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오후 / 김석수
목요일에는 강의가 있는 날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수영장에 다녀와서 어깨에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차창에 빗방울이 비친다. 아침 운동이 힘들었는지 졸려서 졸음 쉼터에 들렀다. 밖에는 가랑비가 오락가락한다. 오늘은 학생들이 논문지도 교수를 정하려고 자신의 관심 분야를 발표하는 ‘콜로키엄’ 행사가 있다. 커피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발표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학교 현관에서 ㄱ 교수를 만났다. 그는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한다. 행사장으로 들어가니 학생이 이미 많이 와서 자리를 잡고 있다. 먼저 와 있는 교수와 인사를 나누고 발표 자료를 챙겨서 자리에 앉았다. 학과장은 이번에는 발표자가 적어서 오전에 끝날 것 같으니 모두가 점심을 함께하자고 한다. 학생이 발표하면 교수가 평가하고 조언한다. 일사천리로 행사는 끝났다. 식당에 가려고 현관으로 나왔더니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시내에서 밥을 먹고 학교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모두가 이런 날이 아니면 얼굴 보기 힘들다. 한캠퍼스에서 근무하면서 한 학기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다. 모두가 바쁘다고 한다. ㅅ 교수는 논문 지도하느라 저녁 늦게까지 연구실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녀는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는다고 한다. 나도 가끔 그런다고 했더니 취향이 비슷하다고 맞장구친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집에 도착해서 컴퓨터를 켜고 ‘밀리의 서재’에 들어갔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이 눈에 띈다. 떠난 이들이 세상에 남기고 간 마지막 흔적을 정리하는 유품 정리사가 쓴 글이다. 비 오는 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 재미는 또 다른 나만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초겨울 문턱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우리 사회의 슬픈 사연에 눈시울을 적셨다.
요즘 홀로 사는 사람이 가족이나 이웃 모르게 죽는 일이 흔하다. 필자는 최근에 마음 아픈 현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50대 후반 이혼한 남자다. 사인(死因)은 자살이다. 흔히 말하는 ‘독거 중년’이지만 자식이 있다. 서로 연락도 하고 지낸다. 하지만, 유서에는 "외로워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라고 적혀있다. "이런 선택을 하게 돼서 자식에게 미안하다."라고 했다. 그는 외롭고 힘들었다.
저자는 25년 동안 죽음의 현장을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고인을 만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죽는 순간에 가족이 곁에 있는 사람은 천 명 중의 한 명이 될까 말까한다. 그런 사람은 가족의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한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죽기 전에 소중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안부를 묻던 세대가 오늘날의 비대면 시대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비대면 시대에 익숙하다. 전화로 안부를 묻지 않아도 괜찮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으니까. 세상과 연결해 주는 스마트폰이 누군가를 기쁘게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외롭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사람은 외롭게 된다."라고 머리말에서 강조하고 있다.
글이 맛깔스럽지는 않지만, 이야기마다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비뚤어진 직업관을 엿볼 수 있다. 서울대 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예비 치과 의사가 자살한 것이다. 그는 노래를 만드는 작곡가가 꿈이었다.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생활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진정한 효도인 것을 몰랐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운 존재가 자식이라는 사실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끝부분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7계명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첫째, 삶의 질서를 세우려면 정리를 습관화하라. 둘째, 직접 하기 힘든 말은 글로 적어라. 셋째, 중요한 물건은 찾기 쉬운 곳에 보관하라. 넷째, 가족에게 병을 숨기지 마라. 다섯째, 가진 것을 충분히 사용하라. 여섯째, 누구 때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라. 일곱째, 사랑했던 사람과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남겨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외롭게 되지 않으려면 가족이나 친척, 친구와 이웃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관심을 두고 서로 연락하며 살아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늦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에 내가 ‘떠난 후에 무엇이 남겨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다.
첫댓글 '여섯째, 누구 때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라. 가 귀에 들어 오네요.'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기억 하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7계명, 아주 좋네요. 음악 들으며 독서하는 선생님, 너무 멋져요.
고맙습니다.
맞아요. 깨끗하게 살다 잘 죽고 싶어요.
벌써 떠날 일을 걱정하는 나이가 됐네요.
얼마 전에 20년 후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라는 주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지금부터 준비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품 정리사의 책이군요.
저도 찾아서 읽어 봐야겠습니다.
7계명, 저도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남겨주어야겠습니다.
아직은 죽음을 생각하면 무섭지만 매일매일 예쁘게 살아야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실천해 보지 못한 것들이네요.
우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데 잊어 먹어요. 그런 것이 한 두개가 아니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나이 들수록 외로움을 잊어버리면 좋겠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