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장보병도 있었지만 중장보병을 보조해 주는 정도였고 실제 전력이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군이 제일 두려워하던 상대는 기병대였다. 기병대는 중장보병이 꿈도 꿀 수 없는 기동력과 함께 밀집대형을 파괴할 수 있는 돌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밀집대형이 한 번 파괴되면 수습이 불가능했고, 절망적인 백병전 또는 도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아테네군이 마라톤에 도착해 보니, 얼마 후에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한 페르시아 기병대가 몰래 배에 올라타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주로 경장보병뿐인 페르시아군 진지를 쳤다. 당황한 페르시아군은 활과 검으로 대응했으나 팔랑크스의 철벽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아테네군의 수적 열세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고, 그들은 전차처럼 장갑차처럼 적을 밀어붙였다. 방패로 밀치고, 창으로 꿰고, 칼로 내리찍고. 이 때 페르시아군의 가장 나은 대응책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면서 때때로 돌아서서 반격하고, 다시 후퇴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중장보병은 그들을 따라잡을 속도가 없는 데다 쉽게 지쳤기 때문에 결국 진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페르시아군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런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첫째, 조국과 가족을 구할 결의에 불타는 아테네군과 달리 왕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전쟁터에 끌려왔던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기백이 부족했다. 그래서 양쪽 날개가 먼저 무너지자 둑이 터지듯 무질서하게 달아나고 말았던 것이다. 둘째, 페르시아군의 진영 뒤에는 얼마 못 가서 큰 늪지대가 있었다. 도망치다가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페르시아군 병사들을 아테네군은 악마처럼 도륙해 버렸다. 아테네군의 전사자 192명, 페르시아군은 6400에 달했다고 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배를 타고 달아나는 적군을 바라보다가, 밀티아데스는 비로소 적 기병대가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차렸다. 본래 페르시아군은 아테네군을 마라톤으로 유인해서 붙잡고 있는 동안, 주력을 배편으로 빼돌려 아테네를 직접 공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면 아테네의 친 페르시아 세력이 내응하게 되어 있었다. 아테네군은 부랴부랴 왔던 길을 되짚어, 그야말로 마라톤을 하듯 달려갔다(이 전투의 승전을 알리려 42.195킬로미터를 달려간 병사가 아테네에 이르러 소식을 전하고 죽었다는 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간발의 차이로 그들은 페르시아군보다 먼저 아테네에 닿았고, 적군은 상륙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이렇게 해서 페르시아 전쟁의 제1막은 끝났다. 그리스의 ‘기적 같은’ 승리로! 혼자 힘으로 페르시아를 물리침으로써 아테네의 위신은 한껏 높아졌고, 그것은 다른 그리스 도시들에 ‘페르시아, 페르시아 하더니만, 별 것 아니잖아?’하는 자신감과 ‘다음에는 우리도 한몫 해야지!’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한편 페르시아의 야전지휘관들에게는 그리스에 대한 공포를, 최고사령관(즉 왕)에게는 ‘다음에는 온 힘을 다 기울여,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고 말리라!’는 분노를 심어주었다.
테르모필라이, 그리고 불타는 아테네
다리우스는 죽기 직전까지 그리스 원정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기원전 486년에 숨을 거뒀으며 왕세자 크세르크세스(Xerxes I)가 뒤를 이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닥친 이집트의 반란을 평정하고는, 곧바로 그리스 원정 계획에 들어갔다. 그의 사촌이며 트라키아에서 활약했던마르도니우스(Mardonius)는 그리스군의 팔랑크스를 돌파할 능력이 있는 페르시아 기병대, 메디아인, 사카족 등으로만 정예병력을 꾸려 침공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는 그런 “전투에만 초점을 두는 편제”는 페르시아의 전쟁 목적과도 맞지 않으며, 지난번의 승리로 기고만장해 있을 적을 위압할 수도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제국 각지의 백여 개가 넘는 민족을 징집, 복장도 무기도 가지각색인 수십만의(병참 사정 등을 고려하면 수만이었으리라 보기도 한다) 대군을 편성하고는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어 서쪽으로 출발했다. 물자 지원과 별도 병력 수송을 위한, 1천 척이 넘는 함대도 뒤따랐다. “역사상 이루어진 모든 원정을 다 합친다 해도, 이 원정의 규모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아시아의 모든 민족이 크세르크세스의 징발에 응했고, 큰 강 말고는 모든 강물이 이 대군의 식수로 고갈되었다.”(헤로도토스) 왕의 군대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당당하고 여유만만히 소아시아를 지나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헬레스폰트 해협에는 다리를 놓아 건너고, 트라키아를 거쳐, 그리스 북부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페르시아 왕이 세상의 모든 민족을 모아서 그리스를 멸망시키러 온다”는 소문은 그리스에 빠르게 번졌고, 많은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스파르타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대책회의가 열렸지만, 전체 도시의 십분의 일 정도만 참석했다. 스파르타와 오래전부터 앙숙이었던 아르고스 같은 나라는 “스파르타와 한편이 되느니 페르시아의 종이 되겠다”고 선언하고 있었으며, 국력이 상당했던 시라쿠사는 맹주 자리를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팔짱을 껴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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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불멸대. 다리우스 궁전의 부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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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거짓 정보에 속아서 동맹군 병력이 테살리아의 템페로 진입했다가, 하마터면 몰살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오는 일이 생기면서 그리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그러나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Leonidas) 등은 동요하는 시민들과 이웃나라들을 북돋우며 전쟁에 임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480년, 테살리아에서 아티카로 진입하는 좁은 길목인 테르모필라이와 그 근처인 아르테미시움 앞바다에서 마침내 격돌이 벌어진다. 좁은 곳은 폭이 15미터밖에 안 되는 테르모필라이 협곡을 지키던 자들은 레오니다스 왕과 3백 명의 친위대, 그리고 테베와 포키스, 테스피아이 등에서 온 수천 명의 병사들이었다. 이들을 왕이 직접 지휘하는 수만의 병력은 수시간 만에 돌파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아테네가 마라톤에서 중장보병의 능력을 한껏 과시했다면, 테르모필라이의 스파르타 군은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암벽에 의존하여 치고 빠지는 기민한 전술로 페르시아군의 돌격을 몇 번이고 물리쳤으며, 사흘 밤낮 동안 협곡을 철통같이 지켰다. 에피알테스(Ephialtes)라는 배신자가 크세르크세스에게 숨겨진 좁은 산길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더 오래 지켜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레오니다스도 그 산길은 알고 있었지만 워낙 좁고 험한 길이라 페르시아 군이 이용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자그로스 산맥에서 훈련했던 페르시아 왕실 친위대, “불멸대”는 이를 돌파하여 레오니다스의 측면을 공격했다. 전세가 기울자 레오니다스는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시키고, 스스로는 소수의 정예부대와 함께 협곡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그 소식이 가까스로 적함을 막고 있던 아르테미시움의 그리스 해군에게 전해지자, 그들도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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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테네를 포함한 아티카 일대는 유린이 불가피했다. 아테네에서 농성할 것이냐, 델포이 신탁에서 “나무로 된 성채에 의존하라”고 한 말을 “선박을 의존하라”고 해석하여 아테네 근해의 살라미스로 피할 것이냐를 두고 아테네 민회는 격론을 벌였으나, 결국 소수만 남고 살라미스로 피하게 되었다. 얼마 후 도착한 페르시아군은 소수의 농성자들을 살육하고, 아테네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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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에서 플라타이아이까지
아테네를 불태움으로써 승리를 거의 목전에 두었다고 여기던 페르시아군은 살라미스에 집결된 그리스 연합함대를 공격해서 저항의 뿌리를 뽑느냐, 그들을 무시한 채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입해서 스파르타를 불태우느냐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좁은 섬에서 언제까지고 대군과 피난민이 농성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리스 본토가 모조리 페르시아에게 돌아가고 나면 조만간 내부 분열을 거쳐 살라미스는 자멸할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크세르크세스의 선택은 살라미스 공격이었다. 아마도 해군까지 전멸시키고 나면 펠로폰네소스는 알아서 항복해올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약 3백 척의 삼단노선(그 중 2백 척이 아테네 해군이었다)과 그리스 해군은 페르시아보다 조함술에서 앞서는 편이었으나, 배를 햇볕에 말릴 시간이 없어 물을 잔뜩 먹은 채라서 페르시아 배보다 무거웠으므로 기동력이 오히려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살라미스 해협 바깥을 뒤덮은 페르시아 해군은 폭풍과 아르테미시움 해전으로 많이 줄기는 했어도 아직 6백 척 이상이었다. 누가 봐도 페르시아 쪽이 우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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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라미스 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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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체 해군이 없던 페르시아의 해군이란 페니키아, 이집트, 이오니아 등에서 징발한 선박들의 연합함대였으며 따라서 결속력과 투지가 모자랐다. 게다가 하루바삐 승리를 얻고 싶었던 크세르크세스는 “결국 그리스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일부는 엘레우시스 만을 빠져나가 달아날 것이다”라는 가짜 정보에 속아 자신의 함대 중 두 번째로 실력이 뛰어난 이집트 함대를 만의 반대쪽으로 보내 달아나는 적을 공격하게 하고, 나머지 함대는 해협으로 돌입하여 혼란에 빠져 있을 잔당을 소탕하도록 지시했다. 기원전 480년 9월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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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삼단노선. |
그러나 마치 테르모필라이처럼 좁은 해협으로 많은 배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니 자연히 질서가 무너졌고, 협곡 틈에 숨어 있던 그리스 배들은 뛰쳐나와 이들을 공격했다. 기동력이 필수적인 먼바다에서의 해전이 아니다 보니, 그리스의 무거운 배가 오히려 유리했다. 적의 배를 들이받아 격침시키기 쉬웠기 때문이다. 당황한 페르시아 배들은 후퇴하려다가 자기네끼리 부딪치고 깨어지면서 대혼란에 빠졌으며, 그런 배들의 측면에 그리스 배들이 돌진해와 우지끈하고 부딪쳤다. 전세가 기울자 이오니아 함대는 주저없이 도망쳐 버렸다. 이 해전에서 그리스 측이 잃은 배는 40척, 전사자는 1천 안팎인 반면 페르시아 해군은 최소 2백 척의 배를 잃고 4만 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살라미스 해전 후에도 페르시아 군은 아직 수적으로 우세했으나, 의도했던 대로 큰 손실 없이 그리스를 제압하는 일은 이미 불가능해져 있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크세르크세스는 한때 살라미스 섬에 다리를 놓아 육로로 침공하려는 시도까지 했으나, 결국 뒤처리를 마르도니우스에게 맡긴 채 자신은 대부분의 해군과 함께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계속 그리스에 머물다가 패전 소식이 본토에 알려지면 변경에서, 혹은 왕궁에서 반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르도니우스는 이미 사기에서 뒤지고 수적 우세도 잃은 만큼 그리스군과 정면대결하기보다 내부 분열을 획책해서 이기려고 했다.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반목을 노렸는데, 이는 거의 성공하는 듯 했으나 이를 역이용해 아테네를 방관하는 듯 했다가 막판에 군대를 보내 허를 찌른 스파르타, 그리고 아테네, 테게아 등의 연합군과 플라타이아이에서 결전을 치르게 된다. 이번에는 수적으로 불리한 쪽은 페르시아였다. 그래도 분전했지만, 마르도니우스가 누군가 던진 돌에 맞아 전사하면서 결국 무너지고 만다. 기원전 479년이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소아시아의 미칼레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페르시아가 점령한 사모스를 해방하려는 이 전투 역시 그리스의 승리로 돌아갔고, 페르시아 전쟁의 승세는 확실히 그리스 쪽으로 기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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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스의 역습
페르시아 전사를 쓰러트리는 그리스군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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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전장은 그리스를 벗어나 에게 해와 소아시아 반도, 그리고 키프로스나 이집트 등 페르시아의 지배지로 옮겨갔다. 기원전 478년까지 이오니아 도시들이 잇달아 해방되었고, 이후 전쟁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고 손을 떼려는 스파르타와 달리 페르시아를 계속 몰아붙여야 이후에도 재침공을 할 수 없으리라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델로스 동맹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델로스 동맹은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하여 다시 한 번 그리스 해군의 우위를 확인했고, 그리스 북쪽의 트라키아에서도 페르시아군을 내몰았다. 그러나 기원전 454년에는 이집트의 멤피스를 공략하다가 참패하고 말았으며, 이로써 전쟁을 마무리짓자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그래서 마침내 기원전 449년,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에 카리아스 협약이 맺어짐으로써(그 정확한 연대와 성격은 역사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페르시아 전쟁은 끝을 맺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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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남긴 것
전쟁 후에도 페르시아의 위세는 여전해 보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언론을 통제했으며, 페르시아 백성들은 그들의 왕이 서방에서 아테네를 불태우고 스파르타 왕을 죽였다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제국의 위신 추락은 피할 수 없었으며, “중단 없는 정복”을 지향했던 페르시아의 발전전략도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반란이 염려된 중앙정부는 지방의 군사력을 최대한 억제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으며, 이것은 장기적으로 국방력에 치명적 손실을 가져왔다. 그래서 기원전 401년에 키루스의 반란에 동참했던 그리스 용병들은 비록 반란이 실패하여 퇴각했음에도 아르메니아에서 소아시아까지 제국 영토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귀국할 수 있었다. 이제 종이호랑이가 되어가고 있던 제국은 대담하고 야심만만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말발굽에 짓밟힐 날만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후 그리스는 전에 없는 번영기에 들었으며 특히 아테네는 “전 그리스의 모범”임을 자칭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델로스 동맹 맹주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거대 해군을 건설하고 여러 도시국가를 종속시켜, “아테네 제국”의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이를 곱게 볼 수 없었던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결국 갈등을 해소하지 못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약소국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이 어떻게 초강대국 페르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그리스 중장보병과 삼단노선의 기술적 우위도 해답의 일부가 되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버나드 몽고메리는 지형의 유리함을 최대한 활용한 전술의 승리로 본다. 마라톤에서나, 테르모필라이에서나, 살라미스에서나 그리스는 자신들이 유리한 지형에서 싸울 수 있었으며 따라서 전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귄터 블루멘트리트는 그리스군이 대체로 운이 좋았으며, 테미스토클레스나 밀티아데스 같은 명장들의 탁월한 전술적 결정이 큰 작용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빅터 핸슨은 문명사적인 의의를 찾는다. 그리스인들은 “자유인”(비록 민주주의는 아테네에서만 부분적으로 도입되어 있었고, 많은 노예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였지만)이었던 반면 페르시아인들은 모두 왕의 “노예”였고, 자신의 재산과 가족, 조국을 지키려 싸우는 자유인들의 기세에 목숨만 아까울 뿐인 노예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이분법적이고, 서구 중심적인 사고에 기초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라톤이나 테르모필라이에서 페르시아군보다 그리스군의 투지가 훨씬 앞섰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전략, 전술이 다양하지 못하고 무기의 성능도 대단하지 않았던 당시의 전쟁에서, 그런 투지는 전투의 승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병력과 물자에서 압도적이었던 페르시아는 전투에서 몇 번 지더라도 전쟁을 최종적으로 승리로 이끌 힘이 있었으나, 살라미스 해전 후 스스로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것은 먼 타지에서 장기 총력전을 펼치는 일이 페르시아의 전쟁 목표와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를 분기점으로 그리스는 부흥의, 페르시아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것은 장기적으로 유럽이 오리엔트를 압도하고, 7세기에 이슬람이 등장할 때까지 서구문명이 서아시아를 주도하는 역사의 서막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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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ㄷㄷㄷ
근데 자유인의 의지로 이겼다고 하면 왠지 정신승리같은 느낌도 들고...-- 물론 전쟁에서 사기는 중요한겁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사기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그것을 고양시키느냐의 문제로 봐야겠습니다만서도. 구 일본군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동양 vs 서양? 진짜 저 프레임을 아직까지 쓰는 건 --;;
오늘날 서양고대사에서는 이미 안쓰죠. 사실 그리스가 얼마나 짜증나게 페르시아에 삽질을 해대며 찌질거렸는지를 보면;;
저렇게 말했던 몽고메리가 1944년에 아군 전차부대가 올때까지 다리지키고있으라는 명령을 공수부대에게 내릴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빅터 데이비스 핸슨...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무려 정가를 주고 질렀다가 읽고 피토한 살육과 문명...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서역의 대표주자로 꼽은 게 바로 파사국 페르시아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