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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을 준비하면서(1)>
누가 내게 부르짖어 영적 리더가 될까?
약 5:17-18 / 엘리야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18) 다시 비가 오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자 비가 쏟아져서 초목이 다시 푸르게 되고 들의 곡식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면 누구라도 영적 리더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종들 중에 위대한 인물들이 많다. 모세와 엘리야 다윗과 다니엘 같은 신앙인들은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앙의 소유자로 오랜 세월 많은 신앙인의 표상이 되어 왔다.
이들 신앙의 선배들에 공통점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것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하나님을 아는 수준을 넘어 성령에 이끌리어 살았다. 성경을 교양적인 지식으로 접근하는 자는 성령님을 접할 수 없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없다.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많이 배우나 교양과 지식의 수준에서 멈춘 신앙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모든 역사는 성령님을 통해 일어난다. 성령님이 나를 통제하고 다스려야 한다.
모든 역사는 성령님을 통해 일어난다. 성령님이 나를 통제하고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갈 5:24-26)라고 하였다. 자기를 정결(거룩)하게 하였다(딤후 2:19-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사람들에게 육신의 안일(安逸)이 오면 자신도 모르게 세상 것에 관심을 같게 되고 그것은 곧 죄로 이어진다(계 3:14-22). 하나님이 이런 어려움을 주심은 나를 너무나 잘 아시기에 죄악의 길로 갈 수 없도록 깨어 근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경건의 훈련을 하셨다(신 8:2-3) 부모에게 책망받고 훈계를 받을 때는 그것이 쓰고 괴롭지만 결국 그 자녀를 살리는 길이 된다. 약이 입에 쓰나 몸을 살리는 역할을 하듯 하나님의 훈련 방법은 고난을 통하여 나를 진주와 같이 값진 일꾼으로 쓰시려는 깊은 사랑이 숨겨져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곳,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뽑으셔서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신다. 또 아모스 선지자는 양 치는 목동이요, 뽕나무를 배양하며 뽕 따서 밥 먹고 사는 농부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극히 평범한 그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선한 역사를 이루어가셨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엘리야를 우리와 전혀 차원이 다른 슈퍼맨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엘리야는 우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 아니 오히려 우리보다 별 볼 일 없는 길르앗에 우거하던 촌뜨기였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슈퍼맨 같은 능력의 사람을 쓰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을 쓰시기를 원하신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나 요셉과 같은 ‘한 사람’을 찾으시며, 그 ‘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
딤후 2:20 / 부잣집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어서 값비싼 그릇은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이고 값싼 그릇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데 쓰입니다.
위의 20절은 21절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를 든 것이매 21절을 주목해야 한다.
딤후 2:21 / 만일 그대가 죄를 멀리한다면 순금으로 만든 그릇, 곧 집안에서 가장 비싼 그릇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대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 나무그릇들은 엄연히 질적(質的)인 차이가 있지만, ‘금그릇이냐? 은그릇이냐? 질그릇이냐? 나무그릇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먼저 불의한 일에서 떠나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누구든지 금 그릇처럼 귀하게 사용될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달리 자기를 깨끗하게 한 사람이 제일 귀한 그릇이라는 것이다. 많은 분이 잘못 알고 있다. 사람들은 무턱대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했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모르고 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 여기서 사용된 ‘깨끗하게 한다’라는 말을 성경 원어로 살펴보면 ‘엑카싸이로’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육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정결케 한다, 순수하게 한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라는 말은 ‘깨끗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뜻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깨끗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가? 또 우리가 어떻게 깨끗한 인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도 먼저 ‘상식’에도 못 미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 어떤 모임에서 한 목사님으로부터, 그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가슴 아프게 들었다. 그 교회는, (우리나라의 대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다 그러하지만), 주차장 시설이 너무나도 부족해서 이중 삼중으로 주차를 할 수밖에 없다. 그때 그 교회에서는 부흥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집회가 다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록, 거기 길 입구를 막고 주차한 차의 주인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 부근에 주차했던 수십 대의 차들이 꼼짝을 못하고 빵빵거리고 있는데, 그런데도 도무지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온 제직들이 다 동원되어서 그 차의 임자를 찾아 나섰는데, 드디어 찾고 보니 교회의 지하에 있는 구석방에 ‘은혜 받는 기도’를 한다면서 별도로 열댓 명이 들어가 있더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남들이 나로 인해 발이 묶여 있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 은혜받겠다고 한다면, 그게 과연 은혜받는 사람이 하는 행동일까?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런데 가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핑계로, 일반 사람들의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신앙생활이 상식에도 못 미쳐서는 안 된다. 또한, 상식에서 벗어나서도 아니 된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이 상식 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식에도 못 미치거나, 상식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이다. 오히려 상식을 훨씬 능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참된 신앙이다.
여기서 드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예수님께서 ‘누가 너희더러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라도 가 주어라’고 하셨다. 이렇게 이 말씀을 비유할 수 있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오리를 가 주는 것! 이것은 상식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정도는 하지 않는가?
그러나 크리스천은 ‘오리’를 넘어서 ‘십리’를 가주는 사람이다. ‘오리’라고 하는 상식에도 못 미치거나 그 상식에 어긋나지 않으며, 그렇다고 그 상식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능가하여 십리까지 가는 사람!! ―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이다.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릇은 귀히 쓰이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깨끗한 인격의 소유자가 된다는 말은 상식에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언제나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권을 보면 부정과 부패를 뿌리 뽑는다고 하며, 개혁을 주도한다면서 깨끗한 애국자로 자처하던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고 나니 사실은 권력을 이용한 부정축재자였음을 우리는 무수히도 보아왔다.
이같이 사람의 눈은 가릴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늘 에녹처럼 하나님의 눈을 인식하고 살아야만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에서 주인공 돈키호테는 중세 유럽에 만연한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고 학대받는 백성을 해방하는 자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가 마치 기사가 된 것처럼 행세했다. 학자들은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가 놀랍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기사가 되고 싶으면 기사처럼 행동하라.’라는 것이다. 한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성자가 되고 싶으면 성자처럼 행동하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으면 예수님의 제자처럼 행동하라.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자녀가 되고 싶으면 그렇게 안겨 있는 자녀처럼 행동하라.’
마치 ‘누구처럼 행동하라’라는 것은 신앙생활에도 통하는 아주 중요한 원리이다. 믿는다는 것은 마치 그렇게 된 줄로 알고 행동하는 것이다. 권위 있는 기독교 작가인 필립 하시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사실인 것으로 믿고 그렇게 행동하며 사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믿음 생활이다. 예수님의 제자처럼 행동하고 하나님 품에 안긴 자녀처럼 행동하면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알게 된다. 그러나 행하지 않으면 그 진리를 결코 알 수 없다. 믿음은 행동이다. 믿음으로 제자처럼 행할 때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갈 것이다.
2.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쓰임을 받으려면 성결해져야 한다(사 6:1-8).
‘구약의 복음서’라는 이사야서를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남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다. ‘이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사야의 부친은 아모스(선지자 아닌)였고,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마헬살랄하스바스-탈취는 급히, 약탈은 속히 이루어짐). 이사야는 왕궁에 자주 출입하며 왕 및 제사장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보아 그는 귀족 가문의 출신이거나 왕족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그는 웃시야왕의 사촌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유다의 제10대 왕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서 소명을 받았으며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왕을 거쳐, 제14대 므낫세왕 때까지, 거의 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선지자 사역을 한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왕의 우상숭배에 반대하다가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사야가 활동했던 당시의 국내외 정세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힘들었을 때였다. 북쪽에는 앗수르 제국이 자리 잡고, 남쪽으로는 애굽이 자리 잡고 있어,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남유다를 비롯하여 인근의 소국들은 강대국 눈치를 보며 생존하고 있었다. 북이스라엘과 인근 국가들이 앗수르의 강력한 정복 전쟁으로 인해 멸망당할 때, 마침 남유다는 친앗수르 정책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그리고 히스기야왕 때에는 인근 국가들과 함께, 애굽의 힘을 업고 동맹하여 반앗수르 정책을 펼쳤지만, 동맹국들은 앗수르의 침공을 저지하지 못하고 차례로 멸망하게 된다. 남유다 역시 두 차례에 걸친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멸망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으로 간신히 구원받았다.
신앙적으로 볼 때도 이사야가 활동할 당시의 남유다는 실로 암담한 시기였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받을 때 왕이 웃시야였는데, 남유다를 통치했던 웃시야는 즉위 초기에는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으나 후기에는 제사장 직분을 침해하는 등의 악행을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나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 뒤를 이은 요담은 대체적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유다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요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하스는 신당을 건립하는가 하면 자신의 자녀를 이방신 몰렉에게 인신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였다. 온 나라가 여호와 신앙을 떠나 패역했으나 다행히 아하스왕의 아들 히스기야는 즉위하자마자 과단성 있게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유다 전역에 퍼져있는 우상숭배 제거에 온 힘을 다하였다. 덕분에 앗수르의 침공으로 남유다도 북이스라엘처럼 멸망 일보 직전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심판의 때를 연장하셨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 중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해 온 백성이 천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이제 남유다마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였다. 이에 이사야선지자는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경외심과 신뢰를 바탕으로 선지자 사역을 감당하며, 다윗 왕조를 향한 불타는 충성심과 애국심으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중보기도를 했다. 그리고 백성의 죄악을 고발할 뿐만 아니라, 회개를 전제로 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예언하며, 택한 백성의 장래에 대한 확고한 소망과 구원을 전파했던 복음적 선지자였다. 이런 점 때문에 이사야선지자는 여러 선지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손꼽혔다.
● 특히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소명받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어느 날 성전에 있다가 환상을 보게 된다. 아직 선지자로 부름을 받기 전이었는데, 왜 이사야가 성전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가 제사장도 아니요 레위인도 아니었음에도 홀로 성전에 있었다는 것은 특히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심히 패악한 시대였음을 감안할 때, 적어도 이사야는 심각한 영적 부담감을 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사야는 그 암울한 시대에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던 신앙의 사람이었다.
이사야 6:1-8[이사야의 소명] / 웃시야왕이 죽던 해 (BC 736년)에 나는 주님을 보았다. 주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고, 성전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의 위에서는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하나님을 모시는 천사.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불타는 자들’이라는 뜻)들이 날고 있었다.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다른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날아다녔다. 3) 그들은 웅장한 교송합창(Antiphona交誦)으로 이렇게 노래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여, 온 세상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구나!’ 4) 그 장엄한 소리로 성전이 기초까지 흔들렸으며 성전 안은 연기로 가득찼다. 5) 그때에 내가 외쳤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입술이 더러운 이것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임금님을 눈으로 직접 뵙다니! 아, 이제 나는 저주받은 몸이 되었구나.’ 6) 그러자 여러 스랍들 가운데서 한 스랍이 불집게로 제단에서 숯불을 하나 들고 내게로 날아와 7) 내 입술에 숯불을 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이제는 네 죄가 씻어졌고 네 허물이 깨끗해졌다.' 8) 그때에 내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좋을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려고 할까?’ 그래서 내가 대답하였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 주소서.’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하였다. 나라 안이 술렁이기 시작하였고, 이제 인접 국가들의 위협의 검은 구름이 서서히 유다를 향하여 몰려오고 있었다. 유다의 온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완전히 좌절과 실망 가운데 빠졌다. 혼란과 위기를 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야웨이시다. 이 어려울 때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를 세워주신 것이다. 인간의 소망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부귀와 영광이 휴지처럼 되었다고 낙담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늦은 비를 주시고 이른 비를 주신다.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의 장차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국가의 난제를 짊어지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 깊숙이 들어가 기도하였다. 성전에 들어가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이사야에게 이상이 나타났다. 높이 들린 보좌에 주께서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唱和)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그때에 성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였고 연기가 집에 충만하였다.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던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웠다. 유대인들이 믿고 의지하던 왕인 웃시야는 죽었다 할지라도 야웨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그들을 통치하고 계시니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주인은 왕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기도하던 중에 주님을 만난 이사야는 이 사실을 깨닫고 위로를 받았으며 새로운 소망과 비전을 보게 되었다.
▶ 이사야 선지자의 부르심에 대하여 복음성가 2곡으로 대처하면 이렇다.
♬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나의 백성들 절망과 굶주림에 갇힌 저들은 내 마음의 오랜 슬픔 고통의 멍에에 매여 울고 있는 나의 자녀들 나는 이제 일어나 저들의 멍에를 꺾고 눈물 씻기기 원하는데 【누가 내게 부르짖어 저들을 구원케 할까 누가 나를 위해가서 나의 사랑을 전할까 나는 이제 보기 원하네 나의 자녀들 살아나는 그 날 기쁜 찬송 소리 하늘에 웃음소리 온 땅 가득한 그 날】
♬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주소서. 가진 것 모두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를 받으옵소서. 나를 받으옵소서.
3. 이제 우리도 애즈베리의 부흥을 경험하자.
애즈베리 부흥운동은 2023년 2월 8일부터 24일까지 16일 동안 일어났다. 2월 8일 미국 켄터키 월모어의 애즈베리 대학교(Asbury University) 강당에서 채플 설교를 마친 후 ‘사랑을 깨닫지 못한 자는 자리에 남아 기도하자’라고 채플 인도자가 말하자 자발적으로 학생 20~30여 명이 남아 기도를 시작하더니 진행자 없이 이들의 기도는 밤새 지속되었다. 학교 총장인 케빈 브라운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 이메일로 전파하였고, 기도 운동은 SNS와 기독교 언론을 통해 전파되었는데 애즈베리 대학의 기도 운동은 2주 이상 쉬지 않고 계속되었고 결국 미국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특이한 것은 따로 기도회의 진행자가 없었다는 점과 참가자가 대부분 미국의 10대와 20대인 Z세대라는 점이다. 학생들이 채플 이후에 서로의 죄를 고백하던 기도가 미 전역으로 펴져 나간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애즈베리 부흥운동은 성령 운동의 결과이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마음이 열려 있다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애즈베리 부흥운동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였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성령을 모신다면 동일한 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미국의 10대나 20대는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이기적이며,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는 세대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 마음을 열었기에 부흥을 경험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여전히 오늘날도 기도하고 말씀에 복종하는 이들에게 역사하신다. 애즈베리 부흥운동은 기도로부터 출발했다. 기도는 지역교회를 움직이고, 지역을 움직이고, 결국은 한 나라를 움직일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 한둘만 있으면 된다. 애즈베리에서처럼 20여 명의 기도자가 있다면 쉬울 것이다. 모임이 크든 작든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헛되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부흥을 꿈꾸고 갈망하면서 기도 모임이 없다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동안 인원 타령을 하고, 기도할 사람이 없었다고 포기했다면 이제부터라도 기도회를 다시 열어야 한다. 새벽기도를 시작하고, 저녁기도, 개인기도 금요철야기도를 재개하는 것이다.
애즈베리 부흥운동은 회개로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하나씩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이들이 동참하고 불이 붙자 부흥 운동으로 번졌다. 회개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회개할 때 하나님이 크신 역사를 부어 주신다. 시기, 질투, 분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때 우리에게도 부흥은 시작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애즈베리에서 뿐 아니라 한국 땅에서도, 부흥운동을 시작하실 것이다.
♬ 이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나라 이땅에 임하소서
결 론
무엇이 보입니까? / 작곡가 이권희가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에 관한 선교 동영상을 보았다. 얼굴에 수많은 파리가 앉아 있지만 떨쳐낼 힘조차 없는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에 큰 아픔과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달려가야 할 사명을 깨달았다. 그는 고백하였다. “그 순간 제 몸이 뜨거워지면서 기도를 드리는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부시게 흰옷을 입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을 모른 채 죽어가는 이 땅의 수많은 백성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험한 산도 괜찮고, 바다 끝도 괜찮으니 나를 보내 달라’고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한참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는 그날의 감격과 느낌을 가사로 적어 그대로 악보에 옮겼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사명’이라는 복음성가이다.
♬ 사명 /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아서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