 뭐냐면 우리 마음대로 미사일 생산을 못하게 됐다. 왜냐하면 그 부품이 미국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가 생산해서 쓸려면 너희가 미국한테 다 까발려라. 그래서 미국에서 미사일 포대를 방문해서 일일이 시찰까지 했었다. 그때 우리는 모든 걸 미국에 의존하면 안 되겠다. 모든 부품을 전부 국산화로 시작을 했고 그게 25년 지나면서 지금은 완전히 국산화가 돼서 바로 해외로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K-방산의 초석을 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⑭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원래 원하는 200킬로미터였는데 백곰 미사일은 사거리 180킬로미터로 20킬로미터가 줄어든 이유는 대한민국이 독자적으로 미사일을 개발한다. 그리고 그런 원천기술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라는 첩보가 미국에 전해졌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ADD를 방문한다. 200말고 180으로 사정거리를 줄이고 탄두의 문제도 500킬로그램까지 가지 말고 454킬로그램으로 줄이라는 제안을 했다. 미사일 개발이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미사일 개발 제한조치를 하는 거였다. 백곰을 공개 하자마자 일본이나 소련에서 바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당시에 아사히 신문은 핵하고 연결되는 것 아냐 하는 식의 보도가 나왔다. 이미 76년, 77년쯤에 한국정부가 중수로를 구입한다는 얘기가 국내에는 안 알려졌지만 해외 신문에서는 조금씩 나기 시작했었다. 대통령이 핵개발과 연결시키겠네 하는 계획이 애초에 있었다. 개발에 참여했던 故홍영식 교수에 따르면 최종 목표는 핵탄두 라고 말은 안 하였지만 핵탄두 같은 것을 운반하는 로켓을 개발하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최종 목적이다. 실제로 박 대통령도 탄두를 교체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라고 지시를 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더 의심스러운 게 백곰 미사일과 나이키-허큐리스가 똑같이 생겼다. 나이키-허큐리스는 핵탄두 장착이 가능하다.
⑮ 만약에 우리가 핵 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한다. 그럼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 때문에 음모론, 이 시대를 배경으로 소설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국방과학연구소를 김종필 총리가 방문한다. 김 총리는 다과회를 하는 자리에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 한 사람에 일억씩 주겠다 라는 얘기를 했단다. K9 자주포, 천궁-11, K2 전차 등의 國産武器를 수출, 2022년 방산수출액 173억 달러 (약22조 8000억원), 사상 최대 기록달성, 백곰에서 시작한 대한민국의 防衛産業, 50여 년 만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우뚝 선 K-방산! 방산은 우리의 미래 먹거리의 하나다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외부로 부터의 여러 문제를 지키기 위한 억지력으로 발전시키면서 다른 나라의 방위력 강화와 평화에 기여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중요한 산업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 뉴스를 보면 군의 초급간부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보도가 있다. 그들에게 대우도 잘 해주고 방산무기를 만드는 연구원들이 가끔 가다 실패한다. 백곰 사업도 몇 번 실패했었다. 그들이 열심히 해서 실패한 건 안아주고 격려해 줄 수 있어야 된다. 우리나라의 사업을 보면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 하리라. 지금 찬란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을 과소평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현재의 대한민국은 20, 30, 40, 50년대생 국가 지도자와 사업가와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님 어머님들의 노고와 희생 덕분에 잘 살게 되었다. 혹시 기적을 믿으십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를 들여다 보시라 그것이 곧 기적이다. 국민 모두가 진정 잘 사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