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 공무도하 외 1편
서안나
1
호스피스 병동에서 바라보는 밤은 왜 사무적인 걸까
의사는 호스피스 병동 앞에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한다고 했다
2
고레다 히로즈의 영화를 보았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피를 나눈다는 건 무엇일까
3
침대에 기대어 잠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할 때
왜 먼지 냄새가 나는 걸까
병실 창밖에는 메마른 구름비나무 한 그루
4
아픈 사람은 5층 같아서
걸어 올라가다 보면 내가 먼저 지치지
간병은 지루하고
지친다는 것과 슬프다는 것은 구별하기가 어려워
나는 새벽에 병원 지하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인간의 존엄함에 대하여 생각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병실의 시간과 창밖의 구름들
나는 구름을 쳐다보며
어떤 기적 같은 형상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라
이 저녁
병자들은 무용하여 아름답고
저녁의 문장은 링거처럼 맑고 차갑지
물 끝에 아스라이 서 계신
당신,
공무도하
공경도하
봇디창옷
말은 사람에게 상처 입혀 무릎 끓게도 하지만
봇디창옷은 아픈 곳을 감추는 소매가 긴 저녁이 되기도 합니다
점점 사라지는 제주어를 적어보는 봄밤
제주의 아이들은 정작 제주어를 모릅니다
나이 든 어머니와 옷장을 정리하다 낡은 봇디창옷에 손이 갑니다
봇디창옷에 뭉클거리는 오 형제가 검은 배꼽을 오똑 내놓고 누워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할 말이 많아집니다
어머니의 제주어에는 뼈를 버린 사람이 삽니다
눈과 입에서 웃음이 먼저 번지는 어머니
세상의 모든 국경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집니다
바람 든 콥데사니 껍질 같은 어머니의 귀에서
아이들이 옷을 벗고 물뱀 되어 흩어지고
맞춤법에 걸린 바당과 할망당 심방들이 제물 차롱을 지고
징게징게 꽹과리를 치며 걸어 나옵니다
어미가 물애기에게 소매가 긴 봇디창옷를 입힌 마음
80년 된 콥데사니 같은 알싸한 제주어가
내 눈에도 뾰족하니 돋습니다
*봇디창옷: 귀한 아기에게 소매가 밤처럼 긴 옷을 삼베로 만들어 입힌 어미의 마음.
어미는 아기가 전생의 기억을 지우는 동안 깃과 섶을 달지 않고 기다리지.
*콥데사니: 제주에선 콥데사니를 제사 음식에 쓰지 않지. 콥데사니라고 부르면 제주의 제삿날이 마늘처럼 매워지네.
*심방: 신을 모시는 심방들이 징게징게 굿하는 날 신도들이 준비한 제물 든 차롱을 굿당에 나란히 올린다. 억울하게 죽은 저싱 사름을 위해.
*물애기: 물애기라고 부르면 나도 물렁거리는 진흙덩어리가 되네.
― 서안나 시집, 『애월』 (시인수첩 / 2023)
서안나
1990년 《문학과 비평》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 『새를 심었습니다』,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 『정의홍 선집 1·2』 『전숙희 수필선집』,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이 있음. <불교문예 작품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제주작가회의 회원. <서쪽>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