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에게
김채운
제 살갗의 허물과 제 품 안의 모든 그늘을
고스란히 걷어낸 연후에야
늙은 배롱나무의 위엄이 드러난다.
비틀리고 꺾이면서도 세찬 풍파를 견뎌온
묵묵한 나무여, 고요한 카리스마를 지녔구나!
어느 한 시절 허투루 살아왔을까마는,
어느 한 시대 헛되이 지나쳤을까마나는,
멥찬 하늘을 찌르는 당당한 호기를 닮고 싶다.
거친 대지를 닫고선 의연한 기상을 닮고 싶다
백일여 한 세상 물들이던 붉은 꽃빛의 기억은 접어두고
한 세월 아우르던 단단한 초록 잎사귀 기세도 내려놓고
거친 바람의 숨결 그러모아 우듬지의 촉을 버리고 있다
허공을 추앙하는 빈 가지들 그 무일푼의 충만을 위해
이 계절에도 뿌리는 짱짱 깊어질 테다.
― 김채운, 『한국작가회의』 (2023 / 겨울호)
김채운
충북 보은 출생. 한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전공. 2010년 계간 《시에》 봄호로 등단. 시집 『활어』(2011, 시와에세이), 『너머』(2019, 애지), 『채운』(2021, 시시울) 등. 공저 『시창작과 문화 콘텐츠』(2021, 글누리). <한국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회> 회원 및 <큰시> 동인. 한남대학교 탈메이지교양대학 강사.
첫댓글 정말 멋진 나무입니다. 오래도록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신품종 다이너마이트 붉음, 분홍, 보라, 흰색 등 이제는 색이 다양해져서
보는 눈길이 호사롭습니다.
그러나 모든 색의 배롱나무도
나무 기둥과 가지 만큼의
전통을 잊지 않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참 여운이 남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