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키다모스 전쟁  기원전 431년 3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테베가 델로스 동맹의 플라타이아이를 공격하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첫 국면은 기원전 421년까지 이어졌으며, 스파르타 왕의 이름을 따서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 부른다. 이 때에 스파르타는 계속해서 아티카를 침입했고,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직접 공격을 가하기보다 스파르타 편을 드는 도시들, 가령 메가라, 포티다이아, 미틸레네 등을 해군력을 앞세워 공략해 나갔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영토인 아티카를 손쉽게 점령했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고, 아테네인들의 과수원과 농장을 망친 다음 3주 정도만에 철수하고는 했다. 본국의 농경지를 버려둘 수 없는 데다, 군대가 오래 외지에 머물러 있으면 본국에서 헤일로타이의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병이 아니었다면 아테네인들은 성벽 안에서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전통 군대가 공성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점도 스파르타가 성벽 안의 아테네인을 건드리지 못했던 까닭 중의 하나인데, 기원전 429년에는 아테네 아닌 플라타이아이를 상대로 처절한 공성전을 펼치게 된다. 아르키다모스는 성 주위를 봉쇄해 농성군을 굶주리게 하고, 흙으로 망루를 쌓아올려 성벽 안으로 불화살을 쏘고, 땅굴을 뚫고, 플라타이아이의 내분을 획책하는 등 별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플라타이아이는 아테네의 원군 없이 자력으로 2년을 견뎌냈다. 비슷한 시기에 아테네는 에게 해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에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미틸레네는 본래 델로스 동맹 소속이었으나 반기를 들었으며, 충격을 받은 아테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미틸레네를 꺾어 버리려 했던 것이다. 기원전 427년, 미틸레네와 플라타이아이는 한 달을 사이에 두고 각각 아테네와 스파르타에게 항복했다. 그 처리를 두고 아테네는 “미틸레네의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렸다가 하루 만에 너무 가혹하다며 취소하였으며(취소 결정은 간발의 차이로 미틸레네에 도착했다. 살육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주도자만을 심판하겠다는 약속을 깨고는 플라타이아이의 성인 남성들을 도륙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런 차이는 민주국가와 군사국가의 성격 차이에서 나온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잔인한 보복과 포로 학살은 점점 더 일반적이 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가리지 않게 되어갔다. 미틸레네에 잔인한 보복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사람 중에는 “선동정치가”의 대명사처럼 알려지게 될 클레온(Kleon)도 있었다. 그는 늘 호전적인 주장으로 아테네인들의 주의를 환기했는데, 페리클레스 집권기에도 “겁쟁이처럼 성벽 안에 틀어박힌 채 적들이 우리 땅을 멋대로 유린하는 꼴을 지켜보게만 만드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에 반기를 들어 한때 탄핵에 이르게도 했다. 그런 그가 페리클레스 사후에 아테네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마침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육상에서도 격돌하게 되었다. 역병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테네의 인구는 스파르타를 훨씬 웃돌았으나, 스파르타는 자타가 공인하는 정예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원전 425년에는 스파르타 지휘관 브라시다스(Brasidas)의 부상과 헤일로타이의 반란 조짐을 잘 이용하여 스파크테리아에서 스파르타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클레온이었으나, 펠로폰네소스는 424년에 아티카 북부의 델리움에서 아테네군에게 앙갚음했다. 과두파가 집권하던 보이오티아를 민주화하고, 아티카를 적의 손에서 빼앗으려던 아테네는 수만의 병력을 동원해 델리움으로 진군했다. 이 때 비로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중장보병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밀집대형을 이룬 중장보병대끼리의 대결은 비교적 약한 전력을 진형의 좌측에, 강한 전력을 우측에 배치하고는 서로 상대의 좌군을 먼저 깨트리고 중군, 우군을 격파하려 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두 마리의 뱀이 서로를 휘감으며 머리를 물려고 하는 식으로 벌어졌다. 아테네의 우군은 먼저 펠로폰네소스의 좌군을 깨트렸으나, 병력 운용을 잘 못한 탓에 엉뚱하게 자신들의 중군을 공격해 버렸다. 사태가 수습된 다음에는 별안간 나타난 소수의 보이오티아 기병대를 대규모 원군으로 착각하고는 도주했다(소크라테스도 그 속에 있었다는 말이 있다). 그 사이에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아테네의 남은 군대를 여유 있게 쓸어버렸다. 육지에서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증명한 전투였다. 이어서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는 아테네의 주요 자금원인 은광으로 접어드는 요충지, 암피폴리스를 공략했다. 암피폴리스는 스파르타의 손에 들어갔고(이 때 구원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투키디데스가 추방된다), 클레온은 전력을 기울여 기원전 422년에 암피폴리스 탈환전을 펼쳤으나, 적진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후퇴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브라시다스도 전사함으로써, 양 측은 휴전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하여 422년 겨울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졌고, 아테네 측 대표의 이름을 딴 “니키아스의 평화”가 약 7년 동안 이어진다.
니키아스의 “평화”, 그리고 멜로스의 비극  니키아스의 평화는 전투가 전혀 없는 평화는 아니었으며, 단지 서로가 확전을 자제했을 뿐이었다. 아테네 쪽에서 전쟁의 향방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었을 모험을 시도한 때는 기원전 420년이었는데, 주인공은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이며 미남이자 재주꾼으로 유명했던알키비아데스(Alkibiades)였다. 그는 먼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이간질하려 했다. 니키아스 평화협정에는 스파르타만 서명했으며, 테베와코린토스는 서명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들과 스파르타 사이에 생긴 틈을 최대한 벌어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펠로폰네소스에서 민주국가로 돌아선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아와 손을 잡고 스파르타를 포위해 들어간다! 알키비아데스는 이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직접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북부에서 암약하는 등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418년의 장군 선거에서 아테네인들은 알키비아데스 대신니키아스(Nikias)를 선출하여, 온건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니키아스는 아르고스 등이 스파르타와 싸우면 경우에 따라 힘을 보탤 수도 있으나, 아테네가 먼저 평화협정을 정면으로 깨트릴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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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스파르타가 먼저 움직였다. 아기스 왕(Agis II)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패권을 잃으면 끝장이라는 생각에서, 1만 2천의 중장보병을 동원해 적대세력들을 분쇄하기 위해 만티네아로 진군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서 아르고스와 만티네아도 전력으로 맞섰다. 그러나 아테네는 고작 1천여 명의 병력을 보냄으로써 “힘을 보탠다”는 말도 꺼내기 부끄러울 정도에 그치고 만다. 전투는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으나 아르고스 등도 분전했으므로, 아테네가 델리움에서처럼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면 결과는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스파르타는 만티네아인들은 잔인하게 살육하면서도 아테네의 패잔병은 달아나게 둠으로써, 니키아스에게 “보답”했다. 평화는 공식적으로 깨지지 않았다. 평화는 온건론자들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망쳤다며 목소리를 높인 알키비아데스가 새로운 모험, 즉 시칠리아 원정을 밀어붙임으로써 깨지게 되는데, 그에 앞서 작지만 의미심장한 비극이 아테네의 손에 의해 벌어졌다. 기원전 416년, 그리스 남동부의 작은 섬인 멜로스가 느닷없이 아테네의 침공을 받았다. 멜로스는 줄곧 중립을 지켜왔기에 뜻밖일 수밖에 없었는데, 아테네는 멜로스인들이 스파르타와 같은 종족임을 들어 그 중립을 믿을 수 없다, 항복하고 아테네에 예속되든지 멸망하든지 선택하라는 요구를 들이밀었다. 멜로스인들은 중립을 깰 의사가 없음을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정의가 우리 편에 있다. 강자라고 해서 이렇게 무도한 일을 저질러도 되는가”는 멜로스인의 항변에 아테네인들은 “우리야말로 정의이다. 정의란 곧 약자는 강자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대꾸했다. 결국 멜로스는 결사 항전을 벌였고, 아테네는 이 섬을 점령한 다음 성인 남성은 전원 학살, 부녀자는 노예로 만드는 ‘멸국’을 실행했다. 뒤통수를 친 미틸레네에 대한 분노를 인간적인 동정심으로 억눌렀던 아테네인들. 전쟁은 약 10년 만에 그들의 인간성을 말려죽였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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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로스 섬 해안에 솟은 바위. 2400여년 전의 비극을 묵묵히 바라보았을 것이다. <출처: (CC) Arkoudes at Wikipedia.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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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과 파국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이제는 거의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는 도시국가들이 모여 있었다. 시칠리아 최대의 도시 시라쿠사는 스파르타를 원조하고 있었다. 반면 세게스타는 아테네의 동맹국이었는데, 역시 친 스파르타인 세리누스와 분쟁에 들어가면서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했다. 아테네에서는 알키비아데스를 중심으로 이번 기회에 시칠리아를 손에 넣어 스파르타의 돈줄을 끊고 전쟁 수행의 기반을 마련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기원전 415년, 134척의 삼단노선에 5천여 명의 중장보병, 총인원 2만 5천의 대규모 원정군이 시칠리아로 출발했다.
사령관은 알키비아데스였으나, 조국 아테네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실망을 주었다. 헤르메스 석상이 누군가에게 파괴되었는데 그 범인으로 알키비아데스가 지목되면서, 원정을 중지하고 돌아오라는 소환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불복했을 뿐 아니라 스파르타에 망명해 버렸다.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가 결국 아테네에서 숙청되고는 페르시아에 망명했던 전철을 밟았다고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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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키비아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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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원정은 좀처럼 잘 풀리지 않았으며, 이듬해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가 2차 원정대를 이끌고 합류했으나 같은 해에 스파르타도 구원병을 보내자 전세는 완전히 아테네에게 불리해졌다. 기원전 413년, 아테네군은 에피폴라이 등에서 대패하고 퇴각을 시도했으나 그나마 실패하고는 처참하게 전멸하고 말았다. 7천에 달하는 포로는 채석장 노예로 팔려갔다.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의 앞길에 암운을 드리웠다. 인적, 물적, 심리적 피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아테네에게 계속 충격이 닥쳤다. 기원전 412년에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었으며, 에게해의 델로스 동맹국들이 대거 반 아테네로 돌아섰다. 이 모두가 알키비아데스가 꾀를 써서 조국을 팔아먹은 결과라고들 했다. 델로스 동맹 기금이 끊기고 은광까지 적에게 빼앗긴 아테네에 비해, 본래 자금력이 아테네만 못했던 스파르타는 새로 페르시아의 원조를 받게 되어 훨씬 여유가 생겼다. 더 나아가 스파르타는 그 자금력을 바탕으로 ‘모험’을 시도했는데, 바로 해군 건설이었다. 아테네는 신생 스파르타 해군과 맞서 키노세마(BC 411), 키지쿠스(BC 410)에서 잇달아 승리하여 “해군은 아무나 하나”는 교훈을 주는 듯 보였다. 그러나 명장 리산드로스(Lysandros)가 해군을 이끌며 스파르타 해군이 아테네를 물리치기 시작했고, 당황한 아테네는 한때 알키비아데스를 복귀시키면서까지 대응했으나 대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기원전 406년, 소아시아 연안의 아르기누사이에서 아테네 해군은 스파르타 해군을 크게 격파하여 오랜만에 국위를 떨쳤다. 그러나 아테네 민회는 승리한 장군들을 처형했는데, 바다에 떨어진 아군 생존자들의 구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듬해,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은 아테네의 참패로 끝났다. 아테네의 삼단노선 180척 중 170척이 격침 또는 나포되었고, 수천의 포로들은 전원 학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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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아테네는 사실상 전쟁을 계속할 능력을 잃었다. 아이고스포타미의 소식을 들은 아테네인들은 밤새 울고 소리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투키디데스의 뒤를 이어 전쟁사를 기술한 크세노폰(Xenophon)은 적고 있다. “모두들 스스로가 멜로스인들에게 가했던 행위를 당하게 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몇 달 뒤 무방비 상태의 피레우스 항에 리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함대가 당당히 진입했으며, 아테네는 항복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중에서 테베는 “아테네인 모두를 노예로 만들고, 아테네의 건물을 모두 부수고 땅을 갈아엎어 목초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아테네와 피레우스 항을 보호하던 성곽을 헐고, 델로스 동맹을 해체하며, 12척의 함선만을 유지한다. 그리고 민주정부를 없애고 과두정체를 수립한다는 조건으로 아테네의 항복이 수용되었다. 기원전 404년 4월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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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승자인가 
아테네의 “30인 참주”체제는 오래 가지 못했다. 몇 개월 만에 정변이 일어나 민주정이 복원되었으며,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아테네와 코린토스가 합세한 스파르타-코린토스 전쟁, 그리고 스파르타-테베 전쟁에서 모두 스파르타가 패배함으로써 스파르타도 승자의 영광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끝을 이 때로 잡고, 결국 아테네가 승리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테네고 스파르타고 할 것 없이 쇠퇴와 몰락의 그림자는 지울 수 없었다. 전쟁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더 이상 밀집대형을 이룬 중장보병은 전쟁의 핵심이 되지 못했으며, 다양한 무기와 병과를 동원하는 공성전, 참호전, 상륙전 등의 전법이 전장의 모습을 변화시켜 갔다. 그런 변화에 가장 잘 적응했던 세력은 아마도 북쪽의 마케도니아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빅터 핸슨의 말처럼 “25만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침략했던 페르시아도 물리친 아테네가, 왜 단지 4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온 마케도니아에게는 패배했는가”하는 사실을 보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치명적인 피해”를 그리스 세계에 입혔음은 분명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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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르타의 폐허. <출처: (CC) Thomas Ihle at wikipedia.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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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는 왜 패배했을까? 버나드 몽고메리는 지나치게 해군력에만 의존했던 페리클레스의 전략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는 대전 중반기부터 육상전도 시도했으며, 그 결과는 페리클레스의 전략을 고수하던 것에 비해 썩 좋지도 않았다. 투키디데스가 자신의 책에서 은근히 암시한 것처럼,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제가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방해한 점도 있다. 알키비아데스나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승자들을 ‘도덕적 문제’를 들어 숙청했던 식으로. 그러나 한편으로 브라시다스나 리산드로스 등 총지휘관의 역량에 너무 의존했던 스파르타의 방식이 진정 효율적이었을까? 민주주의 체제는 분명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를 때도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독재 이상의 효율성을 가져온다. 아테네가 비록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지만, 제국을 잃었을 뿐이며 국가도 국체도 지켜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거의 파산 상태에 빠져버렸다. 더 이상 노예들을 착취하는 군국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전쟁을 치르는 도중보다는 시작할 때, 과연 민주국가의 지도자들이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는 결정을 더 잘 내릴 수 있느냐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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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갑니다
승자없는 전쟁이란 이런 것일 듯...
우리가 페르시아도 이겼는데!!
라는 자만심이 너무 컷던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