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드 체페슈- 드라큘라의 초상화.
그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왈라키아를 수호한 영웅이었다.
외세의 잦은 간섭과 침략으로부터 흩어진 힘을 모으고 강력한 군주로 거듭나기 위해
포로를 말뚝에 꽂아 처형하였으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 또한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말뚝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원성 또한 대단했다.
영웅과 흡혈귀의 두가지 전설, 드라큘라
검은 망토, 뾰족한 송곳니에 창백한 얼굴. 마늘과 십자가, 햇빛을 싫어하고 사람의 피를 좋아하는 존재 …. 세상에 알려진 드라큘라의 모습이다. 그런데 루마니아인들에게 드라큘라는 흡혈귀가 아닌 영웅이다. 루마니아 남부의 마을에서는 해마다 드라큘라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축제를 벌인다. 올해 3월에는 루마니아 관광부 주도로 드라큘라의 탄생지로 알려진 트란실바니아 지방 시기쇼아라 시 외곽에 드라큘라 테마 공원이 착공되기까지 했다.
역사 속의 드라큘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야기는 약 600년 전 루마니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드라큘라는 ‘용의 아들’이라는 뜻
드라큘라의 본명은 블라드. 그의 아버지도 블라드(2세)다. 그는 블라드 3세라고 칭하지만 일부 사서에는 블라드 4세 또는 블라드 5세로도 기록되었다. 루마니아에 있던 소국 왈라키아의 영주였던 그는 포로와 범죄자들에 대해 말뚝으로 인체를 세로로 꿰어 죽이는 잔혹한 처벌을 가했기 때문에 ‘꼬챙이로 찌르는 자’라는 의미의 ‘체페슈’라는 별칭을 얻어 ‘블라드 체페슈’로 널리 알려졌다.
블라드 체페슈가 ‘드라큘라’라는 호칭도 아울러 가지게 된 것은 용맹했던 그의 아버지 블라드 2세가 헝가리 왕으로부터 ‘용(Dracul)’이라는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드라큘라라는 말은 루마니아어로 ‘용의 아들’이라는 의미다.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악마의 아들이라는 뜻도 된다.
동으로는 흑해 너머 오스만튀르크, 서로는 헝가리, 남으로는 불가리아, 북쪽으로는 트란실바니아와 몰도비아와 접한 왈라키아는 헝가리 왕국에서 독립한 공국(公國)으로, 14세기 초 드라큘라의 조상 바사라브 1세가 세웠다. 전통적으로 왈라키아 군주는 헝가리 왕의 가신(家臣)이었다. 왈라키아의 왕위는 세습제이기는 했으나 장자상속제가 아니라 왕가의 혈통 가운데 유력한 왕족을 귀족들이 왕으로 선출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그치지 않았다.
거기다 왈라키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유럽의 방패 구실을 하던 동로마제국이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게 결국 무너져 왈라키아는 오스만튀르크의 직접적인 공세에 맞닥뜨리게 되었고, 세력이 정점에 달하던 헝가리 왕국도 로마 카톨릭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왈라키아 뒤쪽에서 오스만튀르크와 대립하고 있었다. 왈라키아는 로마 카톨릭과 이슬람이라는 양대 세력의 충돌지로 전락할 운명이었다.
외세에 맞서 싸운 소국의 군주
드라큘라의 아버지 블라드 2세 드라큘은 급변하는 주변 정세를 살피며 ‘줄타기’ 외교로 자국의 독립을 유지했다. 상황에 따라 오스만튀르크와 헝가리 사이를 교묘히 오간 것이다.
드라큘라는 동생 라두와 함께 오스만튀르크에 인질로 잡혀 소년 시절을 보냈다. 1448년, 그가 홀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 블라드 2세와 형 미르체아는 헝가리와 손잡은 귀족들의 농간으로 이미 암살당한 후였다. 관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와 형의 처참한 모습은 그들이 산 채로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배신자들에 대한 드라큘라의 분노와 복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드라큘라는 오스만튀르크의 지지를 받아 17세의 나이로 왈라키아의 통치자가 되지만 그의 집안과 숙적 관계인 다네스티 일족과, 왕권을 좌지우지하며 사리 사욕 채우기에 바빴던 귀족들의 위협으로 두 달 만에 왕위를 버리고 피신한다. 몰다비아를 거쳐 헝가리로 피신하여 재기를 노리던 그는 1456년, 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습을 감행하여 다네스티 일족을 몰아내고 다시 왕위를 탈환한다.
드라큘라의 두 번째 치세는 1462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그는 내부의 적을 과감히 숙청하고 외부의 공격에 대비한다. 이 시기는 그의 위업이 가장 돋보인 때이기도 하지만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행동을 저지른 때이기도 하다. 그는 왕위를 되찾고 나서 수백 명에 달하는 귀족을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가 하면, 당시 상권을 장악하고 폭리를 취하던 독일계 상인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하였고, 배신자와 도둑을 엄히 처벌하였다. 따라서 귀족들과 독일계 상인들은 그를 암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백성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왈라키아에서는 상업이 번창했으며, 배신자와 도둑이 사라지고 질서가 유지되었다. 드라큘라의 통치 기간 내내, 마을 우물가에 금잔을 두고 광장에는 은제 탁자와 의자를 두어도 어느 한 사람 훔쳐가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문을 잠그지 않고도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고 한다.
루마니아의 민족 영웅, 드라큘라
내부적으로 정적을 숙청하고 질서를 잡는 한편, 드라큘라는 산꼭대기에 견고한 성을 쌓아 다가올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스만튀르크에서 신임인사차 사신이 파견되어 왔다. 오스만튀르크 사신들이 자신들의 관례라며 터번을 벗지 않자 드라큘라는 그들의 머리에 쇠못을 박아 시체로 돌려보냈다. 1461년, 10만 명에 달하는 오스만튀르크 군대가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이 때 드라큘라의 군사는 불과 수천 명 남짓했다고 한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드라큘라는 급습과 게릴라전으로 적군을 격파하고 수만 명의 포로를 꼬챙이에 꿰어 매달아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다시 5만의 오스만튀르크군이 몰려왔다. 수백에 불과한 남은 병사로 포위공격을 버티던 드라큘라는 헝가리 국왕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내는 이 때 적군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성의 탑에서 투신 자살했다고 한다.
1462년, 헝가리 왕은 독일 상인들의 모함하는 말을 듣고 드라큘라를 감옥에 가둬버린다. 유폐기간 동안 그는 루마니아 정교를 버리고 헝가리인들이 신봉하는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은 루마니아 정교회 사제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는 빌미를 제공한다. 만 13년간의 유폐생활 끝에 1476년, 헝가리 왕은 오해를 풀고 그를 풀어준다. 그 사이 왈라키아의 왕권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통치자 술탄의 뜻에 따라 친 오스만튀르크 성향을 띤 라두(드라큘라의 동생)를 거쳐 다네스티 가문으로 넘어가 있었다. 물론 이들은 오스만튀르크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인근 트란실바니아와 몰다비아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드라큘라는 세 번째로 왈라키아의 군주 자리에 복귀한다. 그러자 부쿠레슈티에 있던 오스만튀르크 군대는 곧이어 왈라키아를 침공해 왔다. 지원군들도 돌아간 뒤라 드라큘라의 휘하 군사는 미미한 데다, 견고했던 성채도 파괴되어 있었다. 1476년 12월, 드라큘라는 45세를 일기로 전사하고 그의 목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술탄에게 보내진다.
소설, 영화 등에서 흡혈귀로 그려
드라큘라는 수많은 사람을 꼬챙이에 꿰어 고문하거나 처형한 잔인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이것이 그의 정적들이 그를 폄하하기 위해 퍼뜨린 소문인지, 아니면 그가 적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자비롭기보다 정의로웠으며, 정직과 신의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고, 외세에 맞서 왈라키아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군주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잔인성에 대한 소문은 후대에까지 널리 퍼졌다. 이것이 중세 유럽을 강타한 흡혈귀 전설과 맞물려 19세기에 이르면 ‘흡혈귀 드라큘라’가 탄생한다. 그를 흡혈귀로 재창조한 작가는 아일랜드의 괴기소설 작가 브램 스토커. 어린 시절 병약했던 스토커는 병상에서 어머니로부터 흡혈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성장 후 그는 괴기소설 작가가 되었는데 드라큘라에 얽힌 일화를 듣고 그를 흡혈귀로 설정한 것이다. 1897년 간행된 ‘드라큘라’는 스토커의 대표작이자 흡혈귀 소설의 원조가 되었다.
이후 쏟아져 나온 연극과 영화, 뮤지컬에서 드라큘라는 스토커의 흡혈귀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 작품 속에서 드라큘라는 마늘과 십자가, 햇빛을 두려워하며 심장에 말뚝을 박으면 사멸하는 흡혈귀로 표현되었다.
십자가, 마늘 이야기는 후대에 덧붙여
역사적 사실을 미루어 생각해 볼 때, 드라큘라는 서양인이니 실제 마늘을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흡혈귀를 마늘로 쫓는다는 생각은 루마니아 현지인들의 믿음이다. 민간 신앙에서 마늘은 부적 구실을 했다.
그렇지만 드라큘라로서는 십자가를 싫어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실제의 드라큘라는 루마니아 정교에서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한 인물이지 않은가! 설령 흡혈귀 드라큘라라 해도 고대로부터 다양한 종교에 걸쳐 신앙 상징으로 사용된 십자가를 그리 외면할 이유는 없다. 다만 스토커의 소설 이후로 십자가를 신성시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드라큘라 퇴치용’ 성물로 그려놓았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최근의 드라큘라 영화에서는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드라큘라도 등장했다.
루마니아에서는 드라큘라에 대해 용맹하고 애국심 강한 영웅으로 해석하고 과거 공산 정권 시절까지만 해도 ‘흡혈귀 드라큘라’와 관련된 일체의 서적과 영화를 금지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드라큘라가 한 때 머물렀던 브란 성을 ‘드라큘라 성’으로 개조하고, 드라큘라의 탄생지 시기쇼아라 시 외곽에 드라큘라 테마 공원을 만드는 등 드라큘라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루마니아의 사학자들은 이에 불만이 많다. 드라큘라가 과격하기는 했지만 결코 사람의 피를 들이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는 그를 흡혈귀로 기억할지라도 루마니아인들에게 드라큘라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잊지 못할 민족의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