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후인의 인력거 / 유혜자
유후인(由布院) 거리를 걷노라니 얕은 건물들 너머 저만큼 뒤로 영산靈山유후다케(由布岳)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활화산이어서 시커먼 바위로 되었다는 산,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삼각의 봉우리 아래로는 산등성이가 풍만해서 편안하게 보이는데 무엇을 머금고 있기에 영산이라고 할까.
오랜 직장생활에서 물러나 무엇을 빼앗긴 듯 허전하던 차, 일본 규슈 여행팀에 합류하니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파란 바닷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목마름이 가시는 듯했다. 유후인은 1950년대까지 인구 1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농촌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온천자원을 개발하고 마을을 아름답게 꾸며서 많은 예술가들도 들어왔다. 일본에서 세 번째로 온천수가 많고, 그보다도 자연과 전통을 지켜 관광지 개발보다 삶의 질을 높이려는 터전으로 가꿨기에 그린투어에 맞는 마을이다. 우리나라에선 대규모의 현대화로 자연 파괴의 난개발이 한창이었을 때 자연과 전통을 살려 아늑한 고향 같은 마을을 가꾼 앞선 안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관광지라면 대개 유흥과 문명의 찌꺼기가 혼합되어 있을 텐데 맑고 깨끗한 느낌이다. 역 앞에서 시작되어 긴린코(金鱗湖)호수로 이어지는 유노쯔보 가도街道는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나오는 카페, 예쁜 선물 가게와 특색 있는 상점들이 많다. 만화가이며 애니메이션「미래소년 코난도일」,「빨간머리 앤」,「이웃집 토로로」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상품인 토로로, 포뇨 등을 팔고 있는 가게에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간다. 크리스털 액세서리와 오르골의 가게 ‘가라스노 모리’에는 40대로 보이는 일본 여성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일본 여성들이 낭만적인 산골 유후인을 가장 방문하고 싶은 곳으로 꼽는다고 한다. 가게에는 예쁜 액세서리들이 많은데 점원이나 손님들이 떠들지 않고 꼼꼼하게 들여다보다가 조용하게 묻고 싹싹하게 대답하는 분위기가 보는 이의 기분도 좋게 한다. 길가에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다니는 행인들, 공중도덕을 지키고 예의 바른 모습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유후인은 키 작은 일본인들에게 꼭 알맞은 곳이라는 심술궂은 마음도 생긴다. 우리는 여행길에서는 해방감을 느껴 풀어지기 쉬운데 일탈이 없는 듯한 모습들을 보니 조금은 숨이 답답하다. 시대에 따라 바뀌는 사물과 환경, 그리고 우리의 사고는 얼마나 바뀌는데 소인국에 간 걸리버처럼 작은 규모에 호기심과 흥미를 갖는가 하는 의아심도 든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과 또 변해버리는 것, 그 차이점을 느끼게 한다.
유후인은 높은 분지이지만 마을 뒤편으로 꽤 넓은 논이 펼쳐져 있다고 한다. 시골 마을의 소박한 풍경과 목가적인 분위기까지 풍겨서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화 속의 마을이 되었다는 말이 실감난다. 미술관, 민예품, 식품 가게들도 모두 소규모이면서 예쁘다. 역을 기점으로 30분 안에 걸어서 웬만한 것은 관광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작다는데 거리 한쪽에 인력거가 서 있다.
내가 어렸을 때 타본 인력거처럼 전체적으로 포장을 두른 것이 아니라 지붕만 덮고 사방으로 터진 것이다. 유럽의 고풍스러운 거리에 있는 잘 생긴 말이 끄는 마차라면 중세 귀족처럼 멋스럽게 타볼만 하겠다. 그런데 조그만 체구의 인력거꾼이 땀 흘리며 끄는 인력거에 앉아서 어떻게 맘 편안히 관광을 할 수가 있겠나 싶다.
‘사물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사람이 변하는 것’이라 헨리 소로우가『월든』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쇼핑거리를 지나 동쪽으로 20분쯤 걸으면 나온다는 호수 긴린코를 향하면서, 사람들이 곁을 지날 때마다 혹시나 이용하지 않을까 기다리던 인력거꾼의 안쓰러운 모습이 생각난다. 현진건의 단편「운수 좋은 날」에서 근 열흘 동안 돈을 못 벌었던 김첨지가 어느 날 80전이라는 큰돈을 벌어 아내에게 설렁탕을 사다 줄 수 있어 기뻐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긴린코(金鱗湖)는 석양에 호수의 잉어가 뛰어오를 때 햇빛에 비늘이 반사되어 금빛으로 보여 붙여진 이름으로, 둘레가 4백m정도로 아늑한 호수이다. 호수 서쪽 밑바닥에서 온천수, 동쪽 밑바닥에서 차가운 물이 솟아나와 새벽에는 언제나 하얀 수증기가 피어올라 신비한 분위기라고 한다. 한낮인 지금은 은은한 연둣빛을 머금고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 오리들이 헤엄 치고 물속에서는 잉어들의 입놀림이 바쁘다. 나뭇가지의 반이 물에 잠긴 나무도 독특한 운치가 있고, 주변의 집들이 호수의 풍경을 해치지 않게 별스럽게 꾸미지 않아서 보기에 좋다. 새소리도 청량한데 저만치 SHAGALL이라고 쓰여 있는 집이 보이는데, 샤갈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긴린코 호수가 온천수와 차가운 물이 적당히 섞여서 맑은 물을 유지하듯이 유후인도 자연과 전통, 외래 예술품이 균형을 맞춰 이뤄졌음을 생각하게 한다.
관광지의 인력거처럼 소중한 시절이 지나간 나는, 긴린코에서 석양에 뛰어오르는 잉어처럼 언제나 한 번 금빛으로 반짝여볼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