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명배우시리즈-1. 손 숙의 '셜리 발렌타인'(월리러셀 작) 연극을 보았다. 대구 백화점 창업 50주년 기념 실험극장 초청 공연 연극이었다. 우리 나라의 기라성 같은 많은 여배우 중에서 제일 먼저 공연을 가지게 된 손 숙 씨.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 앞에서 거의 한 시간 반 동안 혼자서 연기하는 모노드라마 형식이었다. 연기자 자신이 그렇게 고백했듯이 , 아무도 도와 주는 이 없이 혼자서 연극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주방을 무대로 시작되는 연극, 혼자서 포도주를 따르고, 날계란을 깨트려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 접시에 담고 대사하고 다음 동작을 이어가고.
종횡무진 바쁘게 움직인다. 관객을 끌어당기고, 호소하고, 감동하게 하는 그 힘. 보통 사람이 넘볼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을 한마디로 풀이하면 '끼'가 아닐까? 끼가 있기에 저렇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배우로서의 자세를 다 갖추고 있는 몸가짐. 거침없이 술술 풀어내는 대사. 역시 '끼'라는 것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상적인 삶의 권태감에서 벗어나려는 한 중년 여성의 치열하고도 간절한 '나'를 찾는 여행이라는 선전문에 이끌려 보게돈 '셜리 발렌타인'
무관심한 남편. 동거 중인 딸. 집을 떠나 살고 있는 아들. 모든 것이 무기력하고 따분한 일상뿐이다. 친구와의 여행으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셜리 발렌타인으 삶을 찾는다는 내용을 원작 이상으로 진솔한 연기를 보여 준 손 숙 씨. '끼'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지난 일요일, 오랜만에 TV에 모습을 나타낸 원로 작가 박경리 씨.
언제던가? 아마 1966년도 가을쯤이었으니 근 30여 년 전이었다. 내가 다니던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주최로 여류 문인 초청 강연회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모윤숙, 박화성 선생임과 함께 박경리 선생님의 강연이 있었다.
단정한 용모에 조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이 강연하신 선생님들이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박경리 씨를 만난 것이 즐겁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때도 별로 바깥출입이 빈번하지 않았던가 보다.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자신을 지켜 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가고 이제 초로의 작가를 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희끗한 머리카락, 순수한 옷차림, 그 어디에 그 긴 대하소설을 잉태한 저력이 숨어 있던가.
1969년 8월부터 1994년 8월까지 만 25년에 걸쳐 「토지」를 쓴 그 힘. 그것이야말로 '끼'가 아닐까. 토지를 쓰면서 곧 암수술을 받았으나 작품을 쓴다는 것에의 환희로 건강을 회복했다고.
6·25전쟁으로 남편을 잃었다. 연이은 아들을 잃은 슬픔. 절망적인 어려움 속에서 어머니와 딸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 삶이 너무 가혹한 것 같아 처절한 슬픔을 느꼈지만 한 번도 죽겠다는 생각은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작가의 고백이 가슴을 울린다.
헐벗고 굶주리며 살아온 이름없는 사람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으리라.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 땅에서 살아온 민초들의 이야기 「토지」는 우리 문학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이다. 고향 평사리를 떠나 만주 땅 용정에서 피난 생활하는 여러 인물들. 조선 말기 이후의 한국 사회의 근대화라는 격변기를 살고 있는 전형적인 인물의 창조에 성공했다는 평론가들의 격찬. 삶과 풍속의 탁월한 재현. 미묘한 심리묘사.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문체라고 칭찬하는 빼어난 작품의 탄생 뒤에는 고통의 삶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가의 노고가 어떠했을까.
왜 쓰느냐는 물음은 왜 사는가라는 물음과 같다고 하는 박경리 씨. 원주에서 손수 가꾼 농산물을 손질하며 조용히 묻혀 있는 듯한 작가. 원고지 쓸 때마다 파지가 더 많이 나온다는 따님의 애틋한 표현도 작가의 고통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 섬세한 애정이 문학의 본바탕에 잠재되어 있다. 문학이란 고달픈 작업이긴 해도 해방된 영혼의 표현이라고 끝을 맺고 있었다.
고통의 삶을 훌륭한 작품으로 승화시킨 그 내면의 힘. 그것이 바로 '끼'가 아닐까?
끝없는 열정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끼'란 예술 영역에서 더욱 빛이 나는 것 같다. 더 크고 높고 가치 있는 예술을 탄생시키는 그 근원적인 힘이 바로 '끼'임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우리의 정신 세계를 채워주는 '끼'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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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에 비친 얼굴
창문을 두드리는 밤바람 소리가 잠을 못 이루게 한다. 가랑잎이 쓸려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강원도 두메에서 있었던 일들이 그리움으로 묻어온다.
싸릿가지로 엮은 울타리 너머 넓디넓은 자갈밭, 그 밑으로 깊이 패여 흐르는 강물이 푸르고, 물 속에 비친 산 그늘은 언제나 변화가 무쌍하였다.
부산에서 새벽버스를 타고 밤이 이슥하여야 닿을 수 있는 곳. 남편이 두 번째 전속해 간 곳이 강원도 화천군 부촌면 부촌리.
오래 머물러 있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곳이었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이동하는 부대를 따라다니는 철새라고 할지? 그들의 얼굴에는 이방인의 애수가 짙게 묻어 있었다. 처음 이사 와서는 낯선 곳에 정을 붙이려 애쓰고, 얼마만큼 생활의 때가 묻으면 또 단봇짐을 꾸려야 하는 유랑민의 서글픔 같은 것이 안개처럼 젖어 있는 마을이었다.
우리가 세든 방은 행랑채에 달린 방. 바닥이 울퉁불퉁 고르지 않고, 간단한 세간을 들여 놓고 둘이 누우면 발을 뻗을 수 조차 없었다. 다 찌그러진 쪽마루가 삐닥거렸다. 그런 방이었지만 나는 첫눈에 세들기로 결정하였다.
방문을 열면 한 눈에 들어오는 산과 강이 깊고, 안온한 생각들을 몰아와 내 사색의 뜰을 풍요롭게 할 것을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방세가 헐 했다. 아무튼 생활은 낭만이나 감상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깨달을 나이였는데 숫제 편리함을 외면한 것이다.
한 지붕 아래 다섯 가구가 살았다.
문간방에 김중위네, 위채에 살면서 주인 대신 집 관리를 하는 장상사, 아내를 귀부인처럼 받들고 모시는 뒤곁의 정하사, 키가 껑충하고 무골호인풍의 김대위네, 그리고 군위관이던 우리집, 아침 저녁으로 좁은 집안은 시골장처럼 붐비었다.
비록 바깥 주인들의 소속부대가 다르고, 계급이 다르지만, 모두가 그곳의 잠간 잠깐 머물다 가는 사람들, 그 한가지만으로도 가족처럼 다정하게 지낼 수 있었다.
쿵쿵 산너머 대포소리가 들려오는 최전방. 민간으로서 더 들어갈 수 없는 그 곳은 시야(視野)에 험한 산을 빼고 잡히는 것이 없었다. 높고 높은 빌딩은 말할 것도 없고, 넓은 벌판조차 볼 수 없는 삭막일색이었다. 남자들이 모두 부대로 출근하고 나면 온 집안에 정적이 내리고, 나는 마을 나들이라도 할 듯이 서둘러 설거지와 빨래를 끝냈지만, 고작 뜨락 옆으로 다가가 흐르는 강물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거긴 낭만과 생활의 여운이 실려 있었다.
흐르는 강물은 완만하였다. 고여 있는 것인지 흐르는 것인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흐르는 것도 같고 멈추어 있는 것도 같았다. 멈춰있는 내 마음의 강물 위에는 산이 떠 있었다.
산이 밝은 표정을 지으면 강물도 말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근심 어린 표정이면 물빛도 흐렸다. 언제나 산의 표정이 강물의 마음이요, 강물의 유유한 흐름이 산의 의연한 자태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에서 먼 산도 싫고, 산에서 먼 강도 싫은 것이다. 산과 강이 서로 이웃한 깊은 산골에서 남편과 함께 유배된 것 같은 젊음을 달랠 수 있어 좋았다.
오늘은 부대에서 어떤 소식을 가져다 줄까? 고향에서 보낸 편지느 없을까? 아니면 전속며령을 받고 떠나야 하는 아쉬움과 당혹감에 절은 얼굴로 퇴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산의 숭엄한 표정을 살피고 강의 소곤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었다.
아니, 산을 사랑하고 강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또 한 사람. 장상사의 말 못하는 늙은 어머니. 할머니는 나보다 몇 갑절이나 더 강과 산에 대한 감정이 절실하리라.
가슴에 우뚝한 것은 무너뜨릴 수 없는 바위산이요, 가슴속에 고인 것은 핏빛 노을이 물든 샛강이었다. 내가 아이를 업고 허전한 마음으로 강가에 서면 할머니는 언제 왔는지 내 뒤에서 등을 치는 것이다. 뒤돌아보면 빙그레 웃으셨다. 나도 따라 웃는다. 어느 땐 신문지에 싼 고구마 두 뿌리를 내 손에 얼른 쥐어주었다. 아직도 뜨거운 것이니 어서 식기전에 먹으라는 시늉을 해 보이시는 것이었다. 아마 며느리 몰래 잿불 속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 온 것이리라. 나는 목이 메어 껍질을 까먹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늘 밥 짓고 빨래하고 물 길러 오고 심지어는 장작을 패기도 하셨다. 잠시도 쉼 없이 온갖 일을 다 하시건만 외출이 심한 며느리는 외출에서 돌아오면 까닭없이 구박을 했다. 며느리의 고함소리가 들리면 눈물을 글썽이며 할머니는 강가로 나가 흐르는 강물에 당신의 한을 실어 보내려는 듯 흰 치맛자락을 뒤집어 눈물을 닦곤 하셨다.
"자식도 못 낳는 것이 하늘도 무섭지 않은가? 말 못한다고 시어미를 마구 구박해?" 그런 소리가 내 귓전에 울리는 듯 했다. 나는 강물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았다. 내 자신도 시어머니를 잘 모신 기억은 없지만, 남을 보고 깨친다는 옛말처럼 앞으로 더욱 잘 해드려야겠다는 결심을 다져 보는 것이다.
"젊은 색시가 무슨 생각이 그리도 깊은가? 생각이 깊으면 실수하는 일은 없으나 너무 깊으면 혼돈이야. 잡념에 빠져서는 안돼. 이제 강물은 그만 보고 어서 집으로 돌아 가자구.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구먼."
가슴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눈빛을 보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할머니도 너무 슬퍼 마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며느님도 언젠가 할머니의 그 착한 마음을 알아 줄 날이 꼭 올거예요."
비록 서로 가슴에 담아둔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강물 위에 떠서 가는 꽃 이파리였다.
지금도 나는 흰눈이 펄펄 내리는 골목 어귀에서 군고구마 장수를 볼 때마다 벙어리 할머니의 깊은 눈빛과 애정을 잊지 못한다. 아무리 추운 눈발 속이라도 그 생각은 입김처럼 훈훈하게 젖어 눈앞을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