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하면 좋으련만 / 이임순
두 사람이 길을 가면서 말다툼을 한다. 처음 보는 이들은 경상도와 전라도 말을 하는데 거칠다. 길 건너 밭에서 파를 심던 김씨 부인이 쳐다보고 서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듣기 거북한 말을 쏟아낸다. 조용한 시골길이 난데없이 욕 거리가 된다. 주위가 소란하니 개가 컹컹 짖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파트가 들어선 후 사람 왕래가 종종 있다. 산책로는 아니지만 한적한 길이라 걷기로 체력을 단련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오늘은 소음 공해를 일으킨다.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돈이 문제다. 애완견한테는 한 달에 몇십만 원을 쓰면서 어머니 생활비 20만 원 송금하는 날이면 왜 속을 긁어대냐고 남자가 소리 지른다. 아들이 삼 형제인데 용돈을 다 같이 주어야지 장남만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자가 맞선다. 동생들은 고등학교만 다녔고 자신의 대학등록금 마련하느라 논을 팔았으니 생활비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우리 힘으로 결혼했고, 두 동생 결혼 비용도 대주었으니 부모님 생활비는 그들도 부담해야 된다고 한다.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선다. 신랑측 부담은 내가 했지 왜 우리이고, 동생들 결혼할 때 축의금 50만 원씩 한 것을 무슨 결혼 비용을 다 댄 것처럼 하냐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이다. 처제 둘이 동생들과 같은 해에 결혼했는데 그들에게도 똑같이 축의금을 했으니 처제들도 내가 결혼시킨 것이냐고 묻는다. 여자가 대답이 없다. 화를 삭이는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연다. 해마다 장인어른 생신 때 여행가라고 300만 원씩 목돈을 주면서 어머니 용돈에 토를 단다고 목청을 높인다. 하도 바가지를 긁어 담배 끊고 그 돈을 어머니께 매월 송금해 주기로 한 약속은 잊었냐고 한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두 분이 알아서 생활했기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혼자 계시고부터는 아들의 도리를 조금이나마 하려는데 한 번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볶아댔다고 따진다.
3일이 멀다 하고 처제들이 우리 집에 드나드는데 내 동생들한테는 오지 말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한다. 같은 부모형제인데 시댁에 주는 돈은 아깝고 친정에 주는 것은 아깝지 않냐며 앞으로는 본인이 벌어서 주던지 옷이며 화장품값 줄여서 친정에 주라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 부모 형제가 우리 집에 오지 않듯이 처가 식구들도 못 오게 하라고 한다.
잠시의 틈을 두고 표정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작심이나 한 듯 말을 잇는다. 부부로 10년을 살았는데 더는 당신을 믿을 수가 없으니 이제부터는 돈 관리는 본인이 하겠다고 한다. 내가 번 돈 내가 관리하는 것 당연하지 않냐며 생활비로 200만 원을 줄 테니 그 돈의 한도에서 가정을 꾸리라고 한다. 저녁 한 끼 집에서 먹으니 두 식구 생활비로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잘 돌아가는 기계처럼 쉬지 않고 말을 하던 여자가 입을 꾹 다물고 땅만 쳐다본다.
김씨 부인도 나도 마주 서서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귀를 쫑긋 세운다. 나무 그늘에 잠시 앉아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장승처럼 꼿꼿하던 여자는 기가 퍅 죽었다. 이럴 줄 모르고 메뚜기처럼 날뛰었냐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주변을 인식한 남자가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날마다 큰소리를 낼 수 없어 꾹 참고 지냈는데 더는 속에 담아 둘 수 없어 작정하고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당신이 어머니의 희망이고 집안의 기둥인데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부모 형제와 멀어지게 하니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부인이 하는 양을 눈치챈 어머니가 내 마음 편한 대로 살라고 하는데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해드릴 수 없다고 한다.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직장생활 12년 차인데 재산이라고는 아파트 한 채가 전부란다. 결혼 전에 모아 두었던 돈으로 결혼하고 남은 것은 친정아버지 회갑 기념 여행 보내드릴 때만 해도 효녀라 생각했는데 내 등골 빼먹는 사람이라 한다. 아기가 없어 애완견 키우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썼단다. 종일 하는 일도 없이 소일하면서 퇴근하고 오면 심부름을 시킨다면서 앞으로는 애완견에 따른 일은 시키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친정아버지께 용돈 드리고 싶으면 개하고 노닥거리는 시간에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보충하라 한다. 부모님 생활비 드리는 것이 아까운 사람이 개 밑에 들어가는 돈은 우습게 여기는 그 사고방식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낯 모르는 사람 앞에서 이런 말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 알면서 실례를 무릅쓰고 한다면서 자신의 생각을 바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한다. 흐린 눈빛으로 부부의 연은 끊을 수 있어도 부모 형제의 연은 끊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생판 모르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부아가 치민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많이 다쳤으면 저럴까 미루어 짐작된다. 자식한테 쓰려고 아끼고, 부모님께 무엇 하나라도 해드리려고 절약하며 사는 것이 일상의 생활인데 자식은 없고 부모님께 생활비도 마음 편히 드리지 못한 대장부의 심사가 얼마나 불편했을까 싶다.
친정이나 시댁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무엇을 해드리고 싶어도 이제는 마음뿐이다. 부모 그늘이 어떤 것인지 저 여자는 언제쯤 알까? 행여 챙겨드려야 할 것을 놓친 적은 없는지 더듬어보니 눈시울이 젖는다. 용돈 드릴 분이 계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삶의 가치가 있는데 그녀에게 시부모는 어떤 존재일까?
파를 심던 김씨 부인이 혀를 차면서 내게 다가온다.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 일은 아닌데 저런 인간성 궂은 사람도 있다고 구시렁거린다. 부부의 연은 끊을 수 있어도 부모 형제의 연은 끊을 수 없다는 각오가 무슨 의미인지, 여자의 입이 굳게 닫힌 것은 그 속내를 알기 때문이려나?
첫댓글 남의 일이지만 속상하네요.
보통 여자 쪽에서 많이 느끼는 감정인데요.
공평하기가 쉽진 않겠지만요.
친정과 시댁,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면 되는데 이 여자는 친정만 생각해서 생긴 문제지요. 낯 모르는 사람이 하소연을 하는데 여자를 쥐어박고 싶었습니다.
남자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서로의 주장을 들어봐야 겠지만요.
부부의 갈등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남의 일이지만 글의 남자에게 엄청 몰입해서 읽었어요. 선생님이 그만큼 잘 쓰셔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