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 전 그 날
지금으로부터 51년 전의 그 날이 생각난다
1974년 2월20일! 내가 입대했던 날이다
대학 3년의 과정을 마치고 입대했다
1973년 그 해에도 무척 시끄러웠다
1972년의 10월유신의 여파가 가시질 않았다
곳곳에서 항의 데모가 벌어지고 그랬다
2학기 들어 장기간 휴강사태에 들어갔다
수업일수를 채우지 못해 보충수업이 있었다
그 보충수업이 1974년 2월23일부터 였는데
내게는 그보다 3일 앞선 2월20일 입영통지서가 왔다
1973년 2학기에 내가 묵고 있었던 기숙사에서
반정부 비라가 살포됐다. 본의 아니게 내가 연루됐다
어느날 서울집에 다녀오니 일요일인데도
당시 수의학과 교수였던 학생과장께서 날 찾으셨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그럼 가서 있었던대로만 잘 진술하고 오게"
그렇게 학교앞 느티나무 앞으로 가 보라고 하셨다
나가보니 검은색 가죽잠바를 입고
검은색 도꾸리 쉐타를 입은 사내들이
검정색 선그라스를 끼고 서 있었다
내 이름을 묻고 확인하더니 차에 타라고 했다
검은색 지프차였는데, 타자마자 내 뒷목을 눌렀다
바깥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갔다
어딘지도 모르는데 뒷골목의 어느 여관이었다
세 명이었던가? 망을 보고 나를 취조하고 그랬다
물었던 걸 계속 되묻고 또 묻고 하였다
주말에 서울집으로 출발해서 돌아올 때까지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묻고 또 물었다
나중에 들으니 여친 집으로도 전화확인을 했다고 한다
희한하게 지나간 일인데도 분 단위로 생각이 났다
한 마디라도 말이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물었다
갱지에 모나미 볼펜으로 문, 답, 문, 답, 그런식으로
조서를 써 나갔다
그렇게 밤을 새워가며 조서를 작성하고
아침에 해당 시 경찰서로 끌려갔다
지하의 음침한 취조실에 갇혔다
철문 여닫히는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작은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희미한 전구가 하나 달려 있었다
바닥은 습하고 더러웠다
조금 있다가 풍채가 좋은 사람이 들어왔다
공안과장이라고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면서 말은 부드럽게 내용은 살벌하게
내게 겁을 줬다
일반 사범이 아니고 공안사범이라는 거였다
사안이 아주 중대하다고 하였다
반국가내란음모죄를 범했다며 겁을 줬다
그러면서 사실대로 모두 자백하면 풀어주겠다고 했다
일단 옥상으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다
내 이름과 번호가 씌어진 패를 들고
정면과 양 측면 사진을 찍었다
양 손 열 손가락의 지문도 모두 찍어야 했다
그렇게 경찰서에서 이틀정도 있었나?
시켜다 주는 밥을 먹었고 화장실도 갔다
형사 한 명이 늘 내 옆에 따라 붙었다
아무 일도 없이 풀려났지만 마음이 많이 불안했었다
누구에게도 이번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하였다
식구들에게도 상세한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다
주위에서는 내가 왜 갑자기 입대를 하게 됐는지
영문도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보충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거지로 학점을 대충 따고 입대를 하였다
내 입대사유때문에 병역기록부에 스탬프가 찍혀서
3년 내내 여러가지로 불이익을 받았다
그 때문에 교련혜택도 3개월이 아닌 2개월을 받았다
배치된 부대도 빡세기로 소문났던 수기사였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였다
논산훈련소에서는 26연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논산에서 6주, 현리의 사단교육대에서 8주
포천 이동의 기갑여단으로 가보니 여름이었다
곧바로 코스모스가 피었다
그렇게 빡센 군대생활을 마치고 1976년 10월말
부대를 출발해 집에 온 것이 11월3일이었다
군대생활 얘기와 제대 후의 얘기는
전에 올린 적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나중에 제대 후에 알고보니
내가 연루되었던 사건이 바로 민청학련사건이었다
이해찬을 비롯한 소위 운동권이 일으킨 일이었다
그 때 앞장서서 운동을 했던 친구들은
이후의 진보정권에서 모두 한 자리씩 해 먹었다
나는 그러지도 못하고 그냥 시늉만 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하고 빡센 군대생활을 해야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박정희가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을 떡주무르듯 했고
일반 백성들의 목숨은 파리목숨이었다
결국 본인도 부하의 총탄에 불귀의 객이 됐다
지금은 거대한 현충원 묘소에 안치되어 있다
부인 육영수여사도 총탄을 맞고 죽었다
총으로 일어난 자는 총으로 망한다고 했던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나도 지금은 과거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51년 전인 1974년 2월20일!
언뜻 날짜를 알고보니 그 때의 일이 생각났다
한양대학교 교정에 모여 왕십리역으로 가서
논산으로 향했던 입영열차를 탔던 생각이 난다
내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됐던 그 때 그 사건
그나마 이렇게 살아남아서 건강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첫댓글 그런일을 당하셨군요.
염리동 21번지 말집촌에 살때 동네에
유일하게 고려대학생이 우리 앞집에 살았어요.
온 동네 관심이 그 오빠에게 집중되었는데요.
데모 딱 한번 나간 경력으로 군대 끌려가고
취업도 못하고 결혼까지 못했어요.
부모님께서 아들의 성공을 기대하며 고생 하셨는데
백수 아들때문에 눈물만 흘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청솔님은 다행히 운좋게 빠져나가셨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별 큰 일도 아니었는데 군대를 가야 했지요
1년 늦게 간 탓으로
동갑쟁이들이 고참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 시절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남산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은 한 친구는
거의 폐인이 돼서 나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고대생이었다는 그 분 일이
남의 일같지가 않습니다
네 저는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한참 직장생활 하던 때인 것 같은데
운명의 갈림길이었네요..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아마도 그 비주얼, 그 지혜, 그 언변으로 봐서
어느 정당 당수 정도는 되어있을 것 같습니다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본의아니게 그리 되었습니다
실수라고나 할까요
과분한 말씀 황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그때쯤에 학교에 다녔어요
비싼 등록금내고 학교 강의도 못받고 학점을 report로 제출하도록해서 학점을 줬어요 저는 지금도 휴교령 계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찻집에서 친구와 대화하다가 끌려간 친구등등 말도 조심 사람도 조심해야했던 암울한 시절이 저의 청춘시절이었어요
그러셨군요
맞습니다. 허구헌날 데모를 했지요
1학년때부터 졸업때까지
매년 이슈꺼리가 생겼지요
72년도에는 10월유신 한다고
학교내로 군바리들이 밀고 들어 왔지요
탱크와 장갑차들이 주둔했습니다
긴급조치 9호가 생각납니다
서로 말도 못하도록 억압했지요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군사개발 독재시대였지요
박정희가 그렇게 18년을 해먹다가
결국 김재규의 총탄에 죽었습니다
육영수도 나 입대 후 1975년 8.15때
문세광 총을 맞고 죽었지요
질곡의 시대였습니다
마구잡이로 끌려간 학생들 많았지요 옳고 그르고 따지기 이전 몇명을 잡았나 하는 성과도..
허나 누가 뭐래도 빅정희대통령은 과보다
공이 더 크신 분이지요
욕심도 없고 오직 나라 걱정만
공이 크다고는 하지만
과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도 많구요
희생당한 학생들이 아주 많습니다
조작된 범죄로 사형당한 사람들도 많구요
저의 대학 같은 과 3년 선배님은
1975년 4월11일 이에 항의하며
할복자살하셨습니다
제가 군대에 끌려가 있을 때였지요
지금은 김상진열사로 불립니다
군사독재로 경제개발을 한 건 맞지만
공에 못지않게 과도 많은 양반입니다
요즘은 공만 너무 부각되고
과가 묻혀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박정희에게 당하고 희생당하신 분들
5.18처럼 국가유공자 반열엔 못 올리더라도
국가가 나서서 마땅히 보상해야 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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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없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박정희, 육영수 이름을 따서
정수장학회를 만들었구요
그에 대한 뒷얘기도 많습니다
MBC도 사유화했으며
영남대학교를 세웠지요
한때 영남대 출신들이 잘 나갔습니다
박정희의 특혜덕분이었지요
제 손윗동서가 영남대 출신입니다
효성에서 대표이사까지 했지요
박정희가 건드린 연예인만 200명이 넘는다는
그런 기사들이 인터넷에 돌아 다닙니다
심지어 이혼한 사람들도 있구요
박정희대통령하면 공보다는 겁부터납니다 아주 무서웠어요
@우담 동감입니다
가히 공포정치시대였지요
전두환은 한 술 더 떴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