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빈의 컵-현상과 본질
식탁 위의 접시가 완전한 원으로 보이는 경우는 없는데
어떻게 원으로 지각할까?
왜 흰 종이는 그 위에 붉은빛을 비추더라도 하얀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사물을 서로 다르게, 혹은 사실과 다르게 보는 것일까?
게슈탈트(Gestalt) 심리학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의 논의 중
이른바 ‘착시’라고 불리는 현상들이 있다.
검정 바탕의 회색은 흰색 바탕의 회색보다 밝아 보이고,
루빈의 컵은 마주보는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거의 모든 인쇄물이 그러하듯,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웹사이트의 모습도
확대해 보면 형상을 알아보기 어려운 수많은 픽셀들의 조합이고,
우리가 보는 영화도 착시 효과에 기댄 수많은 정지 장면의 연속이다.
게슈탈트(Gestalt)는 ‘사람마다 다른 방법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며
루빈의 컵을 볼 때 지각을 결정하는 요인은 그 사람의 지각적 습관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는 ‘어떠한 물리적 현상도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모든 정신 현상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라고 한 브렌타노의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착시를 경험하게 되는 까닭은 우리의 의식이 기본적으로
통일성, 연속성, 유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웹페이지를 볼 때 만일 동일한 사이트 내에서 페이지를 이동한다면
우리의 의식은 페이지 구성의 통일성, 연속성, 유사성을 요구한다.
대부분의 웹사이트의 인터페이스는 이를 기본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본다는 것은 눈이 보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마음은 눈만 가지고는 볼 수 없는 대상들을 본다.
현상과 본질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사전적 의미로 `현상’은 관찰할 수 있는 사물의 형상이고
`본질’은 사물의 현상 뒤에 있는 실재라 한다.
그리고 현상과 본질은 반대되는 개념이라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이두가지는 서로 별개의 것일까?
예를 들어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어느 날 한쪽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상대방에게
우리 그만 헤어지자고 말하고 결국 둘은 헤어진다.
두 사람의 보이는 관계는 끊어진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비쳐질 것이다.
그러나 헤어진 후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그리움)과
둘의 추억에 남아있는 그들의 모습은 계속 이어진다.
그들의 영혼의 교감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면 둘이 헤어졌다고 볼 수 있는가?
서로 상대방의 현상적 존재를 잃어서 슬퍼했겠지만,
다시 생각해 어차피 둘은 같은 공감대에 존재하기에
둘은 각자의 생활을 해 나갔을 것이다.
또 비가 내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흔히 구름이 생성되어서 비가 내린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 그 구름의 근원은 어디인가?
지상의 물이 증발되어 구름이 되고 그것이 비가 되어서 다시 지상에 내린다.
여기서 지상의 물이 증발하였다고
그것이 영영 되찾을 수 없이 빼앗겨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것이 순환되어서 다시 지상의 물을 보충해준다.
이로써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없는 그 자체로 남는 것이다.
가령 주식에 투자하다가 돈을 날렸다고 자살을 시도했다면
그건 어리석은 짓이다. 왜 이면에 있는 본질,
즉 언젠가는 나에게서 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고,
그리고 어차피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너무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한다.
새옹지마란 중국의 고사성어가 있다.
행복의 뒤에는 불행이 있고, 불행의 뒤에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면 현상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세상을 등지는 사람도,
삶을 슬퍼하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다.
어차피 모든 것은 하나인데….
CAP = Creative + Active + Posi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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