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2일..미국월드컵에서 자책골로콜롬 비아에게 패배를 안겨 피살당한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선수. 월드컵 축구의 열기가 한창이던 1994년 7월 2일 콜롬비아 동북부 메델린시의 한 나이트클럽 밖 주차장에서 12발의 총성이 울렸다. "골, 골, 골"을 외치며 방아쇠를 당긴 괴한 들의 구둣발 아래 한 축구스타가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졌다. 콜롬비아 축구대표팀 주전수비수인 안드 레스 에스코바르(27)는 단지 미국 월드컵 에서 자책실점을 기록했다는 이유만으로 고국에 돌아와 이렇게 총탄세례를 받았다. 에스코바르는 94년 미국월드컵 축구대회 미국과의 대결에서 팀의 1-2 패배를 부른 자책골을 허용했다. 그는 미국의 존 하크스가
콜롬비아 골문 앞으로 찔러 넣은 공을 걷어내려다 그만 공이 자기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오늘의역사(1900년대)7월2일
🌿06년 일본 경찰,경운궁(덕수궁)의 경비권을 강탈. 🌿08년 의병장 이강년 일본군에 사형 당함 🌿09년 대한민보 창간, 시사만화 첫 등장 🌿09년 용산의 일 군용지에 민가 200호 신축 🌿31년 만보산 사건 발생- 만주 만보산에서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간에 대규모 충돌 사건. 🌿31년 서울˙인천˙평양 등 전국각지에서 반중(反中) 감정 노골화, 중국인 습격˙학대사건 속발. 🌿31년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직속하에 일본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 ‘한인애국단’을 조직. 🌿33년 충무공 영정 봉안, 제승당 중건 낙성 🌿34년 경기도, 학생들의 문맹 퇴치 운동을 금지함. 🌿34년 신의주 비행장 완공 🌿37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무기 정간되었던 동아일보 복간 🌿40년 사탕배급제 실시 🌿41년 일제, 조선농업보국청년대 결성 🌿41년 조선영화협회 창설 🌿46년 부산서 콜레라 창궐, 전국에 만연, 9월말까지 1만 1000여 명 사망 🌿47년 입법의원, 민족반역자·부일 협력자 특별조례 법안 통과 🌿50년 36개국 대한(對韓) 군사지원 성명 🌿54년 국무회의에서 한글 간소화 안을 통과시키자, 각계에서 반대 성명 냄. 🌿57년 민주당,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공표 🌿59년 국제의원연맹(IPU), 한국가입을 정식으로 거부 🌿61년 최고회의 의장에 박정희, 내각 수반에 송요찬 임명 🌿64년 서울대 고대생 등 2000여명 박정희 대통령 하야 요구하며 데모 🌿65년 국무회의, 1개전투사단 월남파병 의결, 9/25 맹호부대 제1진 월남 도착. 10/9 청룡 월남 상륙 🌿66년 주한 유엔군 사령관에 본스틸 대장 🌿67년 박대통령 주최로 한·미·일·중화민국 수뇌회담 🌿70년 금산 위성통신 지구국 개통 🌿70년 전북 익산에서 백제 무왕의 왕궁지 발견 🌿74년 정명훈,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제에서 피아노 부문 2위 🌿79년 제4차세계시인대회 개막(서울) 🌿81년 신안 해저유물 발굴, 세계 최대로 추정되는 청자정병 등 유물 247점 인양 🌿83년 공정거래실, 건설공사 하도급의 불공정 거래행위를 강력히 단속하기로 🌿83년 농업협동조합, 의료보험 혜택이 없는 농민을 위해 단위조합별로 입원 공제제도 실시 🌿84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새 위원장에 강우영 판사를 선출 🌿84년 한국·노르웨이 섬유협정을 체결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폭로. 🌿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 민주당 당사 방문, 개헌 협상재개방향 등 의견 교환. 신민당과 국민당 방문 🌿88년 민족문화작가회의(김정한ㆍ고은ㆍ백낙청 등) 기자회견에서 남북작가회담 제의 🌿88년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헌정사상 처음-이일규 시대 개막 🌿88년 재독 한국작곡가 윤이상, 휴전선 남북음악제 개최 제의(7.20 북한측 수락) 🌿89년 한겨레신문 윤재걸기자에게 서의원방북사건과 관련, 불고지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 발부됨 🌿90년 외무부는 시르추크 주한 소련영사처장 대리-영사처 직원들이 여행제한구역 벗어났다 경고 🌿90년 법원행정처, 4888자 범위내에서 이름을 짓도록 하는 내용의 호적법 개정안을 마련 🌿90년 6월 중 수출은 56억 600만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4.4% 증가, 90년 들어 처음으로 흑자 기록 🌿91년 노태우 대통령,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워싱턴에 도착, 백악관에서 부시 미국대통령과 65분 동안 정상회담 🌿91년 미국, 한국에 대한 주한미군 주둔비분담액 (원貨 직접경비)을 연차적으로 올리는 중기분담액 목표 제시. 🌿91년 북한, 12일자로 유엔가입 신청서를 제출. 🌿91년 정부와 민자당,부실공사로 말썽이 된 5개 신도시 아파트 분양계획을 93년까지 순연키로 확정. 🌿92년 정부, 연안지역 관리법을 제정, 주요연안지역에 블루벨트를 설정, 해 양오염방지 특별관리해역 추가. 🌿93년 김영삼 대통령, '신경제5개년계획발표' 연평균 성장7%, 물가 3% 억제, 97년 담세율 22~23%로 높여 🌿93년 제162회 임시국회 12일간의 회기로 개회. 🌿93년 보사부, 92년말 현재 국민연금기금의 총자산 규모가 5조 901억원이라고 발표. 🌿94년 남북한, 남북한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절차 완전타결(선발대 파견, TV생중계 합의) 🌿94년 국가안전기획부, 조선노동당의 남한내 지하당 `구국전위' 사건과 관련, 간첩단 23명 구속 🌿96년 정부, 정리해고제ㆍ변형근로제 등의 도입을 강력 추진키로(노동계, 강력하게 반발) 🌿96년 한국ㆍEU, 세관부문의 협력 및 상호지원
~~~~~~~~~~~~~~~~
1970년 7월2일...전북 익산에서 백제 무왕의 왕궁지 발견
이 유명한 신라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은 백제 30대왕 무왕(재위 600~641)으로 알려져 있다. 서동요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 기이편은 무왕의 남다른 출생부터 왕위에 오르는 과정까지 한편의 드라마를 전한다. 그의 모친은 과부로 궁의 남쪽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해 무왕을 낳았고, 무왕은 어려서부터 마를 팔아 가족을 부양해서 서(맛)동이라 했다. 신라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가서 위와 같은 서동요를 유포시켜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 백제로 돌아와 공주의 지참금과 그동안 모았던 큰 재력으로 민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 ~~~~~~~~~~~~~~~~
1970년 7월 2일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서 위성통신지구국 개통식이 열렸다. 개통식 행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는 등 국가적인 경사였다. 이날 행사장에는 바지저고리 차림의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금산위성통신지구국은 일종의 통신 중계시설로 위성과 전파를 송수신할 수 있어, 한국과 외국 사이에 통신 및 텔레비전 중계가 가능하도록 했다.
~~~~~~~~~~~~~~~~
1908년 7월2일..의병장 이강년 일본군에 사형 당함 운강 이강년은 건국공로훈장 가운데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을 만큼 저명한 의병 지도자이다. 그가 추구했던 투철한 항일의식과 논리, 그리고 제천ㆍ갈평ㆍ재산ㆍ서벽ㆍ영월 등지에서 보여준 뛰어난 활약으로 보아, 이강년은 한말 의병전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강년 선생이 연승을 거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 출신으로 지리에 밝고 식량조달, 현지 정보망 구축과 함께 유림, 선비, 농민 등 다양한 각층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08년 6월 장마철에 벌어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안타깝게 적에게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재판장에서 끝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이강년 선생은 그해 10월 13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에서 최초의 사형수로 의기에 찬 51세의 일생을 마친다.
~~~~~~~~~~~~~~~~
대한협회에서는 1908년 7월2일 (융희 2년)부터 월간으로 《대한협회회보》를 발행했다.
그러다 1909년(융희 3년)에 《대한협회회보》를 종간하고 같은 해 6월 2일부터 《대한민보》를 창간하여 발행했다. 《대한협회회보》와는 달리 《대한민보》는 일간이었다. 글은 국한문 혼용체로 썼다. 타블로이드 판 4면마다 1단에 45행 씩 6단을 사용했으나 나중에 7단으로 바꾸었다.
신문의 목표는 민족 단결과 지식 보급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하고, 일진회가 발표한 〈한일병합성명서〉에 대해 비판하는 등 친일단체와 맞서면서 항일운동에 힘썼다.
~~~~~~~~~~~~~~~~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 창춘 교외에 위치한 완바오산(萬寶山)에서 조선인 농민 200여명과 중국인 농민 500여명이 충돌했다. 가난이 싫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농민들이, 완바오산 근처에 미 개간지를 중국으로부터 차지한 일본인에게서 10년 기한으로 다시 불하받아 관개용 수로 공사를 하던 중 중구인 농민들이 이를 중단시키려 한 것이 발단이었다. 수로공사로 인해 땅이 갈리고 수해까지 예상한 중국인 농민들이 공사 중지를 요청한 것은 당연한 권리행사였지만 순박한 조선인 농민들은 공사 강행을 부추긴 일본인만을 믿다 이 같은 불상사를 맞았다. 한편으로는 임오군란때 청나라의 경제적 침략자로서 동원된 한족 화교들에 대한 반감에 의한 조선인들의 민중 항의이기도 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