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개헌
- 미국 유학 중이던 장남 전재국은 부친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을 진언한다. 내각제와 직선제 사이에서 고민하던 전두환은 결국 직선제로의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6.29 선언이 있었다. 전재국 또한 대한민국을 위한 결정에 합류한 셈이었다.-
1. 의원내각제
전두환은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를 선호한 사람이었다. 대통령제의 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그는 내각제를 선호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오늘 여러분에게 처음 말하지만, 나는 솔직히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두려운 때가 많았다.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내기 위해 다들 서류를 잔뜩 챙겨오는데, 결심을 해야 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중요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미국에서 무기를 사들이겠다는 재가서류가 올라왔는데, 도대체 제시된 그 가격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비싸면 비싼 만큼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대통령 중심제는 아주 작은 일에서 국가의 생존과 관련되는 큰일까지 모든 것이 대통령 하나에 달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문제들을 대통령 한 사람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두환은 1986년 4월 5일 유럽순방길에 오른다. 영국, 서독,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그는 의원내각제에 확신을 갖게 된다. 영국의 대처총리는 전두환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건네준다.
“영국은 지역감정의 골이 아주 깊은 나라입니다. 얼마나 심하든지 축구대표팀조차도 단일국가대표팀을 구성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각 지역의 대표팀이 따로따로 출전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판국에 영국이 대통령중심제를 선택했다면 국론 분열과 국력낭비가 극심했을 것입니다.”
서독도 의원내각제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대한민국 역시 영국처럼 지역감정의 골이 깊은 나라이며, 국론 분열이 극심한 나라이다. 비록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였지만, 그 개발과정에서 일어난 지역감정은 망국(亡國)적인 현상이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한 후, 전두환은 진정한 정치발전을 위해 의원내각제를 결심하게 된다. 또한 개헌의 방향도 의원내각제로 나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모든 시위와 집회의 주제를 대통령 직선제로 몰아갔다. 국민들도 우리 손으로 뽑는 대통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시위에 동참하였고, 결국 전두환은 의원내각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선택이었고, 6.29 선언을 마치 위대한 승리로 포장한 민주화세력들의 오판이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전두환의 뜻대로 의원내각제를 하고 있다면, 어느 한 정당의 전횡은 사라졌을 것이며, 권력을 잡기 위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식의 심각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좌우세력들이 권력을 잡은 다음 보복과 복수로 일관하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 당파싸움을 연상케 하고 있지 않은가.
후일 이 의원내각제는 자민련을 이끌던 운정 김종필을 통해서 다시 부활한다. 김대중의 대선승리를 위해, 김종필은 김대중과의 합당 조건으로 대선 승리 후 의원내각제를 하기로 철통같은 약속을 한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역사에서 의원내각제 논의는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2. 대통령 직선제 개헌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모두 9차례 개헌을 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 9차례 개헌의 과정과 내용을 간추려 정리해 본다.
<제1공화국>
제헌헌법-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구성된 국회(제헌국회)가 헌법기초에 착수하여 동년 7월 17일 공포. 대통령, 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하도록 함.
이승만 정부
1차 개헌(1952년 발췌개헌)-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승만이 국회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장기 집권을 위해 강제력을 동원하여 헌법을 개정함.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의원내각제를 주내용으로 하는 의외 발의안이 충돌하자, 정부와 의회가 협장으로 양 개정안에서 발췌한 발췌개헌안을 만들어 공고절차도 없이 기립표결로 통과. 이렇게 야당의 개헌안과 정부의 안을 절충한데서 '발췌개헌'이라고 함.
2차 개헌(1954년 사사오입)- 이승만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
대통령의 중임을 1차로 제한한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철폐하는 것이 골자.
당시 국회에서 재적 203명 중 135표를 얻어서 개헌선(재적 2/3인 135.333)에 0.333인이 미달되어 부결되었다. 의장은 부결을 선포했으나 2일후 '4사5입' 이론을 내세워 개헌선을 135표로 수정하여 개헌을 선포하였다.
<제2공화국>
3차 개헌(1960년 6월)- 4.19 혁명 후 내각책임제로 전환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 선거는 대대적인 국민의 저항을 받아 4.19로 이어지게 되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이승만은 하야하였고, 그 후 의원 내각제 정부 형태로 3차 개헌을 하게 되었다. 개헌에 따라 의원내각제가 도입 되었고,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보장하고 공무원의 신분 및 정치적 중립성 보장하는 내용이다.
4차 개헌(1960년 11월)- 허정 과도내각. 반민주행위자처벌에 관한 부칙조항 삽입
3.15부정선거 관련 반민주 행위자 처벌을 위한 소급적용을 허용하는 헌법부칙만 개정.
<제3공화국>
5차 개헌(1962년 12월)- 장면 내각. 5.16 발생 후 대통령제로 전환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하는 5.16쿠데타로 헌정이 중단되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후 민정 이양을 위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대통령제로 복귀하고 대통령의 재임을 2기로 국한하는 5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 투표로 확정되어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5차 개헌은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거친 헌법 개정이었다.
6차 개헌(1969년 3선개헌)- 박정희 대통령 3선을 위한 목적으로 단행
5차 개헌때 3선을 금지한 조항을 철폐, 대통령의 재임을 3기까지 가능하게 함.
<제4공화국>
7차 개헌(1972년 유신헌법)- 유신체제 전환을 위한 개헌
1972년 10월17일 비상초치로 헌정이 중단되었고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만들어진 개정안이 11월 국민투표를 통과하였다. 유신헌법의 특징은 기본권의 약화와 대통령의 1인 장기집권체제의 제도적 확립이다.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간접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6년으로 중임이나 연임제한에 관한 조항을 두지 않아 1인 장기집권이 가능하였다.
<제5공화국>
8차 개헌(1980년)- 신군부 집권에 따른 전두환 정권으로의 전환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고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하자 12.12사태로 전두환 , 노태우 신군부가 정권 장악.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자의로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헌법을 만들고 국민투표로 확정하였다. 이 헌법은 전면 개헌으로서 대통령을 간선으로 뽑고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였다.
<제6공화국>
9차 개헌(1987년 현행헌법)- 대통령 직선제
1987년 범국민적 저항운동 6월 항쟁이 일어나자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이른바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약속. 그 결과 최초로 여야 합의를 통해 개헌을 하게 되었다.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을 직선제로 하고 5년 단임으로 하였다.
(전두환 정부에서 개헌 함. 현재 윤석열 정부 또한 6공화국 연장선상임)
2024. 11. 17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