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보단 유부든 경량부든 잘 알 거 같은데요; 시계 소리도 세속적, 관습적으로만 존재하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승의적으론 없습니다. 이게 중관의 관점이에요. 소리와 같은 외경은 실재하며 자성으로 인지한다는 게 소승의 관점이고, 외경은 없다는 게 유식이고, 외경이 존재하지만 항상 착란식으로 인지한다는 게 중관입니다. 님 질문엔 학파의 견해마다 다 다르게 대답할 수 있어요. 귀와 소리가 만나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식은 발생하지 않구요.
(소승 등의)하위 학파들은 대상을 아는 첫 찰나만이 바른 식이라고 주장한다. 식의 두 번째 찰나는 재결식(再決識)이라고 불리는데, 비록 그것이 주된 대상을 정확하게 알더라도 량이 아니다. 재결식의 정의는 “이미 인식한 것을 다시 인식하는 마음”이다.
근식이 어떤 것을 직접 인식하자마자, 주로 마음 속에 분별[생각]이 즉각 일어난다. 분별은 현량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현량은 사물들 간에 차별을 하지 않고, 거기 있는 것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다. 분별은 표시[명칭]를 적용하고 다양한 사물들과 그것들의 속성 간에 차별한다.
현량은 분별을 벗어난다. 하위 학파들에 따르면, 다섯 근식[前五識]은 그것들의 대상과 그 대상들의 속성을 직접[현전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근식은 인식된 대상에 관해서 바르다[量]. 그것은 대상이 그 자신의 자상(自相; 개별적 특성)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래서 그 대상의 자성(自性)에 관해서 량이다. 짧게 말하면, 근식은 그 대상의 실질적인 자성을 인식하는데, 그것은 표현할 수 없다.
유식학파 체계에 따르면, 어떤 근식도 착란적인데,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때 그것은 인식하는 주체로부터 별개의 실체로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현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체와 대상[객체]이 모두 동일한 내부적 원인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대상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본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자에게 외부적인 대상의 모습은 착란적이다; 즉, 그러한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보는 식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귀류논증 중관학파 체계에 따르면, 범부의 현량은 착란적인데, 범부의 식은 그것이 현량이든 분별이든 항상 그 현현경(顯現境)에 대해서 착란적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자성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현현하는 반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그들의 현량의 정의에 ‘불착란적인’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착란적인 현량은 오직 공성의 직접 인식과 부처님의 승의제와 세속제 모두를 순수하게 인식하는 것의 두 가지 유형의 현량뿐이기 때문이다. 현량의 모든 다른 사례는 착란적이다.
씨앗에서 나무가 생긴다고 할 수도 없고, 씨앗 안에 나무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게 중론에서 말하는 겁니다.
@법무아 님아,,, 불교에서는 씨앗에서 나무가 생겨요. 그거를 부정하진 않아요. 그거를 부정하면 인중무과라고... 위에 적었잖아요.
님처럼 공을 가지고 놀면, 그냥 인중무과론이 되어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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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라는 단어를 알고 '결과'라는 단어를 상식적으로 안다고 해서, 그 상식을 가지고 중론에서 사용된 단어를 파악하고 이해하면, 그거는 중론을 이해한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명이라는 말을 쓰는데요. 가명에 상응한 논리가 아함부나 니까야에도 나와요. 제일의공경이었나? 그거도 그러고, 또 유명한 걸로 육중품인가? 여하간 많아요.
연기에서는 동일성을 긍정해도 안되고 부정해도 안되기에, 원인과 결과라는 말을 그냥 가명으로 씁니다. 부처님의 연기에서는 말이예요. 반야부를 논하기 전에 이미 아함이나 니까야에서 그런 점을 밝히고 있어요.
불교에서는 원인과 결과라는 단어 자체가 법(실제 있는 현상, 소위 '있는 그대로'라고 포장해주는 현상) 즉 빠라마타가 아니예요. 빠라마타는 오온이예요.
기초가 부실하면요. 너무 많은 거를 다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게 참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기초를 좀 다져서 잘 분별해서 의미 있는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이는 말을 하려면, 정치한 논의를 했으면 좋겠구요.
힘들면요. 오온이든 18계든 12처든, 일체를 가지고 논의를 그냥 하구요. 그 다음 이름들을 가져다 써요. 그렇게 하면 조금은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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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께요. 중론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려고 할 때 행자가 해야 할 바는 다음입니다.
방에 시계가 있고, 그 시계소리를 알아차림한다고 합시다.
시계소리를 알아차리려고 의도 즉 행온을 일으키니까... 자... 탁 탁 탁... 소리가 들려요. 그죠? 그런데 소리가 들린다 만다 생각은 하지 마요. 그냥 소리만 들어요. 탁 탁 탁... ...
그것을 확인한 후에, 이제서야 생각합니다.
시계소리를 인식하지 못했다. 시계 소리가 없었다. 그런데 들으려고 하니까 들린다... 탁 탁 탁
들으려는 의도 즉 행온... 그 의도 즉 행온에 시계소리가 있나? 탁 탁 탁 이거는 색온이다.
탁 탁 탁 그 시계소리는 이미 있었지만 단지 인식을 못했을 뿐인가?
어떤가요?
무슨 말이냐 하면요. 구체성, 관찰... 경험... 생각을 해도 여기서 출발하라고... 구체적으로 출발하라고...
소위 빠라마타... 오온... 그거로 출발해서 사유해 나가는 거... 그러면 기초 개념이 부실해도, 이해를 할 수 있다니까...
불교라고 다 같은 견해가 아니라 유부, 경량부, 유식, 중관 다 다릅니다. 중론에서 자생과 타생 모두 부정하기 때문에 씨앗에서 나무가 생긴다는 것도 승의적으론 부정합니다. 세속적, 관습적으론 인정할 수 있죠.
중관에선 빠라마타도 인정 안 합니다. 방문객님 쓰는 글들을 보면 중관에 대한 이해가 없어요. 저번에 티벳불교는 관심 없다고 말한 거 같은데 티벳불교를 모르면 중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님 스스로도 잘 모르는 유부 경량부 등등 운운하지 말고... 구체적 사실에서 사유하는 거라도 하라고... 오케이?
위에 의문형으로 적은 내용도 있잖아. 탁 탁 탁 그 시계소리는 이미 있었지만 단지 인식을 못했을 뿐이야?
님보단 유부든 경량부든 잘 알 거 같은데요; 시계 소리도 세속적, 관습적으로만 존재하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승의적으론 없습니다. 이게 중관의 관점이에요. 소리와 같은 외경은 실재하며 자성으로 인지한다는 게 소승의 관점이고, 외경은 없다는 게 유식이고, 외경이 존재하지만 항상 착란식으로 인지한다는 게 중관입니다. 님 질문엔 학파의 견해마다 다 다르게 대답할 수 있어요. 귀와 소리가 만나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식은 발생하지 않구요.
왜 그리 말이 길어요...
아니... 님이 직접 경험하는 바에서, 탁 탁 탁 그 시계소리는 이미 있었지만 단지 인식을 못했을 뿐이냐구요.
님의 견해가 뭐냐고, 사실을 어떻게 파악하냐고...
자기 생각을 물어도, 물은 거에는 자기 생각을 답하는 적이 엄어. 참... 견해가 엄어요? 그냥 현실이 꿈이야? 그게 공이예요?
아니... 실체가 없다느니, 승의적으로 없다느니... 그딴게 뭐냐고.... 구체적으로 시계소리에서 님이 어떻게 공을 이해하고 파악하냐고... 참...
본글부터 댓글까지 줄곧 중관 관점으로 얘기했는데 뭘 또 생각을 말하래요; 중관 견해가 제 견해입니다. 내용은 바로 위에 댓글에 다 적었으니까 읽으시구요.
무자성이 실체가 없음, 승의로 없음이에요. 거봐요 중관 이해가 하나도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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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생각하는 방식을 적어주께.
법 즉 구체적 사실에 대한 유장한 사고... 이거를 법을 고찰하는 거라고 하고, 그와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법담이라고 그래.
자... 그럼 법담을 해보자.
시계소리에서 이제 생각을 한다고.
시계소리가 안들렸었는데, 시계소리를 알아차리려고... 알아차리려고? 거품이지? 들으려고 하니까, 탁 탁 탁 들려.
중론의 원인과 결과... 의도는 행온, 시계소리 색온... 양자의 동일성?
시계소리는 원래 있었던 건가? 들으려고 해서 들렸으니 좀 더 자세히 들어볼까?
탁 탁 탁.. 조금 더 자세히 들으니까... 타가닥 타가닥 타가닥...
어?
탁 탁 탁 이 타가닥 타가닥 타가닥?
원래 있었다고 상정할 시계소리라는게 있나? 의도를 떠나서? 좀 더 강화된 의도에서는 탁이 아니라 타가닥인데?
그래서 또 생각해 나간다고...
맴 맴 돈다고... 구체적 사실에 달라붙어서 더 잘 알기 위해서 주의력을 변화시켜가며 더 더 더 구체적으로 알아간다고...
미리 있었던 시계소리라는 것은 상정에 지나지 않아.
파동 즉 시계를 상정하더라도, 그것은 시계소리가 아니야...
차근 차근 해보면 중론에서 말하는게 다 나와...
법의 유장한 사고를 하라고. 말장난해서 법을 파괴하지 말고. 뜬구름 소리만 하지 말고.
쉬운 거를 하나도 답을 못하잖아. 이해하려고 한 바가 없으니까... 이해는 말장난이 아니라고, 구체적 사실에서 나온다고.
시계소리가 그렇다?
나에게 알려지는 모든 현상이 그렇다?
나의 욕망도 시계소리야.
공을 알아서 만구 생각으로 없다? 번뇌가 준다?
공 공 공 염불외워서 번뇌가 줄어들면 님처럼 행동할 거 같아?
공 공 공 은 탁 탁 탁 시계소리를 듣고 그에 머물어 유장한 사고를 하는 것과 비교도 안되게 열악해.
말은 말일 뿐이고, 생각은 생각일 뿐이야.
중관의 핵심인 무자성도 모르면서 중론은 어떤 거라고 남한테 당당하게 가르치려 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네요. 언제부터 그런 성향이 생긴 건지 참..
중관을 기반으로 한 수행은 님이 어림짐작하는 거처럼 공공공 염불 외우는 게 아니라요, 사마타를 시작으로 해서 무자성에 대한 논증과 공성을 현관하는 위빠사나를 목표로 합니다. 보리도차제론 한 번 읽어보기라도 하고 생각일 뿐이니, 공염불이니 그런 말을 하세요.
시계소리 얘기는 소남스님 강의록 일부 복붙 해볼테니까 님이 어느 견해에 해당하는지 점검 해보세요. 무자성에 대한 이해는 없고, 미리 있었던 소리는 상정에 불과하다는 댓글로 봐선 잘쳐줘도 유식 정도 같네요.
(소승 등의)하위 학파들은 대상을 아는 첫 찰나만이 바른 식이라고 주장한다. 식의 두 번째 찰나는 재결식(再決識)이라고 불리는데, 비록 그것이 주된 대상을 정확하게 알더라도 량이 아니다. 재결식의 정의는 “이미 인식한 것을 다시 인식하는 마음”이다.
근식이 어떤 것을 직접 인식하자마자, 주로 마음 속에 분별[생각]이 즉각 일어난다. 분별은 현량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현량은 사물들 간에 차별을 하지 않고, 거기 있는 것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다. 분별은 표시[명칭]를 적용하고 다양한 사물들과 그것들의 속성 간에 차별한다.
현량은 분별을 벗어난다. 하위 학파들에 따르면, 다섯 근식[前五識]은 그것들의 대상과 그 대상들의 속성을 직접[현전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근식은 인식된 대상에 관해서 바르다[量]. 그것은 대상이 그 자신의 자상(自相; 개별적 특성)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래서 그 대상의 자성(自性)에 관해서 량이다. 짧게 말하면, 근식은 그 대상의 실질적인 자성을 인식하는데, 그것은 표현할 수 없다.
유식학파 체계에 따르면, 어떤 근식도 착란적인데,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때 그것은 인식하는 주체로부터 별개의 실체로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현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체와 대상[객체]이 모두 동일한 내부적 원인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대상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본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자에게 외부적인 대상의 모습은 착란적이다; 즉, 그러한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보는 식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귀류논증 중관학파 체계에 따르면, 범부의 현량은 착란적인데, 범부의 식은 그것이 현량이든 분별이든 항상 그 현현경(顯現境)에 대해서 착란적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자성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현현하는 반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그들의 현량의 정의에 ‘불착란적인’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착란적인 현량은 오직 공성의 직접 인식과 부처님의 승의제와 세속제 모두를 순수하게 인식하는 것의 두 가지 유형의 현량뿐이기 때문이다. 현량의 모든 다른 사례는 착란적이다.
현량 등이 뭔지는 알아? 하하 참나... 님이 경험하는 거, 쉬운 거부터 하라니까요. 참 나... 쉬운 거를 몬하면 어려운 거는 더더욱 몬해요.
현량을 학파마다 어떻게 다르게 정의하는지 설명하는 글을 옮겨놔도 현량이 뭔지는 알아요? 이러고 있네 에휴..
@법무아 아이고 참... 제 말의 뜻은... 님은 님 스스로 의미를 모르는 말을 가져다 놓는다는 겁니다. 오케이?
님이 경험하는 거에서 출발해요. 그래야 이해할 수 있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국어 능력도 좀 길러요.
무자성도 모르면서 중론을 가르치려는 님처럼 제가 이해 못하는 글을 옮기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