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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후손의 계보(1) |
남의 나라 조상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 나라에 대한 문화적 실례를 범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우리의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마당에 그 진위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중국인들의 조상과 동이족의 관계에 대해서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현대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펴낸 '고사변(古史辯)'이란 책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다. 동북공정이라는 정책이 실시되기 전에 나온 책이라고 한다.
"....동이(東夷)는 은나라 사람들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복희), 제준, 제곡, 제순, 소호 그리고 설(계=은나라의 시조)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위에 열거되 인물들 중에는 예로부터 동이족이라고 알려졌던 제왕들이 있기 때문에 은나라와 같은 혈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복희는 사기에도 기록된 그들 신화의 아버지이지만 '동방의 제왕', 즉 동이족의 제왕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통지(通志)' 씨족략엔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 되어 있고 '창힐은 고신씨(요임금의 아버지)와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라고 되어 있으니....
그렇다면 그들이 펴낸 '고사변'이나 '통지'의 씨족략 같은 문서들을 우리 글로 펴내는 것이 그들의 역사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역사서인 환단고기를 되살려 우리의 역사서로 공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인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황제의 첫째아들 현효→교극→고신→8원(元)의 혈통과 둘째아들 창의→전욱(고양씨)→8개(愷)의 혈통이 있었다고 말한다. 첫째아들 현효의 후손이 요임금의 아버지인 고신씨였고 둘째아들 창의의 후손이 전욱이라는 북방의 제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신씨와 고양씨에게는 각기 뛰어난 인물이라는 뜻의 '8원'과 '8개'라는 여덟 형제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기의 기록은 대만의 신화학자 원가(袁珂)가 쓴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내용이다. 원가는 산해경, 회남자, 열자 같은 가장 고대의 문서들에 의거해서 중국의 신화들을 다루었지만 사기를 쓴 사마천은 그 후대의 문서들을 원전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원가가 쓴 '중국고대신화'에서는 창의의 아들이 한류(韓流)였고 한류의 아들이 전욱이었다고 말하는데 반해 사기에서는 창의의 아들이 전욱이었다고 말한다. 중간의 '한류'를 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고대신화'에서는 전욱에게는 후계자가 될 만한 아들이 없었다고 한 반면 사기에서는 '8개'라는 걸출한 아들들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기'를 해역한 우리나라의 박일봉 선생에 의하면 '춘추좌씨전'에 고양씨와 고신씨에게 각각 여덟명의 걸출한 후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다. 그러면 춘추좌씨전이란 어떤 문서인가?
춘추좌씨전은 공자가 쓴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를 공자의 제자이자 사관이었던 좌구명이 살을 붙여 재해석했기 때문에 '춘추좌씨전'이 된 것이다. 그것을 서진(書晉) 시대의 두예(杜預)가 다시 첨삭가감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 한다. 두예는 그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중니(공자)께서는 노나라(魯)의 사관(史官)이 책에다 써 성립된 옛 글에서 그 참되고 거짓됨을 상고하여 옛날의 법식과 예법을 밝히어 썼다....전(傳=좌구명의 해설서)의 글 중에서 세상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바가 있으나 뜻을 해치는 대목은 삭제하고 새로이 바로잡고, 그 밖의 것은 다 전(傳)의 역사기록을 그대로 이용했다....
노나라의 사관은 춘추전국 시대의 역사기록을 썼고, 그것을 공자가 다시 추리고, 거기다가 공자의 제자 좌구명이 다시 살을 붙이고, 그로부터 진→한→삼국시대를 지나 서진 시대의 두예가 또 첨삭가감해서 쓴 것이 오늘날의 춘추좌씨전이라는 예기가 된다. 그러면 산해경, 회남자, 열자 같은 고대문서를 바탕으로 쓴 원가의 '중국 고대신화'와 수세기를 거치면서 첨삭가감된 '춘추좌씨전' 중 어느 것이 원형에 가까울까? 첨삭가감 이전의 고대문서가 원형에 가까웠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기'에서도 '중국고대신화'에서도 황제의 증손자 전욱(고양씨)과 요임금의 아버지 고신씨를 황제 다음의 중요한 조상으로 여기고 있음은 동일하다. 그들이 당시의 세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고신씨는 요임금이라는 훌륭한 임금의 아버지였고 전욱은 북방의 제왕으로 알려졋을 뿐 아니라 많은 신화적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다.
요임금의 아버지 고신씨가 동이족 치우천왕의 후손이라는 것은 중국의 '통지'라는 문서 씨족략에 씌여 있다고 한다. 고신씨가 황제의 증손자라는 사기의 기록과는 다른 것이다. 또 북방의 제왕 전욱에 대해서도, '중국고대신화'에서는 전욱의 할아버지 창의(昌意)가 잘못을 저질러 약산에 유배되어 살았다 하는데, 사기에서도 황제의 아들 창의가 약산에 살았다고 한다. 황제의 둘째아들 창의가 약산에 살았던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신화에서는 창의의 아들이 한류(韓流)였고 한류의 아들이 전욱이었다고 한 반면 사기에서는 창의의 아들이 전욱이었다고 말하는 점이 다른 것이다.
왜 이런 차이점이 발생한 것일까? 신화에서는 창의의 아들 한류가 목은 길고 귀는 작으며, 얼굴은 사람의 얼굴인데 입은 돼지의 입이고, 마치 기린처럼 목은 길지만 두 다리는 하나로 붙어 있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는 이상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한 모습의 조상은 계보에서 빼야 했기 때문에 한류의 아들 전욱을 창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사기에서는 고양씨(전욱)와 고신씨에게 각기 8개와 8원이라는 걸출한 아들들이 있었다고 간단히 말하지만 춘추좌씨전에서는 그들의 이름까지 거론한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 경에 쓴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간단히 '8개(愷)'와 '8원(元)'이 있었다고 한 반면 그로부터 약 3백년 후에 첨삭가감되어 만들어진 오늘날의 춘추좌씨전에서는 그 이름들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신농(神農)의 후손들이 8대 530년에 걸쳐 자신들의 조상을 다스렸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 8대의 이름들을 자세히 거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제(帝)자가 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마지막 후손이 제(帝) 유망(楡罔)이었다고 말한다. 이는 그 후대의 인물 황제(黃帝)와 같은 수준에 있었던 인물들이 신농의 후예였다는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이 주,보,감,허,희,로,제,기,이,상,신,여(呂) 같은 여러 성씨로 갈라졌으며 모두 그 후대에 제후가 되거나 사악(고관직)을 차지했다고 한다.
....주(周) 시대에는 포후, 신백이 왕실의 현상(재상)이 되었고 제(齊) 허(許)는 제후의 열에 들어 중국에서 패(覇)라고 일컬어졌다. 생각컨데 성인(聖人)의 덕택(德澤)이 광대하여 그 자손이 번창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성인이란 곧 염제 신농(神農)을 가리킨다. 사마천은 이처럼 신농을 고대의 성인으로 치고 그를 복희 여와와 함께 삼황(三皇)의 하나로 친 반면 그 후대에 이르러서는 신농 대신에 황제를 삼황의 대열에 넣어 자신들의 직계조상으로 만든 것이다. 신농의 후손에 대해서 사마천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그 기록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반면 황제의 후손이었다는 고양씨와 고신씨가 8개와 8원이라는 걸출한 아들들을 가졌었다는 기록은 간단히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신농 대신에 황제를 삼황의 하나로 치듯이, 앞에 제(帝)자를 붙여 부를 정도로 걸출했던 신농의 여덟 후예들을 황제의 후손이라고 변조한 것은 아닐까? 춘추좌씨전에서 말하는 8개와 8원은 그들의 이름만 거론하고 있을 뿐 그들의 활동이나 후손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8개'라는 걸출한 아들들을 두었다는 전욱의 왕통은 전욱에서 끝났고, 전욱의 왕통을 이은 것은 고신씨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신씨의 아들 요임금은 8개나 8원의 걸출한 인물들을 기용하지 않았다고 사마천은 말하고 있다. 걸출한 8개의 아들들을 둔 전욱은 무엇 때문에 고신씨에게 왕통을 넘겨야 했으며 또 고신씨의 아들 요임금은 왜 친족인 8개나 8원 중에서 아무도 기용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는 사마천이 사기를 쓰면서 역사학자 다운 양심을 들어낸 증거라고 생각한다. 춘추좌씨전에서 고양씨와 고신씨에게 8개와 8원이라는 걸출한 후손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신농의 8대에 걸친 걸출한 후손들을 갖다가 변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농의 후손에 대해서는 자세히 쓴 반면 고양씨나 고신씨의 후손에 대해서는 간단히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아무도 기용되지 않았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걸출한 인물들 중에서 아무도 기용되지 않았다면 역사적 논리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고양씨와 고신씨에게 걸출한 아들들이 있었다고 쓰기는 했지만 독자들에게 그 진의를 파악하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다.
사마천은 그가 살았던 한(漢)나라 시대의 조상에 관한 계보가 변조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요임금의 조상도 황제가 아니라 문조(文祖)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요임금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던 순(舜)이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요임금의 조상인 문조(文祖)의 묘에 가서 제사지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순이 섬기던 요임금의 조상이 황제가 아니라 문조였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마천 같은 당대의 학자가 '통지'라는 문서를 안 읽었을 리 없고, 통지에서 말하는 중국인들의 조상 계보와, 동이족을 사방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한 후인 한나라 시대의 조상의 계보에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해서든 진실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나마 진실을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사기의 첫머리에서 말하는 조상들에 관한 계보가 모순성을 일부 지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120장 참조)
그러면 중국인들은 왜 신농 보다는 황제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으려고 했고 또 신농의 걸출했던 후예들을 황제의 후손이라고 변조한 것일까?
신농은 우두인신, 즉 소머리에 사람의 몸집을 한 이상한 조상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 황제는 동이의 제왕 치우(蚩尤=자오지 환웅)와 싸워 이긴 강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농의 후손이 어떤 성씨로 갈라져 나갔는지, 또 동방의 제왕이라 불린 복희(伏羲)의 후손 풍(風)씨가 또 여덟 개의 다른 성으로 갈라져 나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인들은 고대의 인물들 중에 동이족에 그 뿌리가 가 닿지 않는 인물이 없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더 이상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는 시대에 이른 것이다. 동이족을 오랑캐라 하여 적대시해야만 하는 시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라는 초기의 역사서에서는 하,은,주의 고대 나라들이 정치를 잘못할 때마다 동이가 쳐들어왔다는 기록을 사실대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하나라와 같은 시대에 단군왕검은 거대한 전장이 된 대륙을 피해 동북쪽 송화강 유역에서 단군조선을 출발시키고 있었고, 치우천왕의 영토였던 중국의 동부지역엔 많은 동이족이 그대로 살고 있었으며, 그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순임금에게 이첩했기 때문에 하은주 시대의 정치에 대해서 단군조선이 간섭을 했던 것이다. 그 지역의 백성은 동이족이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로서의 사마천은 동이족과 한족의 뿌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기의 첫머리에 나오는 '삼황본기'에서 말하는 초 고대의 기록들이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환인 시대의 기록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마천은 삼황인 복희, 여와, 신농이 동이의 조상인 환웅(桓雄)에서 갈라져 나간 환웅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이의 문명이 선진문명이었고, 대홍수 후에 태어난 한(漢)족은 홍수 이전부터 있었던 동이의 문명을 계승했다는 많은 사료적 근거가 있었지만 그 사실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 시대의 중국은 동이족에 비해 한족의 인구가 우세했고, 그 결과 언어도 동이족의 그것이 한족의 언어로 흡수되어 새로운 문화권을 형성한 나라로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현대 역사학자들이 펴낸 '고사변(古史辨)'이란 책에서는 자신들의 조상이 동이족과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이의 문명이 선진문명이었다는 점도 인정한 것이다. 작금의 동북공정에서 말하는 고구려사 왜곡은 역사학이 아닌 정치적 우격다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위의 그림들은 '십팔사략'이라는 고대문서에 실린 황제와 신농의 그림이다. 까만 그림은 돌이나 금속에 새겨져 있었던 고대의 그림이고(금석화) 하얀 그림은 후대의 사람이 그린 것이라 한다. 신농의 모습을 보면, 머리엔 두 뿔이 나 있었기 때문에 인신우두의 신으로 전해졌고 쟁기로 밭을 가는 것은 그가 농사와 의약의 신이었다는 뜻이다.
('정신세계사' 간 임승국 역해 '한단고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