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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상하도와 서역에서 들어온 깨와 콩 등 외래종 채소와 포도에 고구마와 감자!
중국 장시성 (강서성) 우위안 (婺源 무원) 의 샤오치 (晓起 효기) 마을에 장랑(長廊) 이 있으니
그 안의 가게에서 파는 오래된 물건 중에 "청명상하도 (淸明上河圖)" 책을 보았는데.....
북송 시대에 한림학사 (翰林學士) 장택단 (張擇端) 이 수도 "카이펑 (開封 개봉, 汴京 ) 의
청명절 (清明节)" 에 도성 내외의 번화한 정경을 묘사한 그림으로.... 중국 국보 제1호 라고 합니다!
청명절은 성묘나 벌초를 하는 등 조상의 넋을 기리는 중국의 대표 명절로.... 주(周) 나라때
생겼으니 2,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매년 양력 4월 4, 5, 6일 중 하루를 청명절
로 지정하니 우리나라에서는 '삼짇날' 이라고도 하는데..... 청명은 24절기 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한식절 (寒食节) 풍습이 녹아 들면서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한식절 (寒食节) 은 중국 춘추시대 진 (晋) 문공 (文公) 이 어려웠던 시절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문공의 허기를 채워주었던 충직한 "개자추(介子推)" 를 그만 잊어버렸다가.... 뒤늦게
등용하려고 하자 자존심이 상한건지 개자추가 산에 숨으니 불러내기 위해 불을 질렀는데,
저 고지식한 개자추가 타죽으니 혼을 달래기 위해 "찬밥' 을 먹은 것으로 부터 유래 되었습니다.
그후 문공은 한식절 다음날을 청명절 (清明节) 이라고 정한후 현대에 이르러 한식절의
풍습이 청명절에 스며들었으니.... 찬밥을 먹는 풍습은 현재도 이어오고 있으며
조상에게 성묘하고 봄나들이 (春游 춘유) 를 가기도 하며 이무렵 식목일 행사와
연날리기를 한다는데.... 우리 속담에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라는게 있습니다.
"청명상하도 (淸明上河圖)" 는 북송 시대 1120년 춘분을 지나 15일 후인
4월 5일 청명 절(淸明節) 날 교외에서 노닐고 성묘를 하는 명절에
흥청거리는 도성의 인파를 화권형식 (畵卷形式) 으로 그린 그림 입니다.
북송의 수도 변경 (汴京 개봉) 을 흐르는 변하 (汴河) 를 사이에 두고 교외,
시내 (川) 와 배, 다리 및 성문 시가 등이 순서대로 보이니.... 술집, 상점,
노점 상인에 우마차 및 군중 등이 배치되는 형식으로 원근법 을 사용했습니다.
청명상하도 (淸明上河圖) 는 중국 풍속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이 그림은
송대 (宋代) 의 인물 풍정과 사회적 번영을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그려내고 있으니....
후세에도 영향을 미쳐 원 (元) 명 (明) 청 (淸) 을 거쳐 수많은 모본 (摹本) 이 성행 했습니다.
해서 강남의 소주 (蘇州) 부근의 풍경으로 변화되어 점포를 늘어놓는 방식에 잡기 (雜伎),
그리고 황성 내의 용주탈표 (龍舟奪標) 등 세부적인 도안이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청명절 과 한식 외에도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명절들은 설날 과 대보름에
단오, 칠월칠석, 중추절(추석) 과 동지 가 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고유 명절인 5월 삼한의 수릿날, 10월에 고구려의 동맹, 동예에 무천,
삼한에 상달제 그리고 12월 부여에 영고 는 저 중국 명절에 밀려 사라졌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옛 명절은 모두 잃어버리고 "설날이며 단오와 추석등 남의나라 명절"
을 쇠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를 "소중화" 로 자처했기 때문이니.....
문왕과 주공 단이며 공자와 맹자, 주자등 성현의 나라 중국을 흠모한지라, 중국의
성인인 기자가 와서 조선을 세우니 백성들이 예를 알게되었음을 기뻐했기 때문 입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평양에 기자묘가 있어 제사 를 지냈다는데..... 중국 문화가 선진문화인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조상님들은 우리 문자를 발명하지 못한 때문으로
봅니다. 고조선은 문자(글자) 가 없으니 기록과 문서가 없는 나라 였는데, 훗날
중국에서 한자 (漢字) 가 책의 형태로 들어오면서 중국 문화가 퍼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중국에서 조선에 전해진 청명과 한식의 유래를 생각하다 보니 한국인의 음식인 된장과
간장이며 김치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 재료인 콩 과 마늘에 고추도 모두
중국과 일본에서 온 것이니, 그러니까 임진왜란 무렵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고추가
없었으니 그때 김치는 백김치 였지 싶은데....... 그렇다고 중국 고유의 종 은 아닙니다!
BC 2세기 한나라 무제때 장건이 서역을 다녀오면서 호두, 배, 은행, 생강, 계피, 차, 백반, 설탕,
장뇌, 석류, 포도, 깨, 콩, 오이, 마늘, 녹두, 시금치, 당근, 무화과와 파가 중국에 들어온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훗날에 다시 조선에 전해진 것이고, 감자와 고구마에 고추는 조선말에
남미에서 유럽을 거쳐서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들어왔으니... 한반도 고유 종은 무엇이 있을까요?
BC 2세기 한나라 무제때 장건을 통해 서역에서 들어온 것은 배와 포도에 마늘 같은 채소와 과일
외에도 대원국의 말, 코뿔소, 사자, 코끼리, 타조, 흑소, 사냥개, 원숭이, 앵무새,
공작, 검은 담비에다가 유리, 보석, 산호, 호박, 상아, 대모, 진주, 코뿔소 뿔에 향료 등이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에서 서역으로 간 것은 비단, 도자기, 거울, 철기 제련술, 관개술, 종이
제지술에 나침반과 화약이니.... 바로 "실크로드" 라고 불리는 교역로 입니다!
이러한 서역의 채소와 과일이며 동물들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한나라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대월지와 동맹을 맺고자 장건을 서역에 파견한데서 유래하는데... 한무제는 사랑하는
이부인의 오라버니 이광리 (李廣利) 를 중용하니 대완국과의 전쟁에서 패했음에도
흉노 정벌 3만 한나라군 총사령관으로 다시 임명하는지라 출진하지만 무능한팃에 포위당합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부하 장군 이릉 (李陵) 은 5천으로 3만 흉노군과 목숨을 걸고 싸워서는
한나라 군대의 퇴로를 열어주고 자신은 기진맥진해서 포로가 되니 투항하는데 이런
이릉을 홀로 변호한 사마천은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결국 궁형 (宮刑)을 받는데...
한무제로서도 패전의 책임을 "사랑하는 위부인의 오빠에게 물을 수는 없었던" 것 입니다?
장건은 흉노에서 탈출해 재차 서역으로 가서 오손국 을 찾으니 “오손 (烏孫)” 왕 곤막은 한나라
에 답례 사절을 보내 우호를 맺는데, 오손에서 바친 말에 반해 “天馬(천마)” 라고 이름
붙인 한무제는 너무 기분이 좋아 왕소군 보다 72년이나 앞서 한나라 공주 세군 (細君)
을 시집 보내는데...... 이 정보를 접한 흉노는, 흉노 여인을 오손국 왕에게 먼저 출가를 시킵니다.
세군 (細君) 의 부친은 황족인 강도왕 (江都王) 유건으로 부친상 중에도 부왕의 미녀들과 정을
통했다는 난봉꾼이니..... 심심해서 말과 나귀를 관계시켰더니 몇달후 암컷 나귀가 四不像
(사불상) 을 낳았으니, 나귀 보다도 크고 힘이 셌다는데 오늘날 다른 이름으로는... “노새” 입니다!
황족 유건은 황제가 되려고 BC 121년 반란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참수당하고 부인과 자식
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나라는 몰수당해 廣陵郡(광릉군) 이 설치 되었는데...
당시 細君 (세군) 은 너무 어린데다가 소녀이니 숙조부인 한 문제가 데려다가 궁중
에서 길렀는데... “물에 비친 고운 꽃,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버들” 같이 여렸다고 합니다.
높은 산맥과 사막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서역 오손에 도착한 한나라 공주 양주 미인 세군은
오손 왕에게는 이미 왕비가 있으니 후처로 들어가야 하는 처량한 신세라.... 악기 비파를
만든 여인 답게 悲愁歌(비수가), 일명 황곡가 (또는 백조가) 라고 불리는 시를 지어 부릅니다.
우리집이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모서리요
멀리 다른 나라에 의탁하니 오손왕이로다.
궁려는 방이 되고, 전은 담이 되었으니,
고기는 음식이요 낙은 장이로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함이여 마음이 슬프니
黃鵠(황곡, 백조) 이 되기를 원함이여 고향으로 돌아감이로다.
오손 왕은 부인 세군을 자기 손주인 岑陬(잠추) 에게 재가시키는데 세군이 유교 도덕으로 고민
하자..... 한무제는 친히 편지를 보내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나라 습속을 따르라” 하니
결혼하고 새 남편은 오손왕위에 오르니 그녀는 허약한 체질 이라 少夫 (소부) 라는
딸을 낳고 죽자 잠추왕은 다시 요청해 한나라 초왕 유무의 손녀 解憂(해우) 공주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오손왕 잠추가 흉노 공주 곤미도 부인으로 맞아 泥靡 (니미) 라는 아들을 낳으니 딸
뿐인 해우 공주는 어려움을 겪는데.... 왕이 죽고 니미 왕자는 어린지라 왕족 옹귀미가
왕위를 잇고는 부왕의 두 비를 아내로 물려받으니, 해우는 세명의 왕자와 2명의 딸을
낳는데.... 아들 원귀미가 태자가 되니 흉노의 공격을 한나라가 원군을 보내주어 물리칩니다.
아들이 왕이 되어 아버지의 여자들을 물려받는걸 오랑캐 풍습 이라고 할수도 있으나... 부인인
젊은 여자를 죽여서 무덤에 묻는 순장이나, 부인의 머리를 깍아 절에 보내 감시를 받으며
평생을 억지로 비구니 노릇을 하게 하는 중국 풍습 보다는 오히려 인간적(?) 이니 늙은 오손왕
곤막이 후처가 된 한나라 공주 세군을 젊은 후계자에게 시집을 보낸 배려가 참으로 인상적 입니다.
그런데 옹귀미가 죽자 오손인들은 태자 원귀미를 제치고 흉노 공주의 아들인 泥靡(니미) 를
왕으로 세우자..... 해우 공주는 살기위해 새 왕 니미에게 3번째로 재가해 아들 저미를
낳는데, 흉노 부인 곤미의 냉대로 굴욕을 참지 못해 반란을 도모 하다가 왕에게 부상만
입힌지라.... 해우는 한의 사신과 함께 적곡성에서 포위되어 처절한 전투를 감내하게 됩니다.
이에 한나라 서역도호 정길조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포위를 풀고는 화의 를 모색하니
다친 왕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한(漢) 나라의 사신을 참수하는 선에서 수습하는데....
이후 흉노 공주의 아들 오취도가 부친을 죽이고 왕에 오르니, 한나라는 파강장군의 군대
를 보내는데 해우의 시녀로 오손국 우대장과 결혼한 馮嫽 (풍료) 가 나서 타협을 주선합니다.
오손 (烏孫) 을 2개의 나라로 나누어 한나라 해우가 낳은 아들 원귀미는 6만호 대곤미를 맡고,
흉노 곤미의 아들 오취도는 4만호 소곤미를 맡는 대타협으로 평화 를 이루게 되는데...
이후 원귀미가 죽고 손주 성미가 대를 잇자 해우 공주는 BC 51년 70세로 장안으로
귀향하는데.... 오손은 이후 유연에 패해 서쪽으로 이동해 “카자흐” 로 부족 이름을 바꿉니다.
그건 그렇고...... 호두, 배, 은행, 생강, 계피, 차, 백반, 설탕, 장뇌, 석류, 포도, 깨, 콩, 오이, 마늘, 녹두,
시금치, 당근, 무화과 와 파가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면...... 고추와 담배,
고구마, 감자, 토마토와 커피등은 임진왜란 이후에 서양에서 일본이나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옵니다.
고추는 Chili pepper 라고 하는데, 한자 이름은 먹으면 맵다고 '괴로울 고(苦)' 자를 쓰는
'苦椒 (고초)' 였으며 이것이 '고추' 로 변했는데, 원산지는 멕시코로 콜럼버스가 유럽에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북방 전파설과 임진왜란때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담배 Tobacco는 “합법적인 마약 ”이라고 일컫는데 마야문명에서 주술, 의식용으로 처음 사용
했으며 임진왜란때 들어왔으니 1618년 승평읍지에 남령초로 적고있는데.... 서당에서 훈장
과 학도가 맞담배를 피웠고, 조정의 조회를 하는 정전이 담배 연기로 가득하자 광해군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죽이겠다고 협박했으나 정조는 유명한 골초로 담배 예찬론자 였습니다.
“여러 가지 식물 중에서 이롭고 유익한 것으로는 남령초만 한 것이 없다. 민생에 이용
되는 것으로 이만큼 덕이 있고 이만큼 공이 큰 것이 어디 있겠느냐?” 정 조는
담배는 몸에 좋다는 주장을 펼쳤고 민간에서는 담배가 편두통, 매독에 효과가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지니 배가 아픈 아이에게 담배를 물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감자는 마령서 (馬鈴薯) 또는 북감저 (北甘藷) 라고 하는데 페루· 칠레등 안데스 산맥 원산으로 1532년
경에 에스파냐 탐험가 피사로에 의하여 항해 중의 식량으로 처음 식용하였고, 이어 에스파냐·
아일랜드 등지에 전파 되었으며...... 미국에는 17세기 초, 인도에는 16세기 말에 전해졌다고 합니다.
조선에는 이규경(李圭景) 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1824년 명천의 김씨가 북쪽에서 가지고 왔다는
설과 청나라 사람이 인삼을 몰래 캐가려고 왔다가 떨어뜨리고 갔다는 설이 있으며 다르게는
김창한이 쓴 "원저보" 라는 책에 북방에서 감자가 들어온 지 7~8년이 지난 1832년에
영국 상선이 전라북도 해안에서 1개월간 씨감자를 나누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토마토는 남만시(南蠻枾) 라고도 하는데 원산지는 남미 페루로 16세기초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재배되었는데.... 조선에는 19세기초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으며
처음에 토마토를 관상용으로 심었으나 차츰 영양가가 밝혀지고 밭에 재배하여 대중화 되었다고 합니다.
커피는 기원전 3세기 에티오피아의 목동 ‘칼디’ 가 염소들을 돌봤는데, 얌전하던 염소들이 붉은
열매를 뜯어 먹더니 밤새 흥분해 춤추듯 뛰어다니기 시작했으니 이상하게 생각하고 수도원의
승려에게 사실을 알렸는데..... 승려들은 열매가 정신을 맑게하고 피로를 덜어준다는 것을
알고는 사원에서 기도를 할 때 졸음을 쫓기 위해 먹었으니 콩을 빻고 볶아서 빵에 발라 먹었습니다.
커피는 예멘과 메카에 이어 터키로 전해졌는데 1541년 오스만 투르크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을 포위공격 하다가...... 독일과 폴란드 기병이 원군으로 나타나 기습을 하는 바람에 패해
물러간후 그들이 남기고 간 자루에 든 커피콩을 빈에서 볶은게 유럽 전래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커피가 유입된 초기에 로마 교황청은 커피를 “이교도의 음료, 이슬람의 와인, 악마의 유혹, 사악한
검은 나무의 썩은 물” 이라고 부르며 금지시켰는데..... 당시 베네치아가 아라비아숫자를 사용해
부기를 하니 로마교황청은 아라비아 숫자는 이슬람이 사용하는 악마의 숫자 이니... "기독교도는
사용을 금한다" 고 탄압했으니 정교 분리 를 한 베네치아 가 아니면 0,1...9 숫자 는 없었을 것이라?
0,1,2,3... 9 숫자 조차 이교도 아랍인들이 사용하는 것이라며 금지한 로마 가톨릭이니 당연히
커피를 금지한 것을 이해하지 못할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은 커피에
계속 빠져들었으니... 결국 1600년경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커피에 세례" 를 내림으로써
유럽 곳곳에 커피 하우스가 생겨나게 됩니다만, "커피는 열대지역에서만 재배" 가 가능합니다.
2024년 1월 26일 대마도 (對馬 쓰시마) 의 이즈하라(嚴原 엄원) 에 도착하여 한국인이 운영하는 지온
(祈園) 호텔로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는 나와 운하를 걸어서.... 가네이시성 (金石城) 으로
들어가 정원과 쓰시마번 번주인 소우케 (宗家 종가) 의 묘소인 반쇼인 (万松院 만송원) 을 구경합니다.
반쇼인을 뒤로 하고는 걸어 나와 슈젠지 절을 보아야 하니 시가지를 걸어서 운하를 따라 항구
쪽으로 내려가다가...... 조금 못미쳐서 산쪽으로 난 주택가 골목길을 들어서서
방화벽인 호우카헤키 ほうかへき (防火癖) 를 지나 슈젠지 (修善寺 수선사) 절을 발견합니다.
절 안에는 묘지가 늘어서 있는데 주지는 밤에는 퇴근하는지 없으니 안으로 들어가 최익현 선생의
묘를 찾다가 절의 오른쪽 입구에서 최익현기념비를 발견하는데, 大韓人崔益鉉先生
殉國之碑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 로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웠습니다.
대원군이 성년이 된 고종에게 권력을 물려주지 않자 최익현은 1873년에 상소를 올려 이륜두상
이니 올바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이니 하면서, 천재 (天災) 가 나타나고 지변 (地變) 이
일어난다며 대원군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조정이 발칵 뒤집혀 목숨이 위험할
뻔 했지만 고종은 이를 계기로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오매불망 갈망했던 친정" 을 시작합니다.
대마도 이즈하라에 최익현 선생이 유배당해 죽은 슈젠지 절을 찾아 순국비에 참배하고 나오면서
국제신문에 실린 “부산 영도구 청학배수지전망대 쉼터에 있는 조내기 고구마를 짊어진
농부 조형물이 추울까봐 걱정됐는지 누군가 목도리를 선물했다” 라는 기사가 떠올렸습니니다.
부산여행특공대의 추천 리스트에 영도 조내기고구마 역사기념관(청학동) 이 거점으로 제시된 걸 보고,
무릎을 쳤다. 영도구 청학동 높은 지대에 자리한 이 기념관은 설날 당일에만 문을 닫고 연중
개관하는데..... 봉래산 정상까지 걸어갔다 올 수 있으니 봉래산 정상에서 보는 부산 풍경은 절경 입니다.
우리나라 고구마 시배지에 세운 조내기 고구마 역사관 자체는 단출한 편이다. 2층에는 카페,
3층 옥상에 전망대가 있는데 어디서든 바다 경치가 좋다. 청학배수지전망대쉼터는
‘조망의 강자’ 이니.... 오죽하면 물을 공급하는 공공시설인 배수지에 전망대쉼터를
만들었겠는가. 이곳에 있는 조내기 고구마 농부· 절영마 동상 곁에는 운동기구도 있습니다.
고구마나 감자와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에 들어왔으니.... 고구마는 전분이 발달한
덩이뿌리를 말하니 탄수화물이 풍부하고 병충해에 강해 감자와 함께
전통적인 구황작물로 여겨졌으며, 오늘날에도 풍부한 단맛으로 널리 사랑받는 채소입니다.
고구마는 남아메리카 원산이며 멕시코 고산지대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니 콜럼버스등 대항해
시대 탐험가들이 신대륙에서 원주민들의 고구마를 가져와 보급했으리라 추측하는데....
제임스 쿡은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에서 고구마가 자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스페인이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마닐라를 점령하여, 멕시코의 은을 명나라의
복건지방 상인들에게 파는 갤리온 무역을 시작했는데 이 때 선원들의 식량으로 싣고
온 고구마를 복주 (福州) 의 상인 진진룡 (陳振龍 1543 ~ 1619) 이 명나라에 가져
갔는데 1594년 복주에 기근이 들자 금학증 (金學曾) 이 구황작물로 처음 보급했다고 전해집니다.
1608년 농학자 서광계가 재배법을 정리했고, 이후 명나라 전역에 퍼져 류큐 왕국(오키나와) 에도 전래
되었는데, 일본의 경우 1609년 류큐 왕국이 일본의 사쓰마번 (가고시마현 ) 에 복속되고 1705년
마에다 리에몬 이라는 어부가 본토에 가져간 것이 시초로.... 사쓰마 지역에서 보급되었기
때문에 '사쓰마 지역의 마 (이모, 芋)' 라는 뜻에서 '사쯔마이모 (サツマイモ)' 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한반도에 고구마가 들어온 때는 조선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18세기 후반으로, 감자가 들어온 시기
(19세기 초반) 와 비슷한 무렵이니.... 고추나 담배의 전래와 혼동하여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본으로 부터 들어온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에도 고구마가 보급되지 않았으니.... 고구마와 감자는 훨씬 나중에 보급된 구황작물 입니다.
고구마가 조선에 전래된 경위는 조선 영조 39년(1763) 에 조선 통신사 조엄이 일본 쓰시마(대마도) 에서
고구마를 목격하고 이듬해 제주도와 동래부(부산) 영도에서 이를 기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정설이니..... 조선 통신사들이 사신으로서 일본으로 갈때 군고구마 가게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영조가 " 그 종자를 가져와서 심어보라" 하고 명하여 부산 영도에 심은 것이 시초로 여겨집니다.
연해 지방 고을에는 고구마 (甘薯, 감저) 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구마는, 명나라의 명신 (名臣) 인 서광계
(徐光啓) 가 찬술한 《농정전서 (農政全書)》에 보이는데 칭찬하며 말하기를 '그것은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간에 이롭다.' 고 하였습니다.
고구마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성들이 다투어 심어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후 영과
읍의 가렴주구가 심해지니 사나운 관리가 문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수색을 하였으니 관에서
백포기를 요구하고 아전은 한 이랑씩 다 거두어 가니 심은 자는 곤란을 당하고 아직 심지
않은 자는 서로 경계하여.... 심고 가꾸는 것이 점점 처음만 못해지다가 이제는 희귀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주어 심기를 권장하고 풍속을 이루게끔 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은 혜택을 받기를 문익점
(文益漸) 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번식도 하기 전에 관리들이 가렴주구
를 행하여 어렵사리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종자를 오래 자랄수 없게 하고..... 씨받이 종자까지
먹어버렸으니, 어떻게 종자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정조실록', 정조 18년(1794) 12월 25일 3번째 기사
정조실록에 보면 전래된 것은 1764년 이고 일본에서 전래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상품작물이라 돈이 된다고
생각한 농민들이 많이 재배했으나 탐관오리들이 수탈을 해대자 재배를 포기했으니, 다음해 농사 짓는데
써야 할 종자를 보관할 이유가 없는지라 그냥 종자까지 먹어치워버려 농사가 줄어들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치 제주도에서 감귤농사를 짓는데 관리들이 열매를 맺을 즈음 찾아와 그 수량을 조사한후
수확시기에 그 수량에 맞추어 세금으로 거두는데.... 자라면서 떨어지기도 하고 아이들이
지나면서 따 먹기도 하니 숫자가 크게 부족한데도, 원래 숫자대로 세금을 강징하니
오히려 감귤을 사서 바쳐야 할 지경이라..... 농부들은 감귤 나무 뿌리에 독을 뿌려 죽입니다.
또 전복을 따는 물질 해녀는 원래 남자들이 했는데 바닷속 작업이 힘들고 조난 사고도 당하고
잠수병에 걸리는데.... 서울의 임금님과 조정 대신들이 학수고대하는 것이 제주도 전복
이라! 관리들이 악착같이 많은 수량을 세금으로 거두고 그 과정에서 자기몫도 챙기니
어부들은 다 뺏기고 나면 가난해서 장가도 못가니.... 어느 처녀가 시집을 올려고 하겠습니까?
목숨 걸고 물질해서 잡은 전복을 뺏겨버리니 먹고 살수가 없는지라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지경이 되니
남자 해녀들이 하나, 둘 육지로 도주해 버리자..... 다급해진 제주도 관리들은 여자들을 강제로
바다로 밀어 넣었고 이후 해녀는 여자들 몫이 되었는데, 이들이 육지로 도망칠까 두려운 조선
조정은 “제주도 여자들은 육지로 가는 배를 탈수 없다” 라는 법 까지 만들어 단속했으니.... 아! 조선이여!
제주도 귤이 진상되면 임금은 축하 의미에서 과거시험을 치루니 황감제인데, 정조 임금때에 과거시험장
에서 귤을 나누어 주는데, 기다리던 유생들이 혹시 못받을까 걱정이 되어 앞으로 밀어닥쳐 서로
뺏을려고 하다가 아수라장이 되니 "난장판" 의 유래로..... 정조는 시험을 주관한 두 관리를 파직시킵니다.
이때만 해도 양반이고 순조 부터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니 과거시험을 치루기도 전에 합격자 명단이
나돌고 설사 합격해도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가 아니면 뇌물을 써야 지방관으로 발령이 나니.... 부임
하자마자 3가지 돈을 긁어모으는데 첫째는 빚내서 뇌물 준 돈, 두번째는 3~5년 임기후 자동 해임되면
다시 바칠 뇌물 세번째는 평생 먹고살 돈이니 백골포까지 등장하는지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니 민란 입니다!
첫댓글 와~ 다양한 지식입니다
깨와 콩이며 포도등이 서역에서 중국을 통해 들어왔고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에서 감자가 일본에서
고구마와 고추에 토마토와 양파등이 들어왔으니......
그럼 임진왜란 무렵에는 고추가 없었고
또 김장을 담그는 배추도 일본인들이 개량한 종자이니
그 당시는 속찬 배추가 아닌 재래종에 백김치를 먹었다는....
벼도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왔으니.....
오래전 한반도인들은 보리, 밀, 조, 수수,
기장에다가 피 등을 먹은 것 같습니다.
채소나 과일도 가지수가 몇 안되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