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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믿음, 약속의 유업
갈 3:10-20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갈 3:10-20 / 그렇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셈입니다. 성경이 매우 분명하게 ㄷ)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ㄷ. 신27:26) 11) 유대교의 율법을 고스란히 지켜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여태까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 길은 믿음의 길뿐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예언자 하박국이 ㄹ)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사람에게 살길이 있다'고 한 말도 같은 뜻입니다. (ㄹ. 합2:4) 12) 율법에는 ㅁ) `율법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되어 있으니 이 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ㅁ. 레18:5) 1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성경에 ㅂ)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이다'라고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ㅂ. 신21:23) 14)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이방인들에게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15) [율법과 약속]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보통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문서로 만들고 서명을 하면 변경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가서 어떤 것을 대신 집어넣을 수도 없습니다. 16)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과 그 후손과 ㅅ)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여기서 `후손들'에게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하십시오. `후손들'에게라고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유대인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 되겠지만 `후손'에게라고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ㅅ. 창13:15,17:7,24:7) 17)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을 통해서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후 430년이 지나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뒤에도 무효가 되거나 변경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문서로 만드시고 서명을 하신 것입니다. 18) 만일 율법을 지켜야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방법과는 다른 것이어야 하겠지요. 아브라함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9)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약속을 주신 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덤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가리킨 후손, 곧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또 하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는 천사들의 손을 거쳐 모세에게 주셨고 모세는 그것을 백성에게 주었습니다. 20)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는 그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직접 그에게 주셨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운명을 설명하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인간을 속량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인간이 받은 이 놀라운 복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 언약은 결코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는 영원한 약속입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10-14) 바울은 성경을 인용하여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 사람은 저주 아래 있고(10; 신 27:26),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며(11; 합 2:4),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그 가운데서 산다고 말합니다(12; 레 18:5).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신 21:23) 율법의 저주에서 인간을 속량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고, 믿음으로써 성령의 약속도 받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저주는 믿음으로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15-18) 아브라함의 유업은 약속에 의해서 얻는 것이고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언약 아래 율법이 있고, 율법 위에 언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의 저주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시기 위해 일시적인 방편으로 주신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인간은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이 언약은 모세 시대의 율법보다 훨씬 이전에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이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20) 율법이 언약보다 아래에 있다고 해서 율법이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구원의 역사 안에서 율법이 가진 온전한 가치가 있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율법의 역할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구원의 약속 그 자체이시며 사람이 받을 저주를 자신이 대신 받으심으로써 구원의 약속을 역사 안에 실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율법과 그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을 믿는 것뿐입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 율법과 죄에 매여 고단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율법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은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어떤 분이 이런 비유를 하였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사는 사람은 혼자 힘으로 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우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기만 하면 넘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넘어지다가 포기하고 맙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전거를 타는데 뒤에서 예수께서 붙들어 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얘야 걱정하지 말고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라” 그러면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뒤뚱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지려고 하면 뒤에서 예수께서 붙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뒤뚱거리다가 보면 자전거를 잘 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믿음입니까? 행위입니까?
갈 3:10-14 / 박조준 목사
본문은 우리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얼른 읽 을 때는 그 사상의 개념이나 낱말들이 퍽 어려워 보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중심 문제,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기 때 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방향에서 말 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11절).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정죄받는 것의 반대입니다.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 하나님께 용납받는 것, 하나 님의 자애로운 웃음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친구와 친구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 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형제와 형제 사이에, 이웃과 이웃 사이에,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호의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합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우리 인간은 시조의 죄로 말미암아 날 때부 터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와 마찬가지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바른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면 마음에 평 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편 32편 1∼6절의 시를 기억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 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이 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 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이 얼마나 범죄한 인간의 영혼을 생생하게 그렸습니까? 죄를 품 고 있는 동안 얼마나 마음이 불안한지 그 뼈가 쇠하고 여름 가물에 마름처럼 바싹 바싹 타는 것 과 같은 모습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죄 지은 인간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지식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돈으로 평안을 살 수 없습니다. 권세로 평화를 누리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하나님 과 원수가 되어 있는 동안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범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 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움을 받아 하나님께 정죄 를 당하지 않을 때 복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시편 32편 5절에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 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 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했습 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 베드로도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 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 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는 이사야서 55장 1절 이하에서 그 당시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인간들을 향하여 간곡하게 외쳤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 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 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 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며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 하시리라.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무리 하나님과 대적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던 우리가 자신의 죄를 알고 가슴 아파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서 나아오면 우 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참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 것을 말합니다(11∼12절). 본문 11절 과 12절에 있는 대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습니 다. 여기 살리라 를 다른 번역대로 하면 그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 은 물론 육체적인 생명, 생물학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 영원한 생명, 이 세대의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세대의 생명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에 관한 정의는 요한복음 17 장 3절에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니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 이란 하나님과 바른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의 미합니다. 그리고 영생 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친교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 가 하나님이 마련하신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때 그것이 곧 영생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고, 에덴 동산에서 내쫓겼 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육신이 당장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낳고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 러나 그 영혼은 이미 죽었고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생명만 남은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교제하고 있습니까? 영생을 얻은 것입니 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적대 관계이고 그와 친교가 없습니까? 사망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과 영생 은 긴밀하고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호 적인 관계에 있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 리가 하나님과 한번 화해한 다음에는 우리에게는 그와의 친교가 허락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런 체험이 있는 사람만이 아는 일입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울던 새도 잠잠케 한다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친교를 가질 수 있습니까? 바울이 표현한 대로 말한다면 어떻게 죄인이 의롭게 되고 어떻게 영원한 생명 을 얻을 수 있습 니까? 본문이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11∼12절은 양자택일의 경우를 말합니다. 구약 성경대로 11절의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는 것과 12절의 의를 행하는 자(율법이 요구하는 것)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했습니다. 이 두 말은 다 구약 성경에서 인용된 것인데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하박국 2장 4절에서, 그리 고 율법의 요구를 행함으로 산다는 말은 레위기 18장 5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말씀이 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은 모두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 그는 살리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모두 한 사람을 향해 영생을 약속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런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영생을 얻는 길에서 서로 다르게 다뤄지고 있습니 다. 전자는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자는 행하는 자에게 영생을 약 속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믿음을 구원의 길로 삼는 데 비해서 후자는 구원의 행위를 길로 삼습 니다. 전자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의롭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하는데 후자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이것이 양자택일의 경우입니다. 어느 것이 참된 것입니까? 사람이 의 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입니까? 행위로입니까?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이 믿음에서입니까? 행함 으로서입니까?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값 없으신 은혜 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이 조금이라도 수고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서로 반대되는 문제를 가지고 복잡하게 만들고 있 습니까? 본문 10절을 보십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 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 음이니라. 이 말씀은 구약 신명기 27장 27절의 인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중에 아그립바 왕 앞 에서 변명할 때에도 그랬듯이 그의 가르침이 선지자들과 모세가 말한 것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 려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율법의 모든 계명 가운데서 어느 하나라도 어긴 사람에게는 저주가 엄숙하게 선언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저주하는 신(a god)보다 축복해주시는 신(神)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성경은 죄를 범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 고 원수가 된 것은 형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죄와 사망 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인간의 입장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죄의 보편성을 단언합니다. 그는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나는 거기서 제외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존엄한 사람까지도 죄는 예외 없이 지배합니 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 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사도 요한은 죄를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법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도 않으며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떠한 인간도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의 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12절)는 것은 마치 하나의 공리처럼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행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가운데서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바울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 래 있다 고 10절에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하는 일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선행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분투한 다고 해도 이 모든 것 중 어느 한 가지도 죄를 범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길은 절망으로 끝났습니다. 그 길에는 의롭게 됨이나 생명은 커녕 오로지 어두움과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 상반에서 이렇게 결 론지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제 본문 13, 14절에 믿음의 선택에 대한 것이 다뤄집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소개됩니 다. 사도 바울은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 하여 완성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 리스도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악에서 건지셨습니다. 속량하셨습니다. 율법의 저주 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무서운 노예의 상태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블런트 감독은 바울은 그 단어 하나 하 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고 했습니다. 여기 13절에 말한 저주 는 10절에서 말하는 저주 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가운데서 건지신 바 이 율법의 저주 는 우리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 자신이 저주 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저주는 우리에게서 그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자원하여 자신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은 바 되셨습니다. 그 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 이까? 하고 외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에 관한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확증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23절 하반). 사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기 름 부으신 자가 보좌 위에서 통치하지 않고 나무에 달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그들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한동안 예수는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이 무서운 저주를 받았습니까? 그가 그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는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 은 바 되셨다고 성경은 말했습니다. 본문을 보세요.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 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 위해 죽으시고, 우리 위해 부활 하시고, 지금 우리 시대에 살고 계신,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격적으로, 생명적으로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가 있습니 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가 있습니까? 그 대답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입니 다. 14절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함 이었다고 했습니다. 믿음 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는 공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의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의 가치는 믿음 그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 상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믿음은 귀하신 보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붙들지 아니하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셨습 니다. 믿음은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옛날 모세와 같이 인간의 두 가지 운명은 축복과 저주라고 말합니 다. 13절과 14절을 볼 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그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 은 아브라함의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왜요? 아브라함 자신이 믿을 때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 다. 그리고 그를 향해서 하나님이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 을 것이니라 (창 12:2∼3)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것처럼 약속된 축복 속에는 하나님과 화해함으로 의롭게 됨과, 하나님과 교 제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삼중의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들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무한하신 축복 을 다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주를 제거하라
갈 3:10-13 / 피영민 목사
서론
사람은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 합니다. 그리고 행동 자체보다도 “행동의 바른 원리”가 더 중요합니다. 행동원리가 비뚤어지게 되면 열심히 행동해도 소용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나는 걸어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겠다.’는 행동목표를 가졌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는 북쪽으로 걸어가면 부산이 나온다는 행동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북쪽으로 열심히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걸어가면 갈수록 결과는 부산에서 멀어지는 결과밖에는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것 못지않게 행동의 원리가 더욱 중요합니다.특별히 우리 인간의 영혼구원문제에 있어서 바른 원리를 따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원리가 잘못되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명백하고 바른 원리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의 원리는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원리를 따르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원리가 인기 있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적인 영혼구원에 관한 잘못된 원리는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스스로 착한 일을 해서 구원을 받으려 합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천국에 가고자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의 원리로 ‘네 자신이 너 스스로를 구원하라(self salvation)’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따라 아무리 열심히 선행을 해도 구원받을 수 없고 그의 영혼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선행을 통해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특별히 오늘 구원에 관한 성경의 바른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혼자이고 여러분은 다수이지만 저와 여러분 각자가 일대일로 면대하고 말씀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하며 들어, 말씀에 반응하며 결단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초청된 분들을 향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믿은 성도라 할지라도 복음을 다시한번 확신하기 원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그 당시에 존재하던 거짓선생들에 대항해서 바른 복음을 확립하려는 위대한 사도바울의 서신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바른 원리를 알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서를 읽어야 합니다.
1.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
본문에 나오는 첫 번째 원리가 10절 말씀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온갖 일”을 개역개정판에서는 “모든 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누가 저주아래 있는 자인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책의 많은 내용 중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거룩하고 바른 계명으로 십계명의 모든 것을 항상 행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다른신을 한번이라도 여러분 앞에 두고 섬겼다면 죄인이요 저주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우상에게 한번이라도 절해본 사람은 죄인이요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제삼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건하고 망령되게 한번이라도 불러본 사람은 죄인이요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입니다. 칠일 가운데 하루는 하나님의 날입니다. 그 하나님의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요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런 네 가지 계명이외에도 사람끼리의 여섯 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부모를 제대로 공경치 않은 사람은 죄인이요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제육은, ‘살인하지 말지니라’입니다.혹시 생명을 죽인일이 있는 사람, 말이나 글로 사람을 죽인일이 있는 사람, 혹은 직접으로 죽인일이 있는 사람은 죄인이요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제칠은, ‘간음하지 말지니라’입니다. 간음한 사람은 죄인이요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제팔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입니다. 남의 것을 도적질한 사람, 국가의 것을 도적질한 사람은 모두 죄인이요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제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입니다. 제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입니다. 이웃의 아내나 종이나 소유를 탐낸 적이 있는 사람은 죄인이요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나는 가능한 한 지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내가 십계명 가운데 여덟 가지는 잘 지켰고 두 가지에 꼭 걸립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죄인이요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있는 모든 내용을 항상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저주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약할 때 가끔 좀 어깁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죄인이요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모든 내용을 항상 지켜야 하는데 항상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나는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다 지켰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짓말이라도 문자적으로 다 지켰다고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지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사람도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직접 간음은 안했다.” 그래도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다면 그는 이미 간음한 것이나 마찬가지 죄인이요저주아래 있는 자입니다. 또 “나는 사람을 죽인일이 없다.”고 말해도 마태복음 5장 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분노하고 욕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분노하고 욕해도 살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지켜야 됩니다. 마음으로 못 지킨 사람도 저주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모두다(all) 항상(always) 행동으로나 혹은 마음으로나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는 무엇인가? 그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선고인 것입니다.본문 10절을 다시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된 온갖 것, 모든 것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 저주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현재적 저주(present curse)입니다. 아직 지옥에 떨어진 것은 아니로되 죄인들의 현재 주소는 저주입니다. 신명기 28장 16절로 19절의 말씀이 현재적 저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저주 상태에 있는 사람은 어딜 가서 무엇을 해도 다 저주가 됩니다. 돈을 벌었습니까? 저주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 돈이 저주가 됩니다.자식이 많으십니까? 자식이 똑똑합니까? 저주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나중에 저주가 됩니다.출세를 하셨습니까? 저주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나중에 저주가됩니다. 잘생기셨습니까? 저주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저주가 됩니다. 인기가 있으십니까? 저주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후에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적인 저주입니다.
둘째, 미래적 저주(future curse)입니다. 현재적인 저주는 장차 올 미래적인 저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밥숟가락을 놓는 순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의사가 “이 사람은 사망하였습니다.”라고 선고하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다가옵니다.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우리에게는 옵니다. 육신은 흙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우리 영혼은 육신에서 떠납니다. 그때에 영혼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가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선고를 들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eternal fire)에 들어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미래적인 저주, 게헨나요 지옥입니다.
셋째, 우주적 저주(universal curse)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다 항상 행동으로나 마음으로나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담의 후손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은 모두다 예외 없이 자연 상태에서는 저주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중립상태에 있어서 잘하면 천국에 가고 잘못하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도 저주상태요 살아가면서도 저주상태요 죽어서도 저주상태에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기본형편이라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가만히 있으면 다 저주받은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 안방에 태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육 칠 십년 안방에서만 살다 죽었다 그래도 그는 저주상태인 것입니다. 자연 상태에서의 모든 인간은 저주상태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넷째, 두려운 저주(fearful curse)입니다. 나는 저주받아도 좋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주의 핵심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은 물론 육신의 사망을 합니다.그러나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인 사망이요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영원 사망, 둘째 사망인 것입니다. 영영히 타는 불 못에 던져지는 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 합니다.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모든 면에서 성공했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붙어있는 저주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그가 대통령이 됐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있는 하나님의 저주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는 실패자입니다. 기업체의 회장이라 해도 자기에게 있는 저주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의 인생은 소용없는 인생입니다. 저주를 제거해야 됩니다.내게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진노를 반드시 제거해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저주가 머물러 있는 것을 바로 깨닫고 제거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핵심은 스스로 이 저주를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항상, 모든 율법을 지키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살아보십시오. 과거에 죄지은 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앞으로 내가 선행으로 갚아보겠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과거에 안 된 것이 앞으로 되겠습니까?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들에 가면 안 샙니까? 과거에 안 됐는데 미래에 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이외에 다른 모든 종교의 원리인 “self salvation” 즉, 자기 스스로의 선행에 의해 스스로 구원 받으려는 생각은 “잘못된 원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행을 행할 수도 없거니와 이미 임해있는 저주를 스스로 제거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그리스도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아 주셨다.
본문 13절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리셨다고 했습니다. 나무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redemption)하셨습니다. 속량은 대가를 치르고 저주에서 해방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노예를 돈을 주고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속량입니다. 대가를 치르시고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그냥 용서 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 전반에도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로되 죄는 없으신 분으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동정녀 탄생을 못 믿겠다고 하는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게 하는 것을 왜 못하십니까? 어떤 분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한 것을 못 믿겠다고 하는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여 죄가 없으신 의인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심장이 창에 찔려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 대신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son of man)이시며 아울러 하나님의 독생자(son of God)이십니다.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우리 대신 저주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임하여 있는 저주를 제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그렇다면 사람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있는 저주도 제거하셨다는 말인가?”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봐야 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할 때에 “우리”는 “나”를 포함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봐야 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으시며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의 저주가 내게 머물러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하나님 아버지,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하나 둘도 아니고 다 어겼습니다. 마음으로도, 행동으로도 어겼습니다. 내게는 저주가 이미 선포되어 있는 것을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통해 알았습니다. 내 스스로 이 저주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저주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의지하나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원하나이다.”라고 아뢰어야 합니다. 마음에 이런 소원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사람이요 그리스도 예수님이 이미 저주를 제거하신 사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래도 남에게 해를 안 끼치고 잘 살았는데 왜 죄인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진짜로 해를 안 끼치셨습니까? 또 “내가 모든 게 잘 되는데 왜 저주를 받았느냐? 저주는 너나 받아라.”며 억지를 씁니다. 또한 “나는 착하게 살고 내가 바르게 살아 내 힘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며 억지를 씁니다. 그런데 여러분 양심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저주를 제거한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전파한 것은 “회개하라. 그리고 예수를 구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네 죄가 사함 받고 영생을 얻어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가고 네게 임한 저주가 사라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위대한 해방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은 사람은 저주가 제거되어 사라지고 결코 저주가 없는 것을 믿으십시오. 자신의 선행, 공로, 착함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원리입니다. 그 원리를 따르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려하면서 계속해서 북쪽으로 가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착함, 선행으로 구원받으려 하지 마시고 예수께 나와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으십시오. 이런 사람은 저주가 제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라는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믿음으로 제거되는 저주
회개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저주가 제거됩니다. 믿음으로 제거되는 저주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저주는 믿는 순간 즉각적으로(immediately) 제거됩니다. 예수는 오늘 믿었는데 저주는 십년 뒤에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으로 소경은 눈을 떴습니다. 또 중풍병자가 예수님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죽은 소녀도 예수님께서 “달리다굼 소녀여 일어나라” 명령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구원은 즉각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는 그 순간 즉각적으로 저주가 제거되는 줄로 믿으십시오.
둘째, 저주는 완전히(perfectly) 제거됩니다. 저주의 일부만 제거되는 게 아닙니다. 현재의 저주, 내세의 저주, 영원저주, 모두다 제거되는 것입니다. 요즘 나오는 어떤 책은 ‘예수 믿어도 가정에는 저주가 여전히 머물러 있다.’는 잘못된 말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가게이든 기업이든 가정이든 사업이든 하나님이 모든 저주를 완전히 제거해 주시는 줄로 믿으십시오. 물론 예수 믿고 구원받으니 그동안 오래 섬겨온 악령들이 와서 “너 전에 나 섬기더니 왜 그러느냐?”며 자꾸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섬겼던 주인이 “너 나한테 밥 주더니 왜 이제는 안주느냐?”하며 자꾸 괴롭히려 하는 것이지만 저주가 아닙니다. 악령, 귀신, 마귀들은 성경에 파리의 왕, 바알세불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파리들이 날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저주라 합니까? 그런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를 멸망시키고 죽이려 하는 악한 사단, 악령들은 떠나갈지어다.” 명령을 해서 쫓아버리십시오.
셋째, 저주는 돌이킬 수 없이(irreversible) 제거됩니다. 하나님이 저주를 제거하셨다가 우리가 하는 행동을 보고 다시 저주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주를 한 번 제거하면 다시 돌려주지 않으십니다.
넷째, 저주는 영원히(eternally) 제거됩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33절로 34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송사합니까? 누가 우리를 정죄합니까?누가 우리를 저주합니까?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도 우리를 저주하고 정죄할 자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는 자는 하나님이 저주를 이처럼 제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이 자리에 어떻게 오셨던지 간에 이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성령의 인도로 이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일대일로 간절히 권면합니다. 죄를 회개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제거해 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고 믿으십시오. 이것 이외에는 다른 원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만이 구원의“바른 도리”입니다.
“나는 오늘 안 믿고 좀 더 생각해 보고 다음에 와서 믿을래.”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저주가 일주일동안 더 함께 다니기에 좋은 친구입니까? 지금 저주를 떨쳐버리십시오. 다음주에 또 말씀을 들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말고 또 기회가 없을지 누가 압니까? 저주를 제거하시어 지옥을 피하시고 용서받으시며 영생을 얻으십시오. 그리하여 살아도 축복이요 죽어도 축복된 인생을 걸어가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아브라함의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위와 은혜
갈 3:10-14 / 홍정길 목사
대우에 다니시던 한 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이런 이야기 를 합니다. IMF로 구조조정을 시작 해서 사람들을 감축시키고 명예퇴직 시킬 때 부하직원 한 사람, 한 사람 잘라내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요. 전심전력으로 헌신하고 봉사하 던 회사에서 쫓겨났다는 울분으로 그 인생을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것 을 볼 때마다 너무나 안타까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 분들이 부럽다고 합니다. 회사가 앞 으로 어떻게 될지, 퇴직금이나 받고 물러날지를 걱정하는 대우 식구들을 볼 때 또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 리 눈으로는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모르겠어요. 구조조정할 때는 남은 사람들이
"나는 살았다!"고 했어요. 쫓겨난 사람들은 울면서 나갔습니 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나 간 사람이 부러운 자리에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축복이고 더 불행인지 를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런가하면 우리 인생의 선택에 있어서도 한 번 상상해보십시다. 내가 지금 내 남편 과 아내와 결혼하지 않고 내가 생각 하는 그 사람하고 결혼했다면 내 인 생이 어떻게 펼쳐졌을 것 같습니까? 제가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지금이 최선입니다. 딴 맘 먹지 마십시오. 정말 우리 생애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확실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을 성 경 본문 통해서 보여주기를 원합니 다. 두 선택의 내용이 있습니다. 하 나는 율법으로입니다. 하나는 하나 님의 은혜를 믿음으로입니다. 여기 첫 번째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 니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 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 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여러분, 인생 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는 '내가 정 말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입니다. 다른 말로 고친다면 '내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 을까?'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를 가지려고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 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지킴으로, 선 행을 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 다. 이것이 이 지상 모든 종교의 과 제입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선행함 으로, 좋은 계율을 지킴으로 하나님 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런 사람을 향해서 성 경은 말합니다.
"무릇 율법의 행위 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 니..."
율법으로 애쓰고 수고하고 노 력하는 그 사람이 저주 아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바 누구 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 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아무도 온전하게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십계명 을 압니다.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 우리가 반드시 지켜 야될 10개의 계명을 하나님께서 주 셨습니다.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 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 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웃 을 해하거나 탐내지 말라."
무수한 계명 가운데 '나는 이 계명에 대해 서 완전히 지켰다'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 은
"네가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다. 말하기를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 는 저주 아래 있는 자다."
"아니, 내가 그 때는 그래도 잘 지키고 살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그 때 잘 지키고 그 때 잘 살았느냐고 말하지 않고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만 잘 했느냐가 아니라 항상 잘 했냐고 묻고 있습니다. 모든 순간, 모든 시 간에 하나님의 율법에 충만한 순종 자냐고 묻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그래도 그 일만은 끝내주게 했지 않아요? 물론 이 율 법을 보니까 내가 잘못한 것도 사실 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참 잘 했 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 나를 버 리십니까? 그래도 내게 저주가 있다 는 말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어느 것 잘 했고, 어느 것은 못했느 냐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일입 니다. 이 계명만 잘 지켰는가 뿐 아 니라 저 계명도 잘 지켰느냐까지 입 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동네에서는 그래도 내가 괜 찮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날더러 그래도 덕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내가 저주받아야 됩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덕이 있든지 없든지, 사람들에게 좋 은 평판을 가졌던지 갖지 못했던지, 누구든지 모든 온갖 일에 항상 주의 율법대로 행하지 않은 자는 저주 아 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십계 명의 표면적인 내용만 갖고도 머리 가 숙여집니다. 나는 그렇게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말씀 을 다시 깊이 풀어주시기를
"네가 살인하지 않았다. 아니야, 네가 마음 으로 살인했으면 살인이야. 네가 간 음하지 않았다고? 마음으로 간음했 으면 간음한거야."
사람은 겉모습 밖에 못 봅니다. 하나님 눈에는 보 이는 것 있습니다. 뭐가 보입니까? 마음이 보입니다. 그런고로 누구든 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 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율법의 모든 행위는 우리 머리 위에 저주를 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 전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 가장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기 위해서 나 가고 나가고 나가도 그 분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율법 을 바로 지키는 사람들은 결국 절망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안된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다. 내가 하나님 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고 그 구 원은 나와 상관이 없다. 그 대신 저 주가 내 머리 위에 있다고 절망합니 다.
여러분, 이런 절망하는 인 생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해답을 주 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고 십자가입니다. 12절에 이렇게 말 합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 살리라 하였느니라."
아무도 자기 삶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 량하셨습니다. 내가 받을 저주를 주 님께서 다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 리고 주께서 그 저주의 값을 지불하 시고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언 제 그랬습니까?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 이니라."
여러분 동양에서 사람들을 나무에 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국가를 크 게 더럽히고 어지럽힌 사람들, 민란 이나 국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목 을 베어 효수를 했습니다. 목을 장 대에 높이 꽂아서 못되고 나쁜 놈, 저주받을 사람의 상징으로 매달아놓 았습니다. '이런 사람의 삶을 따라서 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효수(梟首) 라는 것은 목만 베서 메달아 놓는 것이고 효시(梟示)는 사람을 곤장으 로 쳐서 죽으면 목을 베지 않고 그 사람 목을 맨 채 나무에 달아 오가 는 사람들로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요근래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러다가 개화기 임오군란, 갑오경장 때 젊은 청년들이 법을 고치면서 어떤 경우 에도 그냥 목을 매달아 교수대 처형 하는 것 이상은 안된다고 못을 박았 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은 사람 목을 매다는 경우가 없습니다. 하여 튼, 나무에 높이 달려있는 시신을 보면 저것은 저주다, 저 인생은 저 주받은 인생이다라는 사실을 동양의 모든 국가가 동일하게 알았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율 법을 범하면 돌로 쳐서 죽이고 그 다음, 하나님의 진노 받기에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목을 매달아서 나무에 달아놨습니다. 그 의 일그러진 몰골을 보면서
"하나님 의 저주가 마땅히 이 사람에게 임했 지 않느냐? 이를 본으로 여겨 죄를 미워하고 주의 율법을 따라야한다."
고 가르쳤었습니다.
그랬는데 로마에서는 죽고 난 다음 목을 베어 매다는 것이 아 니라 아예 나무에 사람을 매다는 무 지무지한 십자가라는 사형대가 있었 습니다. 원래 이 십자가는 카르타고 에서 민족 반역자를 죽이는데 사용 한 사형도구입니다. 기본 개념은
"이 친구는 땅에 묻힐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시체라도 누워 있어서는 안될 못된 놈이다."는 의 미입니다. 대개 십자가에 못을 박을 때 손바닥에 못을 치지 않습니다. 손바닥에 못을 치면 사람의 체중에 의해서 찢겨 버리든지 빠진답니다. 그래서 손 뼈가 모두 모여 있는 팔 목에 못을 칩니다. 만져보면 못을 칠만한 자리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 도 사람을 그냥 오징어 말리듯이 팔, 다리를 쫙 펴서 못을 박아놓으 면 평균적으로 힘이 분산되기 때문 에 고통이 덜 하답니다. 이것을 느 슨하게 쳐놓으니까 손에 힘을 주면 발에 힘을 줄 수 없고 발에 힘을 주 면 손에 힘을 줄 수 없어서 의식이 있는 동안에는 이리 꿈틀 저리 꿈 틀... 너무 아파서 기절했다가 또 의 식이 돌아오면 꿈틀꿈틀 거립니다. 며칠이고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 대로 놔두었습니다. 로마가 카르타 고를 점령한 다음, 이 이상한 사형 제도를 자기 나라에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정했습니다. '아무리 극악무 도해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에 죽을 수 없다.' 그래서 시 세로의 글을 보면 '십자가라는 것은 치욕이고, 십자가는 저주고, 십자가 는 형벌이고, 십자가는 패배이고, 십 자가는 어둠이다. 십자가 문양은 로 마 사람들과 영원히 상관없다'고 했 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죄를 지었는 데도 로마 시민권자인 사도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사도 바울이 참수당했다는 예배당이 로마 에 있습니다. 그 목이 떨어져서 네 번인가 다섯 번 굴렀다는데 굴러 떨 어지는 곳마다 표식이 있다고 해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 겠습니다만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일 으키는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민권을 갖지 못했던 사도 베 드로는 그 극악무도한 십자가 형틀 을 확정받습니다. 그는 사형 집행인 에게 말합니다.
"나 같은 못된 놈이 어찌 우리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 을 수 있습니까? 거꾸로 십자가를 매달아주세요."
그래서 베드로는 거 꾸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 동 생 안드레는 십자가에 못박힐 때 사 형 집행인에게
"나도 감히 우리 주 님처럼 그 영광의 십자가에 달릴 수 가 없습니다. 어떻게 인생으로 주님 모습을 흉내낼 수 있나요? 십자가를 엇비슷하게 뉘어주세요."
그래서 X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X자 십자 가를 St. Andrew's Cross라고 이야 기합니다. 성 안드레의 십자가!
여러분, 그 십자가에 우리 주님이 달리셨습니다. 초대 교회 예 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는 사 실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십자가를 목에도 매고 사방에서 보니까 그렇지, 사형 집행 틀 중에서 어떤 사형대를 자기 종교 의 심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 습니까? 어디 그런 상상이 있을 수 가 있어요? 그래서 이 십자가가 어 떤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 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 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패배와 저주 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저주의 상징에 못이 박혔단 말이예 요. 그런데 그 저주는 그냥 저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13절은 다 시 말합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 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 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 라."
즉, '나무 아래 있는 자는 저주 를 받는 자다, 주께서 저주를 받으 셨다, 그 저주는 그냥 저주가 아니 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틀이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십자 가를 지러 올라가실 때 로마 군인들 의 무서운 채찍이 그의 등을 할퀴었 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 이요..."
주께서 십자가에서 못이 박혔습니 다. 손과 발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 위의 가시관이 힘껏 눌려서 가시 끝이 박힌 곳에 피가 주르르 흘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 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몸부림치고 바르게 하려고하면 할수 록 내게 하나님의 저주 밖에 없다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죄를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해 결해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처치하는 완전한 방법을 고안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십자 가를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약속하 신 저주의 시행처라고 믿으면 내 저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로 옮겨 집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자매 들이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왜 나 는 이처럼 재수 없는 인생인가, 내 삶에 있어서는 저주의 저주가 계속 되지 않았는가? 내가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한번도 내 마음에 유쾌한 날 을 갖지 못하지 않았는가? 내 마음 속에 어두운 그늘을 한번도 헤쳐보 지 못하지 않았는가? 마음 속에 깊 은 저주의식을 가지신 분 있으십니 까? 그 모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에 옮겨놓으시기 바랍니 다. 주께서 나의 저주되셨습니다. 여 러분, 행위는 나를 믿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결론은 절망입니다. 온전 히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내 저주에서 내가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혼자 그 늪 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 면 움직일수록 그 늪 속 깊은 곳으 로 더 빨리 빠져버리는 것과 같습니 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이 큰 막 대기를 주어서 그 막대기를 붙잡으 면 올라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 간은 내 저주에 빠져서 허우적거립 니다. 아침에 일어나도 유쾌함이 없 습니다. 저녁에 자면서도 기쁨과 평 안이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잘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무거운 억눌림이 있습니다. 내일 어떤 불길 한 일이 나를 뒤덮을까하는 저주의 식으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닙 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 라보시면서 내 모든 저주가 그 십자 가에서 시행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 랍니다. 내 저주는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 주받은 바 되사..."
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저주 받을 이유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렇 기 때문에 남의 저주를 대신 지실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분이 죄인 이어서 자기 저주를 자신이 받을 인 생이었다면 그는 자기 저주를 자기 가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님은 흠 없는 분으로 저주와 상관없 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래서 디모데전서 1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 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이 말을 믿으십니까? 나를 믿는데서 그리스도, 주님을 믿는 대로 그 믿 음이 바뀌어져야 됩니다. 이제까지 는 항상 나였습니다. 나 중심이었습 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완성하신 그 해결책,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옮겨집니 다.
아브라함은 몸이 늙어서 도무지 자녀 낳을 수 없는 조건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약 속하시니까 믿었습니다. 그것이 그 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미 내 무시무시한 저주가 우리 주님 께 시행되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믿 음으로 수납하는 것입니다. 그 때 내 저주는 옮겨지고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시는 의로 옷을 입습니다. 주님의 의가 내게 전가됩니다. 내 죄는 던져집니다. 하나님과 막혔던 장벽을 주께서 제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사귐이 시작되 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새로운 인생을 삽니다.
"아빠 하나님!"
여러분, 인 생 사시면서 참 외롭지 않아요? 그 런 인생들이여, 아빠 하나님의 이름 을 불러보세요.
"아버지!"
언제나 내 곁에 계신 분, 나를 나 보다 더 사 랑하십니다. 아빠 개념이 나 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 의 저주가 되신 주님, 십자가를 바 라보십시다. 나의 죄를 바라보지 마 시고 나의 저주를 바라보지 마시고 내 저주가 실현된 십자가를 바라봅 시다. 그 안에 내 구원이 있습니다. 그 안에 내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 에 내 인생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애쓰고 수고 해서 얻었다는 것, 내 노력의 댓가 이지 복음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내 대신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저주를 해결 해주신 우리 하나님, 그 놀라운 약 속을 내 것으로 믿을 때에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인쳐주십니다. 하나님 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주십니다. 그 리고 내 인생이 새로운 생애로 펼쳐 집니다. 내 저주가 십자가에 달렸고,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움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 르는 믿음의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 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둘 중의 하나를 선택 해야 됩니다. 내 노력으로, 내 믿음 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내 열심에서 내 죄의 모든 저주를 해결하신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완전하심,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 혜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인생의 방 향을 옮기십시오. 이 두 생애가 평 생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도 내재합니다.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 니까? 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어느 편으로 가길 원하십니 까? 이미 내 저주가 주님께 퍼부어 져서 내 모든 죄가 주님께 전가된 것을 믿으신다면 중심으로 할렐루 야, 찬송하십시오. 그 저주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지금 고통스럽다구 요? 그건 저주 아닙니다. 아빠의 사 랑의 채찍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고통 없이 크고 아름다운 인 생이 된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저 주가 없어야 되요. 저주가 없으면 아파도 좋습니다. 저주 의식만 없다 면 실패도 괜찮습니다.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산성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저 주는 이미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하 나님의 저주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 다. 요즘 책 중에 엉터리 책이 있습 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 라! 복음을 모르는 소리예요. 그 친 구는 율법에 갇혀있는 친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 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습니다. 믿습니까? 무슨 가계에 저주가 있어 요? 지금 그 사람들이 말하는 유전 적인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전 달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저주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복음을 모르면 그렇게 헛된데 마음을 뺏깁니다. 여 러분, 내 저주는 사라졌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해야 됩니다. 십자가 를 바라보십시오. 내 저주는 끝났습 니다. 이미 내 저주는 처형되었습니 다. 그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천국에 가 서도
"죽임 당하신 어린 양, 힘과 영광과 권능이 다 주께 있습니다"
하고 찬송으로 우리 주님 앞에 영광 을 돌려야 됩니다.
저주의 십자가
갈라디아서 3:13, 6:14 / 김삼환 목사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주셔서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저주 를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시고 마지막 죽 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살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육체 가 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 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확실히 저주의 십자가, 흉한 십자가, 보기 싫은 십자가, 무 거운 십자가, 모두가 피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잔인하고 악독한 사람에게 처형하는 형틀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신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지신 이 십자가가 그 한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과 기쁨, 소망을 상징하는 영생과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축복의 십 자가가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십자가와 하나 되어야 합니다. ‘나’는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주 예수와 함께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면 없어지느냐? 망하느냐? 십자가로 끝나 느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소금은 두 가 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소듐과 다른 하나는 클오라이드라고 하는 염소 나트륨이 합해서 소금이 된 것입니다. 나트륨과 염소는 따로 두면 독극물입니다. 먹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합해 놓으면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독이 전혀 없어지고 오히려 맛을 주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것 입니다. 그것만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물도 그렇습니다. 물이 무엇입니까? H2O, 산소와 수소입 니다. 수소는 H2, 산소는 O입니다. 이 두 가지는 원래 태우는 불붙이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소 나 산소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두 가지를 합하면 오히려 불 끄는 역할을 하는 물이 됩니다. 생명을 줍니다. 불은 생명을 없애 버리는데 물은 생명을 주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 여 주님의 죽으심과 나의 죽음이 합하면 죽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이 생명으로 나아가 게 되고 주님의 저주와 나의 저주가 합하면 저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축복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죄를 인하여 길이 없고 죽어야 마땅하지만 십자가를 만나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 에 달리신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천국을 가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의 저주는 완 전히 능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성격, 새로운 성질, 새로운 요소, 새로운 원소로 바뀌어 진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죄를 인하여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둘이 합하여 하나님께 나 아가는 자녀의 길,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신비합니다.
아무리 죽을 사람도 십자 가 앞에 나오면 그 뒤에 길이 있습니다. 영생의 길,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십자가 밖에는 길이 없습니 다. 그래서 모두 교회 나올 때는 길이 없어서 나오고, 길이 십자가 뒤에 새로운 길, 놀라운 영생의 길, 우리가 피하는 도피성의 길을 찾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성지에 가서 지금 터키 땅에 있는 안디옥 을 가봤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처음 선교사로 파송한 귀한 교회입니다. 이 안디옥 교 회는 그 당시 세계 5대 도시에 들어가는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기독교가 자유를 얻기 까지 적어도 250년 그 교인들이 모두 예배드리던 장소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 다 신고를 받으면 밑에서 로마 군인, 경찰들이 와서 습격을 합니다. 붙잡아 갑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 리면서도 언제나 망을 보고 누가 오는지 이렇게 지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몰아닥칠 때 빨리 연락을 하면 그 안에 있는 분들이 예배를 드리다가 바로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완전히 바위를 뚫어 4Km를 터널을 만들어 그 곳으로 모두 빠져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뒷길로 빠져 나갑니다. 군인들이 와 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틀림없이 예배드린다고 했는데 와보면 아무도 없습니 다. 그래서 나중에 그 구멍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못 들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만 생각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던 성도들의 몸이 얼마나 약합니까? 그래서 자기들만 빠져나가게 아주 약 한 구멍으로 이 뚱뚱한 잘 먹던 로마 군인들이 단 한 명도 못 가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뒤에 는 길이 있습니다. 저주받고 불행하여 ‘나는 이제 죽었다. 나는 끝났다. 나는 자살해야 되겠다. 우리 집은 이제 망했다’라고 생각하는 분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오면 길이 있습니다. 잘 사는 길이 있고, 사는 길이 있습니다. 영생의 길, 행복의 길도 물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낙심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저주도 십자가에서 해결되고 십자가 다음에 새로운 길, 십자가 다음에 새로운 통로, 영생을 위하 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 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에 승리 하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나 자신을 잘 살도록 도 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얼마나 정욕이 있고, 옛사람과 혈기가 있고, 교만과 강퍅한 마음, 이 기적인 마음, 얼마나 불의한 마음이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마음들이 십자가와 하 나 되면 중성을 시키기도 하고 억제하기도 하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이 우리 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생애를 끝까지 주의 십자가로 우리를 인도하여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도 십자가와 함께 가면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고 적응할 수 있도 록 만들어 주십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모든 성도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토굴 속, 환란 속에서도, 저 카타콤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를 붙잡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몇 번 만나도 그런 이야기를 안 들었는데 듣고 많은 감동 을 받았습니다.
우리 극동 방송국에 사장으로 계시는 김장환 목사님께서 결혼을 해서 40년 전에 그 사모님을 데리고 한국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살면 되는데 미국에서 모두 좋은 자리, 너무너무 세계적인 자리가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너는 네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듣고 고국으로 왔습니다. 가장 문제가 사모님입니다. 사모님은 이미 40년 전, 우리가 6.25사변 바로 직후 에 비참하던 때 미국에서 최고의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을 한국으로 데려왔습니다. 데려와서 수원에서 개척을 했습니다. 서울도 아니고 수원에서 개척을 했습니다. 그 당 시는 침례교가 뭔지도 잘 몰랐습니다. ‘침주는 곳인가?’ 그 때는 장로교만 생각했지, 침례교를 잘 모르 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 또 부모님과 같이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온 식구들이 한 집에 같이 살았습니다.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제일 음식문화가 적응하기 어려웠고, 어른들과 사는 것이 너무 어렵고, 방도 우리 한국 그런 방에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제일 어려운 것이 화장실입니다. 첫째로 화장실에 문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그 당시 문이 없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문은 고사하고 지붕이 없어 항 상 천국을 보고 볼일을 봤습니다. 지붕, 비가와도 그대로 맞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얼마나 미국 사람이 어렵습니까? 방방에 자기 화장실이 있던 삶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밥을 적게 먹고 안 먹으면서 딱 밤12시 지나 한 번만 화장실에 갔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해야 시아버지 안 만나고 시동생 안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간을 택했습니다. 그런데도 밤중에 또 시아버지가 올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도 모두 잘 참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가니까 참습니다. 남편보고 못 참습니다. 사람보고 못 참을 일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어제 신문에 난 기사를 보셨습니까? 여자들, 특히 어머니들이 지금 1년에 자녀, 남편, 부모 두고 집을 떠나 가출한 사람이 12,000명입 니다. 12,000명, 14,000명 정도가 해마다 집을 떠나갑니다. 기분 나쁘면 떠납니다. 잔소리 하면 떠납니 다. 마음에 안 들면 떠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밤마다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 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세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바라보 고, 십자가 짊어지며, 십자가 사랑하면, 십자가와 하나 되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 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죽음까지 정복하여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도 항상 피를 뿌리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피 뿌리고 기도했습니다. 피 뿌린 다음에 청소했습니다. 피가 없는 날은 어떤 일과도 시작할 수 없었던 것은 피가 우리의 모든 길을 열어 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 여 하나님이 우리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믿고, 십자 가 앞에 나오면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그대로 이루어집니 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14절에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하여 뱀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독사의 독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며칠 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모세야, 너는 장대위에 높이, 높이 구리 뱀을 달아라. 모든 백성이 이 구리 뱀을 보면 나음을 얻으리라.’ 이 구리 뱀은 온 인류의 구리 뱀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 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신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그 구리 뱀이 바로 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구리 뱀을 보고 치료함을 받았지 만 온 인류를 위하여 장대 위에 높이 달리신,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구리 뱀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뱀에 물리 유대인이 고침을 받듯이 온 인류의 죄와 마귀에게 물려 있던 붙잡 힌 독이 온 몸에 진행되고 퍼져나가는 인류의 죄악들이 예수의 십자가에 구리 뱀 앞에 다 깨끗함을 얻 고, 저주가 사라지고, 그 능력이 중성화 되고, 파괴되고, 무너져서 주어야 할 생명들이 새로운 생명으 로 살아나는 줄로 믿습니다. 오직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이 모든 은혜를 우리가 받아 누리 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은 그래서 십자가를 알 아야 눈을 뜨게 됩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남의 집 지하에서 아무것도 먹을 것도, 환경도 열악하여 텔레비전도 없이 남의 집 에 가서 항상 구경하고 있다가 어느 날 아파트로 올라가서 집도 새집을 얻었습니다. 그 집에서 텔레비 전, 냉장고, 책상도 가져다 놓고 자기 방도 주어졌습니다. 너무너무 좋아서 친구들 오라고 해서 같이 거기 지냈습니다. 그런데 얘가 이렇게 기뻐해도 어머니는 늘 우십니다. 왜 이렇게 좋은 환경에 어머니 가 우는지 몰랐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월남전에 가셔서 전사함으로 이 집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가 돌아가시면서 국가로부터 주어진 그 돈으로 이 집을 얻고 텔레비전을 사게 된 것입니다. 얘는 아버 지의 죽음 때문에 이렇게 얻은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도 교회 나와서 그냥 잘 살고 잘 먹으니까 기뻐하고 이렇게 생각하다가 신앙이 장성하여 지고 초등학교라도 다니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가 주님이 죽으심으로 받은 은혜로구나. 내가 목사 된 것, 주님 죽으심으로 얻은 것이로구나. 내가 이 대접 받는 것, 주님이 죽으 심으로 내가 이 평안 주님이 죽으심으로 이 행복, 기쁨이 주님 죽으심으로 얻은 은혜로구나. 보혈의 은총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 십자가에 달리사 날 구원해 주셨으며 주 예수님 고난 받아 나 평화 누립니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주님 죽으심으 로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 성도가 받은 백만 가지, 천만 가지 영원한 축복이 있다면 피에 묻지 않고 오 는 선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받아도 겸손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 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나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인은 적어도 자랑을 못합니 다. 모두 피 흘려 주신 은혜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이 세 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너무 환란, 시험이 많고, 우리의 대적이 많지만 십자가가 내 곁에 있는 한, 아무도 나를 해칠 수 없습니다. 시편 22편에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란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 고 부르짖는 사자 같음이니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너무 많은 대적이 있지만 십자가 사랑하고 십자가 붙잡고 십자가 하나 되어 십자가 증거하고 십자가 높이는 삶이 되면 여러분은 승리할 것입니 다. 어떤 대적도 여러분을 해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를 저버 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8절에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수로 행하느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십자가 높이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처음으로 이 런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교회 양 십자가의 비밀을 잘 모릅니다. 저는 개척할 때 십자가 한 번 높이 세우고 싶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 20여 년 전에는 큰 아파트 가 없었기 때문에, 이 십자가가 25층 높이입니다. 원래는 그렇게 높이 못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조건 십자가 높이라, 양쪽 높이라고, 그냥 그래서 십자가만 8m입니다. 이렇게 밑에서 보면 얼 마 안 됩니다. 그것만 3층 높이입니다. 여기서 저기까지 나갔는데, 얼마나 높은지 아십니까? 그래서 구청에서 나중에 허가를 낼 때, 마지막 준공 검사할 때 아무래도 허가보다 더 높은 거 같다고 해서 ‘제 가 올라가 보라’고 ‘올라가 보시오. 예예~’ 그래서 막 밀고 나갔습니다. ‘뭐 그러냐’고 보기에 그렇지. 그런 게 아니라고 이렇게 십자가 높이 세웠습니다. 그래서 저 잠실에서도 보면 이 십자가가 보였습니 다. 저쪽 강북에서도 워커힐 그쪽에서도 항상 이 십자가가 환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뭐 목회 잘 하려 고 한 것 보다 십자가 높여야 되겠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 지역에 우뚝 세워야 되겠다. 우리는 십자 가 높여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너무 잘못되었습니다. 교회의 능력은 십자가 아래, 십자가 증거 하는데 있는데 오늘 교회는 모두 십자가를 피하려고 합니다. 십자가 없는 설교가 많고, 십자가 없는 교회가 많습니다. 십자가 없으면 다른 것도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물론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바로 십자가 없는 곳이 오히려 멸망과 저주밖에 없는 것 입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이용하여 인기를 누리고 십자가를 가지고 출세하려는 분들도 많고, 십자가 가지고 돈벌이 하고 장사하려는 분도 많습니다. 큰 교회, 우리교회도 큰 교회, 저 도 큰 목사 십자가 이용해 가지고 짭짤하게 재미 봤습니다. 이것이 모두 문제입니다. 제가 뭐 잘난 것 같이 잘하는 것 같이 크든 적든 십자가 없으면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늘 우리의 십자가 져야 되고 십 자가와 함께 살아야 되고 십자가를 증거 해야 합니다. 이 세상 기쁨을 찾아가면 기쁨이 없습니다. 평 안을 찾아가면 평안이 없습니다. 행복을 찾아가면 행복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축복을 찾아가면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찾아가면 십자가 짊어지고 가면 모든 것 내가 찾는 모든 축복이 십자 가 뒤에 다 있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화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커야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는 오 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온 로마를 십자가로 점령을 해서 로마를 기독교로 만든 능력은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두려워하십니까? 우리는 어떠한 우리의 장래 우리에게 오는 모든 세력을 이 길 수 있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 증거하십시다. 십자가와 하나 되십시다.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죽을 자와 죽을 자가 모여서 죽는 것이 아니고, 저주와 저주가 모여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이 십자가의 비밀과 신비함과 거룩함 속에서 남은 여생을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사람이 되셨다
갈 3:13 / 박경수 목사
멋진 궁궐에 사는 왕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저주받기 전의 모습일 뿐, 지금은 야수로 변했다. 저주받은 후에는 왕자의 궁전과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야수로 변한 후, 왕자는 어둠 속으로 계속해서 숨어들었다. 번들거리는 짐승의 코와 뻐드렁니를 하고 자신의 성에 틀어박혀서 우울한 기분으로 지냈다.
한 소녀가 왕자의 궁궐에 도착했다. 만약 소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야수는, 왕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소녀가 거들떠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누군들 소녀를 나무랄 수 있을까? 야수를 보면 누구나 질겁할 수밖에 없다.
야수의 온 몸은 털로 뒤덮여 있다. 야수의 뻐드렁니는 또 어떤가? 으르렁거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해치려고 덤비기까지 한다. 그런 야수를 누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반면 소녀는 빼어난 미녀이다. 주변 사람들까지 착하게 만들 정도로 친절하다.
야수는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야수이다. 외모와 성격 모두가 야수이다. 하지만 소녀는 다르다. 외모와 성격 모두가 아름답다. 그런 소녀가 야수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누가 감히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소녀는 야수에게 관심을 쏟았다.
야수가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하고, 누군가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주어야 한다. 야수는 사랑할 사람이 있었다. 모든 여자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나 야수에게 관심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때 마지막으로 한 소녀가 나타났고, 그 소녀가 야수에게 관심을 표현한 것이다. 소녀는 진심으로 야수를 사랑한다. 이때 야수는 더 아름다운 존재로, 참다운 왕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우리 안에도 야수가 있다. 우리가 처음부터 야수였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멋진 궁전에서 아름다운 얼굴로 지내던 에덴동산에서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가 임하기 전의 모습일 뿐이다. 에덴동산과 아담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전의 모습일 뿐이다.
저주가 임하면서부터,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달라졌다. 짐승 같아졌다. 흉측해졌다. 반항적이 되었다. 분노를 품게 되었다. 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일을 한다. 그리고 자신도 왜 그러는지 잘 모른다.
하루에 보이는 인간의 양심이다. 신문 제목만 모아봤다. “3개월 딸아이 다리에서 던진 비정男, ‘무죄 항변’” “中대학생, 코골이 때문에 룸메이트 살해” “광견병 안 걸리려 개의 심장 파내 먹어” 모두 외국 이야기이다. 외국만 그럴까?
“은인인줄 알았던 고모부가 이럴 수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마저 돌봐줄 수 없는 된 3남매에게 고모부가 공과금을 부담해주고, 생활비까지 매달 20만원 지원해주었다. 너무 고마워서 성년이 된 후에도 모든 월급을 고모부에게 맡겼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각처에서 도움이 온 것이 5천만 원, 아버지 명의의 연금이 6천만 원 있다는 사실이다. 매달 200만 원씩 나온 돈 중 극히 일부분만 돌려주면서 생색을 낸 것이다. 큰 아들은 허리를 다쳤음에도 고모부의 돈을 갚아야 한다며 일을 하다가 허리를 쓸 수 없는 지경까지 됐다. 현재 고모부가 3남매에게 물려준 빚이 5,500만 원이며, 은행 잔고는 5원이다.
나는 안 그럴까? 사람을 죽이고픈 마음도 들고, 얼굴이 벌겋게 되도록 사모와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말귀도 못 알아듣던 아이들에게 윽박지르고, 게다가 드러내지 못하는 부끄러운 죄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내가 사랑 많은 목사라고 생각하는 성도들을 보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뿐이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사도 바울도 나와 같은 고민이 있다. 사도라는 이름을 얻었으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것이다. 끔찍한 것이다. 성경을 보면 바울만 내면의 야수와 씨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장이 내면의 야수와의 싸움으로 가득 차 있다.
단창을 들고 다윗을 쫓아다니는 사울의 모습을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사람을 향해 창을 겨눌 수는 없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짓을 서슴없이 한다.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만 곧 다시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다. 그의 속에 있는 야수는 다스려지질 않는다.
야곱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디나이다. 디나가 산책을 나갔다가 세겜 족장 아들에 의해 강간을 당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 좋기 위해 다른 사람의 눈에 피눈물을 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이야기를 들은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족속의 모든 남자들을 죽이는 살육을 벌인다. 상황을 알아챈 다른 아들들도 합세하여 세겜의 재산을 강탈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은 사람? 그렇지만 그 속에는 야수가 우글우글 거린다.
롯은 또 어떤가? 작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좋은 것을 양보했어야 했다. 이제껏 자신을 돌봐준 은혜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좋은 것을 먼저 차지할 욕심부터 부린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소돔과 고모라이다. 얼마 후 그 땅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 멸망당한다. 참 묘한 것은 그 상황에서 자신의 두 딸과 근친상간을 벌여 아들을 낳는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싶을까?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정말 아무 것도 몰랐을까? 그의 속에는 얼마나 큰 야수가 있는 것인가?
어린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서슴없이 모든 두 살배기 이하의 아기들을 몰살한 헤롯은 또 어떤가!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쟁반에 올려놓은 또 다른 헤롯은 어떤가!
성경은 선한 책인가? 만약 성경을 선한 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억울한 피의 이야기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억울한 피의 절정은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야수들의 횡포가 절정에 달한다.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겠다던 제자들은 처음에는 잠자느라 바빴고, 나중에는 도망가느라 바빴다. 예수님의 죽음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헤롯은 예수님을 통해 단지 볼거리만 원했을 뿐이다. 빌라도는 사건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그리고 군병들은 피를 원했다.
군병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채찍질했다. 군병의 목표는 하나이다. 피고를 죽기 직전까지 치는 것이었다. 양쪽에 납덩이가 박힌 가죽 끈으로, 39대까지 칠 수 있었지만 사실 그만큼 필요하지는 않았다. 백부장은 죄수의 상태를 살핀다. 볼 것도 없이 예수님께서는 죽기 직전이었다. 묶인 손을 풀어주니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채찍질은 군병들이 행한 첫 번째 일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세 번째 일이었다. 등이 온통 상처투성이인데, 군병들은 예수님의 어깨에 십자가를 지운 뒤 골고다로 끌고 가 매달았다.
군병들의 이 두 가지 행동은 탓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명령대로 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군병들이 행한 행동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㉖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㉗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㉘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㉙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며, ㉚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㉛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 27:26~31)
군병들에게 맡겨진 일은 간단했다. 나사렛 사람을 언덕으로 끌고 가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들은 우선 재미를 보고 싶었다. 유명한 사람,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사람을 철저히 자기들 발밑에 짓밟고 싶었다.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탈진하여 초죽음이 된 예수님을 둘러싼 채 구타하기 시작했다. 채찍질은 명령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도 명령이었다. 그러나 거의 죽은 자에게 이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침을 뱉고,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를 들리고, 희롱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마음인가? 그 속에 얼마나 큰 야수가 들어있는 것인가?
침 뱉음이란 몸에 고통을 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다. 침은 몸에 고통을 주지 않는다. 침 뱉음은 영혼에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침을 뱉을 때, 우리는 모욕을 느낀다. 군병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을 깔아뭉갬으로써 자신들을 높이고자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초라하게 만듦으로써 자기를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한다.
내가 누군가의 얼굴에 침을 뱉은 적은 없다. 하지만 남을 험담한 적은 있다. 옳은 소리이기 때문에 한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험담한 적이 있다. 분노로 손을 추켜올리거나 교만하게 눈을 흘긴 적이 있다. 내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군병들이 예수님께 한 일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향해 조롱하고, 비난하고, 험담하는 행위는 곧 예수님께 하는 짓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곧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우리 안에는 아주 같은 측면, 내가 해놓고도 깜짝 놀라게 되는 야수적 근성이 있다. 우리 솔직히 말해보자. 이 말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나 자신에게 놀란 적이 없는가? 나의 행동을 돌아보며 ‘내 속에 뭐가 있기에?’ 하는 의문이 생긴 적이 없었는가? 당연히 이 말씀에서 나는 절대로 자유롭지 않다.
성경은 아주 간절히 대답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 속에 야수 같은 근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락했다. 이기적이고 패역하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우리 모두는 죄의 성향을 안고 태어났다. 타락은 인류 전체에 보편화되어 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0, 23)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선한다는 것이다. 돼지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다른 돼지보다 나는 우수하다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그 돼지 역시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한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께 견주면 똑같이 도움이 필요하다. 무죄의 표준은 이 땅의 돼지 여물통이 아니다. 하늘 보좌에 있다. 하나님께서 표준이시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7:2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예레미야도, 사도 바울도 같은 말씀을 선포할 수밖에 없다. ‘할 수도 없음이라.’
우리는 죄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우리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거룩하지 못하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거룩해지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침은 우리 마음의 더러움을 상징한다. 우리 마음의 더러움을 예수님의 얼굴에 다 토해냈다. 예수님께서는 더럽다고 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당신의 얼굴을 가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닦지도 않으셨다. 그분의 피와 땀으로 씻겨나가도록 내버려두셨다.
미녀가 야수를 왕자가 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성경은 더 놀랍게 말씀하신다. 야수가 왕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직접 야수가 되셨다. 죄인이 되셨다. 아담처럼 분명히 우리는 저주 아래 놓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갈 3:13).
미녀가 오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야수는 영원히 야수로,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미녀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졌다. 죄인들에게 성인(聖人)의 얼굴을 주시려고 죄 없으신 분께서 죄인의 얼굴을 취하셨다.
당신은 복음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갈 3:13 / 문기태 목사
오늘 이 세상에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중에도, 직분을 받은 사람들중에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제법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아십니까?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와 능력을 십자가에서 깨뜨리시고 승리를 거두셨다는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승리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복음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승리의 능력으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승리의 능력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 복음에 순종하는 삶이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항상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단에게 노략질당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만나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쩔쩔매며 사는 사람은 진정으로 복음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 복음을 모르면 인생의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소유하여 깨닫고 믿는 사람은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복음을 접하면 인생의 엄청난 혁명을 경험합니다. 그를 괴롭히는 인생의 문제들을 그리스도를 힘입어 해결받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길은 느린 듯 하지만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입니다.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길은 어렵고 고생스러운 것 같지만 가장 쉽고 즐거운 길입니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길은 외롭고 비싼 댓가를 지불하는 것 같지만 가장 복된 길이요 가장 가치있는 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그가 경험한 복음은 그가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 그 자체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마다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을 나누고 싶어했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자랑한 복음에는 어떤 신비가 담겨 있을까요?
1.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6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복음을 깨달으면 강력한 능력이 임합니다. 월드컵직전에 어떤 신용카드회사가 제작한 광고카피에는 히딩크감독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라고 되어 있는데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우리 팀이 강팀과 싸워 여러 번이나 이겼습니다. 강한 팀과 싸워 이기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강팀과 싸워 승리를 일구어내는 것이 능력입니다.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감독이나 선수를 수 십억, 수백억을 들여서라도 데려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보여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강력한 대적인 원수 사단과 싸워 이기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여러분을 구해내시는 능력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죄와 저주와 불행과 온갖 문제로부터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사람들에게 살 맛나게 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월드컵에서 우리 나라가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세계의 강호들을 꺽고 승승장구하자 4천 7백만 국민들이 살 맛나지 않았습니까? 늘 우리가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사단의 권세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대신 싸워 주시고 우리를 위해 이겨주시니 얼마나 살 맛 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불행을 느끼는 때는 언제입니까? 중요한 싸움에서 패배하였을 때입니다. 이웃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대적과의 다툼에서 패배하였을 때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였을 때도 괴롭습니다. 더 나아가 사단의 공격에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게 되면 무척 안타깝고 불행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열심히 싸워보리라 결심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단에게 패배한 자신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능력이 크십니다.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사단을 세상에서도 패배자로 만드시려고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저주의 사슬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복이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갈 3:13, 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1985년 테네시주 메이슨 마을에 사건이 생겼다.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가 잠시은신처를 얻으려고 디그라핀리스씨의 집에 침입하였다. 남편 나단은 무서워서 입도 열지 못했다. 그러나 부인 루이스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가까운 손님처럼 대했다. "무거운 총을 내려놓아요, 서있지만 말고 거기 앉아요. 내가 맛있는 요리를 해 드릴테니까요." 하며 콧노래로 찬송을 부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탈옥수는 이상해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내가 무슨 짓도 할 수 있는데 무섭지 않소 !" 이때 루이스는 자기는 예수를 믿고 영생을 믿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 믿는 기쁨과 새로운 인생의 간증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 죄수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가 있음을 분명히 말하였다. 불과 일곱 시간 사이에 그러니까 새벽 세 시에 침입하여 오전 열 시가 되었을 때에 탈옥수는 제 발로 교도소에 돌아갔던 것이다. 이 실화 속에서 콘트롤(제압)과 파워(능력)의 비교가 드러난다. 탈옥수는 총이 있으므로 자기가 그 집을 콘트롤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루이스는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그 힘은 죽음을 이긴 예수로부터 받은 힘이었다. 세상의 힘이란 흔히 콘트롤을 뜻한다. 그러나 신앙의 힘은 어떤 세상의 콘트롤도 극복하는 상위의 능력을 말한다. 우리에겐 이런 힘이 주님께로부터 주어짐을 알고 모든 일에 주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복음은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나타내줍니다. 복음은 어떤 강한 힘이나 권세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2. 복음을 믿어야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17)
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학문의 대상으로 여기고 연구하고 공부하면 능력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도덕과 윤리 규범으로 여기고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따라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복을 가져다 주는 무슨 주문처럼 여기고 외우면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오직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을 뿐 아니라 이제는 우리들이 얼마든지 사단과 싸워 똑 같은 승리를 맛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고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사단과 싸워 주심을 믿고 영적인 전쟁을 시도해야 합니다. 죄와 싸우고, 시험과 싸우고, 마귀의 유혹과 싸워야합니다. 악한 영과 싸우고 낙심케 하는 영적인 권세와 싸우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단의 세력과 지혜로운 싸움을 해야 합니다. 승리를 확신하고 포기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사단이 절망하게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어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믿는 사람은 그런 승리의 간증이 많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능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도와 주셔서 이렇게 행복하다.' '내가 예수를 믿고 저주의 사슬이 끊어지고 이렇게 큰 복을 받았다.' '예수를 믿고서 우리 가정이 이렇게 변했다.'하는 간증이 가득해야합니다.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믿을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네가 나의 능력을 신뢰하고 나에게 순종하는구나!' 하시며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능력을 앞세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저주로부터 속량하셨다고해도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주셨다고해도 믿으려 하지 않고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약속을 주신다고 해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승리를 주시는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기꺼이 모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승리가 임합니다. 저주에서 구원받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힘입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믿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믿고 문제가 다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브라질의 아마존 강은 세계 최대의 하구를 가졌습니다. 7만 평방 킬로나 되기 때문에 양쪽 언덕이 안 보여 처음에 가는 사람은 강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아직 바다 한 복판에 있는 줄 착각을 일으킵니다. 대서양에서 폭풍 때문에 오래 표류한 배 한 척이 식수를 구하기 위하여 겨우 이 하구에 도착했습니다. 해도상으로는 분명히 아마존 하구에 도착했을 때가 되었는데 여전히 언덕이 안 보였습니다. 마침 다른 배 한 척이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그 배의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식수를 구하고 있는데 아마존 강은 어느 쪽이오." 저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들은 이미 맑은 물 한복판에 있소. 물통을 내려 뜨기만 하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강 위에서 살아갑니다. 다만 그 물을 길어 마시지 못하고 다른 물을 찾기 일쑤입니다. 믿음이란 축복의 강에 서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심치말고 예수 그리스도께 물통을 내려 은혜의 생수를 퍼 올리는 것을 날마다 시도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돌아 보십시오. 복음을 듣고 잊어버리지 않고 즉각 믿음으로 은혜를 퍼 올려 문제가 해결되어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모든 문제를 맡겨 평안을 얻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주님께 존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여 예수님의 능력으로 모두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3.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16상)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중에도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확신있게 자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승리의 체험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승리에도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가지 문제에 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가정의 불화, 귀신의 역사,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불안, 죄책감과 죄의 저주 등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힘든 문제를 안고 지쳐 쓰러져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불행한 사람들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의 필요를 여러분이 채워주어야 합니다. 저들의 가장 큰 필요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십자가의 승리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거두신 승리를 자랑해야 합니다. 원색적인 복음을 생생하게 자랑할 때 듣는 이들이 복음을 깨닫고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맛봅니다. 저주가 사라지고 행복한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주위에 복음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여러분 주변에 힘들고 외로운 싸움에 지쳐 영적으로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저들도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대신 간구해주지 않겠습니까? 복음의 진리를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지금 얼마나 강력한 능력으로 믿는 자들안에서 역사하시는지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기적과 같은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목장들이 모두 문을 활짝 열고 복음을 자랑하는 모임이 되는 것이 저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초청해 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데려 온 사람을 정성껏 섬겨서 사랑을 느끼게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쉽게 가르쳐 주어 복음을 깨닫게 합니다. 목자는 목장모임을 지혜롭게 인도하며 목원들은 모두 주일의 말씀과 한 주간의 삶속에서 만난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목장마다 새롭게 복음을 믿기 시작하여 승리를 체험하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입니다.
복음은 부끄러워하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자랑할수록 큰 능력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자랑할수록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회있을 때마다 우리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복음을 자랑합시다.
피터 디존은 그의 책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우선 순위」에서 인도의 한 떼도둑에 몸을 담았던 라마드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라마드가 한번은 어느 집에 들어가 물건을 뒤지는데 담배를 말기에 아주 좋은 얇은 종이로 된 작고 까만 책 한권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책을 가져와 매일 저녁 한 장씩 뜯어서 그것으로 담배를 말아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에 있는 작은 글씨가 자기네 말인 것을 알아본 그는 담배를 말기 전에 먼저 읽어보기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한 페이지를 읽은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주 예수님께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경찰에 자수하였습니다. 이 일로 경찰도 놀랐습니다. 악한 사람 라마드가 예수 그리스도에 붙잡힌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자기의 형량을 마치기까지 그는 많은 사람들을 구주 앞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가 읽은 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이었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용하셨고, 라마드에게는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승리하고 있습니까? 저주에서 벗어난 삶, 사단의 권세를 누르고 풍성한 삶을 사십니까? 복음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으십시오. 복음을 믿고 날마다 믿음을 앞세우며 사십시오. 복음을 부끄러워말고 자랑하십시오. 날마다 더 크고 놀라운 승리가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임한 아브라함의 복
갈 3:13-14 / 이영훈 목사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는 참으로 좋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일이 많아서 몸이 불편해서 예배를 빠질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지만 우리 주님은 늘 일찍 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옆에 분하고 인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시카고에 가면 Moody Bible Institute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교가 있습니다. 미국의 대부흥사였던 D. L. 무디의 동역자인 루벤 아처 토레이(R. A. Torrey) 목사님이 세운 신학교인데 이곳에 많은 인재들이 배출됐습니다. 이 신학교에서 모일 때마다 학교 교가처럼 불렀던 찬송이 찬송가 393장입니다. 주님의 그 신실하심, 신실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변함이 없으시고 약속 그대로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Grate is Thy Faithfulness,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라는 찬송을 통해서 오늘 주님의 신실하신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찬 393장)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 같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 하신 주 나의 구주
봄철과 또 여름 가을과 겨울 해와 달 별들도 다 주의 것
만물이 하나로 드러낸 증거 신실한 주사랑 나타내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내 죄를 사하여 안위하시고 주 친히 오셔서 인도하네
오늘의 힘 되고 내일의 소망 주 만이 만복을 내리시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할렐루야. 이 신실하신 주님의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 우리에게 임하도록 우리교회 가운데 임하도록 우리 대한민국에, 세계 모든 교회 위에 임하도록 우리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통성기도)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의 신실하신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주님의 백성들에게 방송을 듣는 모든 주님의 백성들에게 신실한 은혜가 임하여서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 변화되고 치료받고 용서받고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은혜가 모든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임하여서 다시 그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갈라디아서 3장 13절, 14절 말씀 가지고 “그리스도인에게 임한 아브라함의 복”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눕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임한 아브라함의 복” “그리스도인에게 임한 아브라함의 복”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근데 우리가 예수를 내 마음에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이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복 받은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신분이 바뀌고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남은 일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통사람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아주 복 받은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새롭게 변화된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 받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 받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이 때때로 그것을 잊어버리고 내게 당한 문제와 어려움 때문에 과거의 상처 때문에 절망하며 고통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200억이나 되는 유산을 상속을 받았는데도 상속 받은 줄도 모르고 노숙인으로, 홈리스로 살다가 죽은 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여성 구리광산 부호 위게트 클라크(Huguette Clark)는 2011년 5월 3억 700만 달러, 약 3,274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104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아마 직계자손이 없었던 것 같아요. 먼 손자뻘이 되는 티모시 헨리 그레이에게 당시 60세 되는데요. 유산으로 1900만 달러, 약 200억 원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티모시 그레이는 노숙인 생활을 했어요. 홈리스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변호인들이 이분을 찾아서 유산을 물려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레이는 200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유산상속을 받는 것도 모르고 크리스마스 다음날 26일에 기차 역 앞에서 얼어 죽은 채로 발견이 됐습니다.
그 티모시 그레이를 생각하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보면 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너무나 축복을 많이 받고 행복하게 살도록 우리의 삶이 바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상처, 가난, 실패, 고통의 붙잡혀가지고 늘 신세타령을 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이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우리의 바뀐 신분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이 주님이 주신 참 행복한 삶으로 축복이 넘쳐나는 삶으로 그렇게 바뀌어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다음에 인류를 인류의 조상이신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이런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다스리는 복을 주셨는데 우리가 죄짓고 타락하여서 오히려 물질에 다스림을 받고 세상 것들에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질병, 가난, 저주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돌아가시므로 우리에게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회복되는 그러한 축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1. 저주 받으신 예수님
먼저 저주 받으신 예수님에 대하여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눕니다. 우리를 모든 저주에서 해방시켜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이와 같이 설명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다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는 에덴동산을 만드셔서 그곳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만물을 다스리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며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고 축복이었기 때문에 누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 가난과 저주와 죄와 질병, 사망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우리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21절에 가서 보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할렐루야. 그런데 죄를 지음으로 그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은 목표를 떠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목표를 빗겨간 그러한 모습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말씀을 벗어나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짓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영이 죽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환경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육신은 질병과 사망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을 보면,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죄지은 후에 책망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았어요, 19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육신의 질병과 사망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죄 문제를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한 어떤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종교도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운명인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질병, 저주를 십자가에 짊어지고 대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이라고 하는 말은 값을 지불했다는 뜻인데, 그 당시 노예시장에서 쓰는 말입니다. 노예를 돈을 주고 사고 팔았는데, 돈을 주고 사올 때 노예를 속량시켜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 단어가 들어간 것은,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었었는데 예수님이 죄 값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사서 구원했다고 하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어떤 종교도 이와 같은 구원의 진리를 접할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만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기만 하면 뭐 공부를 많이 하고 돈을 많이 갖고 있고, 노력을 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인 것을 믿기만 하면 믿는 그 순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시고 나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운명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마음의 구세주로 모시고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일생동안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복 받은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 없는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죄 값을 지불했습니다. 예수님이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10장 12절로 14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고 하실 때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다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예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하나님 자녀로서 축복받은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이 축복이 나의 것이 됩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온 분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그래요. 그러나 어느 날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올 때, 믿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부인을 따라 열심히 교회를 나오는데 부인에게 압력을 넣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니까 말씀도 좋고 찬양도 좋고 다 좋은데 통성기도만 좀 하지 말라고 목사님께 전해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처음에 와서 다 기도하는데 혼자 기도 안하니까 어색해서 몇 번 압력을 넣는데 요즘 그 압력이 사라진 것을 보니까 그분도 기도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 은혜입니다. 은혜. 은혜가 임할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게 되고, 감사할 수 있게 되고, 찬양할 수 있게 되고 은혜가 임할 때 믿어지게 되고 믿음을 통하여 축복을 기적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무장해서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브라함의 복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둘째로 저주를 받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빚을 갚으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아브라함의 복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셨는데, 3장 14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에게 미치게 한다고 그랬는데,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신 축복의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할렐루야. 너는 이제 복덩어리가 되어서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면 그 사람도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면 그 사람이 벌을 받을 것이다. 너를 인해서 온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언제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합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 보니까 권세를 주셨다고 그럽니다, 권세. 아무리 큰 차가 덤프트럭 같은 큰 트럭이 막 고속도로를 질주해도 저 앞에서 경찰이 손만 딱 들면 서는 것입니다. 왜, 경찰이 권세가 있어요. 법을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경찰에게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경찰이 어떤 차던지 손을 들면 서야 돼요. 그 차가 외국 고급 승용차든지, 큰 트럭이든지, 어떤 차든지 손만 들면 서게 돼있어요. 왜, 권세가 있으니까. 세상에 경찰만 해도 그 권세를 주었는데, 우리는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자녀가 되고 난 다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복을 주시는데,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이런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에게 부요의 복을 주시고 건강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기만 하면 갑자기 부자가 되고,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 잘 들으세요. 예수 믿고 부요해지는 축복은, 모든 일에 열심을 다하는 그 열심히 있어야 되고, 근면, 정직, 성실함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요의 복을 주십니다. 건강도 내가 주님께서 주신 몸을 잘 관리할 때 건강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다음 영혼이 잘되는 것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요한삼서 1장 2절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서도 우리가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입만 열면 불평하고 남을 물고 뜯고 신세한탄하고 과거의 상처들을, 뭐 그렇게 기억력은 좋은지 시시콜콜 다 캐내가지고 30년 전, 40년 전 기억을 다하고 앉았어요. 그게 지금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40년 전에 학교 선생님한테 야단맞은 것하고 지금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와서 때리고 들러 엎은 게 지금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이미 아버지는 세상 떠나시고 지금 나는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 잘살고 있는데 그게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과거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성경에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이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주시고 있습니다. 다 같이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멘.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도다.” 여러분 겉은 똑같은 것 같은데 이미 속사람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실패와 가난과 저주와 상처로 얼룩진 나의 옛 모습이 바뀌어져서 주님 안에서 의미 있고 보람 있고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가 넘치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어진 거예요. 할렐루야.
가슴을 펴고 감사 찬송 존귀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려야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나의 과거의 상처, 절망, 실패, 고통, 괴로움은 지나갔습니다. 참 좋은 일만 기억하고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상처받은 기억을 하고 살려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늘 기뻐하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체조선수 운동선수들 이야기를 들으니까요, 언제 실수하느냐. 지금 그 경기에 몰두할 때는 실수하지 않는데 과거의 실수했던 것 기억할 때 휙 돌다가 실수합니다. 과거에 잡혀있으면 안 돼요. 김연아 선수가 세 번 도는 거. 그거 세 번 돌기위해서 엉덩방아를 3천 번 찧었다는 거예요. 그 엉덩방아 찧었던 거를 기억하면 또 넘어지는 거예요. 그때는 거기만 몰두해서 최선을 다해야 되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한 우리에게 축복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끝없이 도전하고 아낌없이 나누라』하는 귀한 책이 나왔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 굉장히 감동적인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김용복 회장님이 지은 책인데요. 영동농장에 지금 명예회장으로 계시는데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너무나,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지냅니다.
부산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영어를 배우면서, 운전수를 하면서 주경야독으로 그래도 건대 정외과를 졸업한 후에 1975년 사우디로 건너갑니다. 당시 중동에 건설 붐이 일어나서 사우디에 건너간 근로건설자만 15만 명. 건설 현장에 나간 분이 15만 명인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한국 사람이 중동에 가서 김치를 안 먹고 살 수 있나. 김치를 담아서 보내면 가는 동안에 배에서 다 시어져버리니까 중동에 가서 김치 공장을 하면 돈을 벌겠다. 그래서 채소를 재배하러 가서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가 실패하고 다 망했어요. 사막에 채소가 되겠습니까? 쫄딱 망하고 돌아와서 집에 가서 밤낮 술에 취해지냅니다.
그런데 독실한 크리스천 부인이 교회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예수 잘 믿는 부인 만나는 것도 복된 일이에요.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시다. 예수 믿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새롭게 다시 출발하자고 권면합니다. 예수 믿고 손해 볼 것 없지 않습니까? 교회 갑시다. 교회 가서 목사님께 기도 받읍시다. 가만히 보니까 예수 믿으면 손해 볼 건 없는 것 같아요. 따라 나와서 처음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기도 받을 때 성령의 은혜가 임해서 눈물 콧물 쏟고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 이제 내게 다 맡기고 다시 새 출발해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다시 사우디로 건너가서 그 채소 공장을 만들어서 재배를 하는데 성공합니다. 프로젝트 4년 만에 채소재배를 성공해서 1979년 처음으로 많은 배추가 재배되고 그래서 야채재배에 성공하면 교회부터 건축하겠다는 약속대로 농장에 교회를 지어 봉헌합니다. 저 사막에 이처럼 채소가 있다는 것이 기적 아닙니까? 그래서 이 농장이 사우디 농과학생들의 필수 견학코스가 되었고 나아가서 밀 경작까지 성공해서 11만kg의 밀을 사우디 농림부에 납품하는 그러한 사우디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족에게도 복을 주어서 딸은 목사 사모가 되었고 아들은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여 새로운 농법으로 최고의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1989년 14년간의 사우디 생활을 접고 고향 강진에 들어와 70만평 땅에 영동농장을 세웠는데 본인이 너무나 어렵고 힘겹게 어린 시절 공부하며 지냈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는 가난한 학생을 돕겠다는 뜻으로 사재 10억 원으로 ‘용복장학회’를 설립했고 가난한 학생들을 후원할 뿐 아니라 2003년에는 사재 100억 원을 내놓아서 ‘한사랑 농촌문화재단’을 설립해서 농업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그것으로 많은 후원을 하고 또 지금도 선한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년 초에 유서를 쓴다고 합니다. 내 몫의 재산은 물론 장기까지도 필요한 곳에 사용할 것이다 하고 그 유서에 써놓고 남아있는 부동산을 처분해 불우 어린이를 돕는 사업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돈은 분뇨와 같아서 한 사람이 너무 오래 가지고 있으면 부패하고 구린내가 납니다.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면 향내가 나고 비료가 돼 죽어가는 생명도 살리게 되지요. 세상은 저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 소유를 어떻게 사용했는냐.’ 이 물음에 당당하게 대답하는 종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이요 꿈입니다.”
할렐루야.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9절에,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이 음성을 듣고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할 때 온 유럽이 복음화 되고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나라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부강한 나라가 되고 그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함으로 세계 곳곳에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1620년 영국에서 백여 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 플리머스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교회를 짓고 미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서 미국이 400년이 지난 지금 세계 최대 강국으로 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130년 전에 열강의 침략을 받아서 풍전등화와 같을 때 기독교 복음이 들어와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하고 그리하여 일제 36년을 믿음으로 견디고 이겨내게 했고 6.25동란에 기독교의 복음이 가난과 절망과 저주 속에 살아가는 모든 국민에게 전해져서 오늘날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들어가는 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우리 교회도 1958년 5월 창립된 이래 오늘날까지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복을 이제는 우리 주위에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며 살아야 되겠다. 우리 1년 재정의 1/3을 구제와 섬김, 선교하는 일에 우리가 나누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작년 말에는 서울시와 협력해서 서울시내 1만8천 극빈가정에게 생필품 패키지를 전달했고 NGO 굿피플을 통해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 가난, 질병, 재난당한 지구촌 곳곳의 사람들을 찾아가 사랑으로 섬기고 있고 지금까지 국내에 4천여 명이 넘는 어린 아이들에게 심장병 무료 시술을 해서 저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고 해남 땅 끝 마을의 천사의 집 뿐 아니라 여러 그룹 홈을 인수해서 버려진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2백만 다문화 가정이 있는데 작년에는 안산에 다문화센터를 지어서 그곳에 다문화가정을 섬기고 있고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많은 다문화 가정을 위해서 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몽골어, 인도네시아어로 매주 동시통역을 하고 있고 개교회로서는 최대의 장애인 교구를 갖고 있습니다. 약 2천 명의 우리 장애인 성도들을 섬기고 있고요, 서울 은평구에 장애인 시설을 지금 짓고 있습니다. 아마 그곳에 장애인 센터가 생기면 장애인 복지에 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북한 동포를 위해서 200억 원을 투자해서 260병상의 심장병원을 지금도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절망에 처한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손짓하고 있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 와서 우리를 도우라, 와서 우리를 도우라.’ 우리가 그들에게 주의 복음을 들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503장 4절을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받기 원하네
저들 소리 들을 때 가서 도와줍시다.
만인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예수 사랑 전하세. 예수 사랑 전하세.
만인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할렐루야. 이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 충만의 은혜가 임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의 약속
마지막 셋째로 성령의 약속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어요. 3장 14절에 말씀합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내 힘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힘듭니다. 내 힘으로 이웃을 도우려고 하면 그 돕는 것이 때때로 마음에 부담을 줍니다. 어떤 때는 선한 일하면서도 짜증이 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해서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주님의 권능으로 우리는 모든 일을 잘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섬기는 일, 복음 전하는 일, 우리는 복음의 증인으로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초대 교회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했던지 성령 충만 받은 모든 성도들이 받은 축복을 갖고 교회에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드려서 교회 내에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굶고 배고픈 사람이 사라져버렸어요. 사도행전 2장 44절로 45절에 설명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저들이 주의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에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었어요. 그래서 백성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주님의 자녀를 칭찬했습니다. 2장 47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할렐루야! 우리가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주여, 우리를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권능으로 사랑으로 섬길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주의 복음을 만방에 전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 되게 하여주옵소서.”
감리교창시자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성령받기 전에는 선교사역에 실패한 그러한 성공회 목사였습니다. 미국에 가서 선교사역에 실패하고 돌아와서 낙심 가운데 있을 때에 하루저녁 성령 운동하는 성령파 교회에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불을 받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순복음교회에 와서 불 받은 거예요.
1738년 5월 24일 저녁8시45분 말씀을 듣다가 성령의 불이 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서 그를 변화시켜 위대한 주님의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그가 가서 말씀을 선포할 때 수천 명이, 수만 명이 모여들어서 그들이 변화 받고 회개하고 그가 한번 지나가고 난 다음 온 마을이 변화되었습니다. 술주정뱅이들이 술을 끊고 그 지역의 범죄율이 낮아지고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길거리에 부랑자들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떤 판사는 죄짓고 잡혀오는 사람이 없어 ‘내가 할 일이 없다’고 그랬다고 하는 기록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더해주시니까 그와 같은 큰일을 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세계는 나의 교구다!’ 외치면서 88세까지 4만 2천 번의 설교를 한 위대한 목사님.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학교, 병원, 고아원, 은행 등을 세우고 노예해방운동, 금주운동 같은 사회 기여운동에 앞장 선 귀한 목사님. 신학 러프스 존슨은 말합니다. “그의 부흥운동은 ‘거룩한 변화의 기적’을 일으켰고, 특별히 ‘사회’를 변혁시켰다.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이 성결해지고, 감옥이 개혁되고, 노예무역이 중지되고, 노예해방이 이루어졌으며, 사회생활은 개선되고, 무지가 정복되고, 곳곳에서 ‘생명의 샘''이 터져 나왔다!”
이 모든 것이 성령 충만의 은혜입니다. 이와 같은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가 평생에 복음을 전한 것은 항상 내 마음속에 ‘성령의 불길’이 있어서 쉬지 않고 전도할 수 있었다!”
이 성령의 불길이 여러분 모두에게 타오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 모든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하여 주옵시고 베풀고 나누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살게 하여주옵소서.” 이와 같은 복을 다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승리
갈 3:13-14 / 조학환 목사(하강교회)
십자가는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속에는 어떻게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까?
1. 죄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주는 십자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선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가장 참혹한 사형틀입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차에 걸고 무슨 장식품이나 부적처럼 달고 다니지만 십자가는 본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혐오스러운 물건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끔찍스럽고, 처절한 고통을 주는 가장 참혹한 사형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의 정도도 말로 할 수 없고, 고통의 시간 또한 많게는 40여일 동안 계속되는 너무나 잔인한 사형방법인 것입니다.
게다가 십자가의 사형은 먼저 채찍으로 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채찍도 보통의 채찍이 아니라 끝에 쇠갈고리가 달려 있는 채찍입니다. 이것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이렇게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며 사형장소로 이동합니다.
사형 장소에 도착하면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세워놓습니다. 그러면 못박힌 손목과 발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밤에는 추위가 엄습합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당합니다. 심지어는 독수리가 와서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것도 잠시잠깐이 아니라 목숨이 긴 사람은 40일 동안이나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니 그 고통과 비참함과 참혹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끔찍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죄를 지은 인생은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셔서 그 참혹한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면 우리 모든 인생이 그런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2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 고통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9:6에서는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는 너무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영영토록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는 나중에 지옥에서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여기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와 고통과 미움과 저주와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은 물론 여기서도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하여 빛과 같은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저주를 풀어준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처절한 고통의 장소였기 때문에 십지가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받을 그 저주, 그 참혹하고 처절한 고통을 대신한 대속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13절 말씀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죄없고 흠없고 티 없으신 예수님,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영화로우신 예수님이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순전히 내가 받을 고통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내가 받을 지옥의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죄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구속함을 받아 죄에서 자유인이 되어 새생명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20:28절에서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요19: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사형을 당하면서 그것도 그 저주받은 그 끔찍한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니 이성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야말로 다 이룬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저주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처절한, 그 끔찍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그 처절한, 그 참혹한 고통의 굴레를 벗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지옥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과학으로도 물론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그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영원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그 저주에 풀어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일 입니까? 영원한 고통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셨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과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영원한 저주에서 해방된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영광 돌리며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십자가
여러분, 그렇습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랑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이 너무나 큰 사랑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남의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 여러분의 자식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실 용기가 있으십니까? 여러분, 내가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자식이 아픈 것은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자식이 죽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천한 곳에 보내셨습니다.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가장 처절한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3: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범죄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저주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너무나 크나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이런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또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더욱 감사하여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축복을 가져다준 십자가
여러분,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느냐, 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느냐?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이 뭡니까? 한마디로 영생복락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천국에 가는 복입니다. 그래서 눅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영원한 천국의 복을 주셨다는 말씀이고, 이 복이야말로 지고지선지은의 복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복복복하면서 복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세상의 복은 온전치 못한 복입니다. 제 아무리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세상에는 걱정 근심이 있고, 질고가 있고, 불안과 외로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복은 완전한 복입니다. 100%입니다. 아니 200%, 1,000%입니다. 넘친다는 것이지요. 충만하다는 것이지요. 무엇으로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행복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들은 조금치도 깃들일 수가 없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은 우리는 바로 그 복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덧입어야만 죄사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만 이런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난주일이지만 동시에 종려주일인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승리의 주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부활하셔서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주님의 처절한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를 보내며 그 저주 받은 십자가, 그 끔찍한 십자가, 그 참혹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만이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는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순절
갈 3:13-14 / 김남수 목사
교회는 지난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사순절이라는 수난절을 지나게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탄생과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과 그리고 그의 생애를 기억하는 여러 가지 절기를 이어가면서 한해씩 지나가게 됩니다.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 오순절 감사절 성탄절 이렇게 주님을 중심으로 계속 캘린더가 이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될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는 캘린더이고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야 될 성도들의 아름다운 발걸음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늘 교회를 중심으로 주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순절에 주님의 십자가와 나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나의 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주제를 가지고 오늘 말씀을 드리면서 수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이 전체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은 아주 선명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린 사람은 저주받았다 하는 구약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저주를 받으셔서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저주받을 자리에 그가 대신 저주받으심으로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해방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저주가 사라지고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율법 앞에 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살 사람이 없습니다. 그 율법의 결과는 형벌과 저주로 끝납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것을 언도하고, 마침내 죄와 사망의 결과로 저주와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 율법의 마침입니다. 그 율법의 저주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셔서 건져내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성경을 읽으시다가 구약을 읽다보니 무서운 사건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에 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떻게 성경이 이렇게 무섭습니까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설명하기를 "율법이 죄인됨과 죄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읽어 구약을 다 읽으시고 그 다음에 신약을 읽어 보십시오" 그가 얼마 후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신약을 읽어보니 죽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도 "내가 너를 용서하노니 다시는 죄를 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도 용서를 받아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고 도둑도, 절도도, 강도도, 간음한 자도 다 용서하시고 병든 자도 고치시고 신약에 오니 완전 딴 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설명하기를 "앞의 책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 죄의 결과는 형벌이라는 것을 언도하고 그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에서 우리를 건져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새 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주님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책이 성경입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롬8장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속량하시고, 정죄함이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하시고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죄를 정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해방이 너를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음이라. 성령의 법이 은혜의 법이 율법과 저주에서 너를 해방했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인 것입니다. 세상에 아버지가 많아도 나의 아버지는 한 분이십니다. 어머니가 많아도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한 분이십니다. 진리는 하나이어야 됩니다. 진리는 반드시 하나이어야 되며, 하나님도 한분이시어야 되며, 하늘 아래 인류를 구속할 유일한 구세주도 한분이셔야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사망과 저주에서 해방시키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고 언약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며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는 강도요 절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셔서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예수의 피로 구속한 사람들에게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나니 율법과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성령과 은혜의 새 법이 우리를 속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른 법을 적용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문화된 법 이외의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마다 룰이 있고, 사람이 살아가는 인간의 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피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과 율법과 저주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의 새로운 법, 은혜의 법을 적용시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주시고, 거룩한 영광을 주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잘 보십니다. 겉도 보시고 속도 보시고, 우측도 보시고, 좌측도 보시고, 앞도 보시고 뒤도 보시고 속도 겉도 다 보십니다. 그리고 x-ray 찍어도 안나오는 것 까지도 다 보십니다. 하나님은 감정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 희생, 미움, 온유한 마음, 충성된 마음,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모두 emotion이고 motivation인데 하나님께서는 다 보십니다. 그런데 못 보시는 데가 있는데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보실 때는 잘 보시지 못합니다. 잘 보셨으면 나와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법을 적용하셔서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셔서 그냥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고슴도치도 새끼보고는 예쁘다고 합니다.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어 주시고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사귐을 통해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 아들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거저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 영광의 찬송을 부르게 하게 하심이라. 그래서 우리가 저주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사망과 죄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셔서 성령과 새 법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입니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나의 형제여" 나의 기쁨이요, 나의 자랑이요, 나의 면류관이요, 나의 감사요라는 아름다운 단어들을 썼습니다.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주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아래 있으면 율법과 저주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예수안에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할 줄 믿습니다. 이 진리에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가 사회운동, 사회참여, 인권운동, 정치운동도 중요하지만 교회는 이런것들을 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전하는 redemption, 속죄와 용서를 전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참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곳이 교회인줄 믿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의 피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 진리가 영원한 진리인줄 믿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구원, 속죄, 영생을 빼놓고는 교회가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을 받으면 무엇을 해야 되는가? 성경에 보니 앉아 있는 사람, 일어나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서성서성 합니다. 구원의 터가 흔들리면 집을 질 수 가 없습니다. 회개와 구원의 터를 다시 닥지 말라고 했습니다. 든든히 터를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거기에 앉으라는 것입니다. 하늘보좌에 이미 앉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보좌에 이미 앉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에 앉아 있는 신분적 변화를 가져온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값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가 값을 주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값있게 그에게 갚아 드리고 값없이 받은 구원을 값있게 살아 드리므로 그 구원에 대한 보답과 감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구원받기 위해 교회에 다니지 마십시오. 구원받기 위해서 봉사하거나, 헌금하거나, 기도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서 봉사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수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안에 자유가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자리에 오셔서 죄를 담당하시고, 죄 있는 자를 죄 없게 하시려고 그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일어나서 주님을 위해 살아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내게도 힘이 되고 나도 성숙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제 그 구원에 감사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방법을 연구해야 될 것입니다. 먼저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 가십시오. 자기 위치에서 힘써 일하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도 맡겨지게 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2)고 말씀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 3:14) 내가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해리 아이언싸이드 박사는 소년 시절에는 양화점의 직공이었다. 쇠가죽을 구두본에 맞추어 재단하고 물에 담그어 흠뻑 적셔서 가죽이 단단해지고 건조해질 때까지 계속 두드린 후에 구두창에 못을 박는 일이 매일의 그의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거리에 나갔다가 다른 양화점에 들린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직공은 구두창을 두드리지도 않고 곧바로 물에서 꺼내어 못을 박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겨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쇠가죽을 단단해지도록 두드리지 않아도 품질 좋은 구두가 되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빠른 시간에 많이 만들어 내야지 두드릴 시간이 어디 있어." 해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자기네 주인에게 달려와서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성경책을 열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를 읽어주며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구두를 만드는게 아니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나는 심판날에 주님 앞에서 '넌 참으로 비열한 짓을 했어. 최선을 다하지도 못했어'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주님께서 웃으시면서 '참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싶어. 사람이란 자기가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 행복한 법이다. 이 구두를 주님 구두를 만드는 것처럼 만든다는 것입니다. 작은일이라고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큰 일만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작은 일이라도 내가 지금부터 준비하고 확신있게 서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마이클 코스타 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오케스트라의 연습을 시키고 있을 때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의 한 사람인 피콜로 주자가 연주하다가 옆을 보니 트럼펫 부는 사람은 크고 높은 음들을 웅장하게 잘 내고, 뒤를 보니 드럼을 치는 사람도 신나게 한 몫을 단단히 하는 것 같고, 앞에서는 바이올린도 그 아름다운 선율로 자랑하는데 나는 도대체 이 조그만 악기로 빈약한 소리만을 내고 있으니 불어보았자 들리지도 않을 걸 차라리 없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피콜로를 불지 않고 부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마이클 코스타 경은 지휘하다가 말고 전 오케스트라를 중지시키고 "피콜로는 어디 있지" 하면서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모인 청중이야 어느 파트인지 큰 것 작은 소리를 분간할 수가 없다지만 지휘자의 귀는 다릅니다.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되는 것은 큰 악기나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꽝꽝 울리는 소리와 미미한 모기 같은 소리 모두가 조화될 때 하나의 웅장하고 감동적인 음악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지휘자는 여러 사람이 입을 열어 불지만, 불고 불지 않는 것 모두를 듣고 있고 세미하게 주시하고 있으므로 알게 되어 있습니다. 종종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은 나 하나쯤 안 하면 어때. 나 같은 인간이야 무슨 힘이 있나 자포자기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몸에 수천 수만 가지의 혈관이 있고 세포들이 있는데 하나의 세포가 터지거나 막히면 몸 전체가 마비되고 사망하는데 이른다. 공동체나 단체란 한 사람이 귀한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나에게 주어진 의무와 사명, 책임이 있는 법이다. 나 하나쯤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단체에서나 무용한 자이며, 이런 사람이 끼어 있는 단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해 구원받은 거룩한 community, 거룩한 공동체를 만드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세상을 구원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실 거대한 하나님의 오케스트라를 만드시고, 각자 위치에서 자기 일을 충성스럽게 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주님은 각가지 재질을 주셨습니다. 일이 작지만 최선을 다하는 이가 진정 기쁨이고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가대에서 주일학교에서, 목자로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이 최선을 다하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갈 3:13-14 / 최성규 목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우리에게 아무런 자격이나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눈물, 감사와 찬양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삶 가운데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나의 나됨 뿐만 아니라, 나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서 숨을 쉬는 것도, 온갖 자연의 혜택을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욱이 죄 많은 내가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기쁨 가운데 헌신할 수 있는 이 모든 신앙생활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주를 위해 수고하고 애쓴 사도 바울도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살펴봄으로, 받은 은혜를 헛되이 잃어버리지 말고, 회복하고 풍성케 합시다.
첫째, 구원의 은혜
구원의 은혜란 생명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받기 전의 모든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타락한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고 증거합니다(엡 2:1).
장차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죽은 존재인 송장이 돈 많이 벌고, 큰 집 사고, 좋은 차 굴려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화병에 꽂혀 있는 생명 없는 꽃일 뿐입니다. 그 꽃은 비록 화려할지 모르나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 없는 화병의 꽃이 아니라, 솔로몬의 영광보다 아름다운 생명 있는 들의 백합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길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의 은혜, 생명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 구원의 은혜는 사람의 결심이나 선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자 청년처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구원은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부터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력(人力)이 아니라, 오직 신력(神力)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막 10:26-27). 예수님은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말합니다.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우리는 세상의 눈과 잣대로 나를 보고, 이웃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며, 예수님이 대신 피를 흘리실 만큼 특별한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 이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깨닫고, 누리고,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둘째,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은혜
예수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갈 3:14상)라고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말합니까? 먼저,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말씀처럼 늙은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이라는 새로 운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혈통으로나 영적으로 큰 민족의 기원이 되는 복(창 17:4), 즉 그 이름이 온 천하에서 창대케 되고, 심히 번성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창 17:6). 복을 받는 수준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도록 축복하셨으며(창 12:2), 자손이 잘 되고, 그 자손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7:7; 22:18상).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칭하셨고, 친구로 만나주셨습니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된 우리도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일컬을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이 모든 아브라함의 복을 삶 속에서 구하고, 누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우리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축복이라고 구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만부자가 되려고 하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유케 할 정도로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좋은 대학을 구하나,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좇아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베풉시다.
셋째, 성령의 약속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 중에 큰 선물은 성령의 약속입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하).
여기서 "성령의 약속"이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요 14:16)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은 보혜사로 오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십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교회에 나올 수 있고,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4)라는 고백이 성령의 약속을 받은 우리의 심령에서 저절로 터져 나와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에 감사한 사람만이 그 은혜의 영광을 풍성히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약속이란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라고 증거합니다. 인간이 처음 어떻게 타락했는지 기억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의 피로 용서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아는 자는 결코 세상의 썩어질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 것에 눈멀지 말고, 감당할 수 없는 성령의 은혜를 누리는 자가 됩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을 감을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예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날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체험하며 삽시다. 그래서 환경에 지배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은혜에 감사 감격하는 인생이 됩시다.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
갈 3:13-14 / 문기태 목사
드라큘라는 16세기경 터키의 침공으로부터 루마니아를 구한 전쟁 영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루마니아에서 탈출한 사제들에 의해 살인마라는 악명이 붙여 졌습니다. 그에 대한 저주는 수세기에 걸쳐 덧칠이 돼 마침내 1897년 영국의 통속 소설가 브람 스토커는 그를 흡혈귀로 만들었습니다. 스토커는 드라큘라 백작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 소설로 대단한 명성과 수입을 올렸습니다. 이에 편승해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제작자들도 그를 향한 저주에 참여했습니다. 결국 드라큘라 백작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으나 엉뚱하게도 후세에 살인마 흡혈귀 등의 악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저주받은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오늘 설교 제목을 보고 기분이 이상한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니 저주받은 그리스도라니 이렇게 불경스러운 말을 어떻게 할 수가 있나?'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은 제가 만든 말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셨다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실 수 있습니까? 무엇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자청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본래 아담이래 모든 사람은 저주아래 놓였습니다. 죄가 무서운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죄를 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에게는 저주가 임하였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즉 환경적인 저주가 임하여 환경이 파괴되고 이로 인해 많은 자연 재앙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온갖 질병이 임하였습니다. 각색 질병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육체와 정신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기아와 고통, 악한 영들에게 시달림,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의 원인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남으로 임한 저주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기를 자청하셨습니다. 율법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하였는데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스스로를 저주아래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으시고 저주와 관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묶고 있는 저주의 사슬을 끊어버리고자 자원하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무서운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떤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였습니까?
1.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13)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음을 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아우성입니다.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사람들의 죄를 지목하며 벌을 주라, 심판하라, 죽여라 하는 것은 모두 율법의 자주입니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찾아내 돌로 치라고 죽이라고 멸망시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죄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본래 노예로 있는 사람을 몸값을 대신 지불해주고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며 사단의 노예로 살며 조종당하여 나쁜 죄를 짓고 살며 늘 불안해하고 꼼짝못하고 눌려 있는 우리를 예수님이 친히 당신의 몸을 내어주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안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에수 믿고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여 죄의 유혹을 간단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죄의 권세가 우리를 위협해도 겁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의 댓가를 치루지 않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죄가 다 용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고 기도응답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된 것을 모르고 눌려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1983년 영국 이스트본에서 열세살 소년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토머스 크레이븐. 소년은 모범생이었으며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소년이 왜 자살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악마의 저주를 받아 가족들이 일찍 죽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죽음이 두렵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어머니 곁에서 죽는 편이 낫다" 소년을 죽인 범인은 '악의에 찬 헛소문'이었다. 사실 이 소문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었다. 이 가정에 적개심을 품은 한 노인이 퍼뜨린 유언비어였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가 여전히 저주아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안에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더이상 저주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미래도 에수님이 책임지시고 예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안전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가계에 흐르는 저주, 사람이 쏟아 부은 저주, 마귀가 가져다 주는 저주 등 모든 저주에서 완전히 풀려난 것을 믿으시고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우리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14)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입니까? 창 22:17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창 22:18)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대로 아브라함은 빈손으로 고향을 떠나 가나안땅에 왔으나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의 양과 소때를 돌보고 집안의 일을 해주는 종들이 318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식이 없어서 늘 외롭게 살았는데 백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고 그 이삭을 통해 후손이 크게 번창했습니다. 또 그와 그의 후손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며 도와주심으로 원수의 성을 차지하는 것 즉 승리가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세상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후손의 덕을 입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시시하게 시작하여 시간이 갈수록 화려하고 존귀하게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통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이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말슴하시는 것을 듣고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반응하며 순종하자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아브라함을 ㅅ훌륭한 인격을 갖춘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존귀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부러워하며 본받고 싶은 신앙의 모델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우리들에게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과 동일한 복을 나누어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잘 믿으면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존귀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에수안에서 가정적인 복을 내려 주십니다. 위기의 가정을 웃음과 사랑이 가득한 화목한 가정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복을 받아 풍성함을 누리게 될 뿐 아니라 자식들과 후손들에게도 고귀한 축복이 전승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고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만 복을 받아 누리는데 그치지 않고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크고 좋은 복이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귀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중보기도를 사용하셔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많이 구해주십니다. 우리에게 많은 재물과 지헤와 능력을 주셔서 그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감동하셔서 우리와 함께 세상을 아름답고 환하게 만드는 일을 쉬임없이 행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임한 저주를 가져가 주시고 대신 아브라함의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내것이라 주장하시고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우리로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셨습니다.(14)
사람들이 범죄한 후에 내려진 형벌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이 함게 하지 않으시고 떠나신 것입니다. 창 6:3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영이 함께 하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흉악해지고 마귀 사단을 닮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불의와 불법, 부도덕과 부패가 가득한 무서운 곳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안에서 저주가 풀리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된 사람들에게 다시 성령을 약속하시고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야말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에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나서 처음에는 두려워하며 쩔쩔맸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하자 담대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소수의 사람들이 온 도시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교육수준도 형편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힘이 있게 담대하고 유창하게 말을 하며 예수를 잘 전하지..' '별 볼일 없던 저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대단한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지..' 사람들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지헤로와졌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성숙해졌습니다.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귀신과 사단이 꼼작못하는 대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증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구원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성령님을 하나님은 예수믿는 우리에게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안에 있으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말고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간구하십시오. 여러분 모두 성령님께 붙들리어 새롭고 놀라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승리하는 새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무서운 저주를 친히 받으셨습니다. 그런 값진 희생을 여러분이 헛수고로 만드신다면 얼마나 배은망덕한 것입니까? 불신으로 인해 여전히 우리가 죄와 저주아래에 갇혀 있고 축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불행한 삶을 살며 성령을 받지 못한채 자신의 감정과 자존심, 기분등에 의해 살아간다면 예수님이 아무 보람도 느끼지 못하며 얼마나 섭섭해 하시겠습니까? 대신 저주를 받는 결단을 하신 예수님의 값진 희생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믿음으로 담대하게 저주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아브라함처럼 큰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강력하게 붙들려 성령님의 지배를 받으며 자신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며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안에서 믿음으로 시대를 열어가는 주역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약속과 율법
갈라디아서 3:15-22 / 석기현 목사
"숲은 보되 나무를 보지 못한다."라는 말과 "나무를 보되 숲은 보지 못한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전자는 전체만을 대충 훑어보고 상세한 내용을 보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키며, 후자는 그 반대로 부분적인 사항들만 알고 전체는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사람이 전체를 총괄적으로도 이해할 줄 알고 또한 부분을 세밀하게 관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은 비단 세상사에만 적용되는 원리는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신자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뜻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크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유대주의자 즉 율법주의자들은 성경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라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의 전체 주제가 무엇인지도 바로 깨닫지 못했으며 그 결과 성경의 한 절 한 절 속에 들어 있는 참된 의미도 전혀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15절부터 22절까지의 본문 말씀에 보면 "약속"이라는 말과 "율법"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두 단어들 속에 포함된 의미들을 대조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사람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의 '숲'과 '나무'가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과연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제대로 깨달아야 할 '주제'와 '내용'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의 숲'은 바로 '죄인을 위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성경 말씀에 나오는 '약속'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이 '숲'을 볼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5절부터 18절에 "15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구약 성경을 대할 때 오직 '율법'이라는 나무 하나만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율법, 그 나무 한 그루를 두고 그것이 마치 구약성경 전체의 핵심인양 곡해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근시안적인 시야를 지적하면서, 성경에는 '율법'이라는 단어나 나타나기 훨씬 전에 "약속"이라는 실로 중요한 말씀이 먼저 기록되어 있었음을 여기서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언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바로 본문 15절과 17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구약의 핵심이라고 보았던 '율법'은 모세 시대에 주어진 것이지만, 이 '언약'은 사도 바울이 지적하듯이 그보다 훨씬 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이라는 단어는 원래 무슨 개인적인 약속이나 사업상의 계약을 두고 쓰인 말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의 '유언'에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헬라 사회에서도 어떤 개인이 작성하고 공증하여 남긴 유언은 그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일부분을 수정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본문 15절에서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느니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실이 그 당시의 사회적인 통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물론 하나님의 약속하신 언약의 불변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주셨던" 그 변치 못할 약속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그에게 '큰 민족과 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가나안 땅과 거기서 이루어진 이스라엘 민족국가를 통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 약속이 거기에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가나안에 세워진 이스라엘이라는 단일민족 국가로서는 다 성취될 수 없는 약속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자손'과 '땅'이란 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영적 선민'과 그들을 통해 이루어질 '영적 왕국'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뒤에 오고 올 수많은 택자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고 복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고 단수를 쓰심으로써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약속의 완성자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언약' 즉 '유언처럼 아무도 폐할 수 없는 약속'을 통해 택자에게 주어진 구원이라는 "유업"은 결코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했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으로서 율법보다 "사백삼십 년" 전에 이미 주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결론적으로 사람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신" 것일 따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무조건적으로 거저 주신 선물일 뿐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오직 '율법'밖에 볼 줄 몰랐던 유대주의자들은 이런 깊고도 넓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저 율법이라는 '나무' 한 그루만을 이리저리 재어 보고 달아 보다가 그들은 결국 '사람은 선행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라는, 성경에는 전혀 없는 이행득구의 이단 교리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구약을 '모세의 율법'이라는 색안경을 끼고서 보지 않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는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바로 그 '약속'을 따라 장차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곧 성경 말씀의 '숲' 즉 전체 주제는 결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언약' 즉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구속사'에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성경을 대할 때에 마치 '길 없는 정글'과 같이 모든 것이 뒤엉켜져 있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신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방대한 내용들은 서로 상관이 없거나 또는 피차 모순이 되는 '자질구레한 말들의 덤불'로 뒤죽박죽이 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긴 역사를 두고 기록되어 왔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기록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만큼 뚜렷한 한 가지 주제를 일관성 있게 기록하고 있는 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천지창조와 인간의 타락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오직 한 가지 주제만을 뚜렷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속역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해 가고 계시는 인간 구원의 '완벽한 종합계획'(master plan)입니다.
여기에 바로 '성경의 통일성'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숲'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로 좁은 시야 즉 자기 시대에만 한정된 눈으로 역사를 판단해 왔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인 역시 21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현재 상황'(current affairs)에만 몰두하며 살고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본다고 해 보아야 기껏 냉전 시대를 추억해 보고 컴퓨터 만능 시대를 예고하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들 '역사의 나무 몇 그루'만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인류 역사의 최초 시발점부터 세상의 종말까지 그 전체를 바로 이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조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을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타락하고 죄악이 이 세상에 관영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대속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장차 오실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영생과 영벌로 심판하실 또 하나의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언약'의 말씀을 통하여 이처럼 명백하게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역사', 바로 이 '성경의 숲'을 밝히 보고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의 나무'는 곧 '나 자신이야말로 구원이 꼭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의미를 바로 깨닫게 되면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사실부터 제대로 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19절 이하 22절의 말씀에 "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1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약속'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전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주신 데 반하여 후자는 하나님께서 "천사들로 말미암아" 전해 주셨다는 사실에서도 다시 확인되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여기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대로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실제로 율법주의자들이 그처럼 사도 바울을 공박하기도 했었습니다.
"만약 바울 당신의 말대로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도대체 율법은 왜 있는 것이란 말인가? 당신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의 복음 속에서 모세의 율법이란 아예 설 자리도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율법을 모독하는 자다."라고 대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그들이 보기에는 바울이야말로 "율법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행21:28)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율법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거나 율법 역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엉뚱하게 적용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비판했을 뿐이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가장 정통하다고 자부하고 있던 '율법이라는 나무 한 그루'조차도 사실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야말로 그 '율법'이 '하나님의 구속역사'라는 큰 '숲'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나무'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의 기능이 사람에게 '구원의 방법'을 제공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해 주는 데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임을 먼저 인식하게 함으로써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이 꼭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본문 19절과 22절에서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사람이)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라고 사도 바울이 일깨워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들을 다시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율법은 왜 주어졌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저지른 죄를 밝혀 주기 위하여 (성경 말씀에) 덧붙여진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이 죄 아래 갇혀 있다고 증거합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똑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기록했고, 로마서 4장 15절에서는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고 했으며, 또 로마서 7장 7절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이 있어야 그 죄상이 뚜렷해지는 원리가 인간 사회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경이라는 '숲' 속에 율법이라는 '나무' 한 그루를 심어 주심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죄인인 것을 똑똑히 깨닫게 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앤드류 쥬크스(Andrew Jukes)라는 사람은 바로 이 사실을 두고 "사단은 우리 사람이 율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거룩한 존재라고 증명하게끔 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라고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율법의 기능과 작용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로지 "약속하신 자손" 즉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의 손"을 베풀어 주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율법의 존재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이 그 믿음 안에서 구원받게 될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며, 그 후에는 이미 완전히 '죄 사함'을 받은 상태이니 더 이상 효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베풀어지는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함 받는 은혜의 감격을 제대로 깨닫게 해 주기 위하여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자신이 죄인인 것부터 인식하고 고백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라는 나무'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반역자이며 신성모독자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길 없는 완전타락 상태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율법'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이 핵심 즉 '내가 곧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크게는 인류역사 전체를 파악하고 이해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말씀이 바로 나 자신에게부터 적용되는 진리임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범하고 있는 대표적인 과오는 바로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조건 '부드럽게만' 처리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가볍게만 여기는 교인이나 공적인 죄를 적당히 얼버무려 버리는 교회에는 결코 참된 기쁨이나 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6장 14절에서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경고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자신을 먼저 저울질해 보지 않고는 '약속'의 은혜로운 참 맛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아예 덮어 놓고 신약만 은혜롭다고 가르치는 것은 '비뚤어진 신학'이며 '반신불구의 설교'입니다.
율법은 우회(bypass)해 버리고 곧바로 복음으로 직행하려고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명백히 어긋나는 곁길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이 십자가의 대속 복음에 진실로 감사 감격할 줄 모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죄를 책망하면서 동시에 사람은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엄중한 유죄선언을 내리고 있는 '율법'을 현대교회의 목사들이 무시하고 강단에서 삭제합니다.
그 결과 '복음'은 실로 '돼지 앞에 던져진 진주'가 되어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자신의 더러움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진주의 아름다움을 결코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율법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벗겨 놓고 자기 모습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복음 속에 담긴 '약속의 은혜'를 음미할 도리가 없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이 배경이 되어야만 별빛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나 자신의 죄와 그 받아 마땅한 심판이라는 어두운 배경이 먼저 눈에 들어와야만 그 가운데 빛나는 '계명성'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실로 아름답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로 인하여 얻어맞고 찢겨져 있어야 우리는 그 상처를 싸매어 주시는 복음을 간절히 소망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죽이려 함을 알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자유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지옥의 절망감을 먼저 맛보아야만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고 약속으로 구원받게 되는 은총이 얼마나 귀한 줄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성경의 나무 한 그루가 이처럼 명백히 증거해 주는 사실을 통하여 나 자신이야말로 '약속'의 구원이 꼭 필요한 죄인임을 절실히 깨닫고 솔직히 자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너는 이렇게 할지니라"(You shall...)는 '구원의 조건부'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셨더라면 우리 중 단 한 명도 구원받을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에 율법을 통하여 오직 사람이 스스로 당신 앞에서 겸비하고 낮아질 것과 오직 당신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하리라"(I will...)는 '구원의 약속'을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기독교는 실로 '사람이 신을 찾는 인본주의 종교'가 아니라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불러 구원해 주시는 신본주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사역의 마스터플랜(master plan)의 전체와 및 세부사항까지 우리에게 똑똑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찬 411장)라는 찬송은 원래의 영어 가사에 보면 "Jesus loves me this I know for the Bible tells me so"(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내가 성경을 보고 알 수 있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경이 '말씀해 주시는'(tell)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해 주려 하시는 것을 비로소 그리고 명백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저 목사에게 '설교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학자들이 세상 문학서적을 대할 때 하는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비평하기 위한 '연구대상'도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엡1:11)이 바로 이 신구약 66권을 통하여 이처럼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도 그 '말씀의 숲과 나무'를 보지 못하는 자야말로 정말 예수님 말씀 그대로 '본다고 하지만 실은 소경'(요9:39)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크신 구원 역사를 한 눈에 보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이 바로 그 구원이 꼭 필요한 죄인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기록된 '약속'과 '율법'을 통하여 이 귀한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그 믿음에 거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율법
갈라디아서 3:15-25 / 김형익 목사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참으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선한 행위나 율법을 순종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나서 율법을 행하라는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셨으나, 이제 모세를 통해서는 의롭다고 하시는 방법을 변경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신앙 생활을 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늘 우리는 율법의 행위에 묶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속으로는 지향하여 살면서도 겉으로는 복음을 말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경험하고 있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거짓 교사들이 와서 ‘믿음 더하기 할례’, 그리고 ‘믿음 더하기 율법’이라고 가르치자 그들은 여전히 복음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율법에 매인 삶을 살게 됨으로써 사실상 신앙 생활의 기쁨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여기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오늘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약속과 율법이라는 두 개념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 말을 복음과 율법이라고 이해를 하셔도 무방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 두 개념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초청합니다.
1. 약속과 율법을 구별하라: “내가 하리니”(I will) vs. “너는 할지니”(Thou shalt)
약속과 율법 혹은 복음과 율법을 구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고, 율법은 나중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약속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겠다(I will)’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아빠가(엄마가) 사줄께’라고 약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해줄께’가 아니라 ‘너는 할지니(Thou shalt 또는 You shall)’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또는 ‘하지 말라’하는 명령들이 율법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이걸 해라’, ‘이걸 하지말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은 약속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하라’, ‘하지 말라’ 이기 때문에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을 주셨고 모세에게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더 깊은 차이가 무엇일까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변경하신 것일까요?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먼저 약속을 살펴봅니다.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바울 사도는 15절에서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예는 사람이 죽을 때 남기는 유언입니다. 15절에서 ‘사람의 언약’이라는 헬라어 diaqhkh는 사실 언약이라는 의미도 가지지만 유언이라는 뜻으로 보통 일상 생활에서 사용이 되던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바는 유언입니다. 사람의 예를 드는 것입니다.
A. ‘유언’은 변경할 수 없다(15,17).
유언은 일단 정한 후에는 아무도 그것을 무효화하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당시 로마법은 오늘날과 비슷해서 유언을 한 사람이 죽기 전에는 얼마든지 고치거나 추가사항들을 넣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헬라법은 그와는 조금 달라서 사람이 일단 유언을 쓰고 법적 효력을 발생시키면 그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변경도 추가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산을 상속받는 유대법이 이와 유사했는데, 유대법에서는 유언을 쓴 사람이 죽기 전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변경하거나 추가할 수 없도록 mattenat bari 라고 하는 행정절차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야기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바로 이 절차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경이 불가하므로 아버지의 생사와 무관하게 이미 확정이 된 것이고 자기의 유산을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 사도는 여기서 이 상속에 관한 유대법을 고려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미 mattenat bari를 한 상태이면 아무리 변덕스러운 사람의 유언이라 할지라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유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430년 후에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에 의해서 폐기될 수도 없고 변경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의 언약도 변경하고 추가할 수 없다면 하물며 신실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언약(여기서는 유언이 아닙니다)이야 어떠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17절의 내용입니다.
B. 유언의 상속은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렇게 변경할 수 없도록 결정된 유언에 의하여 유산을 상속받는 것은 수혜자 또는 피상속인(beneficiary)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법적으로 타당하고도 구속력이 있는 그 유언의 약속에 근거하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힘입니다. 관건은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언이 법적으로 타당하고 구속력이 있어도 그 유언의 약속을 믿지 않고 멀리 떠나 버린 사람은 그 유언에 있는 약속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약속이 요구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노력할 일’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C. 약속된 ‘씨’(자손)는 그리스도시다(16).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바로 유언의 약속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땅과 씨(자손)였습니다. 땅은 가나안 땅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천국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그 약속의 내용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바로 씨(자손)에 관한 것입니다. 그 자손은 사실 이삭이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약속된 씨는 바로 그리스도였다고 바울 사도는 힘주어 강조합니다. 물론 이삭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이스라엘 백성도 자손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만일 그 자손이 이삭 만이었고 이스라엘 만이었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된 자손은 바로 그리스도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히브리어 문법에 근거하여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손(seed)이란 단어는 말하자면 집합명사로서 언제나 단수로 사용됩니다. 단수로 사용된 것은 여러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기 보다는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약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유산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하신 후 2000년 쯤 되었을 때,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갈 4:4) 실로 그 아들을 죄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선물로 주셨습니다!
D. 하나님은 우리를 성과(performance)가 아니라 약속(promise)에 기초하여 대하신다(18).
유언은 본성상 율법이 아니라 약속과 관련이 됩니다. 약속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약속은 단순하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일반 기업체에서 하는 방식으로 ‘성과에 근거하여’(performance-based) 우리를 대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인사고과를 따져서 봉급을 결정하는 식으로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매해를 벌벌 떨면서 성과를 내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회계년도의 결산이 가까와 오면 올수록 우리는 초조하게 성과를 내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도록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결국 인생을 다 살아보고 나서 그분의 평가를 받을 때에만 최종적으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과를 요구하는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약속에 근거하여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칭의와 우리의 구원은 우리 편에서의 성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E. 약속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복음이다(20).
이 약속이야말로 바로 복음 자체 입니다. 그것도 바울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복음입니다. 이 약속은 누구를 거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 곧 모세의 손을 빌어 베풀어주신 것이지만(19절), 약속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20절). 이 말이 약간 난해한 구절인 20절에 대한 해석입니다. 여기 중보는 율법을 하나님과 천사를 거쳐서 받은 모세를 가리킵니다. 모세는 양편의 중간에 서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하나님 한 분에 의하여 아무 중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앞서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주신 복음이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는 별개로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 율법을 추가로 주신 것입니까? 그 이유,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19절에서 바울 사도가 던지는 질문의 핵심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일반적으로 율법의 기능과 목적에 대하여 매우 불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참된 이해에도 어려움을 겪게 만들게 됩니다. 먼저, 율법의 기능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A. 율법의 세가지 기능
i. 죄를 드러내고 밝히는 것(롬 5:20).
제일 먼저, 죄를 드러내고 밝히는 것을 칼빈은 율법의 제1 용도라고 했습니다. 19절에서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20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합니다. 다시 로마서 7:7에서 바울 사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율법의 용도는 죄를 드러내고 밝혀주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발견할 수 있도록 잘 보이게 드러내고 밝혀주는 일입니다. 로마서 5:20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이지요? 실상 율법은 죄를 증가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마치 죄의 자극제처럼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하지말라’는 명령(율법)이 없었더라면 하지 않았을텐데, 그 명령이 있어서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주고 죄악을 찾아내고 발견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권위에 반항하는 속성을 가지는 죄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ii. 죄를 억제하는 것.
율법의 제2 용도 또는 부차적 기능은 죄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일의 결과나 댓가를 말해줍니다. 율법을 범한 자에게 율법은 저주와 형벌과 책임을 요구합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원칙 속에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어 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제1 용도에 비하여 부차적인 용도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오늘날의 범죄자를 처벌함으로써 범죄를 억제시키는 정부의 기능과 비슷한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보여주는 것.
율법의 제3 용도는 율법에 있어서 매우 완전하고 영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기대 수준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완전하고 영구적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십계명은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B. 율법은 천사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19).
이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주셨던 약속과는 달리 천사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19절에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는 장면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모세에게 주셨다는 힌트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율법은 천사를 통해서 또 모세를 통해서 백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간접적으로 주어졌다는데 강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는 대조적인 특징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약속이 율법에 우월할 뿐 아니라 우선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기초가 아니라 약속이 기초입니다.
C. 율법은 복음(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21).
바울 사도는 21절에서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유언의 원리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유언도 변경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430년이나 후에 주어진 율법에 의하여 더욱 변경될 수 없을 것입니다.
D. 율법은 잠정적(temporary) 기능을 가진다: ‘시내산에서 갈보리산까지’
여기서 바울 사도가 집중적으로 말하는 율법의 기능은 바로 제1 용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드러내서 보여주고 나아가서 죄를 더하게(짓게) 하는 기능입니다. 율법의 이 기능은 시내산의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갈보리산의 그리스도에게까지만 존속하는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인류가 구원을 받는 교과서가 되도록 쓰셨습니다. 이 구속사라고 불리우는 구원의 역사에서 율법의 이 기능은 모세에게서 그리스도에게까지만 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때까지만 이 율법의 기능은 작동을 하도록 의도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i. ‘더한 것이라’(19): 복음의 하이웨이로 들어가는 진입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19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율법은 말 그대로 ‘추가된’(It was added) 것입니다. 본래 약속이 있는데 거기에 추가되었습니다. 이 말은 옆길(side road)로 온 것이 율법이란 말입니다. 즉, 비유컨대 율법은 복음(약속)의 하이웨이로 들어가는 진입로와 같은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진입로가 없이는 복음의 하이웨이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진입로에 불과하기에, 그 자체로는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21절 하반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율법 자체가 그것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으라는 의도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흠없고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인류사에 한 사람도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율법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그것을 지켜서 생명을 얻으라고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단지 복음의 하이웨이로 들어가는 진입로일 뿐입니다.
ii.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19).
19절 하반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그 약속하신 자손은 물론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의 제1 용도는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만 입니다.
iii. 감옥(22~23): ‘믿음이 오기 전에’.
22절 이하에서는 바울 사도가 율법의 기능을 두 가지 예로써 설명해줍니다. 첫째가 감옥의 예입니다. 율법은 마치 감옥 혹은 감옥의 간수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을 가두어두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22절과 23절의 말씀입니다. 22절은 “성경이 온 세상(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신약 성경이 다 쓰여지기 전이므로 당연히 구약 성경 즉 율법을 가르킵니다. 율법은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두는 역할을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그 약속을 모든 믿는 자에게 주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23절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합니다. 22절을 재진술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그리고 ‘계시될 믿음의 때가지’라는 말은 구속사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 전에는 모두 율법 아래 매여 있었고 갇혀 있었습니다.
매여있고 갇혀있는 사람만이 풀려나기를 원하고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율법 아래 오랜 세월을 갇혀 있음으로써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간절히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약의 참 성도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얼마나 인간의 죄악이 철저하게 드러나게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너의 거울이다! 이 안에 네 모습이 있다.’ 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iv. 몽학선생(24~25): 율법은 키모테라피(chemotherapy)?
마지막으로 24~25절은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합니다. 유감스럽게도 NIV 성경은 이 단어를 직접 번역하지 않고 의역으로 처리했습니다. “So the law was put in charge to lead us to Christ…”(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책임을 맡았다). 왜냐하면 일찌기 KJV이 이 단어를 교사를 의미하는 schoolmaster로 번역을 했는데 현저한 오역이 되었고,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의역을 한 것입니다. J.B.Philips는 이렇게 옮겼습니다. “the law was like a strict tutor in charge of us until we went to the school of Christ…”(율법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기 까지 우리를 책임지는 엄격한 개인교사와 같다.) 가장 최근의 번역에 속하는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The Message는 Philips와 비슷하게 “The law was like those Greek tutors…”(율법은 옛 그리이스의 개인교사와 같았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몽학선생은 고대 그리이스에서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성숙하여 청년이 되기 까지 그의 성장의 전체 과정을 책임지는 노예로 헬라어로는 paidagwgos 라고 했습니다. 교육학 또는 교수법을 의미하는 pedagogy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학문적 교육을 담당했다기 보다는 주로 버릇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면 그를 학교로 데려가고 학교에는 몽학선생들이 대기하는 방이 있어서 거기서 기다리다가 방과 후에 다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숙제를 하도록 달라붙어서 시키고, 그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게 합니다. 훈육 선생 같은 역할인데 어려서부터 청년이 되기까지 거의 온 종일 붙어서 그를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고대 몽학선생에 대한 그림들이 발견된 것들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매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을 볼 때 매우 엄격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가 장성하여 청년이 되어 성인이 될 때 그는 더 이상 몽학 선생의 지도와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사실 몽학선생은 그를 성장하여 독립된 성인이 되도록 이끌어주고 인도해주는 것이 그 사명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 사도가 설명하는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은 몽학선생과 같습니다. 그것은 엄격하고 가차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장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게 될 때에는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은 그렇게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의 이런 엄한 기능을 아마 키모테라피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암을 치료하는 키모테라피는 19절에서 말씀한대로 결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키모테라피는 죽이는 치료법입니다. 화학물질들(chemicals)은 몸 속에 들어가서 암세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조직까지도 파괴합니다. 이 치료를 하는 동안에 환자는 사실 전체적으로 힘과 건강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치료를 하는 이유는 당장에는 견디는 것이 힘들어도 장기적으로 암세포를 죽임으로써 건강을 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죄를 범하게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 악화시키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믿음으로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갈구하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기에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은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죽을 암환자라고 선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도 스스로를 고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선고를 받은 사람만이, 이 자신에 대한 자각을 얻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저 주시는 복음의 은혜에 간절히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두 가지로 정리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겠습니다.
A.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죄인의 구원은 죄인이 범할 수 밖에 없는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범하실 수 없는 약속에 근거한다.
구원은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변경할 수 없는 유언의) 약속에 근거합니다. 율법은 죄인이 범하지 않을 수 없는 또는 범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근거로 율법을 제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과 생명의 근거로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은 ‘내가 해주마’(I will)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변덕스러운 우리가 지켜야 하는 약속이 아니라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결코 변경하시거나 폐하시지 않고 지키실 약속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리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그 약속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겠다”(요 1:12)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B. 율법만이 죄인을 믿음으로, 구원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은 자기 방식대로 나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 오직 한 가지 길만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복음의 하이웨이로 가는 길은 오직 율법이란 진입로를 통과하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에 이 말씀을 적용해보십시오. 율법이란 진입로를 통과하지 않고 복음의 하이웨이로 들어오게 된다면 여러분은 복음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죄로 비참해지고, 아무런 소망이 없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괴로움이 없이, 믿음으로써 의롭다하시는 복음의 은혜에 들어오셨다면 결코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거꾸로 여러분이 복음의 은혜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살 수 없다면 여러분이 율법이라는 진입로를 통하여 복음의 하이웨이로 들어온 것인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율법이 먼저 나를 정죄하여 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쉽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결단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죄로 비참한 처지에 빠져있는 소망없는 여러분의 상태를 율법이 가르쳐주는 것을 경험하셨습니까? 그것을 경험하고 사십니까? 그 경험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이란 조심스럽게 서행을 해야하는 진입로가 아니라 신나게 달릴 수 있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하이웨이임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믿음으로 거저 주시는 구원을 준다고 말하는 것을 듣기 전에, 여러분은 율법이 여러분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
여기서 율법을 잘못 사용한 사람의 이야기를 언급해야만 하겠습니다. 바로 부자 청년 관원이었습니다(눅 18:18~23). 예수님께서 율법의 내용을 십계명의 항목들로 말씀하시자 그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율법으로 자기의 죄를 찾는데 쓴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로움을 확인하는데 썼다는 것입니다. 앤드류 쥭스(Andrew Juk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단이 율법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입증하려 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입증하시기 위해 그것을 주셨다.”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우리는 자기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도덕성을 확인하는데 율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꼬박 꼬박 한다든지, 주일을 꼬박 지킨다든지 하는 식의 율법 지킴으로 자신의 의로움과 옳음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가신다면, 여러분은 율법을 잘못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참으로 아신다면 여러분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계시하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탐내지 말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우리 안의 탐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오직 율법 안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의 터 위에 세워진 도덕과 윤리는 결코 우리의 죄성을 가르쳐주지도 않고 줄 수도 없습니다.
절망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찾지 않습니다. 율법을 모르면 결코 그는 구원의 길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의 기본적 요점은 인간을 향상시키는게 아니라 악화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스스로 겸비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깨어지게 하고 부서지게 한 후에 그들로 하여금 은혜를 구하게 하고 마침내는 복된 씨인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한다.”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말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체면이라는 껍질을 벗겨내고 그 바닥에 깔린 참 모습을 밝혀줍니다. 현대 사회가 복음을 깨달을 수 없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 없이 복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는 아무리 값비싼 진주라 할지라도 그 가치를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습니다. 율법이 먼저 계시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마치 칠흙같은 밤 하늘에서만 별들이 나타나듯이 죄와 심판의 어두운 배경을 향해서만 복음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멍들게 하여 죽이기 전에는 우리가 우리의 상처를 싸매줄 복음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체포하여 감금하기 전에는 우리가 우리를 풀어주시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여 죽이기 이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 요청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자신에 대한 실망 가운데로 인도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지옥에까지 낮추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를 천국으로 올려 주시는 복음에로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