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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보 보물 문화재 인디아나존스들 (25회~26회)Ⅲ[한국 상고사 고고학 70년 발굴 현장 회고]
31. 부산 복천동 고분- 누가 알았을까, 판자촌 아래 금관가야의 魂이 잠들어 있을줄
부산 복천동 53호 고분(1989년 발굴)을 보존한 야외전시관에서 김두철 부산대 교수가 내부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무덤 바닥 한가운데 일렬로 놓인 덩이쇠(철정)들이 보인다. 부산=김상운 기자
빼곡히 밀집된 주택가 한복판 풀 떼를 입은 거대한 구릉이 나타났다. 거북이 등처럼 야트막한 언덕들 사이로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들이 펼쳐져 있다. 정상부에 있는 대형 무덤은 길이가 7, 8m에 이른다. 21일 답사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과 더불어 금관가야 지배층이 묻힌 공동묘역으로 추정된다.
1980년 10월∼1981년 2월 이곳을 발굴한 김두철 부산대 교수(59)는 “6·25전쟁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고 살던 동네에 금관가야의 거대한 고분이 잠들어 있으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1600년 묵은 ‘처녀분’ 열리다
“철도레일 같은 게 바닥에 쭉 깔려 있다!”
1980년 11월 말 야심한 밤 복천동 22호 고분 발굴 현장. 무덤의 뚜껑돌(개석·蓋石)들 사이에 박힌 돌멩이 하나를 조심스레 빼낸 뒤 손전등을 비춰 보던 김두철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행한 신경철 당시 부산대 조교(현 부산대 명예교수)와 조영제 부산대박물관 학예연구원(현 경상대 교수)도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멍 아래로 가야의 대표적 교역품이자 화폐였던 덩이쇠(철정·鐵鋌)가 마치 레일처럼 무덤 바닥에 줄지어 깔려 있었다. 굽다리 접시(고배·高杯)와 그릇받침(기대·器臺) 등 각종 제의용 토기들도 잔뜩 쌓여 있었다. 김두철의 회고. “어둠 속에서 아릿하게 보이던 가야무덤은 그저 신비하단 말밖에는…. 잔영이 오래 남았는지 그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날 낮 발굴팀은 내부를 아주 잠깐 볼 수 있었다. 무덤 뚜껑돌을 덮고 있는 진흙을 꽃삽으로 긁어낼 때 돌멩이 하나가 툭 떨어지면서 살짝 구멍이 난 것. 주변 인부들을 의식해 발견 사실을 비밀로 해두고 조사원들만 야간에 따로 모인 것이다.
복천동 22호분과 11호분은 1600년 동안 한 번도 사람 손을 타지 않아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이른바 ‘처녀분’임이 분명했다. 고고학자들에게 처녀분 발굴은 일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다. 가야고분 특성상 무덤 깊이가 5m나 되는 데다 그 위에 주거지가 형성돼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발굴팀이 더 놀란 건 무덤 내부에 물이나 흙이 차지 않아 매장 당시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고학에서 무덤 부장품의 정확한 위치는 출토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 두근두근 ‘덮개돌’ 들어낸 순간
1980년 복천동 고분 발굴현장에서 작업자들이 3t 무게의 무덤 덮개돌을 도르래로 들어올리고 있다. 부산대박물관 제공
본격적인 유물 출토에 앞서 발굴팀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무덤을 덮고 있는 거대한 덮개돌 4개를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들어내야 했다. 너비 1.4m, 길이 2.7m의 덮개돌 한 개는 무게가 3t에 달했지만 유구와 유물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중장비를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현장에 밝은 한병삼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에게 SOS를 쳤다. 그의 소개로 경주에서 활동하는 석탑 드잡이공들을 불러들였다. 드잡이공은 인력용 도르래를 이용해 석탑을 해체, 조립하는 이들이다.
복천동 11호분 안에서 발견된 ‘금동관’
드디어 1980년 12월 4일 삼불 김원룡 서울대 교수 등 고고학계 원로들과 언론사 취재진이 모인 가운데 뚜껑돌을 조금씩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거대한 뚜껑돌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래 있는 고대 가야 유물들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조영제의 회고. “하루 종일 뚜껑돌 4개를 서서히 들어내는 동안 얼마나 긴장했던지…. 불상사라도 생기면 우리 발굴팀은 ‘민족의 죄인’이 되는 거였어요. 다행히 드잡이공들이 무게중심을 잘 잡아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뚜껑돌이 제거된 11호분 안에는 치아가 남아 있는 인골과 더불어 가야 금동관이 놓여 있었다.
11호분 바로 옆 부곽(10호분)에서는 판갑(板甲·상반신을 보호하는 쇠 갑옷)과 말투구(마주·馬胄)가 출토됐다. 말투구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었다.
○ 임나일본부설 역사왜곡 극복
복천동 11호 고분 옆 부곽(10호분)에서 출토된 ‘말투구(마주)’.
사람이 쓰는 판갑과 더불어 말투구가 함께 발견된 건 의미가 적지 않다. 왜가 4세기 가야를 점령했다는 일본 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이 깨지는 근거가 됐기 때문이다. 5세기 초반 이전 일본 고분에선 갑옷만 발견될 뿐 말갖춤(마구·馬具)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 일본에 보병만 있었고 기병은 없었다는 얘기다.
반면 4세기 말∼5세기 초 복천동 고분에서는 말투구와 마갑 등 각종 말갖춤이 출토됐다. 임나일본부설에 따르면 왜가 보병만으로 가야의 기병대를 제압했다는 얘기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조영제는 “복천동 고분 발굴은 가야를 둘러싼 역사왜곡을 바로잡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32. 경주 월지(안압지)발굴
- 신라 왕궁 연못에서 건진 목제 남근…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1975년 4월 16일 경주 월지(안압지) 발굴 현장에서 통일신라시대 나무배를 끌어올리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여긴 사방 어디서도 전체를 볼 수 없는 무한(無限)의 공간이오.”
8일 경북 경주시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안압지)’를 함께 찾은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70)이 건넨 선문답 같은 말이다. 과연 그러했다. 천년왕성 월성(月城) 동문 터와 맞보고 있는 월지 남쪽에 들어서자, 연못을 중심으로 복원된 건물들과 인공섬 대도(大島), 소도(小島)가 한눈에 들어왔다. 월지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지점이다. 그러나 연못의 북서쪽 방면에 자리 잡은 중도(中島) 일대는 볼 수 없었다.
42년 전 윤 전 소장과 함께 월지를 발굴한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안압지 발굴조사와 복원’ 글에서 “월지는 무한한 바다를 좁은 공간에 표현했다”고 썼다. 월지는 경복궁 경회루처럼 통일신라시대 연회를 베풀던 경치 좋은 연못과 정원이다.
삼국사기는 월지에 대해 “서기 674년(문무왕 14년)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기록했다. 삼국통일 직후 왕경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문무왕이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월지에 집약한 게 아닐까. 나중에 그가 바닷속 수중왕릉에 묻힌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경주 월지(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제 남근. 귀두 부위에 튀어나온 돌기가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음, 모양이 딱 그건데….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1975년 5월 29일 월지 북쪽 기슭 발굴현장. 최정혜 당시 조사원이 바닥 개흙층에서 발견한 17.5cm 길이의 기다란 나무 조각을 한 남성 조사원에게 내밀었다. 조각을 뒤덮은 진흙을 닦아낸 남성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챘지만 대답을 머뭇거렸다. 남녀유별이 남아 있던 1970년대엔 그럴 만도 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남성의 심벌 모양이었다.
왕궁 연못에서 느닷없이 남근(男根)이라니.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 이쪽으로 쏠렸다. 윤근일의 회고. “최규하 총리를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가 현장에 와서 목제(木製) 남근을 만져보고 신기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다보니 최태환 당시 작업반장이 남근에 실을 살짝 묶어놓았어요. 약품 보존처리 중이던 목제 유물들에 둘러싸인 남근을 손쉽게 찾으려고 한 거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남근의 용도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학계에서는 예부터 바닷가 해신당(海神堂)에서 남근을 세워놓고 제사를 지낸 것처럼 제의용이라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고대 로마 폼페이 유적에서도 도시 곳곳에서 남근 조각과 그림들이 발견됐다. 일각에서는 월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표면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데다 돌기까지 붙어 있어 여성의 자위 기구라는 설도 제기된다.
○ 삼국시대 배 최초로 발견
둘레 1005m, 면적 1만5658m²에 이르는 월지를 제대로 즐기려면 유람선을 띄우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75년 4월 16일 연못 한가운데에서 통일신라시대 나무배 한 척이 발견됐다. 그때까지 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 선박이었다.
문제는 엎어진 채 모습을 드러낸 나무배를 안전하게 들어내는 것이었다. 부식이 쉽게 일어나는 유기물 특성상 1300년 묵은 나무는 스펀지처럼 취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1960∼90년대 경주 발굴현장을 지킨 고 김기출 작업반장과 상의한 끝에 윤근일은 나무장대 여러 개를 나무배 아래로 밀어 넣은 뒤 마치 상여를 메듯 들어 올렸다.
길이 6.2m, 너비 1.1m의 나무배에 인부 30명이 달라붙었다. 경사로에서 나무배를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균형이 맞지 않아 살짝 금이 갔지만, 거의 완형을 유지한 채 무사히 수습을 마칠 수 있었다. 발굴팀은 나무배를 즉시 약품에 담가 7년 동안 보존 처리를 진행했다.
○ 예상보다 훨씬 넓었던 동궁 영역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과 장은혜 학예연구사, 박윤정 학예연구실장(왼쪽부터)이 8일 경북 경주시 ‘동궁과 월지’를 둘러보고 있다. 윤 전 소장은 1975∼76년 발굴에 참여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로프에 몸을 묶고 7m 깊이의 캄캄한 우물 안으로 들어간 기억이 생생하네요.”
이날 ‘동궁과 월지’ 동편지구 발굴현장에서 만난 장은혜 학예연구사(29)는 2년 전 통일신라시대 우물을 발굴한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동궁과 월지 발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지 동편지구에 대한 발굴조사를 2007년부터 이어가고 있다.
당초 동편지구는 별도의 왕경 유적으로 추정됐지만, 막상 땅을 파보니 이곳에서 확인된 건물 터와 유물은 월지에서 출토된 것들과 유사했다. 신라시대 동궁 영역이 현재 사적지로 지정된 범위보다 훨씬 넓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백전노장과 청년 고고학자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말한다. “동궁과 인근 월성 발굴은 시간을 갖고 체계적으로 해야 합니다. 1970년대 발굴에서 확인하지 못한 월지 동편과 북편 경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33.합천군 옥전 고분군
- 가야의 위엄 서린 황금칼, 전설의 왕국 ‘다라국’의 실체 밝히다
M1호분서 발굴된 로만글라스… 서역과의 문물 교류 알 수 있어
다라국 전성기 대표하는 M3호분…정교한 장식의 둥근고리자루큰칼…금귀고리-갑옷 등 유물 쏟아져
“가야연맹 소속됐던 다라국… 6세기 후반 백제와 동맹 맺어”
조영제 경상대 교수가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1985년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김상운 기자
19일 경남 합천군 옥전서원(玉田書院) 옆 야산에 들어서자 사람 키를 넘는 거대한 무덤들이 나타났다.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길게 늘어선 20여 기의 봉분은 멀리서 보면 마치 낙타 혹 같다. ‘어딘가 눈에 익은 풍경인데….’ 지난 시리즈에서 취재한 발굴 유적 32곳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야트막한 구릉에 고총(高塚)들이 빽빽이 자리 잡은 모습이 부산 동래구 복천동이나 경남 김해시 대성동의 금관가야 고분을 닮았다.
답사에 나선 조영제 경상대 교수(64)가 심중을 읽은 듯 한마디 거들었다. “이곳 합천 옥전 고분군에 묻힌 다라국(多羅國) 지배층은 순수 토착세력이 아닙니다.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를 공략하자 김해 금관가야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죠.”
○ 지중해산 로만글라스 발견
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 국립중앙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이건 금관보다 더 귀한 거요….”
1991년 9월 옥전 고분군 M1호분(M은 봉분(Mound)을 뜻함) 발굴 현장. 발굴 지도위원으로 현장을 찾은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로만글라스(Roman glass·로마와 속주에서 제작된 유리그릇) 출토품을 손에 쥐고 읊조렸다. 한국 고고학의 대가는 감격에 젖어 손마저 가늘게 떨었다. 혹여나 귀한 유물을 떨어뜨릴까 봐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로만글라스 아래로 손을 뻗었다.
현재는 고인이 된 고고학계 원로들이 당시 흥분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대 한반도에는 투명한 유리 재질의 로만글라스를 만드는 제조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멀리 지중해로부터 광활한 실크로드를 거쳐 들어온 로만글라스는 서역과의 문물 교류를 보여주는 핵심 증거다. 당시 로만글라스는 경주 신라고분에서만 나왔는데, 경주 이외 지역에서 발견된 건 이것이 유일했다.
로만글라스의 출토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출토 1년여 전 인근 옥전서원 문중에서 “안산을 함부로 파헤칠 순 없다”며 발굴을 막았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 오히려 제대로 보존할 수 있다”고 설득해 1989년 4월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지만 그새 주곽(主槨) 일부가 도굴됐다. 크게 낙심했던 발굴팀이 시신 발치 쪽에 깔려 있던 갑옷을 노출하던 도중 로만글라스 조각을 찾아냈다. 다행히 마구 밑에서 나머지 조각들이 나와 로만글라스를 완전체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귀고리. 국립중앙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제공
학계는 M1호분이 조성된 5세기 3분기(451∼475년)부터 옥전 고분에서 로만글라스와 창녕계 토기 등 신라 계통 유물이 나타나고, 거대한 봉분 무덤이 출현하는 데 주목한다. 5세기 신라에서도 높은 봉분의 적석목곽분이 유행했다.
다라국이 신라와 교역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분석된다. M1호분보다 시기가 앞서는 5세기 초 무덤에서 갑옷과 투구, 금장식품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목곽묘 규모가 갑자기 커지는 양상도 눈길을 끈다. 조영제는 “이때 부장품은 김해 지역의 가야고분과 연관성이 깊다”며 “5세기 초 광개토대왕 남정을 계기로 금관가야 세력이 합천으로 옮겨온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 황금빛 용과 봉황 함께 날다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용봉무늬 둥근고리자루큰칼(용봉문 환두대도)’ 손잡이. 5∼6세기 다라국의 정교한 금속공예 기법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용띠 해에 합천에서 용이 승천했다.’
1988년 초 옥전 고분군 M3호분에서 용봉무늬 둥근고리자루큰칼(龍鳳文環頭大刀·용봉문 환두대도) 4점이 한꺼번에 출토되자, 국내 언론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한껏 들뜬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 보도가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용이나 봉황 문양을 새긴 둥근고리자루큰칼이 한 무덤에서 4점이나 나온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화려한 장식의 둥근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된 곳은 무령왕릉과 천마총밖에 없었다. 더구나 옥전 고분 둥근고리자루큰칼은 금·은 장식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지름이 21m에 이르는 M3호분은 다라국 전성기를 대표하는 거대 무덤이다. 이곳에서는 둥근고리자루큰칼뿐만 아니라 금귀고리, 금동장식 투구, 갑옷, 말 투구(馬胄), 쇠도끼 등 각종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제강점기 때 도굴 시도가 있었지만 다행히 석곽 가운데가 아닌 측면의 돌무더기를 뚫는 바람에 대부분의 유물이 온전할 수 있었다.
역사학계는 옥전 고분군이 일본서기에 몇 줄만 언급된 다라국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열쇠라고 평가한다. 조영제의 설명. “5세기 말, 6세기 초 옥전 고분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다가 6세기 후반 백제계 유물이 주로 나옵니다. 이는 다라국이 대가야를 주축으로 한 가야연맹에 소속됐으며, 6세기 후반 신라에 맞서 백제와 동맹을 맺은 사실을 보여줍니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34. 공주 공산성 발굴- 백제시대 최고급 옻칠 갑옷, 왜 저수지 한가운데 묻혔을까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이훈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 공산정 앞에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이 위원이 손으로 가리키는 공북루 안쪽 공터가 백제시대 건물터가 발굴된 성안마을이다. 공주=양회성
발아래 금강은 유유히 흐르는데 백제 700년 역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꼭대기 정자(亭子)에 오르자, 공북루(拱北樓)로 뻗어 내린 성벽 옆으로 금강이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서기 660년 이곳에서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벌인 의자왕도 저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까…. 475년 한성(현 서울)에서 천도한 이후 64년 동안 백제 도읍이었던 웅진(공주)은 백제 부활과 멸망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공북루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최근 발굴을 마친 공터가 보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 민가 7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성안마을’이다. 여기서 백제시대 건물 터를 비롯해 ‘옻칠 갑옷’ 등 각종 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발굴단은 당초 견해를 바꿔 백제 왕궁 정전(正殿) 터가 성안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故) 이남석 공주대 교수(발굴단장)와 함께 오랫동안 공산성 발굴에 참여한 이훈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스승을 회고했다. “사람이 세상 떠날 때를 택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30년 넘게 공산성 발굴에 매달린 분답게 마지막 9차 발굴까지 모두 마친 직후에 돌아가셨어요.”
○ 당나라 연호 적힌 옻칠 갑옷 출토
○○行貞觀十九年四月卄一日’(○○행 정관 19년 4월 21일)이라는 명문이 적힌 백제시대 ‘옻칠 갑옷’. 공주 공산성 성안마을에서 발견됐다.
“아 행정관(行貞觀) 명문이다!”
2011년 10월 중순 성안마을 내 저수지 발굴현장. 지표로부터 6.5m 깊이 바닥에 깔린 풀을 대나무 칼로 조심스레 떼어내던 이현숙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행여나 유물을 밟을까 오랜 시간 쪼그린 자세로 까치발을 한 탓에 그의 탄성엔 고통이 배어 있었다. 햇볕에 노출된 직후 감청색 빛깔을 드러낸 옻칠 갑옷 조각 위로 빨간색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행정관’ 뒤로 ‘十九年四月卄一日’(19년 4월 21일) 글자도 있었다. 행정관이 무슨 뜻인가.
전화로 보고를 받은 이남석이 급하게 현장으로 뛰어왔다. 명문을 유심히 들여다본 스승이 제자를 슬쩍 나무랐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 정관(貞觀)으로 읽어야지. 당나라 연호 아닌가.” 백제시대 유물에서 당나라 연호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정관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 태종의 연호로, 정관 19년은 서기 645년(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 문헌 기록이 절대 부족한 고대사에서 연대가 적힌 명문은 역사 해석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핵심 자료다.
명문도 명문이지만 옻칠 갑옷 발굴도 대단한 성과였다. 가죽에 10여 차례 이상 옻을 덧바르는 갑옷은 삼국시대 최고 사치품으로 통한다. 더구나 옻칠 갑옷과 함께 쇠 갑옷, 마갑(馬甲), 대도(大刀), 장식칼 등 기마병의 화려한 말갖춤이 한 세트로 묻혀 있었다. 백제시대 공산성의 위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1급 유물들이다.
주변 발굴을 끝낸 직후 발굴단은 갑옷 발견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게 됐다. 이현숙의 기억. “성안마을 주민들이 저수지에만 우물 5개를 팠습니다. 그런데 이 중 관정(管井) 하나가 옻칠 갑옷과 불과 20cm 떨어진 곳에 설치됐더라고요. 조금만 옆쪽으로 뚫고 지나갔다면 갑옷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 누가 왜 최고급 갑옷을 저수지에 묻었나
옻칠 갑옷과 함께 공산성 성안마을 안 저수지에서 발견된 ‘쇠 갑옷’. 공주대박물관 제공
고고 유물은 발굴 못지않게 해석이 중요하다. 관련 역사 기록과 연관성은 기본이고 때론 문헌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공산성 발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옻칠 갑옷 등이 불탄 기와와 화살촉이 가득한 지층 바로 아래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말 탄 기병을 연상시키듯 갑옷, 무기, 마갑 순으로 유물들이 층위를 이루며, 물건을 감추듯 1m 두께의 풀을 갑옷 위에 덮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긴급 상황에서 옻칠 갑옷 등을 저수지 한가운데 놓았다는 얘기인데 왜 그랬는지가 미스터리다.
이를 놓고 학계에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된다. 우선 “백제는 간지(干支)를 사용했다”는 중국 역사서 한원(翰苑) 기록을 토대로 당나라 연호가 적힌 옻칠 갑옷은 중국에서 만든 거라는 견해가 있다. 당군이 웅진도독부에서 철수하면서 버린 갑옷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에 중국 연호가 새겨진 사실이 있으므로 백제가 외교용으로 갑옷을 만들었다는 반론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 “645년 5월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했을 때 백제가 금색 칠을 한 갑옷과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을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옻칠 갑옷에 적힌 645년 4월과 시기도 비슷하다. 발굴단의 해석을 이현숙이 정리했다.
“백제가 당나라에 외교용으로 갑옷을 보내면서 국가기록물 차원에서 추가로 제작한 게 출토품인 걸로 보입니다.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앞두고 갑옷을 저수지 아래 묻으며 승전을 기원한 의례를 올린 게 아닐까요.”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35. 경주 나정 발굴- 神話, 역사가 되다… 박혁거세 탄생의 비밀 깃든 ‘나정’
발굴 당시 나정 전경. 주변 탑동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사진제공 중앙문화재연구원
경주 도심 남천(南川)을 건너 남산(南山) 방향으로 차를 몰자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물 댄 논 사이로 황구가 어슬렁거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탑동이다. 그런데 마을 입구를 지키는 육중한 조선시대 기와 건물이 범상치 않은 포스를 내뿜는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6부 촌장(村長)의 위패를 봉안한 양산재(楊山齋)다.
그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니 소나무 숲 속에 감춰진 공터가 나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기록된 나정(蘿井)이다. 나정과 불과 500m 떨어진 거리에 경애왕이 살해당한 곳이자, 신라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이 있다. 월성과 황룡사지 등 경주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 천년왕국 신라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런 걸까.
2002∼2005년 윤세영 당시 중앙문화재연구원 원장(현 고려대 명예교수)과 함께 나정을 발굴한 이문형 책임조사원(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기획실장)과 이지균 조사원(현 천년문화재연구원 단장)이 살짝 성토된 땅을 손으로 가리켰다. “신라시대 ‘팔각 건물터’가 발견된 곳입니다. 신화가 역사로 바뀐 순간이죠.”
○ 작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역사적 발견
발굴 당시 나정 전경. 주변 탑동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사진제공 중앙문화재연구원
경주 도심 남천(南川)을 건너 남산(南山) 방향으로 차를 몰자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물 댄 논 사이로 황구가 어슬렁거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탑동이다. 그런데 마을 입구를 지키는 육중한 조선시대 기와 건물이 범상치 않은 포스를 내뿜는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6부 촌장(村長)의 위패를 봉안한 양산재(楊山齋)다.
그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니 소나무 숲 속에 감춰진 공터가 나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기록된 나정(蘿井)이다. 나정과 불과 500m 떨어진 거리에 경애왕이 살해당한 곳이자, 신라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이 있다. 월성과 황룡사지 등 경주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 천년왕국 신라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런 걸까.
2002∼2005년 윤세영 당시 중앙문화재연구원 원장(현 고려대 명예교수)과 함께 나정을 발굴한 이문형 책임조사원(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기획실장)과 이지균 조사원(현 천년문화재연구원 단장)이 살짝 성토된 땅을 손으로 가리켰다. “신라시대 ‘팔각 건물터’가 발견된 곳입니다. 신화가 역사로 바뀐 순간이죠.”
○ 작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역사적 발견
2002∼2005년 경북 경주시 나정 발굴 당시 발견된 신라시대 ‘팔각 건물터’. 기단 석렬 내부에 둥근 초석들이 보인다. 아래쪽 비석은 일제강점기 때 박희동(신원 미상)이 세운 것으로, 현재는 사적지 내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중앙문화재연구원 제공
“아니, 이게 왜 이런 각도로 꺾이지?”
2002년 5월 하순 경주 나정 발굴 현장. 조선시대 건립된 비각(碑閣) 주변을 시굴하는 과정에서 건물 기단 석렬(石列)을 발견한 이문형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연히 사각형 모양의 평면을 머리에 그리고 가장자리를 팠는데, 위로 꺾인 석렬의 각도는 수직이 아닌 둔각을 이루고 있었다. 서둘러 반대편 가장자리를 파보니 마찬가지였다. 석렬 주변에서는 신라시대 기와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며칠 뒤 이문형은 후배 조사원들을 조용히 주말에 불러냈다. 경주시가 본래 요청한 발굴조사 내용에서 벗어나 기와 건물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앞서 경주시는 낙수 피해를 막기 위해 담장 이설 공사를 추진하면서 연구원에 주변 발굴을 요청한 터였다. 갑자기 발견된 기와 건물터에 대한 성격 규명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주말 이틀 동안 쉴 새 없이 노출시킨 기단 석렬은 상상을 뛰어넘는 독특한 구조였다. 경주에서 지금껏 한 번도 발굴된 적이 없는 팔각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 더구나 팔각 건물터에서 ‘義鳳四年(의봉 4년·679년)’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에 따라 문무왕의 삼국통일 직후 증축이 이뤄진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
석렬 내부에서는 3열에 걸쳐 초석(礎石) 40개가 발견됐다. 지표가 지속적으로 깎인 탓에 초석은 불과 20cm 깊이에 묻혀 있었다. 팔각 건물터 외곽을 둘러싼 담장도 발견됐다.
○ 나정인가 신궁(神宮)인가
나정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연꽃무늬 막새. 사진제공 중앙문화재연구원
“고허촌(高虛村) 촌장이 양산 밑 나정 우물가에 무릎을 꿇고 우는 흰말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커다란 붉은 알만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온 사내아이를 촌장이 데려와 길렀다. 아이는 이미 13세에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매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탄생 신화에 등장하는 나정은 조선시대부터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역사가 아닌 허구로만 여겼다. 그러나 신라시대 팔각 건물이 발굴되면서 나정은 역사적 실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나정에서 추정 우물터를 중심으로 한 초기철기시대 ‘제의용 환호(環濠·마을이나 제단을 둘러싼 도랑)’가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건국 연대(기원전 57년)와 비슷한 시점에 나정이 신성시됐음을 보여주는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발굴단이 우물터로 지목한 유구가 사실은 기둥구멍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청동기시대 소도(蘇塗)처럼 환호 중앙에 커다란 나무장대를 꽂은 흔적이라는 것이다. 단, 통일신라시대 팔각 건물이 국가 제의시설이라는 발굴팀 의견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학술원 회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나정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박혁거세를 기리는 시조묘 혹은 김씨 시조를 기리는 신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주 나정을 둘러보고 있는 이문형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기획실장(왼쪽)과 이지균 천년문화재연구원 단장.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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