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말구유에 누우신 ‘구세주 하느님’
성경 말씀을 이루어가는 신비
‘공현(公現)’은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심을 의미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세주시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께서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여린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드러내셨다. 이스라엘 후손으로 태어나셨지만 가난한 목동 몇 명 외에는 그분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헤로데를 비롯하여 숱한 사람들의 표적이 되신다. 먼 동방의 이방인 세 박사만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다. 무슨 영문일까? 만왕의 왕이시오, 모든 민족의 구세주께서 권능을 떨치시기는커녕 초라한 마구간에서 갓난아이의 모습이라니?
그러고 보니, 예수님 평생 권능을 휘두르며 자신을 과시하고 약한 사람을 위협하는 등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을 때도 그분은 산으로 피해 물러가셨다.(요한 6,15. 참조) 성전 마당의 장사꾼들과 환전꾼들의 탁자를 엎어버리고 쫓아내신 것(요한 2,14. 이하 참조)은 당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요한 2,17)이었다.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남용하지 않았다. 요즘 같은 세상이라면 SNS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동시간 생중계를 할 수 있었을 것이고, 단숨에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에 못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빼 들어 종의 귀를 잘랐을 때(마태 26,51. 마르14,47. 루카 22,50)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나무라시고 종의 귀를 다시 붙여주신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성경 말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아니 하느님의 뜻이 성경 말씀에 담겨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구세주께서는 만왕을 거느리고 거대한 궁전에서 대관식을 하듯이 세상을 호령하며 당신을 나타내 보일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왜 그랬을까? 정녕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며, 하느님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13)
악마는 성경을 들먹이면서까지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실패한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냉철한 자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흔들림 없이 ‘성경 말씀’에 따르고 있으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전혀 잃지 않고 있다.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 우리 눈에는 그저 한 갓난아기로 보일지 몰라도, 우리의 눈 저 너머에 하느님의 신비가 서려 있는 것은 아닐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그 신비를 본 것일까?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은 우리가 모두 갖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던가? 심지어는 그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 존재가치와 동일시하여 과시하고 허세를 부리며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않는가? 부족하지 않음에도 너보다 내가 가진 것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불평하며 더욱 탐욕에 빠지고 있지 않은가? 일확천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의 척도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예수님에게서 실패한 악마는 ‘다음 기회를’ 우리에게서 잡았나 보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존재인데, 그 어떤 것으로 비교할 수 없는 우리 존재인데, 우리는 어느덧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길을 잃었다. 어린아이들도 똑같은 롱패딩을 입으며 ‘나도 행복해!’라고 외치며,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남과 비교해서 뒤떨어지면 ‘불행한 일이야!’하고, 남들이 하는 것을 똑같이 하지 않으면 ‘난 패배자야!’,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하며 소외감에 빠진다.
초라한 구유에 누우신 구세주,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계신 하느님, ‘그게 아니야! 널 어떤 누구와도 비교하지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우리가 매일매일 신경 쓰고 스트레스를 받는 세상사로부터 자유로운 어린 아기, 거기에 성경 말씀을 이루어가는 신비가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