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이 많은데 게으름을 피운다.
토란대 껍질을 벗겨 뜨거운 가을 햇볕에 말린다.
왼손가락 서너개와 오른 엄지 손가락이 검게 물든다.
난 토란대를 벗겨야 하나 글을 읽어야 하나?
아흔이 넘으셨던 어머니는 허리를 세우고 한나절을 쉬지 않고 그 일을 하셨다.
난 한시간을 버티지 못한다.
동강초 백년사 일도 자꾸 미룬다.
정기적인 편찬위 모임이 있어 상황을 점검하면 진척이 더 잘 될까?
마감시간이 되어야 일의 능률이 오를 것인가?
학교에서 받을 자료도 토요일 기념행사 때 받자고 미룬다.
11시가 넘어 동귀한테 연락하니 바빠 산에 못 간댄다.
후다닥 배낭에 캔맥 하날 넣고 천자암으로 운전한다.
천자암 입구에 차를 세우고 꽃무릇이 몇 개 피어난 암자를 보며
등산로로 접어드니 12시 반이다. 한시간 걸어 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으면 되겠다.
한 사나이가 앞서다가 길을 벗어난다. 버섯 따러 가느냐니 그렇댄다.
천자암봉 아래 보리밥집 가는 삼거리에서 잠깐 머뭇 거린다.
봉우리에 올라 조망을 얻고 조금 더 힘들게 돌아갈까, 얼른 내려가 밥을 먹을까?
천자암봉으로 올라간다.
장군봉이 코앞이다. 백운산 억불봉이 또렷하고 하동의 금오산도 보인다.
지리산도 맑을 것이다. 올해 지리산에 갔던가 못 갔던가?
송광굴목재로 내려가는 능선에 하얀 버섯이 수북하다. 하얀 것이 먹을 것인 듯해 따 식당 주인한테 물어보기로 한다.
굴목재 지나 내리막을 부지런히 걸어 보리밥집에 도착하니 한 시 반이다.
보리밥에 동동주 반되를 주문하며 버섯 이름을 물으니 젊은 여성이 아부지를 부른다.
어른은 내가 내민 두개의 버섯을 보더니 먹지 않는개 좋을 거라 한다.
동동주부터 마시며 보리밥을 먹으니 배가 가득 찬다.
나이든 이들이 슬리퍼를 신고 놀다가 주인한테 호기롭게 인사하며 떠나간다.
서어나무 그늘에 배낭을 베고 눕는다.
30분 정도 잤을까, 잠결에 떠나는 인사 소리에 눈을 뜬다.
2시 반을 넘어간다. 용감하게 송광굴목재로 다시 오른다.
송광사가는 긴 내리막을 힘차게 걷는데 내 앞서 떠난 이가 걸음이 빠르다 한다.
난 다시 천자암으로 걸어야 한다고 뻐긴다.
송광사 침계루 앞으로 내려가 우화각을 지나지 않는다.
'송광사' 9월호를 챙긴다.
지장전에서는 장례 예불을 올리는지 스님의 독경소리 크고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가득 차 있다.
대웅전 뒷쪽 다리 아래를 오리걸음으로 지나고 관음전을 지나 감로탑으로 계단을 올라간다
위창 오세창 글씨의 탑비와 감로탑을 보고 그늘에 앉아 전각의 지붕을 본다.
멀리 모후산이 서 있다.
고색이 보이지 않는 고찰의 지붕 아래 사는 이들은 행복할까?
가닥없는 사진을 찍고 세월각과 척주당을 보고 운구재 쪽으로 길을 잡는다.
4시 15분이 지난다 . 걸음이 바쁘다. 힘은 없다.
채마밭을 지나 오르는 길이 멀고 멀다.
천자암에서 내려올 때는 금방인 듯 하더니 운구재까지도 힘들다. 30여분 지나 운구재에 털썩 주저 앉는다.
캔맥주를 꺼내고 맛동산을 먹는데 날것들이 앵앵거린다.
천자암으로 가는 2km도 돌고돌며 길기만 하다.
5시 50분이 다 되어서야 천자암에 닿는다.
귀여운 개가 용감하게 짖다가 꼬릴 흔든다.
쌍향수를 보고 물을 마신다.
숲 사이의 꽃무릇을 보고 홀로 서 있는 차의 시동을 거니 6시가 다 되어간다.
바보보다 먼ㄴ저 도착하려고 부지런히 운전하는데 바보가 어디냐고 전화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