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oneers of the seven seas를 우연히 읽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50년대에 출판된 책이다. 200페이지에 20장으로 장별로 10페이지정도로 스티머가 출현하기전 무역선의 주종이었던 클리퍼에 대해 주로 기술하고 있다. 범선인 만큼 위도40도 이하에서 적도로 부는 북동무역풍(남반구는 남동무역풍)과 40도 이상에서 60도로 부는 남서풍(남반구는 북서풍)도 기술하고 있다. 3 포에니인들은 홍해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지중해로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가능한 것이 몬순북동풍으로 아프리카동부를 따라 내려오는 것과 희망봉에서 남동무역풍이 있으며 여기에 아프리카를 따라 시계방향의 조류도 있기에 어렵지 않다. 7
남과 낮의 기온차이로 인한 해풍과 육풍도 아프리카 대륙을 따라 항해한다면 가능한 풍력이다. 범선은 순풍은 물론 역풍도 활용할 수있기 때문이다. 9 다우는 지금도 동아프리카에서 인도를 돛과 북극성만을 의지하여 오가는 화물선인데 좁고 길어 약간의 바람에도 이동이 가능하다. 주로 이른 봄까지 몬순을 활용하여 아프리카로 대추야자와 어류를 실어가고 늦봄에 망그로브 목재를 가지고 돌아온다. 위도측정은 9세기에 아랍인들이 발명한 카말을 활용하는데 삼각형의 비를 활용하여 위도는 물론 육지까지의 거리를 재는 것도 가능하다. 19
향해왕 헨리왕자는 실제로 향해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15세기에 향해학교를 설립하여 향해사를 길렀고 동시에 해도와 향해관련자료를 모아 선장에게 명령하여 그때까지 알려진 지중해인근에서 희망봉까지 해상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32 디아스는 1488년 희망봉까지 도착했으나 폭풍으로 고생한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어쩔수없이 귀국했고 희망봉을 폭풍의곶이라 명했는데 나중에 포르투갈왕이 희망봉으로 개명했고 1497년에 다가마가 인도까지 항로를 개척하는 바탕이 되었다. 39
다가마는 인도항로개척임무를 받고 2년간 항해정보를 꼼꼼하게 수집하고 원정준비를 치밀하게 한후 1497년 7월 8일에 리스본에서 4척으로 출발하여 인도까지 왕복 42,000키로를 향해하여 2년후에 귀국했는데 170명이 출발하여 55명만 생존하기도 했다. 도중까지 동행한 디아스의 조언으로 시에라리온에서 연안을 벗어나 무역풍을 활용하고 무풍지대와 폭풍지대를 우회하여 90일만에 희망봉을 돌아 모잠비크와 몸바사, 그리고 말린디를 경유했고 안내자를 고용하여 300일만에 인도에 도착했다.
3개월간 향신료를 구입하고 통상계약을 체결하려 노력했으나 독점을 유지하고자 하는 무슬림상인의 반발이 심했고 가져간 상품도 환영받지못하여 8월말에 귀국 길에 올랐는데 몬순으로 올 때 23일이 걸린 인도양 횡단이 132일이나 걸렸고 선원의 절반이 사망했고 나머지도 괴혈병으로 고생했다. 결국 모잠비크를 탈출할 때 침몰한 한척외에 다른 한척도 침몰시켜 인력소요를 줄여서 7월 10일에 첫 배가 리스본에 도착했고 두번째 배는 병에 걸린 다가마형제를 아조레스제도에 내려주고 7월말에 귀국했다. 병사한 형을 장례지내고 다가마은 9월에 리스본에 도착해서 국왕의 거국적인 축하를 받았다.
다가마는 귀족칭호를 받았고 인도제독으로 임명되었으며 투자자는 원금의 60배의 배당금이 돌아갔으며 장기적으로 신항로개척으로 포르투갈은 엄청난 무역이익을 올리게되어서 그는 1519년 백작으로 임명되었고 1524년에는 인도부왕으로 부임하여 현지안정을 위해 노력했지만 말라리아로 병사했다. 그의 1차항해기록인 바스쿠 다가마의 첫 인도 여행기는 동행자가 저술하여 독자에게 생생한 묘사를 제공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40
마젤란이 신대륙의 남쪽을 돌아 최초의 세계일주를 성공시켰다면 Cort Real은 북쪽을 돌아 시도했지만 뉴펀들랜드의 발견에 그친 경우다. 55 William Dampier는 로빈슨 크루소의 소재를 제공했던 향해에 참가한 적이 있으며 두번의 세계일주를 했고 해풍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A Discourse On Winds 72 가장 위대한 향해가는 James Cook선장이다. 그는 한명의 부하도 잃지않고 귀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던 그도 3차 세계일주중 하와이에서 사소한 다툼으로 사망하는데 선원은 물론 원주민도 비통해했다.
선원의 사망을 방지한 것은 괴혈병을 막기위해 새롭게 도입된 규칙을 준수한 것인데 우선 절인 양배추인 자우어크라우트 등을 간부에게만 나눠주자 일주일도 되기전에 이를 부하들이 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두번째 항해에서 호주와 남극대륙을 발견하기도 했다. 세번째 항해는 북서항로를 탐색하는 것이었는데 범선으로는 무리였고 귀국중에 살해된다. 괴혈병은 러일전쟁시에도 러시아군이 충분한 콩이 있었음에도 일본군의 봉쇄에 야채공급이 차단되자 발생하여 승패를 원인이 되었는데 유럽에서는 콩나물을 만드는 습관이 없었기에 그랬다. 75
John Harrison은 위도와는 달리 경도계산을 하지못했던 이유로 정확한 해양시계를 제작했다. 위도는 소재지에서 잰 북극성의 각도로 결정할 수있지만, 경도는 자전으로인해 정확한 시간이 필요하다. 기준점과 소재지의 시차에 자전속도인 15도/시를 곱하면 경도를 알아낼 수있다. 물론 공전에 따라 북극성은 움직임이 거의 없지만, 별자리의 위치는 1도/일씩 변동하므로 정확한 경도는 두가지를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매년 almanac이 발행된다. 85
거리보다 바람과 조류가 더 중요한 범선에 비해 기선은 거리가 짧고 연료를 보급할 수있는 항구가 있는 경로를 선호하므로 수에즈운하가 개통될 수있었다. 95 목선건조에 좋은 재료인 티크는 비중이 1보다 크다. 다시 말해 밀도가 큰 철이나 강으로 조선을 해도 된다는 뜻이다. 목선에 비해 강선은 검사와 수리가 용이한 것이 전환의 가장 큰 이유다. 98 기선은 풀먼이 가장 유명한데 그 이전에 비운의 발명가 2명이 있었고 풀먼도 생전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114
최초의 단독 세계일주는 조슈아 슬로컴선장이 1895년부터 37피트의 범선으로 3년2개월2일동안 74,029키로를 항해하여 1989년6월28일 새벽1시에 귀항했다. 그는 2년후에 '홀로 세계를 일주하기'를 발간하여 세계적인 명사가 되고 부자가 되었다. 마젤란이 첫 세계일주를 한 1522년이후 356년만에 단독항해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노바스코샤에서 태어나 14세부터 고깃배를 타기 시작해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섭렵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태우고 바다에서 지내다가 50세가 되자 더 늦기전에 세계일주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굴잡이 어선을 매입하고 개조하여 출항한 것이다. 육분의와 해상시계에만 의존하여 거둔 성과여서 더 놀랍다. 188
무기항 단독세계일주는 1967년 치체스터가 세웠는데 226일만에 귀항하여 영국여왕에게 기사작위를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3년간의 항해를 마치고 귀항했던 슬로컴이 친지들에게 십년쯤 젊어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도전은 회춘의 비결인지도 모른다. 그는 책과 범선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바람의 힘으로 이동했으니 지금 시도한다면 콩나물을 키워 비타민을 공급하고 빗물을 모아 음수를, 태양열발전으로 전기를, 그리고 낙시로 단백질을 얻으면서 섬과 항구를 다니며 바람을 기다리는 여행을 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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