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삶
문수보살이 두 번째로 재수(財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여래가 중생을 교화하는 경우, 어떠한 까닭으로 해서 여래는 중생의 시간, 수명, 일체의 행위, 견해 등에 따라서 교화하는 것입니까."
그때 재수보살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지혜가 밝은 사람은 항상 적멸의 행을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를 그대에게 설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신체를 안으로부터 관찰하여 보면, 도대체 나의 몸에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이 정확하게 관찰하는 사람은 자아(自我)가 있고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체의 상태를 깨닫고 있는 사람은 마음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아니합니다.
이와 같이 신체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깨닫고, 모든 것으로부터 공(空)을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이 허망함을 알아 다시는 그 마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신체와 정신이 서로 관계하고 있고, 관련을 가지면서 활동하고 있는 모양은 흡사 타오르고 있는 불의 바퀴와 같아서 어느 것이 앞이고 어느 것이 뒤인지 식별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업은 비유컨대 꿈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 또한 모두가 적멸한 것입니다.
또 모든 세상의 일은 다만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기호에 의하여 판단을 내리는 자는 그 견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또 생멸(生滅)하고 유전(流轉)하는 일체의 세계는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일어나고 순간순간마다 소멸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며, 빠르게 변해가며 공(空)하여 진실한 자기[自我]는 없다고 관찰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떠납니다."
(<화엄경> ‘제 6장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야곱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다. 야곱은, 아이들을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나누어서 맡기고,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은 그 뒤에 세우고,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세워서 따라오게 하였다.
야곱은 맨 앞으로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
에서가 고개를 들어,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면서 물었다. "네가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은 누구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형님의 못난 아우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
그러자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다음에는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요셉과 라헬이 나와서, 그들도 엎드려 절을 하였다.
에서가 물었다. "내가 오는 길에 만난 가축 떼는 모두 웬 것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에서가 말하였다.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
야곱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므로, 제가 가진 것도 이렇게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형님께 가지고 온 이 선물을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간곡히 권하므로, 에서는 그 선물을 받았다.
에서가 말하였다. "자, 이제 갈 길을 서두르자. 내가 앞장을 서마."
야곱이 그에게 말하였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또 저는 새끼 딸린 양 떼와 소 떼를 돌봐야 합니다.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습니다.
형님께서는 이 아우보다 앞서서 떠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는 앞에 가는 이 가축 떼와 아이들을 이끌고, 그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세일로 가서, 형님께 나가겠습니다."
에서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부하 몇을 너와 같이 가게 하겠다." 야곱이 말렸다.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너그럽게 맞아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 날로 에서는 길을 떠나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숙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야곱은 자기들이 살 집과 짐승이 바람을 피할 우리를 지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이 숙곳이 되었다.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의 세겜 성에 무사히 이르러서, 그 성 앞에다가 장막을 쳤다.
야곱은, 장막을 친 그 밭을,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백 냥을 주고 샀다.
야곱은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33장)
오늘 화엄경에서 [지혜 있는 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며, 빠르게 변해가며 공(空)하여 진실한 자기[自我]는 없다고 관찰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떠납니다."]를 보자.
언제 이 경지에 다다를 것인가? 수행하는 분들처럼 아침점심저녁으로 기도하고 명상도 하고 그래야 하나? 매일 조금씩 시간을 내어 글쓰기 명상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까지는 않은데, 어찌 해야 하나? 그 경지에 안 오르면 또 어떤가? 그런 게 있다고만 여기며 지금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왜냐하면 변화가 귀찮기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모순의 인간이로다.
오늘 창세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혹 ‘진실한 자기는 없다’는 생각을 해보았을까 상상해본다. 오늘 이야기는 밋밋하였기 때문이다.
<식물의 잃어버린 언어>에 나오는 글을 보자.
[린네는 식물에 속명과 종명을 붙이는 명명법을 창시했다. 예를 들어오샤osha는 리구스티컴 포터리Ligusticum porteri라 부르는데, 리구스티컴속의 포터리종이라는 의미이다. 리구스티컴은 ‘리구리아의’라는 뜻으로, 이탈리아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한편 포터리는 ‘포터의’라는 의미인데, 포터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름을 따서 식물에 이름을 붙여준 필라델피아의 식물학자 토마스 콘라드 포터를 가리킨다. 이리하여, 수십만 년 동안 북아메리카의 지역 생태계 속에 뿌리내리고 있던 이 독특한 식물이 ‘이탈리아 산産, 포터의 리구리아’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오랜 쓰임새와 관계, 그리고 린네가 무시했던 것을 토대로 이름이 지어진 유럽의 많은 식물들을 제외하고(서양톱풀의 이름인 아킬레아 밀레폴이뭄도 그 한 예이다), 지구상의 모든 식물은 이처럼 자신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관습이 되어버린 과학적 식물 명명법은 오샤 같은 식물이 동식물은 물론이고 곤충과 인간,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채 살아가므로 오샤와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착각을 만들어내고 이를 지속시키고 있다.
모든 언어들이 그렇듯, 식물학의 언어도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언어 속의 검증되지 않은 가설들이 강화될수록, 그 언어도 더욱 많이 쓰이게 된다. 그레고리 베이트슨도 언어 속에 감춰져 있는 관점이 아이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나무 수상록>을 쓰면서 학명을 등장시키는 이유도 실은 학명이 분리 사고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인데, 아직도 낯설기만 해 숙성 문장을 만들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글을 보자.
[반세기 이상이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 정원은 그대로 신비한 매력을 지녔다. 40년 전,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정원이 싱싱하게 우거진 덤불 안에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가곤 했다. 그 당시 많은 몽상가들은 그 정원 안의 녹과 이끼가 낀 두 기둥 사이에 아치를 이루고 있는 기묘한 덩굴과 자물쇠가 걸린 채 비틀어지고 흔들흔들 덜컹대는 철문이 달린 철책을 바라보며 거침없는 호기심으로 수없이 많은 상상을 펼쳤다.]
무슨 책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무와 우리가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마지막 세대는 유럽의 낭만주의라고 한다. 그 시기의 문학작품에 이런 경향이 짙게 있다고 해서 검색하다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 1권을 작년에 읽었다. 장발장 아버지 직업이 나뭇가지를 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장발장도 마찬가지로 나뭇가지 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확인하고 덮었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데, 이것은 5권짜리였다. 그러다가 나무 에세이를 쓰고 있는 지금, 내 문장이 너무 형편없어 이 소설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전자책으로 읽고 있는데, 대가의 문장이 무엇인지 실감난다.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독자로 만족하며 사는 게 좋을 법도 하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 멈출 수도 없어 나무 에세이는 계속 될 것 같다.
위 글은 4권에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묘사되는 정원이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공들여 쓰는 문장이 무엇인지 예술가의 문장이 무엇인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며칠에 걸쳐 필사를 해보련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당신은 이미 어제 저 밖에 서 있다가 나한테 인사를 하지 않았던가요?” 카말라가 물었다.
“사실 나는 이미 어제 그대를 보았으며 그대에게 인사를 하였소.”]
인연을 질기게 이어가려는 문장 같다. 소설은 끊임없는 복선의 배열이다. 여기에 긴장을 주었다 이완을 주었다 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갑자기 오래전 읽은 소설 제목이 생각나네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왜 생각이 났을까요?
무의식 어딘가 있던 것을
앞선 문장들이 그 어딘가를 건드렸을 거예요.
왜 그랬는지는 또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글이라는 것은 늘 그래요
일단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만들어 놓으면
그 다음에는 내가 아니라 언어들이 문장들이
어디선가 계속 흘러나와요
거기에 힘이 들어가도 안 되고
거기에 억지가 들어가도 안 되요.
그냥 올리는 거예요
그냥 써나가는 거예요
그럼 판별이 나요
무엇이 일반인의 글이고
무엇이 예술가의 글인지요
거기에는 삶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글을 쓰세요
내 삶도 그대의 삶도
삶인 것뿐이에요
아무도 모르는 삶이요!
옴 샨티 샨티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