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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은하
머리말
대학에 갓 입학한 청년이 역사와 은하의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줄 단서가 되는 꿈을 꾸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다가올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어둠의 시험에 한발 한발 말려드는 청년은 과연 유혹을 이겨내고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지켜봐 주십시오. 부족한 글이나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례
01 청운의 꿈
02 신내림
03 귀신
04 졸업장
05 민족
06 외계인
07 쌍둥이
08 낙원
09 단군
10 환웅
11 데이트
12 사방신
13 마(魔)
14 여의도
15 은하
16 선택
17 선악과
18 4세대
19 어머니
20 텔레파시
01 청운의 꿈
영필은 양손에 짐을 들고 언덕길을 저벅저벅 걸어올라갔다. 한참을 오르니 저편의 기숙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휴우~~, 저기구나."
열여덟 청춘을 공부에 불살라 마침내 입학하게 된 서울대학교였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뜻모를 열정을 불태워 이곳에 입학하긴 했으나 장차 어떤 생활이 펼쳐질지 가슴이 설레었다.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배정받은 2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2인1실 구조였다. 방짝은 먼저 도착한 듯 짐이 조금 놓여있었다. 양쪽에 책상과 침대 그리고 옷장 하나씩 단촐한 방이었다. 짐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는데 조금 있자 방문이 열리고 건장해 보이는 애가 들어왔다.
"같은 방 쓰게 됐구나."
"응."
"반갑다. 난 농경제학과 장석호야."
"그래, 반갑다. 난 법학과 최영필이야."
"여어, 법대생이구나. 대단한데~."
"아니, 대단하긴 뭘~."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영필은 다시 짐 정리를 시작했다. 가볍게 챙겨온 물건이라 그다지 정리할 것도 없었다. 나머지 짐은 택배로 받기로 한 터이다.
한참 지나 날은 저물고 어둑어둑해졌다. 영필은 책상에 앉아 교양서적을 꺼내들고 책장을 넘겨보았다. 한달 전에 등록금 내러 학교에 왔을 때 멋모르고 마구 사버린 책들 중 사랑의 기술이란 책이었다. 막상 읽어보니 진부하고 따분한 책이었다. 충동적으로 책을 사들이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습관이다. 아버지가 사들인 책 더미 때문에 말단 공무원 집안의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기가 더더욱 힘들어져 어머니가 아버지를 많이 원망하곤 했었다. 부모님이 싸우시는 것을 보며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크고 보니 나도 아버지처럼 필요없는 책을 덥석 사버린 것이다.
그때 끼익 하고 방문이 열리며 석호가 들어왔는데 손에 새우깡과 소주가 들려 있었다.
석호: 야, 우리 한잔 하자.
영필: 어 술이네, 마셔도 되나~?
석호: 뭘~, 우린 이제 대학생인데 괜찮다구.
석호가 두 침대를 옮겨붙이고 자리를 마련했다. 소주병을 툭툭 치며 고시레~ 하는 폼이 익숙해보였다.
한잔 그리고 또 한잔, 술이 익숙치 않은 영필은 어느새 취기가 올랐다.
석호: 야 말로만 듣던 서울대 법대생이 바로 너로구나.
영필: 쑥스럽다 야.
석호: 니 앞길은 이제 탄탄대로겠다~, 천하제일 아니냐.
영필: 그렇지도 않아.
석호: 솔직히 나는 농대잖아. 왠지 좀 꿀리는데.
영필: 우리 93학번은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잖아.
석호: 그게 어때서.
영필: 마지막 시험제도라고 문제가 정말 쉽게 출제됐잖아.
석호: 야 쉬우면 누구한테나 다 쉽지.
영필: 나는 암기과목을 정말 못하는데 문제가 쉬워버리는 통에 크게 덕을 봤어. 어려운 암기 문제가 하나도 안나왔잖아. 영어만 해도 어려운 단어가 없으니 겨우 풀어냈지.
석호: 암기과목을 못하면 뭘 잘하는데.
영필: 수학은 좀 잘했어. 지역 경시대회 인문계 1등이거든.
석호: 수학도 암기 아니냐. 공식 외우기가 얼마나 골치아픈데.
영필: 문제를 많이 풀다보면 공식은 저절로 머리에 들어오잖아. 수학은 실마리를 푸는 감이 더 중요하지. 나는 감으로 찍는 건 잘해.
석호: 그럼 우리가 본고사 세대였으면 넌 망했겠다.
영필: 그렇지. 난 그냥 운이 좋았어.
석호: 너 좋게보면 겸손하고, 어찌보면 걱정된다. 공부라는게 뭐가 됐던 암기가 핵심 아니냐. 앞으로 너 어떻게 하려고?
영필: 그러게 나도 걱정이야.
석호: 법대면 법조문이고 법서고 달달 외우는 거 아니냐? 너 살아남을 수 있겠어?
영필: 솔직히 법대 공부 자신 없어.
석호: 그럼 뭐하려고?
영필: 나는 토론을 좋아하거든. 사람들하고 토론이나 잔뜩 해봤으면 좋겠어.
석호: 에헤 낭만적이네. 공부는 안하고 놀고먹겠다는 거 아냐?
영필: 나쁘게 말하면 그렇겠지만, 난 그냥 내 소질을 살리고 싶어.
석호: 법대생인데 사법고시는 안볼거야?
영필: 사법시험은 나한테 무리야.
석호: 흐흐 겸손도 지나치면 병이야.
영필: 사실 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하면서 선생님들이 문제풀이를 달달 해줘서 얻은 성적이거든. 내 힘으로 얻은 성적이 아니야.
석호: 서울대는 고등학교랑 다르다 너.
영필: 어떻게?
석호: 여기는 그냥 방임형이야. 학생들이 다들 스스로 잘하잖아. 그러니 교수님들이 세세하게 안챙겨준다고.
영필: 그래?
석호: 다른 대학교에 다 있는 고시반이 서울대엔 없잖아. 학교에서 관리해주지 않으니까 학생이 스스로 해내야 돼.
영필: 나한텐 안맞네. 난 고등학교때 선생님들한테 전적으로 의존해서 받아먹기만 한 터라 스스로 공부하는 건 못하는데.
석호: 영필아~, 힘내자.
영필: 응?
석호: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홀로서기를 해야 돼. 언제까지나 선생님한테 의존할 순 없지.
영필: 그러게. 어떻든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해.
석호: 내 말 새겨들어라. 혼자 일어서야 해.
영필: 충고 고맙다.
02 신내림
입학식을 마치고 학교 생활을 소개받으며 분주한 날들이 지나갔다. 일주일 쯤 지났을 무렵 영필은 저녁식사를 하러 기숙사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식당 입구의 로비에 티비가 켜져 있고 사람들 몇몇이 지켜보고 있었다.
'뭐지?'
영필은 호기심이 일어 티비 앞으로 가서 함께 시청했다. 티비에 VTR이 연결돼서 비디오가 재생되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니 수천명쯤 되는 군중이 체육관 바닥에 앉아있고, 왠지 표독스럽게 생긴 사람이 마이크를 쥐고서 앞에 선 아주머니를 향해 고함을 쳤다.
"더러운 귀신아, 너 뭐하는 녀석이야!"
그러자 아주머니의 입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아이고 분해. 아이고 원통해. 뜨거워. 너무 뜨거워. 아이고 나 죽네."
"더러운 귀신아, 너 누구야!"
"아이고 원통해. 나는 얘 시어미야."
"너 며느리 속에 들어가서 뭐했어? 며느리 몸에 암덩이를 만든 게 너지!"
"그래 내가 그랬다. 내가 얘 몸 속에 암덩이 만들었다구."
"왜 그랬어!"
"얘가 제사밥을 차리는데 정성이 없어서 분해 그랬다구."
"에잇 더러운 귀신아, 내가 예수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 몸에서 떠나라!"
"으악~~"
아주머니는 비명을 내지른 뒤 쓰러졌다.
마이크를 쥔 설교자가 아주머니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아주머니 이제 당신 몸은 깨끗이 나을 것입니다."
"아이고 정말입니까?"
"예, 그동안 귀신이 당신 몸을 점령해서 못살게 굴었는데 제가 예수 이름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안심하세요. 앞으로 귀신 섬기지 말고, 예수만 믿으며 사시면 모든 게 만사형통일 것입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필은 생각했다. '예수를 찾는 걸 보니 기독교 전도자인 모양이구나. 기독교인이 귀신을 얘기하다니 특이하네. 무당도 아닌데 귀신을 상대해?'
그때 어떤 여성이 영필에게 접근했다.
"학생,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네, 그러시죠."
"비디오 보기에 어떠세요?"
"특이하구나 싶네요."
"어떤 점이요?"
"기독교인이 귀신을 쫓는게요."
"그거 아세요? 이 모든 게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랍니다."
"네? 기독경에 이런 게 나와요?
"그럼요. 예수님도 전도할 때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쳤죠. 성경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또 성경이 말하기를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칠 수 있다고 했어요."
"신기하군요."
"어떻게, 좀더 알고 싶지 않으세요?"
"예?"
"수요일에 저희 집회가 있거든요. 7시쯤 학생회관의 보레아 동아리를 찾아오세요."
"네, 그러죠 뭐."
"그런데 혹시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어요?"
"영성 고등학교요."
"아아 그래요? 이봐, 재돈아, 여기 좀 와봐."
재돈이라고 불린 사람이 다가왔다.
"왜요?"
"인사해, 너희 고등학교 후배야."
"아, 영성 고등학교 나왔어요?"
"예, 17기 졸업생인데요."
"반갑다. 난 14기 졸업생 김재돈이야."
"네 선배님, 반갑습니다."
"어떻게, 비디오 잘 봤어?"
"네, 수요일에 모임에 나가기로 했어요."
"잘됐다. 그때 더많이 얘기하자."
그리고 처음에 말을 걸었던 여성이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박영미라고 해요. 86학번."
"네, 반갑습니다."
"그럼 수요일에 만나요."
시간이 흘러 수요일이 됐다. 영필은 수업을 들은 후 보레아 모임에 가볼지 고민했다. 귀신 얘기를 하는게 좀 당혹스럽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전통 무속과 공통점을 갖는 것 같아서 호기심도 들었고, 고등학교 선배가 반갑게 맞아준 통에 이번에 안가면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때 난감하게 될 듯도 하고 해서 여러모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생회관에 들어서서 3층으로 올라가니 여러 기독교 동아리들의 이름이 문에 적힌 방이 있었다. 그중 보레아 동아리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회가 이미 시작됐는지 이십여개의 의자에 사람들이 앞을 본채 앉아있고, 기타와 키보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프로젝터로 노래가사가 앞쪽 스크린에 크게 비쳐져 있었다. 영필도 의자에 앉아 뜻모를 노래를 무조건 따라불렀다. 기타와 키보드의 울림이 윙윙 귀에 느껴졌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가사들이 줄창 쏟아졌다. 노래를 부르던 영필의 가슴이 먹먹해지고 왠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참을 울었는데 마침내 노래가 끝나고, 자신을 선교사라고 소개한 남자의 설교가 이어졌다.
집회가 끝나고나자 재돈 선배와 영미 선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모임 어땠어?"
"저도 모르게 감동을 받았네요."
"어렵지 않지?"
"글쎄 아무것도 모르는데 왠지 심취한 듯해서 당황스럽네요."
"이왕 분위기 좋은 김에 한발 더 나가 볼까?"
"예?"
"성령을 받아보자."
"성령이요?"
"응, 하나님의 성스러운 영을 받는거야. 네 몸이 성전이 돼서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 거지."
"좀 갑작스럽지 않아요?"
"이런 건 필 받았을 때 바짝 땡기는거야. 너 오늘 아주 진하게 감동받았잖아."
"괜찮을까요?"
"괜찮아. 이봐 모두들 모여봐. 영필이가 성령 받도록 함께 기도해주자."
영필이를 가운데 두고 모두 빙 둘러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기도했고 어떤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얄라리스부레야 어쩌구 하면서 떠들었다. 영필도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따라서 큰 소리로 기도했다. 한참을 그랬을까 영필의 혀가 꼬이면서 라레아을루리 어쩌구 하는 소리가 입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혀가 뛰노는 대로 맡겨 놓으니 끊임없이 소리가 이어졌다.
"영필아, 됐다. 네 입에서 방언이 터졌어. 그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야."
"정말이요? 된거에요?"
"그래, 네 몸은 이제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 됐으니 앞으로 거룩하게 살아야한다."
"네."
"아참 여기 소개하지. 여기도 법학과 93학번이야."
"반갑다. 나 유철민이라고 해."
"반갑다. 난 최영필이야."
"성령 받은 것 축하한다. 앞으로 잘 지내자."
03 귀신
일요일을 맞아 영필은 보레아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인근 전철역에서 교회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됐는데 안내인의 밝은 미소가 좋아 보였다. 예배당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예배가 시작되고 다같이 찬송가를 불렀다. 그리고 이어서 목사의 설교가 시작됐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쫓겨 내려온 마귀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수하인 귀신이 인간의 몸에 침입하여 영적인 노예로 만들고 있어요. 우리는 이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다스릴 뿐 이 땅은 마귀에게 주어진 공간이니, 이 땅에서 마귀와 싸우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몫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이름에 의지하여 마귀와 싸웁시다."
이 땅의 주인이 마귀라는 얘기에 영필은 혼란을 느꼈다. 아름다운 산천과 인생의 즐거움을 논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이 땅의 주인이 마귀라 하니 당혹스러웠다. 그렇다면 이 땅은 저주받은 더러운 공간이란 말인가.
영필은 처음 기숙사 식당 앞에서 본 비디오처럼 목사가 신도들의 몸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예배가 끝날 때까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예배가 끝난 후 영필은 교회를 나와 인근의 대학생 학습관으로 이동했다. 보레아 동아리 회원이자 법대 동기인 철민이가 먼저 와 있었다.
영필: 철민아, 먼저 와 있었구나.
철민: 응, 영필아 예배 잘 드렸어?
영필: 어, 그런데 귀신 쫓는 게 없어서 좀 싱겁더라.
철민: 귀신 쫓는 거? 그건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야. 주로 수련회 같은 행사 때 집중적으로 하지. 그리고 평소에도 토요일 집회에 참석하면 귀신 쫓는 걸 볼 수 있어.
영필: 아, 토요일 집회 때 하는구나.
철민: 영필아 그쪽에 너무 깊게 빠지는 건 안좋아.
영필: 왜?
철민: 귀신 쫓는 건 신앙의 본질이 아니고 곁가지야. 너는 초보자니까 귀신 쫓는 특이한 이적에 맘이 뺏길 수 있는데 그보다는 하나님을 모시는 신앙의 본질을 차근차근 알아가야 해.
영필: 그래도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는 게 생동감이 있지 않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놀라움이 있잖아.
철민: 들어봐. 우리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야. 귀신 문제는 당의정과 같아. 달콤한 겉의 사탕 속에 맛은 없지만 몸에 좋은 약이 들어있지. 귀신 쫓는 이적에 관심이 끌려서 기독교의 문을 들어섰지만, 정작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희생과 사랑의 길을 배우는 거야.
영필: 그래, 충고 고맙다.
다음주가 시작돼 영필은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에 갔다. 옆자리에 여학생이 앉았는데 얼굴이 예뻐서 입학식때부터 눈여겨보던 그녀였다. 영필은 더듬거리며 말을 붙여 보았다.
영필: 아안녕. 나는 최영필이라고 해. 만나서 반갑다.
그녀: 그래 반갑다. 나는 김혜선이라고 해.
영필: 너 어느 동아리에든 가입했니?
혜선: 응, 한소리에 가입했어. 민중가요를 부르는 법대 동아리야.
영필: 그렇구나. 난 보레아에 가입했어. 기독교 동아리야.
혜선: 보레아라고? 이거 초면에 할 얘기는 아니지만 별로 소문이 좋지 않은 곳인데.
영필: 왜?
혜선: 가입해보니 무슨 특이한 점 없던?
영필: 음, 귀신을 쫓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이지.
혜선: 그게 뭐니? 샤머니즘도 아니고.
영필: 왜에, 그거 다 기독경에도 나오는 얘기야.
혜선: 너희들 귀신의 정체가 뭐라고 하디?
영필: 시어미 귀신이 며느리 몸속에 들어갔으니 죽은 사람의 영혼이 바로 귀신이겠지. 상식대로잖아.
혜선: 성경에서 예수님이 쫓은 건 너희들이 얘기하는 귀신이 아니라 마귀 일당이야.
영필: 그걸 구별해야 돼?
혜선: 그럼. 성경에서 예수님이 마귀를 쫓은 걸 귀신을 쫓은 것으로 번역한 탓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통속적인 귀신 개념에 사로잡혀 혼동하는거야. 예수님이 무당도 아닌데 죽은 사람의 영혼을 쫓는 일을 했겠니? 요새 새로 번역된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귀신이 아니라 마귀를 쫓았다고 고쳐서 표현해 놓았어.
영필: 나는 초보자라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혜선: 더 깊이 빠지기 전에 그만두는 게 좋을거야.
영필: 아, 혼란스럽네.
혜선: 참, 나는 천주교인이야. 우리는 자애로우신 성모 마리아께서 인간들을 도와 주시는 화평한 종교지. 원한다면 내가 성당에 인도해 줄께.
영필: 아니, 좀더 생각해 볼께. 어떻든 충고 고맙다.
04 졸업장
영필은 철민과 함께 법학개론 수업을 들었는데 교수님께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하셨다. 주제는 교육제도 개선방안이었다. 영필은 보레아 친구인 철민과 함께 한조를 이루어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본 후 며칠 후 함께 만나서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시간이 흘러 약속한 날이 됐다. 영필과 철민은 휴게실 라운지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철민: 영필아, 생각 좀 해 봤니?
영필: 음, 그런데 어제 우리 주제와 관련되는 꿈을 좀 꾸었어.
철민: 뭔데?
영필: 꿈 속에서 교육제도를 생각하다가 통합, 통합을 수도없이 반복하며 되뇌었거든.
철민: 통합이라, 무슨 뜻이지?
영필: 뭔가를 통합해보라는 메시지 같아.
철민: 대학 입학을 통합하는 건 어때?
영필: 어떻게?
철민: 각 대학이 각각 학생을 뽑는 게 아니고, 모든 대학을 놓고 추첨으로 입학할 학교를 정하는 거지.
영필: 그러면 과열된 입시경쟁은 없어지겠구나.
철민: 그렇지. 지금처럼 고등학교에서 과열경쟁을 할 게 아니라 대학에서 본격적인 경쟁을 하는게 낫다고 봐.
영필: 나도 그 취지에는 공감하는데, 그렇게 하면 학교와 학생의 선택권이 너무 제한되잖아.
철민: 부작용이 크긴 하지. 넌 뭐 다른 생각 있니?
영필: 대학 입학이 아니라 졸업을 통합하는 건 어때?
철민: 어떻게?
영필: 대학 졸업장을 통합하는 거지. 예컨대 '한국대학교 졸업'으로 말이야.
철민: 모든 대학교를 다?
영필: 아니, 서울대를 비롯해서 국립대학교들을 통합하고 사립대의 경우에는 학생에게 선택권을 주면 좋겠어. 그러니까 사립대 학생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한국대학교 졸업' 또는 'A대학교 졸업'으로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게 하는 거지.
철민: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영필: 학교와 학생의 선택권을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과열된 대학입시 경쟁을 완화할 수 있겠지. 어느 대학교에 입학하든 어차피 '한국대학교 졸업'으로 증명서를 받을테니까 굳이 명문대에 입학하려고 애쓸 필요 없지.
철민: 그래 취지는 좋은데 현실성이 좀 없어 보인다. 예컨대 회사에 취직할 때 면접관이 한국대학교 졸업이라는 이력을 보면 어느 지방에서 학교 다녔냐고 물어볼텐데 서울인지 아닌지에 따라 명문대인지 여부를 어느정도 알아챌 거 아냐.
영필: 프랑스도 파리1대학, 파리2대학 하는 식으로 일종의 통합이 이루어져 있지 않아?
철민: 그렇다지 아마.
영필: 제도가 정착되면 어느 학교 출신이건 한국대학 졸업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거야.
철민: 서울대는 어떻게 될까? 지방대랑 졸업장이 통합되는데 명문대 지위를 상실하지 않을까?
영필: 서울대가 갖고 있는 저력이 있으니 그렇게 쉽게 명문대 지위를 잃지는 않을거야. 서울대를 포함한 한국대 전체가 높은 평판을 얻기를 바래야지.
철민: 아무래도 한국대 전체가 추락하고 사립 명문대만 몸값이 더 오를 것 같은데? 사립 명문대가 1류를 차지하고, 서울대를 포함한 한국대는 2류로 전락하지 않겠어?
영필: 서울대가 열심히 노력해서 학문적인 업적으로 명문대 명성을 유지해야겠지.
철민: 3류대를 다니는 학생은 어떨까? 그들에게 선택권을 줘서 한국대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해주면 너도나도 다 한국대 졸업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대학 생활을 오히려 등한히 하지 않을까? 지금은 3류대 졸업장의 불리함을 만회하기 위해 실력으로 보여주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동기가 있는데, 모두가 한국대 졸업이라면 대학에 가서 새롭게 노력할 필요가 없잖아?
영필: 대학 졸업장이라는 간판이 통합되면 누구나 간판 대신 실력으로 승부하기 위해 더 노력할 거라고 봐. 솔직히 서울대생 중에도 명문대 간판만 믿고 대학 생활에 열의를 쏟지 않는 경우가 있잖아. 지금은 대충 해도 졸업장을 받을 수 있으니 명문대 졸업장을 가지고 회사에 취직하기 쉬운데 굳이 대학 공부에 열성을 쏟아붓겠어?
철민: 그런데 이건 기존의 졸업장까지 소급해서 적용되는거야?
영필: 물론이지. 이미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기존의 졸업장은 사용하지 못하고 새로 '한국대학교 졸업' 이력만 사용할 수 있게 해야해. 방송이나 홍보물에도 정치인이나 관료의 학력을 표시할 때 한국대 졸업으로 통일해야 하고.
철민: 그래 이걸로 정리해서 보고서 써보자.
영필: 좋아.
05 민족
법학개론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하셨다. 이번 주제는 민족전통 계승방안이었다. 영필은 이번에도 보레아 친구인 철민과 한조를 이루어 활동하기로 하고, 모여서 얘기할 날짜를 정했다.
날짜가 되어 영필은 휴게실 라운지에서 철민과 만났다.
철민: 생각 좀 해봤니?
영필: 음, 그런데 이번에도 꿈을 꾸었는데 우리 주제와 관련되는 것 같아.
철민: 이번엔 뭔데?
영필: 어떤 할아버지가 꿈에 나와서 "성씨도 우리 성씨를 써야제."라고 말씀하셨어.
철민: 우리 성씨?
영필: 음, 요새 보면 이름에는 보람이나 큰별처럼 한자어가 아닌 순수 우리말로 된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성씨는 누구나 한자로 된 성씨를 쓰고 있잖아.
철민: 한자가 아닌 우리말로 된 성씨를 쓰자고?
영필: 민법에서 자식의 성은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고 규정해 놓아서 자식의 성을 우리말로 짓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지. 한자로 된 아버지 성씨를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철민: 우리말 성씨라면 예를 들어 어떤 것?
영필: 우리 민족은 태초에 밝음을 숭상했으니 그 취지를 따라 태양을 뜻하는 '해'씨나 밝음을 뜻하는 '밝'씨나 환함을 뜻하는 '환'씨를 쓸 수도 있고, '달'씨나 '돌'씨나 '줄'씨를 쓸 수도 있지.
철민: 한자 성씨는 완전히 버리자는 거야? 그러면 조상이 물려준 성씨를 버린다고 반발이 많을텐데.
영필: 조상이 물려준 성씨를 버리지 않고 이어받되 변형해서 쓸 수도 있지. 한자를 소리로 읽는게 아니라 뜻으로 읽는 거야. 예컨대 李씨는 李가 '오얏 리'인데 소리인 리를 취할 게 아니라 뜻인 오얏을 취해서 '오얏'씨라고 읽으면 돼.
철민: 네 성 최씨는 어떻게 돼?
영필: 崔씨는 崔가 '높을 최'니까 소리인 최를 취할 게 아니라 뜻인 높을을 취해서 '높'씨라고 읽지.
철민: 한자도 우리 문화의 일부인데 굳이 버려야돼?
영필: 한자가 우리 문화의 일부라는 건 인정해. 한자로 이루어진 한자어가 우리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그런 말을 쓰지 말자는 건 아니야. 한자어를 사용하되 단지 성씨에서만은 한자를 음이 아닌 뜻으로 읽자는 거라구. 성씨는 그 민족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잖아. 그런데 우리 성씨는 예전에 중국의 성씨를 모방해 중국식 한자로 붙인 결과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지 못해. 李씨를 이씨로 읽으면 그게 중국 성씨와 어떤 차이도 없잖아. 그러니 오얏씨로 읽어서 중국 성씨의 발음과 차이를 두자는 거야.
철민: 崔씨를 높씨로 읽으면 좀 딱딱하지 않냐?
영필: 그래서 말인데 성씨 뒤에 '온'을 붙이면 좋을 것 같아. 오얏씨는 오얏온씨라 하고, 높씨는 높온씨라고 하는 거지. 성씨라는게 어느 가문 출신인지를 나타내는 거니까 어느 가문에서 온 사람이란 뜻으로 '온'을 성씨에 붙이는 거야. 오얏온씨처럼 성이 너무 길어 불편하면 줄여서 옷온씨나 얏온씨로 줄일 수도 있어.
철민: 사람들이 성씨를 갑자기 바꿔 버리면 사회에 큰 혼란이 초래될테데.
영필: 그러니 이미 살고있는 사람은 쓰던 성씨를 그대로 쓰고, 새로 태어나는 아기부터 새 성씨를 쓸 수 있도록 하면 되지. 그러면 어느 사람의 성씨가 갑자기 바뀌는 혼란은 없잖아. 그래서 특별법을 만들어 새로 태어나는 아기는 순수 우리말로 된 고유 성씨를 쓰기 위해서라면 아버지의 성씨와 다르게 새로운 성씨를 쓸 수 있도록 보장하면 좋겠어.
철민: 이거 왠지 제2의 창씨개명같다. 일제가 한국 사람 성명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려 했잖아.
영필: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어떻든 우리나라의 성씨를 중국의 성씨와 차별화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해. 단지 바꿔 쓰는 성씨가 우리말로 돼야 한다는 거지.
철민: 생각 좀 해 보자.
영필: 한가지 더.
철민: 뭔데?
영필: 성씨 계승에서 남녀 평등을 도입하면 좋겠어.
철민: 어떻게?
영필: 자식의 성씨를 붙일 때 부모 각자의 성씨를 잇도록 하는 거지. 자식이 두명이라면 한명은 아빠성을 잇고, 한명은 엄마성을 잇도록 하는거야.
철민: 자식이면 당연히 아빠의 성씨를 따라야 하는 것 아냐?
영필: 자식이 아빠 성을 따르는 게 세계 보편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우리는 남녀평등 정신을 성씨에 도입해서 엄마의 성씨도 붙일 수 있도록 하면 좋겠어. 우리나라가 조선시대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게 지배했지만, 그전 고려시대에는 남녀 평등의 문화가 강했잖아. 그 전통을 되살려서 응용하자는 거야.
철민: 아빠가 최씨고, 엄마가 이씨면 아들은 최씨를 쓰고, 딸은 이씨를 쓴다는거네.
영필: 그렇지. 물론 아들이 이씨를 쓰고 딸이 최씨를 쓸 수도 있어.
철민: 아빠, 엄마의 성씨를 각각 이을 수 있으려면 자식을 두명 이상 낳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도 있겠네.
영필: 맞아. 지금은 자식을 한명만 낳고 마니까 인구 감소가 우려되지. 최소한 부모가 자식 둘은 낳아야 인구가 현상 유지라도 되지 않겠어. 또 이를 통해 친가와 외가의 균형을 이룰 수도 있어. 자식 둘이서 한명은 친가의 최씨를 잇고, 한명은 외가의 이씨를 이으니 두 가문이 균형을 이루잖아.
철민: 어느 집안에 딸밖에 없으면 가문의 대가 끊긴다고 걱정하는데 딸이 낳은 외손 중 한명이 딸의 성씨를 잇게 되니 그 집안 성씨의 대가 끊기지 않을 수 있군.
영필: 그렇지. 이국철씨 집에 딸 이영애 밖에 없을 때 아들이 없으면 현재는 이씨를 잇지 못하단고 걱정하는데, 부모성씨균형제를 도입하면 딸 이영애가 낳은 자식 즉 이국철씨의 외손이 그 딸 이영애의 이씨를 이으니까 대가 끊길 걱정이 없는 거야.
철민: 그래 이걸로 정리해서 보고서 써보자.
영필: 좋아.
06 외계인
녹음이 짙어가는 어느날 수업이 끝나고 영필이 가방을 챙기는데 보레아 친구인 철민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영필아, 나랑 어디 좀 가보자."
"어디?"
"가면서 얘기하자."
둘은 강의실을 나서서 철민이 방향을 잡은대로 걸어갔다.
"영필이 너 지난번 보고서를 의논할 때 주제에 딱 들어맞는 꿈을 꾸었다고 했잖아."
"그렇지."
"너처럼 영감이 불어넣어진 꿈을 꾸는 학생들이 모여서 토론회를 열고 있거든."
"그래?"
"꿈꾸는 토론회라고, 매주 만나서 일정한 주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지."
"어떤 모임인지 궁금한데."
둘은 학생회관에 도착해서 꿈꾸는 토론회라는 이름이 문에 붙은 방으로 들어섰다.
"모두들 안녕, 나 왔어."
방에 있던 예닐곱 명의 학생들도 철민을 보고 인사했다.
"영필아 인사해, 다들 93학번 친구야."
"안녕, 나는 최영필이라고 해, 잘 부탁한다."
"반갑다. 나는 국문학과 이비유라고 해."
"반갑다. 나는 역사학과 황재성이라고 해."
"환영한다. 나는 종교학과 고마준이라고 해."
"안녕, 나는 불교를 공부하는 박성철이라고 해."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모두들 빙 둘러 앉았다.
성철: 자 토론을 시작해 볼까. 오늘 주제는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서야.
재성: 내가 한마디 할께. 실증적으로 접근할 때 외계인이란 존재하지 않아. 지금까지 어디에도 외계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어.
비유: UFO를 찍은 사진들이 여럿 제시됐잖아.
재성: 그거 대부분 조작이나 착각이지. 실제라고 믿을 수 없어.
철민: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은 지구에 우리 인간만을 창조하셨지 저 바깥에 외계인을 창조하셨다는 얘기는 없어.
마준: 너희 기독경에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선 안되지.
성철: 이 주제에 대해 누구 꿈을 꾼 사람 없어?
비유: 어젯밤 꿈에 호주의 모습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관련이 있을까?
재성: 호주?
비유: 응, 호주.
영필: 호주라면 관광 명소 아냐?
성철: 그렇다면 관광객들이 호주를 방문하듯이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하는 것 아닐까?
철민: UFO를 타고 올 정도의 고도문명을 가진 외계인들이라면 후진적인 지구에서 뭘 볼게 있다고 관광을 할까?
재성: 이건 어때. 역사적으로 볼 때 호주는 과거에 영국의 죄수들을 유배보내던 유형지였잖아.
비유: 그렇다면 영국의 죄수들을 호주에 유배보냈듯 선진적인 별에서 죄를 지은 외계인들을 후진적인 변방의 지구에 유배보냈다는 얘기?
철민: 지구에 외계인들이 산다면 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
영필: 모습을 위장해서 평범한 지구인처럼 변장하고 다니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잖아.
성철: 나는 그저께 꿈에 "미립자"를 되뇌었거든. 관련이 있을까?
비유: 외계인들이 아주 작은 미립자 크기의 존재들이란 말을 할 수 있겠군.
성철: 외계인이나 그들의 비행물체가 미립자 크기라면 우리 주위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며 떠 다녀도 눈에 띄지 않겠네.
철민: 크기가 그렇게 작다면 외계인이 아니라 외계미생물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어?
비유: 크기는 작아도 지능이 발달한 고등생물이라면 인간처럼 외계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재성: 그런데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지구에서 뭘 하고 지낼까?
비유: 후진적인 지구인들을 지도하는 것 아니겠어?
성철: 지구인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서 문명을 발전시키고, 영혼을 관리하는 천사 노릇을 하지 않을까?
철민: 타락한 외계인들이 천사 노릇을 한다고? 그럴리가.
성철: 선진 별을 신의 하늘나라로 볼 때 그 문명을 후진 지구에 전수하고 지도한다면 신의 심부름꾼인 천사라고 부를 수 있겠지.
비유: 지구에서 열심히 활동하여 좋은 점수를 받으면 죄값을 치르고 고향 별로 돌아갈 수 있겠군.
재성: 타락한 외계인들이 제 버릇 못고치고 지구에서도 나쁜짓을 할 수도 있겠네?
성철: 교도관에 해당하는 외계인들이 주기적으로 지구를 방문하여 감시하며 악행을 차단하겠지.
재성: 죄수인 외계인들이 지구에서 자치를 한다는 얘긴데 과연 그게 잘 이루어지겠어?
비유: 어쩌면 그래서 이 지구가 혼란을 겪는지도 모르지. 지구인들을 지도하는 천사들이 악한 습성을 때때로 드러낼 테니 말이야.
재성: 그렇다면 인간은 천사의 가르침을 거부해야 할 때도 있겠네. 천사인 외계인이 인간을 악행으로 유도할 때는 말이지.
철민: 쉽지 않겠지. 신본주의의 정신에 따르면 인간은 신과 천사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해. 과거에 유대인이 가나안 사람을 학살할 때에도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악행일 수 있지만 천사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대로 실행해서 축복을 받았잖아.
비유: 지금은 인본주의 시대야. 아무리 천사의 명령이라 해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할 때 부당한 가르침이라면 거부해야 해.
철민: 사람에게 천사에 대한 반항심을 갖게 하는 건 좋지 않아.
영필: 사람의 지각은 단계적으로 발전했잖아. 구약 시대의 유대인은 종 노릇을 했고, 신약 시대의 기독교인은 신의 아들로 대접받았으며,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장성하여 부모의 품을 떠나 자립한 존재로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삶을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성철: 역사적으로 인간의 지각과 문명이 단계적으로 발전한 건 사실이야. 이제는 인간의 이성이 신으로부터 독립할 때라고 할 수 있지.
철민: 그건 현실성이 없는 얘기야. 요새도 얼마나 극악무도한 범죄들이 많이 자행되고 있니? 또 나라의 권력층들은 위선을 떨며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는데 인간이 어떻게 신을 떠나 자립해서 아름다운 사회를 가꿀 수 있겠어? 인간은 신과 천사의 감시를 받을 때에만 바르게 행동할 수 있어.
성철: 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해 낙관론자야. 인간 스스로 충분히 잘해나갈 수 있다고 봐.
철민: 만약 외계인이 타락한 죄수라는 얘기가 맞다면 그들은 천사가 아니라 마귀하고 해야 하지 않을까?
비유: 그렇다면 지구가 마귀를 가둬두는 감옥이 되겠네.
철민: 아니, 아니, 그렇게 확대해석하면 곤란해. 지구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정의로운 공간이야. 지구 한켠의 외진 곳에 죄지은 외계인들을 가둬둔거지.
비유: 외계인들을 단지 가둬둘 뿐이고 그들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지 않아?
철민: 왜 그들을 그냥 가두어 두는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알 수는 없지.
재성: 어떻든 외계인의 존재 자체는 인정할 수도 있다는 건가?
철민: 아무리 뭐래도 타락한 죄수가 바로 천사라는 얘긴 어색해.
영필: 어쩌면 지구인이라고 착각하는 우리 자신이 외계인일 수도 있지.
철민: 외계인은 미립자 크기라며? 어떻게 커다란 우리가 외계인이 될 수 있어?
영필: 우리가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자리를 외계인이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지.
철민: 인간의 영혼이 외계인이다? 모든 인간이?
영필: 아니, 애초부터 지구에 살던 원주민의 영혼도 있고, 외계에서 온 영혼이 불어넣어진 인간도 있겠지.
철민: 원주민 영혼과 외계인 영혼이 지구에서 섞여 산다는 얘기야?
비유: 외계인 영혼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외계에서 왔다는 걸 알까?
영필: 모를 수도 있지. 인간의 육신에 갇힌 동안은 족쇄처럼 능력이 제한되고, 과거의 기억이 감추어지는거야.
재성: 자신이 외계에서 온 줄도 모르면서 평온하게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다는 얘기군.
영필: 인간의 영혼으로서 생활을 건실하게 잘 하고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면 육신이 죽은 후에 선택을 받아 천사 노릇을 할테고, 천사 노릇을 잘하여 높은 점수를 받으면 고향 별로 복귀하지 않을까?
성철: 자, 어느덧 마칠 시간이다. 결론은 각자의 마음에 맡기도록 하자. 다음주 주제는 역사상의 쌍둥이야.
07 쌍둥이
일주일이 지나 꿈꾸는 토론회원들이 다시 모였다.
불교 성철: 오늘 주제는 역사상의 쌍둥이야.
역사학 재성: 내가 지난 몇주간 꾼 꿈에서 역사상의 쌍둥이를 수차례 되뇌었는데 무얼 뜻하는지는 모르겠어.
국문학 비유: 나 말이야, 우리 국문학과 조동일 교수님 강의를 들었는데 교수님이 유럽과 동아시아의 역사를 대칭으로 설명하셨거든. 이게 관련이 있을까?
종교학 마준: 어떤 내용인데?
비유: 고대 로마제국이 라틴 문명을 발전시키고, 게르만족이 라틴어와 로마법을 비롯한 그 문명을 흡수한 것처럼 우리는 중국이 중화 문명을 발전시키고, 주변 동아시아 민족이 한자와 유교를 비롯한 그 문명을 흡수했으니 대칭적으로 볼 수 있다는 거지.
영필: 나도 꿈을 꾸었는데 유럽 전통의 깃발에 그려진 일어선 사자의 모습이었어.
재성: 그건 유럽 귀족들의 상징이지.
영필: 유럽 전체를 일어선 사자의 모습으로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재성: 이탈리아 반도가 장화 모양으로 생겼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지.
영필: 그래,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라틴족이 사자의 다리에 해당하고, 북유럽의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노르만족이 사자의 머리, 중유럽의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게르만족이 사자의 가슴, 섬나라 영국이 앞발에 해당하겠네.
재성: 배는 어디야?
영필: 라틴족의 뒷다리가 배까지 포함해서 배다리라고 할 수 있어.
비유: 그렇다면 동아시아는 뭐지?
재성: 중화 문명의 지나족이 배다리,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가 머리, 만주의 거란, 고구려, 여진이 가슴, 섬나라 일본과 대만이 앞발이니, 전체적으로 보면 배가 크고 주둥이가 작은 곰이 허리를 구부리고 앞발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모양새로구나.
비유: 구부린 곰이라고? 음, 어떻게 보면 등이 굽은 곱추처럼도 보이네.
철민: 사자와 곰 얘기는 구약성경의 다니엘서에도 나오는데, 거기선 중동의 패권국가를 가리킨다고 해석되지.
성철: 그런데 일어선 사자와 구부린 곰이 쌍둥이를 이룬다고?
영필: 배다리에 해당하는 라틴 문명과 중화 문명이 문화와 예술로 주변국에 자양분을 제공했어.
재성: 가슴에 해당하는 게르만족은 프랑크왕국을 건설했다가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 셋으로 나뉘었는데 동아시아 가슴의 고구려왕국도 거란, 여진, 고려 셋으로 나뉘었지. 서프랑크는 예술을 사랑한 프랑스가 됐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거란에 대칭되고, 중프랑크는 대륙의 패권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됐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금나라와 청나라를 이룬 여진에 대칭되며, 동프랑크는 학문과 기술을 사랑한 독일이 됐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고려에 대칭되는구나. 배다리가 문예국이라면 가슴의 프랑크왕국과 고구려왕국은 무력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필: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이 섬나라 영국에 진출해서 왕국을 건설했듯 백제, 신라, 고구려 세력이 섬나라 일본에 진출해서 왕국을 건설했지.
재성: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노르만족과 한반도의 백제, 신라는 머리 노릇으로서 대륙에 진출한 왕가를 배출했고, 각종 제도의 선구적인 실험장 노릇을 했구나.
비유: 노르만 왕가가 대륙에 진출한 얘기는 잘 아는데, 동아시아도 마찬가지인가?
재성: 금나라와 청나라의 역사를 보면 신라의 일족이 그들 왕조의 시조가 됐다고 기술돼 있지.
성철: 유럽은 뒷다리의 스펜인과 앞발의 영국이 신대륙을 개척하면서 부를 쌓았는데, 동아시아는 중국이 먼저 명나라 때 정화의 원정으로 대항해의 시초를 보였으나 계속 이어지지 못했고, 일본은 섬나라에 갇힌 채 원거리 경영에 나서지 못했구나.
재성: 유럽은 가슴의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이 각자 독립해서 서로 경쟁하며 문명의 발전을 일구었는데, 동아시아는 거란과 여진이 중국의 지나족에게 흡수되거나 통합돼 가슴 부위가 위축됐으니 심장이 없는 꼴이며, 배다리의 중국만 비대하게 커져서 몸의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지 못했어.
마준: 현대의 한국은 어떤 부위기 되지?
영필: 북고려가 가슴에 해당하고, 남고려가 머리에 해당하니 이렇게 보면 동아시아의 가슴이 정말 작지.
마준: 현대 유럽은 크게 통합을 이루고 있는데 동아시아도 마찬가지로 통합하게 될까?
비유: 평화적인 통합을 이루려면 세력 균형이 전제되야 하는데 동아시아는 가슴이 지나치게 위축돼서 균형이 안맞고 머리나 앞발과도 대등한 통합을 논의하기가 어려운 게 문제지. 배다리의 중국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어서 교만에 빠져 일방적인 흡수 통합을 노릴 우려가 있어.
마준: 여진족과 거란족의 후예들을 모아서 만주에 자치정부를 구성해 주면 좋을텐데.
재성: 여진의 후예 만주족은 몰라도 거란족은 워낙 오래전에 패망한 터라 다시 모으기 쉽지 않을 거야.
성철: 자, 어느덧 마칠 시간이다. 다음주에 보자.
08 낙원
영필은 기독경 신약의 복음서를 그동안 여러 차례 읽어보았다. 과연 예수가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친 얘기가 여러 번 실려 있었다. 그런데 그 정황이 보레아에서 본 비디오의 모습과 왠지 달라 보였다. 예수는 어찌 보면 마지못해 귀신을 쫓아버린 듯 했다. 귀신의 영역은 예수가 상대할 영역이 아닌 별개의 영역인데, 귀신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서 사람을 아주 못살게 굴 때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냥 한번 쫓아주자 하는 태도인 듯 했다. 그에 반해 보레아 비디오에선 목사가 귀신을 불러내어 자신의 권능을 내보이는 상황을 즐기면서 좋은 기회라고 내세우며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
한편 일요일이 되어 영필은 보레아 교회의 예배를 마치고 대학생 학습관의 모임에 참석했는데 설교를 하던 선교사가 앞에 앉아있는 대학생들을 모두 일어나라고 한 뒤 "귀신아!, 더러운 귀신아!"하고 외치며 귀신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한참을 외치다가 "더러운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 몸에서 떠나갈 지어다!"하고 외쳐대자 몇몇 대학생이 정신을 잃듯 털썩 주저앉았다. 모임을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오는 길에 영필은 왠지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 책상에 앉은 영필은 손에 기독경을 든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기독경을 책상에 반쯤 내려놓았는데 확 펼쳐진 기독경에서 "귀신을 불러내는 자에게 가지 말지어다."라는 구절이 강렬하게 눈에 꽂혔다. 영필은 깜짝 놀랐다. 아무 생각 없이 경전을 내려놓았는데 자신이 의아해하던 문제에 답이 던져진 듯 느껴졌다. 다르게 번역된 기독경을 찾아보니 "초혼자에게 가지 말라."고 되어 있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는 일을 금지한 것이었다. 그렇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이미 드러난 귀신을 마지못한듯 쫓아내었을 뿐 드러나지 않은 귀신을 불러낸 적은 없었다. 그에 반해 보레아 쪽에서는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기 위해 드러나지 않은 귀신을 불러내어 이런저런 질문으로 상대하면서 상황을 즐기는 것이니 복음서와는 정황이 달라 보였다. 영필은 보레아 모임이 잘못됐다고 느껴져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날 철민과 만나 그 얘기를 했다.
"야, 네 말도 정황이 다르지. 초혼자에게 가지 말라는 것은 무당 같은 자에게 가지 말라는 것이고, 우리가 귀신을 불러내는 것은 쫓아내기 위해서잖아. 쫓아내기 위해서 불러내는 것은 정황이 다르니 괜찮다고 봐야해."
"아니, 난 결심했어. 초혼자에게 가지 않겠어. 보레아 모임에 이제 가지 않을래."
철민이 여러모로 설득했지만 영필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그주 일요일이 됐지만 영필은 보레아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가방을 챙겨든 영필은 학교 전산실의 컴퓨터방에 갔다. 워드프로세서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옆 자리에 어떤 여학생이 앉았다. 여학생은 컴퓨터를 이리저리 조작해 보다가 잘 안되는지 영필에게 말을 걸었다.
"저, 하이텔에 접속하려면 어떻게 해야죠?"
"텔넷 이용할 줄 모르세요?"
"네, 할 줄 몰라요."
영필은 옆 컴퓨터를 조작해 텔넷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하이텔 네트워크에 접속시켜 주었다.
"됐죠?"
"고마워요."
여학생은 마우스로 이곳저곳을 클릭하더니 동영상을 하나 띄웠는데 남녀의 키스 장면을 모아놓은 영상이었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보게 된 영필은 당혹스러웠다. 조금 쑥스러운 영상인데 공개적인 컴퓨터방에서 잘도 보는구나 싶었다. 그때 여학생이 동영상을 멈추고 영필에게 말을 걸었다.
"고마웠어요. 나는 92학번 송지영이라고 해요."
"저는 93학번 최영필이에요."
"후배구나, 반가워. 내가 차 한잔 살께."
영필은 멈칫멈칫하다가 지영을 따라 일어섰다. 둘은 학생회관 휴게실의 라운지에 가서 커피를 한잔씩 사들고 앉았다.
지영: 컴퓨터 잘 하더구나.
영필: 아니 그다지 잘하지 못해요.
지영: 하이텔에 잘 접속했잖아.
영필: 그건 간단한 거죠.
지영: 후훗, 나는 그 간단한 것도 모르는 컴맹이군.
영필: 조금 배우면 금방 하실 수 있어요.
지영: 내가 보기에 네가 좋은 사람 같아서 좋은 모임을 소개시켜주려고 해.
영필: 네?
지영: 너 낙원회라고 알아?
영필: 낙원회요?
지영: 응, 지상낙원을 추구하는 모임이야.
영필: 그런 모임이 있어요?
지영: 그럼, 인생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많은 법이야. 즐거움은 함께 나눠야지.
영필: 무슨 일을 하는데요?
지영: 어려운 건 없어. 맘 놓고 즐기기만 하면 돼. 괜찮지? 자, 따라와.
둘은 일어서서 학생회관 4층으로 이동했다. 어느 방의 문에 낙원회라고 쓰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남학생 한명이 책상에 앉아 뭔가를 쓰고 있었다. 지영이 "나 왔어."라고 외치자 남자가 돌아보며 일어섰다. 영필은 "어!" 하며 아는체를 했다.
영필: 너 마준이구나.
마준: 으응? 너 영필이구나. 너도 낙원회에 가입했어?
영필: 음, 지영 선배가 소개해줘서 오게 됐어.
마준: 토론회에서 볼 때 똑똑하고 착해 보여서 맘에 들었는데 여기서 또 보게 되는구나. 반갑다.
영필: 그래, 잘 부탁해.
지영: 너희 이미 아는 사이였구나. 마준아 동아리 소개는 너한테 부탁할게. 나는 먼저 가볼께.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뒤로하고 지영은 방을 떠났다.
마준: 처음이라 얼떨떨하지?
영필: 응. 여기 뭐하는 모임이야?
마준: 한마디로 데이트 모임이야.
영필: 데이트?
마준: 응. 남녀간에 짝을 지어 주어서 데이트를 하는 거지.
영필: 자유롭게 짝을 만나는 거야?
마준: 완전 자유는 아니고 급수에 따라 상대가 제한돼.
영필: 급수라니?
마준: 초보 1급부터 고등 9급까지 급수를 나누는데 급수가 높을수록 인기있는 상대를 선택할 수 있지.
영필: 인기있는 상대?
마준: 음, 인기투표를 해서 상대의 인기도에 등급을 매기거든.
영필: 급수가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돼?
마준: 회원을 가입시키면 급수가 올라.
영필: 회비 같은 것도 있어?
마준: 걱정할 것 없어. 한달 만원이야. 싸지. 운영비로 쓸 뿐이거든.
영필: 데이트 비용은?
마준: 노예 데이트거든. 주인이 모든 비용을 대고 노예는 주인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해.
영필: 노예?
마준: 괜찮아, 양식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상한 걸 시키지는 않아. 단지 사랑의 노예가 되는 즐거움을 주는 것 뿐야.
영필: 일대일 데이트 말고 집회도 있어?
마준: 일주일에 한번씩 다같이 모여서 교육도 받고 인기투표도 하고 그렇지.
영필: 교육?
마준: 음, 낙원의 왕에 대한 거야.
영필: 왕?
마준: 영적인 얘기야. 차차 알게 되니 걱정하지 마.
영필은 인사를 나눈 후 방을 나섰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이모저모 생각해 보았다.
'얼떨결에 동아리 가입을 했는데 잘한 일일까? 지상낙원을 추구한다는데 너무 거창하지 않나? 실은 부도덕한 모임 아닐까? 기독교를 그만두자마자 낙원에 인도되다니 이건 무슨 조화일까?'
기숙사에 도착할 때쯤 영필은 생각을 접고 차차 부딪히면서 결정하기로 했다.
09 단군
영필은 꿈꾸는 토론회에 참석했다.
불교 성철: 다들 왔지? 오늘 토론은 단군설화에 대해서야. 먼저 단군의 어머니 웅녀가 곰이었다는 기록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국문학 비유: 곰이 변해서 인간이 됐다는 얘기는 비유로 봐야겠지.
성철: 어떤 비유?
비유: 어떤 부족이 새로운 부족으로 가담하게 됐다는 얘기 아닐까?
역사학 재성: 곰과 호랑이가 있었다고 했는데, 곰은 채집생활을 하며 곰을 토템으로 숭상하던 부족이고, 호랑이는 수렵생활을 하며 사냥의 왕인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상하던 부족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에 반해 인간이란 동물과 달리 인간 고유의 문화로 형성된 농경생활을 하던 부족 아닐까?
성철: 곰이 인간으로 변했다는 건 야생의 채집생활을 하던 부족이 농경 생활을 하는 부족에 가담하게 됐다는 거군.
기독교 철민: 내가 볼땐 다 허황된 얘기 같아.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인 건 도대체 뭐란 말이야?
재성: 쑥과 마늘은 야생 입맛과 야생 습성을 버리고 인간 고유의 문화로 적응시키기 위한 도구일 수 있지. 농사일로 수확한 곡식은 야생에서 맛볼 수 있는 달콤한 과일과 달리 맛이 밋밋하잖아. 100일 동안 쓴 쑥과 매운 마늘을 먹으면서 달콤함에 젖은 입맛을 고치고 달지 않은 곡식에 적응할 수 있게 한 거지.
비유: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 따먹던 야생의 채집생활과 달리 새로운 농경생활은 인내와 노력과 기다림이 필요하니까 쓴 쑥과 매우 마늘을 참고 먹으면서 인내심을 기르기도 한 거겠다.
성철: 이 문제는 또 어떻지? 설화의 앞부분에는 환웅이 곰에게 100일동안 동굴에서 수련하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뒤부분에는 곰이 3x7=21일만에 인간이 됐다고 쓰여 있어. 곰이 수련한 건 100일이야? 아니면 21일이야?
영필: 어제 꿈에 79+21=100이라고 되뇌었는데 이 문제와 관련된 것 같다.
재성: 21일 앞에 79일이 있다고?
비유: 79일 동안 호랑이와 곰이 함께 동굴에서 수련했고, 호랑이는 더 참지 못해 뛰쳐나간 반면, 곰은 21일을 더 수련해서 100일을 채우고 인간이 됐다고 할 수 있네.
철민: 순서가 다른데? 설화의 원문에는 곰이 21일을 수련한 게 먼저 기록되고, 호랑이가 동굴을 뛰쳐나간 건 뒤에 기록돼 있어.
재성: 설화가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문장의 앞뒤가 바뀔 수도 있었겠지.
성철: 단군은 환웅과 새로 들어온 웅녀의 자식으로서 우두머리가 됐는데, 기존의 부족민들인 농경인들은 어떤 입장을 보였을까?
재성: 기존의 농경인들은 환웅이 가져온 청동기 문화를 습득한 선진 부족이고, 새로 들어온 웅녀 일족은 채집 생활과 신석기 문화를 유지해오던 부족이니 기존의 농경인들이 웅녀 일족을 우습게 여겼겠지. 그래서 두 집단 간에 결혼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를 불쌍히 여긴 환웅이 웅녀에게 자식을 낳아 주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단군왕검이야.
비유: 단군이 환웅의 자식이기도 하지만 그 어머니가 신석기 우두머리인 웅녀이니 시대에 뒤쳐진 세력이지. 이 세력이 전체 집단의 우두머리가 됐으니 그 사회는 다소 퇴보한 사회 아닐까?
낙원회 마준: 두 문화를 잘 융합해서 새로운 문화를 보여줬을 수도 있지.
재성: 단군의 고조선을 보면 고인돌 같은 큰돌 문화가 뚜렷하잖아. 이런 큰돌 문화는 석기 시대의 잔재인데 이런 풍습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주민들이 얼마나 고생했겠어.
영필: 고인돌은 청동기 문명의 대표유물 아냐?
재성: 나는 개인적으로 고인돌이 석기 시대의 잔재라고 봐. 그것이 청동기 시대에 형성된 국가 권력과 결합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한 거지. 전 세계의 고인돌 대다수가 한반도와 만주에 분포돼 있다고 하잖아.
비유: 그런데 단군왕검이 우두머리가 됐을 때 환웅의 다른 정통 자식들은 이를 기쁘게 여기지 않았을 테고 단군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았을까?
성철: 어디로 이주해?
비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고 일부는 일본 열도까지 건너갔다고 봐.
재성: 환웅의 정통성이 일본 열도로 계승됐다고?
비유: 환웅의 배달국은 태양을 숭상한 광명족(光明族)이잖아. 태양 숭배는 일본의 문화에서 엿볼 수 있지.
영필: 그럼 한국과 일본은 어떤 관계야?
비유: 형제 관계랄까? 환웅의 정통 자식과, 웅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이 형제 관계니까 이들을 각각 계승한 한국과 일본은 형제 관계 아니겠어.
성철: 오늘 토론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다음 주 주제는 환웅이다.
10 환웅
다시 꿈꾸는 토론회가 열렸다.
불교 성철: 다들 반갑다. 오늘 주제는 환웅이야. 환웅의 신분은 어떻게 될까?
낙원회 마준: 환웅은 환인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환인은 하느님이니 환웅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지.
기독교 철민: 함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은 무엄한 일이야.
성철: 환웅은 환인의 아들이니 환인의 신분이 뭔지가 문제인데.
역사학 재성: 어제 꿈에 6천년 맹주의 종말을 되뇌었거든, 이 문제와 관련될까?
국문학 비유: 환인이 6천년간 맹주 노릇을 했다는 걸까?
영필: 1만2천년전부터 6천년전까지 환인의 환국이 세계를 경영하던 인류의 맹주였다고 해석할 수 있겠네.
재성: 신석기시대에 해당하겠군. 환국이 존재했다면 그 위치는 중앙아시아 정도일 듯 한데.
영필: 세계를 경영하던 선진 문명을 가진 나라이니 하늘나라처럼 떠받들어졌고 그 우두머리인 환인은 하느님처럼 신격화됐다는 건가.
철민: 맞아. 환인이 존재했다면 하느님을 참칭한 자일 뿐 진짜 하느님은 아닐 거야.
비유: 6천년전에 환인의 맹주 지위가 종말을 맞았다면 그 아들 환웅은 새 시대를 준비하며 새 땅을 찾아나선 것이군.
재성: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건 '하늘'을 강조할 게 아니라 '내려왔다'를 강조해야겠다. 내려왔다는 게 곧 맹주 지위의 종말을 뜻할테니.
성철: 환인이 환웅에게 준 천부인 세개는 무엇일까?
영필: 맹주 지위를 상징하던 신표 아닐까? 맹주 지위는 끝났지만 상징적으로 과거의 계승을 보여줄 수 있으니.
성철: 구체적으로 어떤 물건?
재성: 유력한 견해에 따르면 "천=청동거울 부=청동검 인=청동방울" 이것이고. 검은 권력과 정치세력을, 거울은 태양을 상징하고, 방울은 신을 부르는 도구로서 거울과 방울은 제사때 사용됐다고 하지. 환웅이 배달국을 일으킨 문명이 바로 청동기 문명이잖아.
성철: 환국은 신석기 문명이니 청동기 문명을 환인이 환웅에게 전수한 것은 아니겠지.
비유: 그럼 환웅은 청동기 문명을 어디서 전수받았을까?
재성: 6천년전에 시작된 새로운 맹주가 청동기 문명을 일으켰고 여기를 찾아간 환웅이 그걸 배우지 않았을까?
성철: 6천년전의 새 맹주는 누구일까?
재성: 새 맹주라면 나는 중동인으로 보고 싶어. 중동인 특히 유대인이 현대 세계를 경영하는 맹주라고 볼 여지가 많잖아.
성철: 그럼 환웅이 중앙아시아의 환국을 떠나 중동으로 내려가서 청동기 문명을 배우고 다시 만주로 옮겨왔다는 거군.
비유: 환웅이 만주로 온 건 해뜨는 곳을 찾아서일거야. 환웅의 배달국에서 배달은 밝은땅을 뜻하잖아. 해 뜨는 동쪽을 찾아 동으로 동으로 옮겨와 만주에 정착한거지.
재성: 중동에서 만주를 향해 동으로 동으로 옮겨올 때 남아시아를 거쳐 오면서 벼농사 기술을 배웠겠지.
성철: 다시 아까의 질문, 천부인은 뭘까?
영필: 환인이 청동기 문명을 환웅에게 전수한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물건일 텐데 그거 혹시 옥(玉)이 아닐까?
비유: 옥이라면 옅은 청록색인 담록색 보석으로서 하늘을 상징하는 거겠군.
영필: 옥반지를 끼고, 모자에 곡옥(曲玉)으로 장식하고, 옥도장을 사용한 거지.
성철: 그건 그렇고 환웅이 거느렸던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는 어떤 존재일까?
영필: 어제 꿈에 영광음전(靈光音電)을 되뇌었거든, 혹시 이것과 관련될까?
비유: 풍(風)은 바람이고 사람의 숨결이니 영(靈)을 뜻하겠다.
철민: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아담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생령(生靈)으로 만들었다고 하지.
비유: 광(光)은 태양이고 광명이니 환웅을 뜻하겠군.
재성: 음(音)은 소리인데 물이 쏟아지면 음파가 발생하니 비(雨)와 연결되겠네.
비유: 전(電)은 번개인데 번개는 구름에서 나오니 운(雲)과 연결되겠다.
영필: 광(光)인 환웅이 우두머리이고, 영(靈)인 풍백은 종교를 담당하고, 음(音)인 우사는 예술을 담당하고, 전(電)인 운사는 기술을 담당했다는 걸까?
성철: 이걸 맹주와도 연결시켜 볼 수 있을까?
마준: 맹주라면 환웅의 아버지 환인은 광(光)이고, 중동인은 비와 연관된 음(音)에 해당하겠다.
철민: 중동의 유대인 얘기인 구약성경을 보면 비 즉 홍수로 세상을 심판한 기록이 나오지.
성철: 그렇다면 광(光) 앞의 영(靈)에 해당하는 맹주도 있었을까?
재성: 인류의 뿌리는 아프리카이니 아프리카의 구석기 문명이 영(靈)에 해당하는 맹주 아닐까?
마준: 18000년 전의 아프리카인이 인류의 1세대 맹주로서 영파계(靈) 열정주의로 석기 문명을, 12000년 전의 환인 부족이 인류의 2세대 맹주로서 광파계(光) 정성주의로 토기 문명을, 6000년 전의 중동인이 음파계(音) 규칙주의로 법률, 계율, 음률에 능통한 금속 문명을 발전시켰고, 앞으로 6000년 간은 누군가가 전파계(電) 문명을 일으키겠군.
비유: 1세대 영파계는 지상의 영혼들인 조상신을 섬겼고, 2세대 광파계는 하늘의 빛인 태양을 섬겼고, 3세대 음파계는 우주신을 섬긴게 되네.
재성: 환웅을 우두머리로 한 배달국은 2세대 광파계 맹주의 후예로서 3세대 청동기 문명을 전수받은 선진국이구나.
성철: 배달국 1500년 역사에서 환웅은 한명일까?
재성: 고조선의 단군이 한명이 아닌 여럿이듯 배달국의 환웅도 한명이 아닌 여럿이겠지.
성철: 단군의 지위는 어떻게 돼?
비유: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호랑이부족과 곰부족은 야생의 1세대 석기 문명일테니 곰부족 우두머리인 웅녀에게서 태어난 단군은 1세대 문화의 후계자이지.
성철: 그렇다면 4500년전에 배달국에서 단군의 고조선으로 이행한 것은 3세대에서 1세대로의 퇴보일까?
마준: 꼭 그렇지는 않겠지. 1,2,3세대의 문명을 버무려서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켰을 수도 있어.
재성: 우리의 전통문화를 풍류도(風流道)라고 하잖아. 풍(風)은 영(靈)에 해당하는 1세대 문화이니 우리 문화가 1세대에 기초를 두었음을 알 수 있지. 조상신을 섬기는 무속의 문화가 우리 문화에서 얼마나 뿌리깊은지는 다들 알잖아.
성철: 마지막 환웅의 여러 자식 중에서 단군왕검을 제외한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비유: 그들이 업신여기던 단군이 환웅의 지원을 받아 전체 집단의 우두머리가 됐으니 이를 반갑게 여기지 않았을 테고 아마 단군을 피해서 다시 동으로 동으로 이주했겠지.
성철: 그렇다면?
비유: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성철: 일본이 환인과 환웅의 전통을 계승한, 2세대 맹주의 후예라는 얘긴가?
재성: 그래서 고대 일본은 2세대 문화에 집착하며 3세대 문화를 거부하고서 시대의 흐름에 뒤쳐졌는데, 나중에 3세대 선진국인 백제와 손을 잡으면서 비약적으로 3세대 국가로서 발전을 일구었지.
성철: 백제와 일본은 어떤 관계였을까?
영필: 일본이 비록 지나간 과거의 맹주를 계승한 자이지만 그 지위에 대해 백제도 최소한의 예우는 갖추어주었겠지. 일본은 백제의 선진문명을 수용하기 위해 서로 몸을 낮추었을 거고.
성철: 자, 오늘 토론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11 데이트
수업이 끝나고 영필은 낙원회 모임방에 찾아가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준이 다른 회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필: 마준아, 안녕.
마준: 어, 영필아. 마침 잘왔다.
영필: 왜, 무슨 일 있어?
마준: 너, 데이트 날짜가 잡혔어.
영필: 데이트? 누구하고?
마준: 지영 선배가 널 데이트 상대로 선택했어.
영필: 언제인데?
마준: 이번 주말이야. 선배 전화번호가 3472-1063이거든. 주말에 전화하면 될거야.
영필: 이거 첫번째 데이트인데, 왠지 떨리는구나.
마준: 마음 푹 놔. 즐거운 시간이 될 거야.
영필: 그거 노예 데이트라고 했잖아.
마준: 응.
영필: 아무래도 걱정인데.
마준: 막상 해보면 별거 아냐. 안심해.
영필: 내가 노예고, 주인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해?
마준: 그렇지.
영필: 아, 모르겠다. 해보면 알겠지.
마준: 그럼.
영필: 딴 일 없으면 난 이만 가볼게.
마준: 그래, 데이트 잘해.
영필: 안녕.
시간이 지나 주말이 되었다. 영필은 기숙사의 공중전화기에 가서 마준에게 들은 지영 선배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신호음이 몇번 가더니 선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저 후배 영필이에요."
"응, 영필이구나."
"오늘 데이트라고 해서요."
"그래, 전화 잘했다."
"어떻게 하면 되죠?"
"일단 만나야지."
"어디서요?"
"서점 그날이오면 알지? 그 서점 앞에서 저녁 6시에 만나자."
"네."
선배가 전화를 끊었고, 영필은 시계를 보았다. 5시였다. 천천히 걸어가면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숙사를 나서서 학교 외곽 순환도로를 따라 내려가 정문 밖으로 나왔다. 왼쪽으로 가면 신림동이다. 한참 걸어 그날이오면이라는 서점에 도착했다. 조금 기다리니 지영 선배가 어느새 다가왔는지 영필의 어깨를 툭 쳤다.
"야, 많이 기다렸니?"
"아니요. 저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저녁부터 먹자. 내가 사줄게."
"네, 고마워요."
둘은 인근의 분식집에 들어가서 간단히 식사를 했다. 분식집을 나서서 영필은 선배를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죠?"
"잠자코 따라와. 내가 사는 자취방에 가는거야."
"자취방이요? 괜찮을까요?"
"괜찮아. 주인아주머니도 별달리 간섭하지 않으시고 문제 없어."
영필은 여자가 사는 자취방에 가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들뜨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야릇했다. 조금 걷던 둘은 어느 이층집 문앞에 도착했다. 지영이 열쇠로 문을 열고 둘은 안으로 들어서서 이층의 지영 방으로 올라갔다.
"들어와."
"네, 실례할게요."
방 안에 싱크대와 찬장을 갖춘 작은 방이었다.
"커피나 한 잔 하자."
"네."
"뭐해? 네가 끓여야지."
"네? 아, 예."
영필은 찬장을 뒤져 주전자를 찾아 물을 끓이고 커피, 설탕, 잔을 꺼냈다.
"커피 좋아하니?"
"싫진 않아요."
"그게 뭐니? 뜨뜻미지근하게.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어야지"
"아, 예."
끓인 물을 잔에 붓고 커피를 타서 둘은 천천히 마셨다.
"잘 탔네. 맛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이제부터 뭘 할까?"
"글쎄요."
"흐흐, 기대해. 맘껏 부려먹을테니."
"네?"
"자, 이거 번역해."
지영은 A4지 열장 정도의 영어자료를 영필에게 건넸다.
"네? 번역이요?"
"그래. 왜 실망했니?"
"아, 그게 아니라. 헤헤. 분부대로 거행합죠."
한참을 걸려서 영필은 사전을 뒤져가며 영어자료를 번역했다.
"다 했어요."
"정말? 빨리했네. 정성껏 한 것 맞아?"
"네, 틀림없을거에요."
"아이구, 잘했네."하며 지영은 영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영필은 씨익 웃으며 멋적어했다.
"영필이 너 참 순진하게 생겼다."
"네?"
"순진말야, 쑥맥이랄까?"
"아, 예."
"너 자위는 해 봤니?"
"네?"
"자위 말야. 수음 또는 마스터베이션."
"저, 그게. 아 그게."
"괜찮아, 얘기해봐."
"그게, 해본적 없는데요."
"왜, 누가 하지 말라던?"
"아뇨, 그냥."
"대학생이나 된 애가 이제까지 도대체 뭘 했을까? 안하기로 마음이라도 먹은거야?"
"그냥, 시작할 계기가 없었어요."
"친구가 안 가르쳐주던?"
"친구들끼리 그런 얘기 하는 걸 들은 적은 있지만 저더러 해보라고 하는 친구는 없었고. 그냥 남 얘기 같기만 하더라구요."
"아유, 얼굴에 그냥 '나 순진'이라고 써 있다니까."
"그렇지도 않아요."
"뭐가?"
"사실은 그렇게 순진하지도 않아요."
"뭐, 야한 책이라도 좋아한다는거야?"
"아, 그게. 실은 해학소설이나 유머집에 그런 내용이 나오더라구요. 그런 부분 읽으니 재미있던데요."
"그래, 어쩐지~. 네 눈에 장난꾸러기 같은 교활한 빛이 있더라니."
"제 눈빛이요?"
"그래, 이 모순덩어리야. 순진한 얼굴에 교활한 눈빛이라니."
"헤헤. 제가 좀 그렇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뒤죽박죽이라서."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늦었다. 오늘은 이만 일어서자."
"네?"
"왜, 실망이니?"
"아니, 그냥요."
"실망하지 마. 다음 번엔 더 친하게 대해 줄 테니까."
"아, 예."
영필은 일어서서 작별을 고하고 지영 선배의 자취집을 뒤로 하고 걸었다. 지영은 방문 앞에서 인사만 하고 더 배웅해 주지 않았다. 선배가 다음 번을 얘기한 게 귀에 어른거리면서 영필은 살짝 가슴이 설레었다.
12 사방신
꿈꾸는 토론회원들이 다시 모였다.
불교 성철: 모두 잘 지냈지? 오늘은 4방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역사학 재성: 4방신이라면 4 방위의 신으로서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남쪽에 주작, 북쪽에 현무지.
국문학 비유: 청룡이면 푸른 용이고, 백호는 하얀 호랑이, 주작은 붉은 새, 현무는 검은 거북과 뒤엉킨 뱀이야.
재성: 4방신은 고구려의 옛무덤 벽화에 그려진 것이 유명한데, 그 유래는 중국에서 생겨난 것이 전해졌다고들 하지.
영필: 어제 꿈에 '배달의 네 형제들'이라고 되뇌었는데 관련이 있을까?
성철: 4방신이 배달의 네 형제라면 6천년전 환웅의 배달국 시대로까지 거슬러 오르겠군.
영필: 단군설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동물이 아닌 부족의 상징이듯, 4방신도 부족의 상징 아닐까?
재성: 당시 만주에 있었던 부족이라면 여진의 조상, 거란의 조상이 있고, 남해와 일본열도에는 왜족의 조상이 있지.
비유: 일본인은 바다의 족속이고, 현재 파란색을 상징으로 삼으니 청룡에 해당할 수 있겠고, 거란인은 북만주 설원(雪原)의 족속으로서 흰색과 연관되니 백호에 해당할 수 있겠다.
재성: 그건 방위가 안맞는데. 그 말대로라면 청룡이 남쪽이고, 거란이 북쪽이 되버리잖아.
성철: 방위는 일단 접어두고 족속을 더 연결시켜 볼까?
낙원회 마준: 여진인은 동만주 해안의 족속이고, 모자와 복장에 검은색을 썼으니 현무에 해당할 수 있겠다.
재성: 그렇다면 현무가 동쪽이란 얘기가 되버린다니까.
영필: 방위가 시대에 따라 왜곡된 게 아닐까?
재성: 어떻게?
영필: 6천년전의 배달국 시대에는 동쪽의 현무를 위에 그리고, 남쪽의 청룡을 오른쪽에, 북쪽의 백호를 왼쪽에 그렸을 수 있어.
재성: 동쪽을 왜 위에 그려?
영필: 배달국은 광명의 태양을 숭상한 나라잖아. 그러니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높이 여겨서 지도의 위쪽에 그린 거지. 후대에 그린 지도에도 동쪽을 위쪽으로 해서 그려진 게 있잖아.
재성: 그러다가?
영필: 이 배치가 중국으로 건너가면 그대로 들어맞을 수가 없잖아. 중국의 위쪽에 현무 즉 여진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중국은 그 배치를 동서남북으로 대체한 거지. 위쪽의 현무를 북쪽으로 삼고, 오른쪽의 청룡을 동쪽으로, 왼쪽의 백호를 서쪽으로 삼은거야.
성철: 그리곤?
영필: 이런 중국식 배치가 나중에 한반도에 역수입되면서 고구려도 중국식 배치를 따른 거지.
비유: 과거의 배치를 잊어버렸다는 거군.
재성: 배달식으로 배치해서 위쪽의 현무가 동쪽을 나타낸다면 아래쪽의 주작은 서쪽을 나타낼텐데 그에 해당하는 부족은 뭐지?
비유: 서만주에 존재하고 붉은 색을 숭상하는 부족일텐데.
마준: 붉은 색을 숭상하는 족속이라면 치우를 조상으로 모시는 묘족이 있는데.
재성: 묘족? 묘족이 서만주에 있었다는 얘기야?
영필: 묘족은 누군데?
재성: 묘족이라면 중국의 대표적인 종족 중 하나지.
비유: 묘족이 서만주에 존재했다면 만주의 동이족과 중원의 지나족을 양쪽으로 상대했겠군.
마준: 묘족의 조상인 치우로 말하자면, 동이의 배달국에서 국방장관까지 지낸 용병대장이고, 새로 일어선 중원의 지나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제압한 호걸이지.
재성: 묘족이 배달국의 용병이었다는 거야?
마준: 남쪽 청룡인 왜족의 조상, 북쪽 백호인 거란의 조상, 동쪽 현무인 여진의 조상, 서쪽 주작인 묘족의 조상들이, 선진 문명을 가지고 온 배달국을 천손(天孫)으로 우러르면서, 용병 노릇을 하지 않았을까?
비유: 중앙의 배달국은 4 방위의 네 부족을 형제처럼 지신(地神)으로 대우하며 아꼈군.
재성: 과거의 동이가 좌(左)동이와 우(右)동이로 갈려서 우동이는 우리 한민족으로 이어지고, 좌동이는 중원의 지나족과 섞이게 됐는데, 이 좌동이를 묘족으로 볼 수도 있겠네.
비유: 서역에서 중원으로 유입됐던 묘족이 서만주로 옮겨가 동이문화권에 편입돼 선진 문명을 습득하고,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 지나족과 뒤섞인 거군.
재성: 동이문화권? 동이라는 말은 그렇게 좋은 말이 아니야. 중원의 지나족이 주변 민족을 오랑캐라고 낮춰부를때 쓰는 용어잖아.
비유: 난 개인적으로 애초의 동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봐. 동이의 이(夷)가 뭘 뜻하지?
재성: 이(夷)라면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가 합쳐진 거잖아. 그러니 동이는 동방의 큰활쓰는 부족을 뜻하겠지.
비유: 아니, 이(夷)는 원래 큰 대(大)자와 ㄹ자가 합져진 거 아닐까?
재성: ㄹ자와 합쳐지다니?
비유: 절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게 ㄹ자야. 그러니 이(夷)자는 큰 절을 뜻하겠지. 동이는 동방의 큰절하는 부족이고.
재성: ㄹ자가 언제 弓자로 바뀌었다는 거야?
비유: 중국 한(漢)나라 시대에 한자획을 표준화하면서 ㄹ을 弓으로 바꿔 夷자로 만든 거지. ㄹ은 한자에 없는 모양새이니 비슷한 모양의 한자인 弓으로 표준화시켜 바꾼 거라고.
영필: 동이족이 원래 동방의 큰절하는 부족을 뜻했다면 나쁜 뜻이라고 볼 수는 없겠군.
비유: 그러다가 후대에 이(夷)를 '오랑캐 이'자로 삼으면서 뜻이 변질된 거라고 봐.
재성: 어찌됐건 치우가 동이족이었다고 하는 역사적 기록은 어찌 봐야 할까?
비유: 치우는 동이문화권에 소속된 묘족일 뿐이고, 우리 한민족의 조상은 아니지.
재성: 4방신이 각기 고유한 색을 상징으로 삼았는데, 중앙의 배달국도 상징 색이 있었을까?
비유: 배달국은 하늘의 자손으로서 하늘의 색인 옥(玉)색을 상징으로 삼지 않았을까?
영필: 옥색이라면?
비유: 옅은 청록색인 담록색이지.
기독교 철민: 아무리 뭐래도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은 마귀에 불과해.
성철: 4방신이 마귀라고?
철민: 그럼. 어떤 합리화도 헛수고에 불과해.
성철: 자, 오늘 토론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주엔 마귀에 대해 얘기해 보자.
13 마(魔)
일주일이 지나 영필은 꿈꾸는 토론회에 참석했다.
불교 성철: 모두 잘 지냈어? 오늘 주제는 마귀야.
기독교 철민: 이런 게 토론 주제로 삼을 가치라도 있을까?
역사학 재성: 마귀라면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나쁜 신령이지. 왜 마귀는 사람을 괴롭힐까?
기독교 철민: 타락한 존재라서 그렇지. 성질 나쁜 타락천사야.
국문학 비유: '오! 나의 여신님'이라는 일본 만화에서는 그 이유가 균형 때문이라고 하지.
성철: 균형? 어떤?
비유: 신족(神族)이 인간에게 행복을 주면 마족(魔族)은 인간에게 불행을 줘서 균형을 맞춘다고.
성철: 행복과 불행 사이의 균형?
재성: 마귀가 인간에에 불행만을 준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지 않을까? 불행 따위 없이 행복만 존재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어?
낙원회 마준: 마왕(魔王)은 인간에게 불행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주는 거야.
철민: 잠깐의 행복으로 유혹해서 영원한 불행에 빠트리는 거겠지.
마준: 아니, 마왕은 행복 점수와 불행 점수 사이에 균형을 맞추면서 인간을 관리한다구.
비유: 마귀는 인간에게 불행만을 주는 존재 아니야?
마준: 그건 절반만 보고 착각한 거야. 나머지 절반도 보면 마왕이 주는 행복을 알게 될 거야.
비유: 나머지 절반이 뭔데?
마준: 사람의 전생이지.
성철: 전생?
마준: 어떤 사람이 이번 생에 불행을 겪는 것은 그 사람이 전생에 큰 행복을 누렸기 때문이야. 즉 어떤 사람이 이번 생에 큰 행복을 누리면 그 사람은 다음 생에 불행을 겪게 되지.
성철: 행복한 일생과 불행한 일생을 반복하면서 윤회한다고?
마준: 그렇지. 그럼으로써 모든 인간이 행복과 불행을 골고루 맛보게 하는 거야.
비유: 인간들 사이에 행복과 불행의 균형을 맞추는 거네?
영필: 불행 따윈 없이 그냥 쭉 행복하게 살면 안돼?
마준: 마왕은 쾌락을 주는 존재야. 쾌락을 위해선 속칭 선과 악을 가리지 않지. 식욕을 채우기 위해 살생을 하고, 물욕을 채우기 위해 절도, 사기, 횡령을 하고,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폭행, 억압, 반란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 피해자가 생겨나.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돌고 돌며 윤회하도록 해. 이번 생에 가해자면 다음 생엔 피해자가 되니 누구나 공평하게 행복과 불행을 맛보게 되지.
철민: 거봐. 마귀는 악을 부추길 뿐이라니까. 그러니 악마라고 하지.
마준: 악이 없는 행복에도 불평불만자는 있어. 누군가 잘생겨서 행복을 누리면 못생긴 사람들은 시기 질투를 하지. 이번 생에 못생긴 사람들이 다음 생엔 잘생기도록 작업을 해줘서 공평한 윤회를 시키는거야.
철민: 마귀가 공평하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야. 선을 행하면 축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 법.
마준: 기독교의 야훼와 마왕은 서로 운영원리가 달라. 야훼는 선악을 따지지만 마왕은 선악을 가리지 않아. 그래서 둘은 영역이 서로 다른거지.
철민: 마귀가 다스리는 영역은 어딘데?
마준: 현실을 봐. 속칭 악을 행하고도 떵떵거리며 잘먹고 잘사는 부정부패범들이 얼마나 많니. 이들은 야훼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 마왕에게 속한 자들이야. 이번 생에 행복을 누린 이들은 다음 생에 불행을 겪도록 작업한다고.
철민: 아니, 살아서 벌을 받지 않더라도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벌을 받는거야.
마준: 지옥이란 따로 없어. 기독경에도 영원한 벌을 받는 지옥이란 곳에 대해 언급돼 있지 않아.
철민: 악한 짓을 해서 재미를 보는 인간은 그럼 어떻게 되는데?
마준: 그런 자는 마왕에게 속한 자가 되지. 결국 다음 생에 불행을 누리도록 작업하는 공평 윤회의 구속을 받게 되고.
철민: 그런 세상이 말이 돼?
마준: 전통적으로 귀신을 섬겨 온 동북아시아는 대표적으로 마왕에게 소속된 대륙이야. 우리가 사주팔자를 따지며 인간의 운명이 이미 결정돼 있다고 믿는 대로, 우리는 공평 윤회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운명을 타고나도록 생년월일이 정해지는 거야.
비유: 불행의 의미는 뭐야? 예컨대 신체의 불행을 안고 사는 사람도 낙천적으로 삶을 즐기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잖아.
마준: 행복과 불행은 객관적으로 정해지지. 객관적인 불행 예컨대 신체의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이 주관적으로 행복을 느끼더라도 점수를 매길 땐 객관적인 조건에 따라 불행 점수를 채우게 되지. 결국 다음 생에는 객관적인 행복의 조건을 부여받을테고.
비유: 인간이란 게 객관적으로 행복한 조건에 살면서도 심리적으로는 불행할 수가 있잖아.
마준: 행복 역시 객관적인 조건에 따라 점수를 매겨. 주관적으로 행복하게 느낄지는 각자의 몫이야.
성철: 결국 어떤 조건에 처하건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하겠군. 일체유심조야.
철민: 하나의 세상이 어떻게 서로 다른 원리로 운영될 수 있어?
마준: 그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기준인을 설정하지.
성철: 기준인?
마준: 인간 중에 기준인을 선발해서 그로 하여금 야훼의 운영원리와 마왕의 운영원리 사이에 우선순위를 결정하도록 맡기는 거지.
비유: 누가 기준인이 되는데?
마준: 시대에 따라 다르지. 어떻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기준인을 뽑아 두 운영원리 사이에 공정한 경쟁을 통해 우열을 겨루고 그 기준인으로 하여금 둘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게 하는거야.
성철: 결론은 각자의 마음에 맡기고, 오늘 토론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14 여의도
기숙사에서 잠을 자던 영필은 새벽녘에 꿈을 꾸었다. 하늘에서 지구가 보이고 점점 클로즈업되어 우리나라, 서울, 여의도의 모습이 확대되어 보였다. 그리고는 "여의도에 가서 기준인을 만나라. 청룡 열둘, 현무 스물"이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며 잠에서 깨어났다.
'기준인? 토론회에서 우리가 기준인에 대해 얘기한 탓일까?'
여의도에 가서 기준인을 만나라니 너무 막연하게 느껴졌다.
'여의도의 어디일까? 사람을 만나려면 사람들이 흔히 찾는 광장이 좋으니 여의도광장에 가야할까? 그렇지만 나는 여의도광장에 가본 적도 없고, 어디인지 모르는데? 또 난데없이 청룡 열둘, 현무 스물은 뭔 소리야?'
혼란을 느끼던 영필은 마음을 정리했다.
'에잇, 모르겠다. 일단 여의도에 가서 생각해보자.'
영필은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은 후 옷을 챙겨입고 기숙사를 나와 마을버스에 탔다. 전철역에 도착한 영필은 2호선을 타고 출발하여, 사당역에서 4호선으로, 삼각지역에서 6호선으로, 공덕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 마침내 여의도역에 도착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여의도광장은 어딜까? 넓은 곳일테니 밖에 나가보면 보이려나?'
전철역에서 나온 영필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광장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4거리에서 영필은 무작정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5분쯤 걸었을 때 다시 4거리가 나왔는데 왠 광풍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불어댔다. 어쩐지 느낌이 이상해 영필은 바람을 등지고서 왼쪽 길로 꺾어 걸어갔다. 또 도착한 어느 4거리에서 역시 거센 바람이 왼쪽으로 불어대자 영필은 왼쪽으로 꺾어 걸어갔다. 그렇게 잠시 걸었을 때 맞은편에서 어떤 젊은이가 걸어왔는데 그가 입은 빨간 티셔츠 가슴팍에 흰글씨로 '5115'가 크게 쓰여 있었다.
'5115?'
왠지 1515 즉 일로일로, 풀어보면 이리로이리로라고 느껴졌다. 느낌이 이상해 영필은 그 젊은이의 뒤를 따라갔다. 젊은이는 한참 걷다가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 들어선 영필은 젊은이를 놓치고서 여기가 어딘가 둘러보았다. 벽에 여의도백화점이라고 쓰여 있었다. 백화점 안을 이리저리 걸으며 돌아보는데 벽에 큰 만년필 그림이 걸려 있는게 눈에 강렬하게 들어왔다.
'만년필? 만년필이면 만년 즉 '영원한 필'이고 이를 줄이면 내 이름 영필이잖아.'
1층을 둘러보고 계단 옆에 이르렀는데 종이판에 2층의 약도가 그려져 있는게 눈에 강렬하게 들어왔다.
'2층에 뭔가 단서가 있지 않을까?'
영필은 계단을 올라가 보았는데 한층 오르자 오른쪽으로 작은 복도가 있었는데 밑에서 본 약도와는 모습이 달랐다.
'여긴 뭐지 1.5층일까? 한층 더 올라가야 2층일것같다'
영필은 다시 계단을 올라가 2층에 이르렀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칠공주 피트니스센터였다. 밑에서 본 약도와 일치하는 점포이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계단 반대쪽 모퉁이에 이르렀는데 영필은 깜짝 놀랐다. 복사기 대리점의 바깥벽에 복사기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는데 그 포스터에 자신의 사진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내 사진이 여기 있지? 양복을 입고 있네? 난 이런 사진 찍은 적 없는데? 이 양복이라면 어머니가 사주셔서 옷장에 걸어두긴 했지만 아직까지 입은적도 없는데?'
영필은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려고 주인을 찾아보았지만 가게는 사람이 없는 채 비어 있었다. 문득 영필은 깜짝 놀랐다.
'이게 바로 꿈에서 만나라던 기준인의 모습 아닐까? 그렇다면 나 자신이 기준인이라고?'
머리속이 혼란함을 느끼며 영필은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그리고 꿈에 '청룡 열둘, 현무 스물'이라고 되뇌인 것에 대해 무슨 의미일지 고민했다. 그때 벽에 벽시계만한 나침반이 걸려있는게 보였다.
'토론회에서 의논하길 청룡은 남쪽이고 현무는 동쪽이라고 했는데.'
영필은 나침반의 방위를 확인하고서 남쪽으로 열두걸음, 동쪽으로 스무걸음을 걸어보았다. 거기에 있는 가게는 '내가 만든 나라'라는 옷가게였다. 잠시 망설이던 영필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어서오세요."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아, 어떻게 오셨습니까?"
영필은 뭐라고 말해야할지 혼란스러워하다가 그냥 "청룡 열둘, 현무 스물이요."라고 대답해버렸다.
그러자 무슨 암호라도 들어맞은 것인지 주인은 점포 문을 잠그고 불을 끈 뒤 영필을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서 주인은 잔뜩 쌓아놓은 박스들을 치우고 가장 아래 있던 박스에서 뭔가를 꺼내 영필에게 내밀었다. 담배갑만한 크기의 휴대용 단말기로 보였다.
"이게 뭡니까?"
"쉿!"
주인은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영필의 말을 저지했다. 말문이 막힌 영필은 잠시 단말기와 이어폰을 쳐다보았다.
"혼자만 보세요."라고 짧게 소근댄 주인은 영필을 다시 바깥쪽으로 안내했다. 주인에게 단말기의 내력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영필은 잠자코 주인을 따라 나왔다. 그리고는 단말기를 가방 속에 집어넣은 뒤, 주인이 문을 열자 조용히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계속 걸어 백화점 바깥을 나온 영필이 4거리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전철역이 보였다. 원래 역에서 가까운 곳이었는데 아까 한참을 빙빙 돌아 백화점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전철을 탄 영필은 자리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기준인? 그게 나라고? 그 사진은 대체?'
'혹시 토론회원들이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복사기 가게에 붙어있던 사진을 토론회원들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내가 기준인인 걸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아닐까?'
되짚어 생각해보니 처음에 기숙사식당에서 자신에게 접근한 보레아 교회의 사람들이나, 전산실에서 자신에게 접근한 지영 선배들의 눈빛이 영필의 얼굴을 이미 알고있는듯한 낌새를 내비친 것도 같았다.
'어찌됐건 그들이 내게 이제까지 내색을 하지 않았으니 이제와서 물어본대도 역시 모르는척할 것 같은데.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기숙사에 도착한 영필은 화장실 칸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좌변기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이어폰을 단말기에 꽂은 뒤 아래쪽의 동그란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이어폰에서 "전원을 켭니다."라는 소리가 들리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조금 기다리자 다시 이어폰에서 "뇌파를 읽고 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리며 화면에 사인, 코사인 곡선 같은 게 잔뜩 그려졌다. 그리고 "본인임이 인증되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린 다음 화면에 그림이 떴다. 무슨 그림인지 자세히 보니 미의 여신 비너스였다. 잠시 후 그림이 바뀌어 낙원회의 여선배들이 비키니만 입고서 이쪽을 향해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영필은 어떻게 낙원회 여선배들의 모습이 이 단말기에 담겼는지 놀랍기만 했다. 그림은 또 바뀌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뭐라고 외쳐대는데 "일어나라 마왕이여, 새시대가 열리도다."라는 구호였다. 영필은 너무 놀라 황급히 단말기의 전원 버튼을 눌러 꺼버렸다.
'아니, 이럴수가. 마왕이라니.'
영필은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내가 기준인인데 마왕을 선택해 버린 것인가? 이 일을 어찌한다? 얼떨결에 생각없이 마구 따라다니다가 뭣도 모르면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버린건가? 이 일을 어쩌지? 이미 엎질러진 물일까? 큰일났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며 요동치는 통에 영필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단말기를 가방에 넣은 뒤 화장실을 나온 영필은 기숙사를 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다. 너무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며 이리 걷다 저리 걷다 봥황을 하였다. 한참을 방황하던 영필은 기숙사에 돌아와 단말기를 책상 서랍 속에 깊숙히 감추고 침대에 누웠다. 벌벌 떨던 영필은 피곤에 지쳤는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15 은하
마음을 가다듬은 영필은 여느 때처럼 평온하게, 꿈꾸는 토론회에 참석했다.
불교 성철: 모두 안녕. 오늘은 진리에 대해 얘기해 보자.
국문학 비유: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인데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종교가 존재할까? 어느 종교든 저마다 자신들이 진리라고 주장하잖아.
기독교 철민: 무슨 소리. 기독교만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인간의 착각에서 유래한 거짓일 뿐이야.
성철: 철민이 얘긴 너무 편협한 것 같다. 불교만 해도 세상에 많은 덕을 끼치면서 사람들의 어둠을 밝히잖아. 어떻게 기독교만 유일한 진리이겠어?
역사학 재성: 종교란 게 가르침의 근본은 도덕과 선행이니 원래 하나일 뿐, 대륙에 따라 모습만 조금씩 바뀐 것 아닐까? 하나의 신이 옷을 갈아입듯 말이야.
낙원회 마준: 종교의 가르침이 도덕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편견이야. 마왕의 가르침은 선악을 초월하지.
성철: 도대체 진리는 하나일까? 여럿일까?
영필: 어제 꿈에 무수한 은하계가 보였는데 어느 은하계에는 비너스가, 어느 은하계에는 부처가, 어느 은하계에는 십자가가 서 있었어.
비유: 부처가 있는 은하계와 기독이 있는 은하계가 서로 다르다는 건가?
재성: 하긴 우주에 그렇게 많은 은하계가 존재하는데 이들이 무의미한 먼지덩어리에 불과할 린 없지. 은하계마다 생명이 존재할 거고, 그들은 서로 다른 진리를 떠받들 수도 있겠다.
성철: 부처가 존재하는 은하계는 금욕은하계겠네.
비유: 십자가가 존재하는 은하계는 기독은하계일테고.
마준: 비너스가 존재하는 은하계는 사랑을 떠받드는 쾌락은하계라고 할 수 있지.
성철: 사실 개인적으로 불교가 말하는 천국이 어떤 모습일까 많이 궁리해 봤거든, 금욕은하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의 사람과 동물은 서로 잡아먹지 않고 모든 생물이 광합성을 해서 살아갈 거라고 봐.
비유: 사람의 몸에 엽록소가 있어서 광합성을 한다고?
성철: 그래, 사람도 동물도 모두 독립영양생물이지. 식물조차도 해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 단지 과일과 열매만 따먹는 것은 괜찮겠지만 말이야.
재성: 식욕이 없는 세계구나.
비유: 식욕이 없고 햇빛을 보면서 물만 먹어도 살아갈 수 있다면 정말 평화롭겠다.
마준: 쾌락은하계로 말하면 마왕이 다스리는 곳이라 할 수 있지.
재성: 네가 말한 공평 윤회로 운영되는 곳?
마준: 그래, 누구나 번갈아가면서 멋쟁이로도 태어나고 못난이로도 태어나지. 누구나 번갈아가면서 강자로도 태어나고, 약자로도 태어나.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면서 쾌락을 누리는데 그 기회는 윤회를 통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가.
성철: 기독은하계는 어떤 종류일까?
철민: 기독교는 금욕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고, 중용이야. 욕망의 긍정적 기능을 인정하여 생물들에게 욕망을 불어넣으면서도, 욕망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도록 한계를 짓는 거지.
성철: 욕망의 인정과 절제인가?
철민: 금욕이나 쾌락이나 그런 극단적인 개념은 환상에 불과해. 역시 기독교의 중용만이 진리야.
성철: 그건 그렇고 마왕이 쾌락은하계를 다스리고, 부처가 금욕은하계에 존재한다면 그들은 지구에서 무얼 하는 걸까?
재성: 어제 꿈에 "가세, 가세, 이민가세"를 되뇌었는데 관련이 있을까?
성철: 이민?
영필: 아, 이민이라면 지구에서 살다가 부처의 은하계나 쾌락의 은하계로 옮겨간다는 걸까?
비유: 종교란 게 그럼 이민홍보 천사겠군.
재성: 불교를 믿으면 금욕은하계로 이민을 가고, 마왕을 따르면 쾌락은하계로 이민을 간다고?
철민: 이 지구는 기독교만이 진리니 기독교인은 이민 따위를 거론할 필요도 없어.
영필: 기독교인도 다른 은하계로 이민을 가지 않을까? 그게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지.
성철: 지구가 대체 어떤 곳이길래 이처럼 이민을 홍보해대는 걸까?
비유: 어제 꿈에 새싹을 심어 키우는 종묘장이 보였는데 이 문제와 관련이 있을듯 싶다.
재성: 지구인의 영혼이 새싹이란 건가?
영필: 새싹을 잘 키워서 다른 은하계에 내다 파는 것일까?
성철: 그럼 우리 은하계는 어떤 종류야?
재성: 자연계를 보자. 우리 자연계는 정글이잖아. 죽고 죽이고 약육강식이 판치는 세상이지.
비유: 정글은하계?
철민: 인간은 동물과 달라. 바로 중용을 실천하는 존재이지. 예의와 염치를 안다고.
성철: 인간이 정글의 동물과 다르다는 건 일단 인정하지.
재성: 지구는 수십억년 동안 정글의 환경에서 진화했어. 인간이 문화를 세운 건 몇만년도 안된다고.
영필: 지구의 시작이 정글이었다는 점은 맞는 것 같아.
비유: 그러다가 어느 때인지 인간을 키우면서 중용은하계로 탈바꿈하지 않았을까?
성철: 정글은하계에서 중용은하계로? 계기는?
비유: 거기까진 아직 알 수 없지.
성철: 어떻든 지구라는 공간을 보면 쾌락계, 금욕계, 중용계의 천사들이 경쟁하는 곳인데 이들 각자의 운영원리가 어떻게 적용될까?
영필: 각 인간의 종교에 따라 죽음 이후의 처분이 결정되지 않겠어?
재성: 불교를 믿으면 연기법에 따라 윤회하고, 마왕을 따르면 공평법에 따라 윤회하고, 기독교를 믿으면 이들은 윤회를 믿지 않으니 이른바 심판 때까지 긴 잠을 자겠군.
비유: 서로다른 운영원리가 지구에 뒤섞여 있지만 그것을 각 인간의 종교에 따라 구별해 적용해주면 혼란은 적겠구나.
성철: 사람의 종교가 바뀌기도 하고, 여러 종교에 모두 발을 걸친 사람도 있는데 이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영필: 각 종교생활의 점수를 매겨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종교를 기준으로 삼는 것 아닐까?
성철: 그런데 말이야, 이들 종교 사이에 우열이 있다고 봐야 하나?
철민: 당연하지. 하나님만이 우월한 신이고, 마귀나 부처 따윈 열등한 존재에 불과해.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시지.
마준: 아니, 기독교의 야훼나 불교의 부처, 쾌락의 마왕은 모두 대등한 관계야. 기독은하계, 금욕은하계, 쾌락은하계가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대등하게 운영되는 것이고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는 따위의 개념이 아니야.
비유: 단지 지구에서의 경쟁에는 우선순위가 있겠지.
재성: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인간 중에 뽑힌 기준인이고?
비유: 그렇지. 예컨대 쾌락계가 1순위, 금욕계가 2순위, 중용계가 3순위로 결정되면 순위에 따라 순서대로 인간들을 유혹할 권리를 갖게 된달까? 첫경험이 강렬한 법이니 먼저 작업한 계열이 인간의 맘을 빼앗기 쉽겠지.
재성: 지역 선택에도 순위가 작용하겠다. 예컨대 1순위가 유럽을 선택하면, 2순위는 남은 땅 중에서 아시아를 선택하고, 3순위는 나머지 땅 중에서 아메리카를 선택한다든지.
성철: 그런데 말이야, 우주의 여러 은하계에 우리가 말한 쾌락계, 금욕계, 중용계 이 셋만 존재할까?
영필: 셋은 큰 분류에 불과하고 조금씩 운영원리가 다른 다양한 은하계들이 수없이 존재하겠지. 우리 정글은하계만 하더라도 약육강식의 쾌락계적인 측면과 욕망절제의 중용계적인 측면이 일부씩 섞여있잖아. 성욕을 예로 들면 정글에서 무리 중의 강자가 성욕의 충족을 독차지하지만, 성욕에 한없이 탐닉하지 않고 찰나의 충족을 누릴 뿐이지.
성철: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오늘 토론은 여기까지. 다음주엔 기독경의 선악과에 대해 토론하자.
16 선택
토론회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며 영필은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마왕이 인간에게 해악만을 끼치는 징그러운 존재는 아니구나. 저 멀리 쾌락은하계를 다스리는 독자적인 왕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니 여의도에서 받은 휴대용 단말기를 처음 켜 본 날 마왕 숭배를 접하고 느꼈던 당혹감은 어느덧 사그라들었다.
'마왕? 마왕이면 어때? 대등한 선택 중의 하나일뿐이라구'
그리고 그때 단말기를 황급히 꺼버린 게 생각났다.
'어쩌면 선택이 이미 완료된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쾌락계, 금욕계, 중용계 세 세력 사이에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거라면 좀더 지켜봤어야 하지 않을까? 그때 너무 성급했어.'
안정을 찾은 영필은 기숙사에 도착해 책상 서랍을 뒤져 단말기를 꺼내서 주머니에 넣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좌변기에 앉은 영필은 이어폰을 꽂고 전원을 켰다. 뇌파로 본인 인증을 한 후 그림이 뜨기 시작했다. 처음 본때처럼 비너스가 나오고, 낙원회의 여선배가 나온 후 마왕을 숭배하는 무리의 영상이 떴다.
'자, 더 볼까? 딴 그림이 계속되려나?'
과연 예상은 맞았다. 앞 영상이 사라진 후 조금 기다리자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여인이 나왔는데 자세히 보니 관세음보살이었다. 잠시 후 그림이 바뀌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남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는 게 보였다. 금욕을 하며 수련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조금 지나니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 침묵하며 명상을 하는 영상이 떴다.
'여기까지는 금욕계의 모습인가?'
영상이 사라진 후 조금 지나자 새 그림이 떴다. 머리를 천으로 감싼 여인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성모 마리아였다. 다시 조금 있자 젊은 여학생의 모습이 나왔는데 이를 보던 영필은 깜짝 놀랐다. 법대 동기인 김혜선이었다. 첫눈에 맘이 움직여서 입학 초부터 지켜보던 그녀였다. 귀신 문제로 영필에게 충고도 해 준 그녀 아닌가? 왠지 그녀와의 순수한 사랑이 시작될 듯한 설레임이 일었다. 그림은 또 바뀌어 사람들이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언덕을 오르면서 "성모 마리아여 우리를 돕기를."이라고 합창했다.
'이건 중용계의 모습이구나.'
그 그림이 사라진 후 화면에는 비너스와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의 세 그림조각이 떴다. 그리고 이어폰에서 "1순위를 고르시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느닷없는 주문에 놀란 영필은 어떻게 할지 망설이다가 역시 전원을 꺼버렸다.
'아직은 때가 아닐거야. 어쨌든 선택할 대상을 모두 알게 됐으니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겠다.'
다음날 영필은 오랜만에 낙원회 방을 찾아갔다. 십여명의 회원들이 앉아있고, 마준이 TV에 VTR을 연결하고 있었다.
"안녕, 마준아. 뭐하니?"
"어, 영필아, 마침 잘왔다. 다들 인사해, 여기 영필이야."
영필은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준이 VTR 연결을 다 했는지 자리로 와서 비디오테잎을 꺼내 VTR에 넣고 리모컨을 눌렀다. 비디오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마준아 뭐야?"
"응, 그냥 봐봐. 앙드레 블랙의 작품이야."
이윽고 화면이 나오는데 한 여자가 또 한 여자를 데리고 큰 거실에 들어왔다. 두 여자 모두 모델처럼 예쁘고 멋진 몸매였다. 따라온 여자는 팔이 등 뒤로 묶이고 가죽끈으로 몸 곳곳이 감겨 있었다. 선두의 여자는 묶인 여자의 옷을 가위로 사각사각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렇게 비디오가 진행되어 한시간이 흘렀다. 화면에 넋을 놓고 빠져있던 영필은 비디오가 끝나자 아쉬움을 느꼈다.
"어때? 사랑의 노예야, 멋지지 않아?"
"글쎄, 이런 모습을 본건 처음이야."
"자주 놀러 와라. 또 보여줄게."
"그래, 이만 가볼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필은 학생회관을 나와서 법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득 맞은편에 아는 얼굴이 다가왔다.
'이런, 혜선이구나.'
잠시 전에 민망한 비디오를 보던 게 부끄러워 이를 알지도 못할 혜선이건만 영필은 괜히 멋쩍어졌다. 말을 걸 용기도 없고 영필은 종종걸음을 쳐서 혜선을 스쳐지나갔다.
'이래가지고 도대체 나는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기숙사로 발걸음을 돌린 영필은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았다. 그런데 문득 지영 선배와 자위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게 생각났다. 화장실 칸 안에 혼자 있는 기회였다. 지영 선배가 자위를 해 보라고 권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20년 동안 금욕의 생활을 해 왔는데 이제와서 깨트릴만한 이유도 없는 것 같고, 자꾸 혜선이 얼굴이 생각나 죄책감이 들었다. 영필은 화장실을 나서서 방에 들어와 침대에 드러누운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17 선악과
꿈꾸는 토론회가 다시 열렸다.
불교 성철: 모두 안녕, 오늘은 기독경의 선악과에 대해 얘기해 보자.
기독교 철민: 선악과라면 아담이 하나님의 금지를 어기고 따먹은 원죄를 저질러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과일이지.
성철: 선악과가 무엇일까? 과일을 먹고 선악을 알 수 있게 되나?
국문학 비유: 과일은 비유 아니겠어?
낙원회 마준: CD-ROM 아닐까? 아담은 3세대 맹주잖아. 맹주로서 서버컴퓨터에 접속하는 개인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고 봐.
성철: 서버컴퓨터라면?
마준: 자연계를 관리하고 감시하며, 인간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중앙 컴퓨터지.
성철: 그런 컴퓨터가 존재할까?
마준: 예컨대 달의 지하 속에 감추어져 있을 수 있지.
성철: 아담이 그 시대에 컴퓨터를 사용했다?
마준: 간단한 단말기를 사용했지 않을까? 그 컴퓨터에 CD-ROM을 넣어서 각종 지식을 습득하는 거지.
비유: 선악과는 선악의 지식을 담고 있는 CD-ROM이군.
역사학 재성: 선악의 근원은 뭘까?
성철: 인간의 욕망이 선악의 근원이라고 봐. 식욕 때문에 살생을 하고, 정복욕 때문에 폭행을 하고, 각종 악행의 근원이 바로 욕망이지.
마준: 그 욕망을 인간에게 불어넣은 건 누구지?
비유: 아담을 창조한 야훼지.
마준: 그래서 아담은 자신에게 악의 근원인 욕망을 불어넣은 야훼를 악한 신이라고 오해한 거지.
철민: 야훼가 악한 신이라니? 말도 안돼.
재성: 야훼는 중용의 신이니 욕망의 긍정적 기능을 인정하면서도 절제로써 한계를 두는 건데.
마준: 아담은 그 복잡한 사정을 모르고 단순하게 야훼를 악한 신이라고 단정한 거야. 자신의 몸에 있는 성욕의 근원에 대해 죄악감을 느끼고 나뭇잎으로 가리게 되지.
영필: 야훼가 3세대 맹주로서 아담을 창조했는데, 아담이 야훼를 악의 신으로 오해하여 심리적 거리가 벌어지는 바람에 야훼는 아담의 맹주 지위를 정지시키고 에덴에서 쫓아냈군.
성철: 그리고는 모세를 세워 십계명을 주고 밑바닥부터 중용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쳤네.
비유: 때가 되자 예수를 보내 아담의 원죄를 씻고 유대인을 3세대 맹주로 다시 임명했군.
철민: 무슨 소리, 예수는 인류 전체의 구원자야.
마준: 아니, 예수는 유대인의 구원자일 뿐이야. 다른 인류는 맹주도 아니고 에덴에서 쫓겨난 적도 없으니 구원이란 것을 받을 필요가 없지.
철민: 아담이 전 인류의 조상이니 아담의 원죄는 전 인류에게 적용된다고.
마준: 아니, 아담은 중동인의 조상일 뿐이야. 다른 인류는 아담의 후손이 아니야.
성철: 그렇다면 다른 인류는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지 않는 거군.
철민: 그럼 다른 인류는 언제 창조됐는데?
마준: 다른 인류는 수십억년의 진화를 통해 형성된 존재야. 아담은 6천년전에 야훼가 에덴동산에 창조한 존재고.
성철: 인간이 두번 창조됐군. 기독경에도 창세기에서 인간의 창조를 두번 언급하고 있지.
철민: 그럼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는 것은 헛일이란 말이야?
마준: 헛일은 아니지.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는 덤이랄까? 다른 인류를 덤으로 불러서 같이 맹주로 활약하게 했지.
비유: 예수가 포도나무고 유대인이 가지라면, 다른 인류의 기독교인은 포도나무에 접붙이기된 다른 나무군.
재성: 유대인은 핏줄로 맹주가 되는 거고, 다른 인류는 믿음으로 맹주가 되는 거네. 그리하여 오늘날 세계를 유대인과 기독교가 장악하고 있군.
성철: 그럼 다른 종교는 뭐야?
철민: 십계명이 가르치길 야훼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어.
마준: 그건 유대인에게 내린 명령이지 다른 인류에게 내린 명령이 아니야. 유대인은 3세대 맹주니까 야훼의 품에 있어야만 하는거고, 다른 인류는 이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다른 종교를 믿을 수 있어.
성철: 맹주에게만 적용되는 명령을 다른 인류에게도 적용되는 명령으로 착각한 거구나. 유대인은 맹주로 선택된, 야훼의 백성이니 야훼에게만 충성해야 하고, 다른 인류는 다른 종교를 믿어 다른 은하계로 이민갈 수 있겠다.
철민: 누가 뭐래도 장차 심판의 때가 되면 모두가 야훼의 앞에 서게 될거야.
마준: 아니, 야훼의 심판은 유대인과 기독인에게만 적용돼. 그들이 맹주 노릇을 잘 했는지 심판하는 거라고.
비유: 청지기 즉 관리인 노릇을 잘 했는지 계산하는 거구나.
성철: 유대인의 6천년 맹주 지위가 이제 끝날 때가 되가는데 그게 대체 언제쯤일까?
재성: 2012년 종말론이 유명하지 않아?
마준: 그게 맞다면 2012년에 유대인의 맹주 지위가 종료되고, 그동안의 맹주 노릇에 대해 심판을 받겠군.
비유: 세상의 종말이 아니고 유대인의 종말이네. 2012년이 되도 세상은 평온하게 굴러가고, 유대인과 기독인의 영혼들만 긴잠에서 깨어나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영계에서 심판을 기다릴 것 같다.
영필: 다른 인류는 야훼의 심판을 받지 않는군.
성철: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음주엔 4세대 맹주에 대해 토론하자.
18 4세대
꿈꾸는 토론회원들이 다시 모였다.
불교 성철: 다들 잘 지냈지? 오늘은 4세대에 대해 얘기해 보자.
역사학 재성: 1세대 맹주는 아프리카의 석기문명이고, 열정을 높이 보며 조상신을 섬겼지.
국문학 비유: 2세대 맹주는 중앙아시아의 토기문명이고, 정성을 높이 보며 하늘의 태양을 섬겼지.
낙원회 마준: 3세대 맹주는 중동의 금속문명이고, 규칙을 높이 보며 우주의 유일신을 섬겼지.
성철: 그렇다면 4세대는?
영필: 어제 꿈에, 장성한 자식이 부모의 품을 떠나 집을 나가서 자립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관련있을까?
기독교 철민: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며 부모를 섬기고 살아야 해. 인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언제까지나 섬겨야 하지.
재성: 인간은 단계적으로 성숙해졌어. 구약시대에 신의 종 노릇을 하다가 신약시대에 신의 아들로 승격됐지.
성철: 아들이 장성하여 이제 출가해서 자립할 때가 됐구나.
비유: 신의 품을 떠나 인간 홀로 자립한다?
재성: 이 시대는 신에게 등을 돌린 무신론의 시대야.
성철: 마치 신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이 영계의 모든 걸 부정하고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고들 하지.
영필: 무신론이 4세대 맹주가 될까?
마준: 구체적으로 누구?
재성: 역사적으로 무신론이 자리잡은 유럽이 맹주가 되지 않을까?
성철: 불교도 원래의 가르침을 보면 무신론에 가깝지.
철민: 아니, 불교 또한 신격화된 부처와 보살에게 의지하는 타력신앙이야.
성철: 원시 불교를 돌이켜 보면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진리를 깨우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자력종교였지.
재성: 그렇다면 원시 불교가 부활하여 무신론을 내세우며 맹주 노릇을 할까?
비유: 불교라면 남아시아가 맹주로 유력하겠구나.
성철: 무신론이 맹주가 된다면 신과 어떻게 접촉할까?
재성: 맹주를 선택하고 인간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신의 역할인데, 무신론자는 신을 믿지 않으니 접촉할 방법이 없잖아.
철민: 신이 무신론자에게 다가선다면 무신론자는 깜짝 놀라 유신론자로 탈바꿈하겠지.
영필: 무신론을 맹주로 선택하는 것은 신이지만,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외계인을 대리인으로 앞세우지 않을까?
비유: 무신론자도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은 긍정하지.
재성: 외계인이 인간에게 접근하여 지식과 영감을 전해줘 문명을 발전시킨다는 얘기군.
철민: 그렇게 되면 외계인을 신으로 모시는 것 아냐?
영필: 인간의 지각이 충분히 성숙했으니 외계인을 맹목적으로 신격화하진 않겠지.
성철: 맹주에게 각종 지식이 담긴 서버컴퓨터에 접속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접속용 단말기를 전해주는 것도 외계인이겠군.
비유: 아니면 신이 유신론자를 이용할 수도 있어.
성철: 아, 그렇지. 무신론이 4세대 맹주가 된다고 해도 세상이 무신론으로 획일화되는 게 아니고, 유신론 역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할테니 신이 유신론자를 이용해서 영감을 주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겠군.
재성: 유신론자는 봉사만 하고, 맹주 노릇은 무신론자가 한다는 건가?
성철: 맹주가 되면 다른 인류가 어떻게 대접할까?
비유: 3세대 유대인의 경우엔 아담이 금지를 어겨 맹주 지위를 정지당하고 에덴에서 쫓겨난 이래로 다른 인류의 업신여김을 받았고, 예수의 구원으로 맹주 지위를 회복한 뒤에도 명예 없는 맹주였지.
재성: 존경받지 못하는 맹주였군.
영필: 4세대 맹주로 말하면 무신론자로서 신의 권위를 대신 내세우지 않을테니 절대적 지위를 누리지는 않겠지.
성철: 4세대 문명은 어떤 문화일까?
재성: 1세대가 영(靈)파계로서 조상신을 섬겼고, 2세대가 광(光)파계로서 태양을 섬겼고, 3세대가 음(音)파계로서 음률을 섬기듯 계율과 법률로 장식된 규칙주의 문화를 꽃피웠는데, 4세대는 전(電)파계로서 전파 문명을 발전시키지 않을까?
비유: 정신적으로는 균형주의가 기대된다. 다양한 문화를 종합해서 균형을 추구하는 거지.
철민: 아니, 도대체 무신론이 세상을 유지시킬 수 있다고 봐?
성철: 무슨 뜻이야?
철민: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데. 신을 믿지 않으면 악한 본성이 그대로 표출되서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말걸.
영필: 일리있는 걱정이다.
비유: 무신론 세상이 평화롭게 유지되려면 텔레파시 능력이라도 필요하겠다.
성철: 텔레파시?
비유: 텔레파시나 독심술 능력이 있어야 어둠 속의 범죄자들을 색출해서 처벌할 수 있잖아.
재성: 범죄자의 두뇌를 읽어 심판한다는 거군.
철민: 그 역할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몫이야. 하나님이 있어야 인간은 자신을 자제하며 통제할 수 있다고.
재성: 사실 어둠 속의 범죄자들만 문제되는 게 아니라 노골적인 권력자들의 악행도 걱정되지.
성철: 어떤?
재성: 예컨대 2차대전 때 자행된 유대인 학살처럼 권력자들이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지른 극악무도한 폭력이 문제되잖아.
비유: 세계적인 석학들도 2차대전을 겪고 난 후 참담한 마음으로 무신론을 포기한 경우가 있지.
성철: 여어, 이야기가 어떻게 비관론으로 치우쳤네.
재성: 어제 꿈에 123,123을 무한반복하며 되뇌었거든. 이 문제와 관련돼 보인다.
비유: 123의 무한반복이라면 1세대, 2세대, 3세대를 거쳐 4세대 무신론 차례가 됐을 때 세상이 온통 악행으로 어지럽혀져, 일년 농사를 망치고 논밭을 갈아엎듯 4세대 인류를 지워버리고 다시 1세대, 2세대, 3세대로 반복된다는 얘긴가?
성철: 4세대란 게 신이 없어도 인간들끼리 잘해나갈 수 있을지 시험하는 단계잖아.
재성: 신으로선 충분히 해볼만한 도박이지. 성공하면 자립적인 고급 인력을 확보할 수 있으니.
영필: 우리가 파수꾼이 되어 건전한 자립이 될 수 있도록 홍보하고 독려하자.
성철: 오늘 토론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지.
19 어머니
영필은 다시 꿈꾸는 토론회에 참석했다.
불교 성철: 오늘은 어머니 신앙에 대해 토론해 보자.
역사학 재성: 대모신(大母神)에 대한 숭배는 세계 곳곳에서 흔적이 발견되지.
기독교 철민: 어떤 이단은 하나님 아버지의 배필로 하나님 어머니가 있다고 하는데 아주 잘못된 얘기야.
종교학 마준: 카톨릭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높이 여기고 있지.
국문학 비유: 그게 혹시 어떤 비유 아닐까?
성철: 어떤?
비유: 예수는 하느님에 비견되잖아.
성철: 그래서?
비유: 예수에게 어머니 마리아가 있듯이 하느님에게도 어머니가 있다는 거지.
재성: 하느님에게 어머니가 있다?
마준: 하느님 아버지의 어머니이니 인간에게는 할머니신이 되겠군.
철민: 틀렸어. 하나님 아버지 외에 다른 신은 없다구.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시지.
비유: 야훼는 태양계의 유일신이고, 더 크게 은하계를 보면 우리 은하계를 다스리는 더 높은 신이 있을 수 있어.
영필: 어제 꿈에 은하수 위로 무지개가 보이고 공주가 그 위에 앉아 있었는데 관련이 있을까?
성철: 무지개라면 일곱 빛깔이고 그게 공주와 연결된다면 칠공주 아니야?
마준: 칠공주라면 무속(巫俗)설화에서 전해지는 바리데기 공주지.
성철: 바리데기?
마준: 부왕(父王)인 오구대왕이 딸을 내리 6명씩이나 낳아 7째에는 꼭 아들이 태어나길 기원했는데, 일곱째도 또 딸이 태어나자 화가 나서 변방에 내다 버렸다고 하지.
비유: 장성한 바리데기 공주는 공덕을 쌓아, 죽은 아버지를 되살리는 선행을 했지.
성철: 오구대왕이 우리 은하계의 대왕이고, 칠공주는 그 딸이며, 야훼는 칠공주의 아들인가?
재성: 그런데 오구대왕은 왜 죽었던 거지?
비유: 어제 꿈에 "금욕 형제여, 떨쳐일어나라, 새 세상을 만들자."라고 되뇌었거든. 관련될 듯 하다.
마준: 오구대왕은 냉정한 정글의 왕이지. 그래서 7째 딸을 변방에 내다 버렸고. 그 칠공주를 금욕천사들이 거두어 장성하도록 키운 것 아닐까? 그런데 우리 정글은하계의 천사들 중 일부가 오구대왕에 반감을 품고 금욕천사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우리 은하계를 금욕은하계로 탈바꿈시키려 한 것 같다.
재성: 금욕 무리의 반란으로 설 땅을 잃은 오구대왕은 실의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겠군.
성철: 허나 결과적으로는 우리 은하계가 금욕 은하계로 탈바꿈되지 않았는데?
비유: 금욕 무리와 정글 무리간에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우리 은하의 미래를 놓고 의견 대립이 끊이지 않았을테지.
영필: 그 대립을 칠공주가 해소하기 위해 내놓은 해법이 바로 중용 아닐까? 욕망을 긍정하면서 한계를 짓는 중용.
성철: 중용이라면 욕망의 긍정적 기능을 일단 인정하니 정글 무리의 찬성을 얻을 수 있었을 테고, 욕망에 끝없이 빠지지 않고 절제를 가르치니 금욕 무리의 찬성도 얻을 수 있었겠군.
비유: 그리하여 욕망을 불어넣는 정글 세력이 다시 설 땅을 회복하자 정글의 우두머리인 오구대왕도 할 일을 되찾아 살아났다?
재성: 결국 오구대왕과 딸들이 창조한 지구의 자연계가 진화를 거듭하여 인간을 형성하자, 칠공주가 그 아들 야훼를 태양계에 보내 유일신으로서 인간에게 중용의 도를 가르치도록 했다는 얘기.
성철: 그렇다면 오구대왕과 칠공주는 지구에 관여하지 않을까?
비유: 본래 모습을 감춘 채 다른 존재로 변장하여 찾아올 듯한데.
재성: 나, 어제 꿈에 "소중한 천년약속이여."를 되뇌었거든.
마준: 오구대왕, 칠공주, 야훼, 예수가 천년씩 주도권을 가지고 인류를 가르친다?
성철: 유대인 맹주의 지위는 6천년간 지속되고, 다른 인류에 대한 신의 주도권은 천년씩이라 할 수 있겠네.
재성: 2천년전부터 천년간은 예수의 희생과 구원의 법칙이 세상을 지도했는데.
비유: 천년전부터 천년간은 오구대왕의 약육강식 법칙이 세상을 지도했어.
영필: 앞으로 천년간은 칠공주가 세상을 지도할까? 지도원리는 배려와 상생.
성철: 비유 말로는 칠공주가 본래 모습을 감추고 다른 존재로 변장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말하지?
비유: 다른 종교와 손을 잡고 비너스나 관세음보살, 성모 마리아로 변장하는 거지.
재성: 그 활동은 기준인의 선택에 따라 1순위, 2순위, 3순위 등으로 결정되겠군.
마준: 그럼 앞으로 6천년간은 무신론이 맹주이고, 다른 인류는 천년동안 칠공주의 지도를 받겠군.
성철: 이 모든 게 우리 무속 설화에 암시돼 있었나?
재성: 우리나라는 옛부터 뿌리깊은 영(靈)파계 1세대 문화를 유지하면서 조상신을 섬겼잖아.
비유: 조상신?
재성: 그렇지. 영적인 조상인 오구대왕과 바리데기 공주의 얘기를 우리가 보존해 온 거지.
성철: 오늘 토론도 뜻깊었던 것 같다. 이쯤에서 마무리 할까?
20 텔레파시
주말이 되었다. 모두들 외출하고 기숙사는 조용했다. 영필은 여의도에서 받은 휴대용 단말기를 책상 서랍 속에서 꺼내 주머니에 넣고 화장실로 갔다.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 단말기를 꺼내 보았다.
'비너스, 관세음보살, 성모 마리아 이들 모두 칠공주가 변장한 모습인가?'
단말기를 슬슬 문지르며 계속 생각했다.
'비너스를 1순위로 선택하면 칠공주가 마왕의 천사들과 손을 잡고 사랑과 배려를 가르치겠군.'
얘기가 복잡해지는 것 같아서 혼란스러웠다.
'어떡하지? 쾌락, 금욕, 중용 어디에 우선권을 줄까?'
영필은 일단 버튼을 눌러 단말기를 켰다. 뇌파 확인 후 전처럼 비키니를 입은 낙원회 여선배들이 손짓을 하고, 다음은 고요히 자리잡은 남자가 앉아서 명상을 하고, 이어서 법대 동기인 혜선의 청초한 모습이 나왔다. 낙원회의 비키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러다 혜선의 순수한 모습이 생각나 머리를 가로저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까 "1순위를 고르시오."라는 소리가 들린 뒤 떠 있는 세 조각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래, 20년 금욕 생활이 내 인생의 인연이니 관세음보살을 1순위로 하자.'
영필이 관세음보살 그림을 누르자 "1순위가 선택되었습니다. 2순위를 고르시오."라는 소리가 들리며 나머지 두 조각그림이 떴다.
'낙원회도 매력적이지만 난 왠지 순수한 사랑에 마음이 끌린다.'
영필은 성모 마리아 그림을 눌렀다. "2순위와 3순위가 선택되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리고, 순위가 표시된 세 조각그림이 밝게 빛났다.
'아, 이걸로 끝인가. 홀가분하다.'
영필은 단말기를 끄고 주머니에 넣은 뒤 화장실을 나와 방으로 돌아왔다.
영필이 방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영필아! 영필아!"
"누구야?"하고 물으며 방문을 열어주자 마준이 서 있었다.
영필: 어쩐 일이야?
마준: 할 얘기가 있어.
영필: 무슨?
마준: 긴 말 안할게. 넌 마왕을 선택해야 해.
영필은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내가 기준인인 걸 역시 알고 있었구나. 이제 까놓고 얘기하자는 건가?'
영필: 아니, 그게.
마준: 쾌락 은하계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아니? 수명이 900살이고 800년동안 젊음의 쾌락을 누릴 수 있어. 아무리 즐겨도 늙지 않는 젊음으로 다양한 짝들과 관계를 맺는다고.
영필: 무슨 말인지, 혼란스럽다만, 난 순수한 사랑을 택하겠어.
마준: 순수? 흥! 그까짓 건 환상에 불과해. 한사람과 순수한 사랑을 한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줄 아니? 3년도 못 넘기고 모든 환상이 깨진다고. 그 다음은 지옥이야. 지옥!
영필: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난 이미 선택을 끝내 버렸어. 이미 결정됐다구.
마준: 아니, 그건 임시야. 확정되려면 아직 시간이 있어. 선택을 바꿀 수 있단 말이야.
영필: 임시?
마준: 그래, 영필아 잘 생각해봐. 진정한 즐거움은 쾌락은하계에밖에 없어. 부탁한다. 마왕을 1순위로 고쳐줘.
영필은 앞으로도 여럿이서 자신을 압박할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에잇, 여기서 도망쳐 버릴까?'
마준: 도망? 훗. 어림없어.
영필은 깜짝 놀랐다. '마준이 내 생각을 어떻게 알지?'
마준: 후후, 몰랐지? 우린 텔레파시 능력이 있어. 내 생각을 보낼 수도 있고, 남의 생각을 읽을 수도 있지.
영필: 독심술?
마준: 넌 이미 마왕에게 속한 사람이야. 한번 잡은 고기는 절대 안놔줘.
영필은 당황했다. '어쩌지? 제대로 낚였구나.'
마준: 아무리 뿌리쳐도 넌 마왕의 품안이야.
영필은 어지러워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고 뒷목이 뻣뻣해지던 영필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