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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설, 희곡 등 모든 방면에서 러시아의 민족 문화를 꽃 피웠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푸시킨은 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이 유명한 시구를 쓴 시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인 중 한 사람인 푸시킨은 흔히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등 모든 장르에서 근대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는 유럽 문화가 러시아를 지배하던 시기, 러시아의 옛 전설과 가요 등을 토대로 단순하고 평이한 구어체로 작품을 쓰면서 러시아의 민족문화가 확립되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에도 비평가부터 대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으며 러시아의 국민 작가로 추앙받는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은 1799년 6월 6일(러시아 구력 5월 26일) 모스크바에 태어났다. 푸시킨 가는 모스크바의 전통 있는 명문 귀족 집안이었다. 그러나 푸시킨은 천재 시인이라는 칭송을 받는 한편, 흑인 노예 출신인 외가 쪽 혈통으로 인해 귀족 사회에서 이따금 멸시를 받았다. 외증조부 아브라함 한니발은 에티오피아의 흑인 노예 출신으로,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고 장군 지위에 올라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푸시킨은 외가로부터 흑인의 외모, 즉 가무잡잡한 피부, 두터운 입술과 곱슬머리를 물려받았고, 혈통 때문에 멸시를 받았음에도 그것을 입증하는 외모를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아버지 세르게이 푸시킨은 귀족 인텔리의 전형이었으며, 어머니 역시 전형적인 사교계 부인이었다. 부모 두 사람이 활발하게 사교계 활동을 하는 동안, 알렉산드르는 할머니와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누나 올가, 남동생 레프와 함께 아버지가 집에서 주최하는 문학 살롱을 접하며 자랐고, 가정교사들로부터 당시 러시아 상류 귀족이 사용하던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를 교육받았다.
12세 때에는 귀족 자제들이 다니던 차르스코예셀로의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했다. 이곳에서부터 푸시킨은 시를 쓰기 시작했고, 프랑스어로 된 작품들을 개작하면서 습작을 했다. 15세 때 모스크바에서 출판되던 〈유럽 통보〉 지에 〈시인인 벗에게〉를 최초로 발표했으며, 16세 때 상급반 시험장에서 〈차르스코예셀로의 회상〉이라는 자작시를 낭송하는 등 시인의 자질을 드러냈다.
일리야 레핀, 〈차르스코예셀로 시절의 알렉산드르 푸시킨〉
18세 때부터 페테르부르크에서 외무성 서기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사교계 활동도 활발히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시킨은 속물적이고 허영에 가득 찬, 쾌락에 탐닉하면서도 겉으로는 젠체하는 사교계 인물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럼에도 쾌락적인 삶을 좇던 청년 푸시킨은 상류 사회의 환락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한편, 이따금 문학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푸시킨은 진보적 문학 모임 '알자마스'에 가입해 활동했는데, 이 모임에서 푸시킨은 문학 작품은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쉽게 써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리체이 시절 했던 생각들, 즉 외래의 문화에 의지하기보다는 러시아의 민족 문화를 꽃피워야 한다는 생각들을 점점 확고히 해 나갔다. 또한 이 모임을 통해 혁명 사상을 지닌 진보주의자들과 접촉하면서 러시아의 제정을 비판하고 구습(농노제)을 타파해야 한다는 견해를 굳혔다.
20세의 푸시킨은 이런 사상들을 시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천재 시인으로서 첫 발을 떼었으며, 평생 논란의 중심에 섰던 시인다운 행보도 시작했다. 이때 두 작품을 발표했는데, 먼저 옛날이야기를 개작한 익살스러운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서사시 골격에 희극적 요소를 섞어 쓰고 민중에게 친숙한 동화를 수용한 작품으로,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표현된 초기 작품이기도 하다. 푸시킨은 이 작품을 그저 '재미있는 것'이라고 일컬었는데, 이것으로 대중에게 크게 인기를 끌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 시를 발표하고 얼마 후 푸시킨은 〈자유의 찬가〉를 발표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알렉산드르 1세의 노여움을 사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버지 파벨 1세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을 받고 있었는데, 파벨 1세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데다 스스로의 손으로 압제를 청산하고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시구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베리아 유형은 유배라기보다는 좌천으로, 푸시킨은 약 6년간 유배 같지 않은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첫 번째 유형지인 예카체리노슬라프에 도착하자마자 학질에 걸려서 요양 판정을 받고 넉 달간 여행을 다니다 돌아왔다. 이곳에서 3년여의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푸시킨은 인조프 장군의 서기로 일하면서 평온한 시간을 보냈으며, 이후 옮겨 간 오데사에서는 화려한 사교계 생활을 하며 수많은 염문을 뿌렸다. 유부녀와의 염문으로 푸시킨은 결국 관직에서 쫓겨나 부모의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예로 보내져 2년여 동안 영지에 박혀 가족과 함께 지냈다.
미하일로프스코예에서 푸시킨은 실연의 아픔을 달래고자 두문불출하며 고독하게 지냈다. 이때 바이런에 심취했으며, 서사시 〈캅카스의 포로〉, 〈바흐치사라이의 샘〉, 〈집시의 무리〉 등을 썼다. 그러면서 점차 젊은 혁명가적 열정은 가라앉고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해 심도 깊은 성찰을 하였다. 그 결과 〈시베리아에 바치는 노래〉, 〈눌린 백작〉, 운문소설 〈보리스 고두노프〉 등 러시아 역사와 민족에 관한 시를 비롯해 서정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같은 작품이 탄생했다.
1825년 12월 1일(러시아 구력 11월 19일)에 알렉산드르 1세가 죽자 니콜라이 1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이던 12월 14일, 데카브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자 청년 장교들이 농노제 폐지와 입헌군주제를 주창하며 거사를 일으켰다. 이 혁명은 곧 진압되었으며, 니콜라이 1세는 반대파 숙청 및 자유주의 운동 탄압을 골자로 하는 보수주의 정책을 강화했다. 그런 한편 문학을 정권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푸시킨을 사면했다. 푸시킨은 자유주의 사상 및 혁명 사상에는 동조했으나 폭력과 무법적인 수단으로 혁명을 쟁취하는 데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사교계 생활과 작품 활동을 하며 소설 《표트르 대제의 흑인》과 표트르 대제에 대한 서사시 〈폴타바〉를 완성했다. 그러나 곧 황제의 검열하에 시를 쓰는 자신의 모습에 낙담하게 된다. 그럼에도 1828년 〈가브릴리아다〉가 신성모독으로 논란에 오르자 황제의 비호 아래 위기를 모면하면서 황제와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게 되었다.
1830년 봄, 푸시킨은 사교계의 꽃이던 16세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에게 청혼한다. 그리고 혼인 비용으로 영지인 볼지노의 땅을 팔기 위해 잠시 그곳에 갔다가 콜레라에 걸려 석 달간 머물게 된다. 이때 그의 창작력이 절정에 달하여 소설 《고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 이야기》, 《예프게니 오네긴》을 비롯해 서사시 〈콜롬나의 작은 집〉, 운문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페스트 속의 향연〉 등 수많은 작품들을 집필했다.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
이듬해 2월 푸시킨은 모스크바에서 나탈리야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는 4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는 니콜라이 1세에게 연금을 받으며 시를 썼고, 그 돈으로 어린 아내의 사교계 활동을 후원했으나 곧 아내의 사치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린다. 푸시킨은 가정에서도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러시아의 현실과 황제에게 매인 자신의 처지, 시인으로서의 자긍심 사이에서 갈등했다. 가난 역시 긍지 높은 귀족이었던 그의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입혔다. 이런 상황에서 푸시킨은 〈로슬라볼레프〉, 〈두브로프스키〉, 〈푸가초프 반란사〉, 〈안젤로〉, 〈청동기사〉 등 러시아의 역사와 현실 인식에 대한 작품들을 썼다. 예술가, 러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우화시 〈황금수탉 이야기〉와 소설 《이집트의 밤》, 《대위의 딸》 등도 이 시기에 쓰였다. 특히 《대위의 딸》은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창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푸시킨의 죽음은 급작스러웠다. 푸시킨은 청년 시절 사교계에서 수많은 유부녀들과 염문을 뿌린 것으로 유명했는데, 아내 나탈리야 역시 그 못지않았다. 이런 아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때에 프랑스 장교 조르주 단테스가 푸시킨의 아내인 줄 알면서도 나탈리야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푸시킨과 단테스는 2년여간 분쟁을 벌였고, 결국 두 사람은 1837년 2월 7일(러시아 구력 1월 26일) 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결투를 벌였다. 사흘 후, 푸시킨은 결투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푸시킨과 단테스가 결투를 벌인 곳으로, 지금은 오벨리스크가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