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것은
숲속에 보이지 않게 숨겨놓았던
제모습을 구겨지지 않게 펼쳐내려는
단정한 날갯짓이지요
나무가 바람에 흔들려주는 것은
단정하게 다듬어놓으려는 제모습을
헝클어지지 않게 풀어내고 있는
욕심 버린 몸부림이지요
바람에 흔들려주는 나무 앞에 서면
몸 둘 바를 모르고 다소곳해지는 까닭은
내 모습을 반듯하게 다듬어놓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이지요.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3.02.10. -
현대인은 점점 부끄러움을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에 시는 우리 현대인에게 종종 부끄러움을 일깨워주고, 그래서 사랑받는다. 윤동주의 시를 생각해보라. 어쩌면 시인은 자신에게서 부끄러움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 발견은 시적 형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위의 시에서 시인이 ‘바람’의 ‘날갯짓’과 ‘나무’의 ‘몸부림’이라는 형상에서 단정함의 윤리와 자신의 부끄러움을 찾아내듯이.
스며든다는 건
온 생을 걸려 닮아가는 일이다
천천히 스며들어
젖어드는 줄 모르고 있다가
헤어질 때가 되어야 비로소
흠뻑 젖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나로 물든 너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제야 마주 보고 깔깔거릴 수 있겠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인사할 수 있길
Good Bye!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3.02.08. -
시에 따르면, 스며듦은 “온 생을 걸려” 이루어진다. 하여 스며듦은 서로를 닮게 해서 상대방이 자신처럼 익숙해지도록 만들고, 우리는 서로 스며들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스며듦을 발견하도록 하는 사건은 이별이다. 이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흠뻑 젖어 들어갔음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헤어질 때가 되어야 우리는 “마주 보고 깔깔거릴 수 있”는 것이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3.02.07. -
아버지에게도 아버지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일 수 있음을 잊고 산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만 하다는 듯이. 위의 시는 누군가의 아들로서의 아버지를 발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이 누군가의 아들이었음을 기억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기억은 ‘사십 년’이 넘도록 스며들어 있는 특정 장소에 대한 감각-‘할아버지 냄새’를 통해 상기될 수 있다.
〈이성혁 / 문학평론가〉
Frozen Lake (from "The Human Stain", Arr. for Piano & Cello) · Rachel Portman · Raphaela Gro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