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군의 해전도. 로마는 코르부스라는 장치를 사용해 해양 민족인 카르타고와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 한니발은 보병 5만과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높고 험한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역사 속에는 넓은 영토와 인구, 군사를 거느린 수많은 ‘제국’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제국들이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해, 주변의 세력과 싸워 이겨가며 역사에 남는 ‘제국’이 된 것이다. 고대 서양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한로마도 마찬가지다. BC 7세기 티베리스강 하류 라티움에서 시작해 오랜 기간에 걸쳐 인접국가를 제패하며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포에니 전쟁(Punic Wars)은 바로 이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의 패권을 손에 쥔 ‘제국’으로 도약하게 된 계기가 된 전쟁으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BC 3세기 무렵, 지중해. 상당수의 문명국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지중해의 동부와 달리 서부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고 정복자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the Great)가 벌인 정복전의 무대에서 살짝 벗어난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라틴족의 조그마한 도시인 로마가 주변의 세력을 하나둘씩 정복하며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다. 로마 북쪽의 에트루리아, 주변에 있던 삼니움 등이 로마에 무릎을 꿇었고 이탈리아 반도에 진출해 있던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들도 로마와 잘 지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로마에 비하여 카르타고는 보다 일찍 역사에 등장한다. 카르타고는 배를 타고 지중해 각지를 돌아다니던 해양민족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도시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페니키아인들은 현재의 레바논에서 BC 3300년대에 이미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BC 2000년대를 거쳐 1000년대에 이르면 이들은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네트워크를 가지게 된다. 지중해 세계에 대한 페니키아인들의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페니키아의 문자는 그리스로 가서 그리스식 ‘알파벳’으로 재탄생하였다.) 특히, 이들의 우수한 항해 능력은 각 제국들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었는데,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해군이 없어 페니키아의 함선들과 선원들을 동원할 정도였다. 거대한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부(富)’의 축적에 관심이 많던 페니키아인들은 배와 선원들을 거대 제국들에게 빌려주는 대신 그들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카르타고의 유적.
지중해 최고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카르타고의 해군 기지 유적.
포에니 전쟁의 발발 원인
로마의 문인(文人)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장편 서사시인 [아이네이스(Aeneis)]에 의하면 카르타고는 현재 튀니지에 레바논의 티레(Tyre) 출신의 엘리사(디도라고도 한다)라는 여왕이 세웠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새로운 티레’라는 뜻이다.) 새로운 도시에서도 해양 민족의 특성은 발휘되어 카르타고인들은 지중해는 물론 지중해 밖의 현재 모로코 해안,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현재 영국 해안까지 배를 몰고 장사를 했다고 한다. 아울러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해안의 넓은 지역은 물론 시칠리아와 코르시카까지 그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즈음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한 로마는 시칠리아를 놓고 카르타고와 충돌하게 된다. 이미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다스리고 있던 그리스계 세력과 네 차례(BC 480, BC 410, BC 397, BC 315)에 걸쳐 전쟁을 한 적이 있었다. 카르타고는 최후의 전쟁에서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국가인 시라쿠사의 아가토클레스(Agathokles)의 군을 무찌르고 시칠리아를 거의 점령하였다가, 아가토클레스가 카르타고 본국에 대한 기습공격을 하는 바람에 다 잡은 승리를 놓치고 본국으로 회군하였다. 이후 아가토클레스와 협상을 하여 시라쿠사를 내버려두는 대신 시칠리아 내의 카르타고 세력을 확고히 하였다.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진출은 로마와의 전쟁을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아가토클레스는 이탈리아 반도 출신의 용병들을 고용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일자리가 없어지자 용병들은 메사나라는 도시를 점령하고 해적질을 하면서 스스로를 마메르티니(Mamertini, 마르스의 아들들)라고 하였다. 이들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인근 주민들은 시라쿠사의 새 왕인 히에로 2세(Hiero II)에게 구원을 청하였고 이에 마메르티니들은 시칠리아 남방에 있던 카르타고인들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이를 본 시라쿠사군은 물러났지만 카르타고인들은 마메르티니들을 ‘보호’하는데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마메르티니들은 로마의 도움을 받고자 사절을 보낸다. 로마도 주민들로부터 도시를 빼앗은 도적집단을 돕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로마와 가까운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의 세력확장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강력하게 제기되며, 마메르티니와 동맹을 맺는다. 시라쿠사의 왕인 히에로 2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시칠리아 남부의 카르타고 세력과 손을 잡는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본격적으로 시칠리아 쟁탈전에 나서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다.
1차 포에니 전쟁: 로마, 해양 강국 카르타고를 바다에서 격파
전쟁에 돌입한 로마와 카르타고는 BC 265년에 메사나에서 충돌한다. 로마군은 카르타고·시라쿠사 동맹군과 싸워 승리한다. 그러나 로마군의 완전한 승리로는 볼 수 없는데, 피해를 두려워한 카르타고 지휘관 하노(Hanno)와 히에로 2세가 메사나를 포기하고 물러났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전투는 BC 262년에 로마군이 지금의 시칠리아 남부의 도시 아그리겐툼(현재 이름은 아그리겐토)을 포위하면서 벌어진다. 카르타고군은 아그리겐툼을 시칠리아 주둔군의 주요 거점이자 기지로 삼았고 이를 안 로마군이 아그리겐툼을 점령하려고 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한니발 기스코(Hannibal Gisco)와 그의 아들은 아그리겐툼을 포위하던 로마군을 멀리 유인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나, 작전이 간파되는 바람에 앞뒤로 협공을 받게 되고 카르타고군은 다시 한 번 패하였다.
아그리겐툼의 전투 이후 카르타고군은 육지에서 로마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그들의 장기인 해전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BC 260년의 리파라 군도 해전을 제외하고는 바다에서의 싸움도 역시 로마의 승리로 돌아갔다. 당시 지중해에서의 해전은 화살을 주고받다가 상대의 배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리파라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 로마는 배에 코르부스(corvus, 까마귀 부리)라는 것을 장착하는데 이것은 긴 나무판자 끝에 뾰족한 송곳이 박힌 장치이다. 로마 함선이 카르타고 함선에 접근하여 코르부스를 밀면 송곳이 내리꽂히며 카르타고 함선의 갑판에 박히게 된다. 카르타고의 배는 꼼짝하지 못하게 되고 동시에 로마병사들이 코르부스를 다리 삼아 적선에 건너가 카르타고 선원들을 도륙하였다. 카르타고는 코르부스를 장착한 로마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패하고 만다.
코르부스.
이어 카르타고는 레굴루스(Marcus Atilius Regulus)가 이끄는 로마군의 침공을 받게 된다. 로마군은 수차례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도인 카르타고 본성(本城)에까지 들이닥친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고용한 그리스 출신의 크산티푸스(Xanthippus)라는 장군이 카르타고군을 맡으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크산티푸스는 현재 튀니스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대파하였다. 살아서 도망가던 소수의 로마군도 배가 폭풍을 만나면서 모두 익사하고 로마의 카르타고 본토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의 전투들은 해전을 포함하여 모두 로마의 승리였고 시칠리아에 재차 파견된 카르타고군을 지휘하던 대 한노(Hanno the Great)가 아에가테스 해전에서 로마에 완패하면서 카르타고는 로마와 휴전협정을 맺고 시칠리아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육전에 강했던 세력이 천년이 넘도록 바다를 넘나들던 해양세력을 바다에서 꺾어 버린 것이다. 그 당시까지 해전의 주된 공식이었던 충파, 즉 상대편 배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방법 대신 코르부스를 이용하여 육상병력을 함상(艦上)에서 싸울 수 있게 한 로마인들의 전술적인 창의성이 빛을 발한 것이다. 반도에만 갇혀 있던 로마세력이 처음으로 이탈리아 본토 밖으로 진출하게 된다.
2차 포에니 전쟁: Hannibal Ad Portas!
1차 전쟁에서의 패배로 시칠리아를 잃은 카르타고 본국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결국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카르타고 본성이 포위당하였으나 하밀카르 바르카스(Hamilcar Barcas)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의 반격으로 반란군은 패하고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러나 하밀카르의 전공을 시기한 귀족들의 견제가 시작되었고 하밀카르는 카르타고를 떠나 히스파니아(지금의 에스파냐)로 가서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히스파니아를 자신의 영지로 만들었다. 그 전쟁 와중에서 하밀카르는 물에 빠져 목숨을 잃고 그의 아들은 하밀카르의 사위인 하스드루발 밑에서 자라났다. 그가 바로 맹장 한니발이다.
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한니발.
일설에 의하면 하밀카르가 살아 있을 당시 어린 아들을 신전으로 데리고 가서 절대로 로마인의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을 맹세케 하였으며 한니발은 때가 되면 불과 쇠로서 로마인들의 운명을 멈추게 할 것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하스드루발은 이후 로마와 협정을 맺었는데, 현재 에스파냐의 북쪽에 있는 에브로 강(江)을 경계로 하고 서로 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되고 히스파니아는 한니발의 영지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에브로강 남쪽에 있는 도시인 사군툼을 ‘보호령’으로 삼자 장성한 한니발은 사군툼을 공격하였고 로마는 즉각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단지 로마군의 공격을 막기보다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BC 218년에 원정군을 편성하여 이탈리아 쪽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당시 로마는 1차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꺾어 시칠리아를 차지하였고 카르타고군과의 싸움에서는 언제나 이긴다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가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해안가로 올 것으로 예측하였으나, 한니발은 높고 험한 알프스 산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한니발은 보병 5만과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기 시작하였다. 비록 로마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기로 하였지만 4,000미터에 이르는 산이 즐비한 알프스는 고대 군대에게 있어 녹녹한 곳이 아니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에스파냐에서 느껴보지 못한 추위, 길 바로 옆의 천 길 낭떠러지, 그리고 외부인들을 경계하는 사나운 원주민들과 싸워야 했다. 결국, 한니발이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가 거느리고 있던 보병 중 1만 2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기병 역시 4천 명이나 죽은 상태였다. 코끼리들의 피해는 더 심각하여 거의 다 죽고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한니발 군이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거의 거지꼴로 변해있었다. 더구나 이때 한니발이 이끌던 군대는 히스파니아 원주민인 이베리아인들을 포함하여 갈리아 남부에서 전리품을 약속하고 끌어들인 갈리아(켈트)족 전사들, 누미디아(현재 리비아) 출신 기병, 지중해의 바레아레스(Islas Baleares) 군도 출신의 투석병(投石兵), 그리고 카르타고 본토 출신의 소위 ‘아프리카’ 보병으로 이루어진, 좋게 말하면 혼성군이고 다시 말하자면 글자 그대로의 잡군(雜軍)이었다. 한니발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이탈리아 북부 포 강(江) 지역에 살고 있던 갈리아 부족들에게 로마 대신 자신을 따를 것을 종용하였다. 로마가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불만이 많았던 갈리아족의 상당수가 카르타고군으로 몰려들면서 한니발은 상당한 수의 병력을 다시 얻었다.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의 이동 루트.
군대는 그 숫자만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특히 한니발이 이끌던 군대처럼 여러 족속들이 혼합된 혼성군은 더욱 그렇다. 군대에 간 젊은이들이 같은 병영 안에서 같은 부대명을 쓰고 같은 군복을 입고 같은 무기를 쓰는 이유는 한 가지, ‘하나’라는 연대감을 지닌 의가족(疑家族)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동료들과 자신이 하나의 단위에 속해있다는 의식은 병사들이 동료를 서로 도와 싸우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로마군이 바로 그러하였다. 자신들은 스스로 땅을 일구면서 로마라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위기에는 로마를 위하여 싸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군이었다. 적어도 부대원 간의 화합(Unit Cohesion)만을 놓고 보자면 한니발군은 로마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군이 이전에 맞선 상대들과는 ‘급수’가 틀린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 급조한 잡군들은 대개 전리품을 약속받고 전쟁에 동원되는데, 한니발은 단순히 전리품으로 용병들을 꾀거나, 카르타고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보다는, 한니발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자신과 함께하면 언제나 승리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자발성을 이끌어냈다. 이는 이후 막강한 로마군을 연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연전연승
이탈리아에서의 첫 번째 큰 전투인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동원된 4만 중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대패하였다. 그나마 로마의 중앙부를 맡았던 중군(中軍)만이 근처의 로마 요새로 대피하여 증원군을 기다렸다. 패전의 소식에 로마 시민들은 술렁이기 시작하였지만 로마는 아직 15개 이상 군단 10만 병력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의회(senatus)와 군부는 침착하게 다음 싸움을 준비하였다.
트라시메노의 대패 이후 집정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싸움을 지연시키는 소모전을 통해 상대편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펼쳤다. 훗날 서양전술사에서는 이와 같은 전술을 그의 이름을 따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이라고 불렀다.
이때 로마군은 지금의 에스파냐 북부를 다시 차지하였고 이 때문에 한니발이 히스파니아로부터 원군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 로마 의회는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를 새 집정관으로 뽑아 군의 지휘권을 주었다. 플라미니우스는 트레비아에서 살아남은 병력과 새로이 동원된 네 개 군단을 합쳐 약 4만의 병력으로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한니발의 병력은 약 5만 정도로 플라미니우스의 병력을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한니발은 로마군과 정면대결보다는 매복전을 통한 기습을 준비하였다. 중부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에 있는 트라시메노 호수(Lago Trasimeno)를 지나던 한니발의 군은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이 근처까지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호숫가에서 로마군을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플라미니우스는 급한 마음에 군을 다그쳐 안개가 자욱하게 낀 호숫가의 길을 따라 한니발을 쫓았다. 마침 소규모의 적이 앞에 나타났고 로마군의 선봉이 급히 쫓는 바람에 로마군은 선봉과 중군, 그리고 후미가 나뉘게 되었다. 이때 한니발은 호수 위의 언덕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병력들에게 총공격을 명하였다. 전투 대오를 형성하지 못한 행군상태에서 옆구리를 찔린 로마군은 완전히 붕괴하였고 4만의 병력 중 반수가 적의 창칼에 맞아 죽거나 호수에 빠져 죽었다.
로마 해군이 다시 히스파니아에 있던 카르타고 해군을 꺾었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 로마는 여전히 한니발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때 한니발은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최남단 지방으로 가서 최근에 로마에 복속된 ‘동맹’ 도시들을 이탈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로마에서는 트라시메노의 대패 이후 한니발과의 정면대결 대신 지연전과 보급선 끊기 등을 주장한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대규모 싸움을 피하고 있었다 (이후 서양전술사에서는 힘이 부족할 때 펼치는 지연전을 두고 파비우스의 이름을 따서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후 몇몇 전투가 있었지만 파비우스의 방침을 따라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적과 당당히 싸워 이기는 것이 전통인 로마인들은 파비우스의 지연전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힘들게 싸워 기껏 복속을 시킨 동맹도시들이 한니발에게 넘어가는 것은 더더욱 참기 힘들었다. 파비우스는 집정관 연임에 실패하였고 BC 216년에 로마 상원은 파비우스 대신 타렌티우스 바로(Tarentius Varro)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lus)를 집정관으로 선출한 후 8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보냈다. 당시 한니발군의 수는 약 4만에서 5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병력의 열세에도 아랑곳없이 한니발은 후세에 오래 기억되는 대승을 이끌어낸다.
양면포위 작전의 모범: 칸나에 전투
새로운 로마의 대군과 한니발 군이 대결을 펼치게 된 곳은 이탈리아 반도의 ‘뒤축’에 해당하는 칸나에였다. 로마군를 공동으로 지휘하게 된 두 명의 집정관중 파울루스는 신중한 성격이어서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법률상 두 명의 집정관이 공동으로 군대를 지휘하게 되는 경우 하루씩 돌아가면서 지휘를 맡게 되어 있었는데, 한니발은 이러한 로마의 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성미가 급한 바로가 지휘를 하는 날에 싸움을 걸었다.
한니발은 보유한 병력 중 가장 약체인 이베리아인들과 갈리아인들을 중앙에 배치하고 강한 아프리카 보병과 기병을 양옆에 두었다. 이를 본 로마군 사령관 바로는 전술적인 상황에 따라 소규모의 부대단위들이 유기적으로 흩어지고 뭉치는 평소의 작전 대신 중앙을 돌파하려는 생각에 거의 모든 전력을 대형의 앞쪽 중간에 집중시켰다.
전투가 시작되자 양 옆에 배치되어 있던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그리고 누미디아 기병들은 로마 기병대와 로마 동맹 기병대를 공격한다. 여기에서 로마 기병대는 패하고 동맹 기병대도 누미디아 기병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이 와중에 카르타고의 중군은 로마 보병의 맹렬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버티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로마 보병들이 조금만 더 싸우면 앞의 적 대열을 뚫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순간, 한니발군 최정예인 아프리카 보병이 대오가 무너져 무질서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로마군을 양옆에서 죄었다.
이로써 로마군은 삼면으로 포위되고 말았는데 설상가상으로 로마동맹군 기병을 쫓아버린 한니발 군 기병이 뒤를 들이치면서 로마군은 빠져나갈 구멍도 없이 완전히 포위되었다. 양옆으로 우회한 아프리카 보병을 이용하여 로마군을 포위하였기 때문에 많은 전쟁사가들은 이를 두고 양면 포위 기동(Pincer maneuver)이 기록된 거의 최초의 사례라고 보고 있다.
칸나에 전투 진형도. 로마 보병이 한니발군의 대열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 한니발군 최정예인 아프리카 보병이 로마군을 양옆에 죄는 전술을 보여준다. 전쟁사가들은 이를 양면 포위 기동이 기록된 최초의 사례로 보고 있다.
포위망에 갇힌 로마군은 학살을 당했고 이날 전투에 참여한 8만의 로마군 중 6만이 죽었다. 고위 귀족 80명도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죽은 로마군의 손에서 빼낸 반지만 하여도 큰 바구니 세 개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패닉상태에 빠졌다. 죽은 로마인들이 워낙 많아 로마시민이라면 누구이건 칸나에에서 죽은 사람 한 명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였다. 로마의 사가 리비우스(Titus Livius)는 이렇게 적고 있다.
“평상시 그 어떤 때도 이때처럼 로마의 성벽안이 공황(恐惶)과 혼란으로 가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적더라도 그 현장의 광경보다는 덜할 것이기에, 이를 적지 않고자 한다.”
로마가 전쟁에서 이긴 후에도 한니발은 로마인에게 공포의 대명사였고 우리나라 부모들이 ‘못되게 굴면 호랑이가 물어간다’라고 하였듯이 로마의 부모들도 못되게 구는 아이에게 ‘Hannibal Ad Portas!(한니발이 성문밖에 왔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공황과 혼란은 로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리비우스는 동맹들에 대해서도 적는다.
“그날까지 우리 곁에 굳건히 서 있던 동맹들이 우리나라(로마)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이번의 참사(慘事)가 그 이전에 벌어진 어떠한 일보다도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칸나에 전투 이후: 전세의 역전
칸나에 전투 이후 BC 212년에 벌어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공방전은 포에니 전쟁에서 ‘곁가지’ 전투에 지나지 않지만 고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당시 시라쿠사는 지도부가 로마파와 카르타고파로 갈린 상태였는데, 카르타고파가 일시적으로 득세하였으나 친카르타고파인 시라쿠사 왕 히에로니무스(Hieronymus)가 암살되고 친로마파가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로마는 시라쿠사가 언제 정쟁에 휘말려 다시 돌아설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대선단과 상륙군을 보내어 공격하였다. 시라쿠사는 로마군을 맞아 싸울 수밖에 없었고 바다를 따라 지어진 성벽 위에서 배를 타고 오는 로마군의 공격을 방어하였다. 이 방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유명한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시라쿠스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였다.
아르키메데스의 과학적 발견에 대한 일화는 차고 넘치도록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시라쿠사 공방전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로마군은 병력을 해안에 상륙시키기보다 아예 배에 사다리 가교를 장착해서 배에서 바로 성벽을 올라가 공격할 수 있게끔 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발리스타(일종의 大弩)와 오나게르(투석기)를 사정거리가 짧게, 중간 정도, 그리고 길게 개조하였고 이를 알맞게 성벽에 배치해 로마군에게 쉬지 않고 돌과 납덩이를 날렸다. 로마군 선원들은 성벽에 다가가기도 전에 돌덩이와 납탄들을 피하느라 바빴다. 밝은 낮에 다가갈 수가 없자 로마군 지휘관 마르켈루스(Marcellus)는 야습을 시도하였는데 시라쿠사는 역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하르파게’로 대응하였다. 하르파게는 갈고리가 달린 도르래 기중기로서 로마 함선이 다가오면 줄에 달린 갈고리를 내려서 배에 걸리게 한 다음 들어 올렸다. 배를 완전히 들어 올려 거꾸로 떨어뜨려 물에 잠기게 하거나 약간 들어 올린 다음에 떨어뜨려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로마군은 아르키메데스의 도움을 받은 시라쿠사인들의 호수비에 막혀 거의 2년을 허비하였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이를 틈타 시라쿠사를 도우려 하였으나 패하고 물러섰다.
시라쿠사의 선전은 오히려 자만심을 키우게 되었고 아르테미스 여신을 기리는 축제를 성대히 열었다. 이를 틈타 수십 명의 로마군이 시라쿠사의 외벽을 넘어 성안으로 잠입하여 성문 보초들을 죽이고 성문을 열었다. 술에 취하여 자고 있던 시라쿠사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학살당했다. 로마 지휘관 마르켈루스는 혹시라도 아르키메데스를 찾으면 죽이지 말라고 하였지만 아르키메데스는 자기 집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가 로마병사가 들이닥치자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가 누구인지 몰랐던 병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한편,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한니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이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있었다. 인근의 카푸아와 타란토 만에 있는 그리스계 도시들은 완전히 한니발 쪽으로 돌아섰다.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를 온전히 기지로 얻은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포기하는 기미가 없었으며 오히려 한니발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히스파니아를 공격하였다. BC 209년에 스키피오(Scipio)의 로마군이 히스파니아 최대의 항구인 노바 카르타고(현 카르타헤나)를 점령하고 한니발군의 자금줄이라 할 수 있는 은광을 장악하면서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세력은 기가 크게 꺾인다.
이후 BC207년에 3만의 병력과 많은 공성무기들을 가지고 한니발과 합류하려던 하스드루발(한니발의 동생)이 메타우루스 강가(현 이탈리아 레 마르케)에서 마르쿠스 리비우스(Marcus Livius)와 클라우디우스 네로(Claudius Nero)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하면서 한니발이 증원군을 받을 가능성은 영영 사라졌다. 한니발이 로마를 직접 공격을 못하였던 이유가 ①병력이 부족했고 ② 공성(攻城)무기가 없었기 때문임을 감안한다면 메타우루스 강에서의 패전은 매우 뼈아픈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전쟁사가들이 2차 포에니 전쟁을 결정지은 전투로메타우로스강 전투를 꼽는다.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에 패배한다.
한니발은 이후 이탈리아에서 계속 싸우지만 로마를 굴복시킬 수 없었고 오히려 BC 203년에는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카르타고 본토에 상륙한다.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에게 급히 귀환하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한니발은 결국 본토로 돌아와 로마군과 최후의 대결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반도에서 단 한 번도 로마에게 패하지 않았던 천하 명장 한니발의 운도 BC 202년 자마 평원에서 다하고 만다. 5만의 병력으로 4만의 로마군과 싸웠지만 2만이 죽고 2만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하였다. 카르타고 최후의 희망이라 할 수 있었던 한니발마저 패하자 카르타고 의회는 로마에게 평화를 구걸할 수밖에 없었고 로마는 카르타고가 도저히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로마는 카르타고 본국 이외의 모든 카르타고 영토를 빼앗았고 카르타고는 본격적인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듯하였다.
이탈리아에서의 15년 원정을 마치고 카르타고로 돌아와 자마에서 패하였을 때, 한니발은 아직도 43세의 한창나이였다. 한니발은 전쟁 영웅으로서 시민의 지지를 얻어 부패로 만연해있던 카르타고 과두정(寡頭政)을 개혁하여 선출제로 바꾸었다. 국가재정을 좀먹던 부패를 근절하는 데 성공하여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로마가 강요한 배상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불과 수년 만에 카르타고가 한니발의 효과적인 지도하에 다시 부유해지자 이에 놀란 로마는 카르타고에 한니발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고 한니발은 조국을 위기에 처하게 하기보다는 망명을 하였다. 망명 도중에 셀루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Antiochos)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철학자로 행세하는 포르미오라는 인물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중 장수로서의 의무에 관한 강의를 들은 후 포르미오가 한니발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한니발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내가 사는 동안 우매한 자들을 수없이 보았지만 이 자(포르미오)만큼 우매한 자는 없었다”
한니발은 로마인들을 피하여 셀루코스 왕조를 떠나 여러 나라를 전전하였으나 로마의 감시망을 피할 수 없었다. BC 182년, 비투니아의 왕이 그를 로마인들에게 넘겨주려고 하자 독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한니발은 자살하면서 이러한 말을 남겼다 한다.
“로마인들이 한 늙은이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을 몹시도 조급해하니 그들의 오랜 걱정거리를 덜어주어야겠군.”
3차 포에니 전쟁과 카르타고의 멸망
로마는 다시 카르타고에 무지막지한 배상금을 요구했고 카르타고는 이후 전쟁을 할 때마다 로마의 허락을 받기로 하는 협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BC 151년에 카르타고는 로마가 추가로 요구한 배상금마저 모두 납부하였다. 배상금을 모두 낸 카르타고인의 관점에서는 로마와의 협약은 종료된 것이었다. 이때 주변의 유목족인 누미디아가 침공해오자 카르타고는 2만 5천의 병력으로 싸웠으나 누미디아에 패하고, 로마는 허락 없이 싸움을 하였다며 로마의 요구를 들어주든지 아니면 다시 전쟁을 하라고 하며 카르타고를 재차 협박하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귀족자제 300여 명을 인질로 로마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카르타고는 이에 응했다. 아울러 카르타고의 모든 무기와 갑옷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고 카르타고인들은 심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무기를 모두 내놓았다. 이어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에게 내륙으로 이주하여 살 것을 요구하였으며 카르타고 본성은 불태워질 것이라고 하였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싸울 핑계를 찾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의 요구에 불응하고 즉각 싸울 준비를 하였다.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 휘하의 로마군은 카르타고 본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싸움은 카르타고인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하여 3년 이상을 끌었다. 3년간의 긴 싸움 끝에 카르타고가 함락되었고 싸움에서 살아남은 카르타고인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나갔다. 카르타고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일설에는 로마인들이 주변의 농토에 소금을 잔뜩 뿌려놓아 농사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제국 로마의 탄생
이로써 로마와 카르타고의 100년간에 걸친 싸움은 로마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당시 로마는 카르타고와 싸우는 동시에 지중해 동부에서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the Great)의 장군이었던 셀루코스의 후손이 세운 셀루코스 왕국과 함께 알렉산드로스의 후손들이 있던 마케도니아와 싸우고 있었다. 마케도니아를 격파한 로마는 선배 문명이었던 그리스 본토를 장악하게 되었다. 뒤이어 로마는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지중해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즉,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흡수함과 동시에 페니키아인들의 무역 네트워크를 차지하여 지중해의 경제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흔히 거대 제국을 유지하는 3대 요소는 다른 국가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 군대와 관료들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 그리고 다른 족속들의 자발적인 복속을 이끌어낼 수 있는 문화 역량 등이라고 한다. 로마는 강력한 적과의 전쟁을 통하여 강하고 억센 군대를 양성하였고 엄청난 부의 원천을 거머쥐었으며 함께 문명화되었다고 하는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다. 로마가 이후 거대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을 얻은 것은 카르타고라는 강력한 적을 꺾음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첫댓글 네이버캐스트가 깔끔하게 정리 잘 해주는군요. 저도 종종 찾아보곤 합니다.
사실 포에니 전쟁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한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카르타고와의 충돌과 승리는 오히려 그 결과라고 봅니다만..ㅁ. (0삼니움족은 그때 로마 포로들을 모두 도륙냈어야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