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귀포 토평4거리 오희준공원에서 진행된 산악인 오희준 5주기 추모제에 다녀왔다. 그리고 오는 5월 29일에는 한라산 1100고지 고상돈공원에서 산악인 고상돈의 32주기 추모제가 열린다. 5월에 우리는 한라산이 배출한 최고의 산악인 두 명을 잃었다. 정상의 사나이 故 고상돈과 적토마 故 오희준이다. 고상돈은 1979년 5월 29일, 오희준은 2007년 5월 16일 사망했다. 당시 고상돈의 나이 30세, 오희준은 37세였다. 둘 다 한라산 자락에서 태어나 한라산을 보면서 꿈을 키웠고 마침내 우리나라 최고의 산악인으로 국민들에서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다 산으로 되돌아간 산악인이다.
▲ 에베레스트 정상의 고상돈(고상돈기념사업회 제공)
고상돈은 우리나라 최고의 영웅이었다.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태극기와 에베레스트가 그려진 기념우표,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를 들고 서있는 고상돈의 사진이 실린 주택복권 발행, 기념담배 등이 출시 등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교육용 교과서에까지 소개됐었다.
고상돈은 1948년 제주시 칠성통에서 태어났다. 1955년 4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 입학, 4학년 1학기까지 제주에서 학교생활을 한다. 초등학생 시절 구름에 뒤덮인 한라산을 신비감에 사로잡혀 바라보다가 그 꼭대기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고상돈은 초등학교 시절 한라산 정상에는 오르지 못하고 3학년 소풍 때 한라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관음사까지 갔던 게 고작이다.
▲장구목에 있는 고상돈케른(Cairn)
고상돈이 한라산에 오른 것은 한참 후인 79년 1월 미국 알래스카 매킨리 원정등반을 위한 한라산 적설기 전지훈련을 위해서다. 훗날 고상돈이 매킨리에서 사망한 후 제주의 산악인들은 당시 훈련의 주 무대였던 장구목에 고상돈케른(Cairn)을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다.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
1977년 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는 김영도 원정대장을 비롯한 18명의 대원으로 구성되는데 이때 고상돈이 참여한다. 그리고는 당당히 정상에 오른다. "여기는 정상"이라는 고상돈의 이 한마디는 약소민족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 그 위상을 알리는 소리이자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메시지와도 같았다. 만약 이때 고상돈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한국원정대는 산소가 바닥내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로써 고상돈은 에베레스트에 오른 56번째의 등정자로, 한국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8번째의 국가가 된다.
하지만 지구의 꼭대기에 오른 고상돈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2년 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데, 북미 최고봉 매킨리다. 코스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기존코스인 웨스트 버트레스(West Buttress)보다 조금 더 어려운 웨스턴 립(Western Rib)으로 당시까지 100여건의 매킨리 등정자 중 단 3번밖에 성공한 사례가 없는 난코스이다.
5월 29일 고상돈은 박훈규 부대장, 이일교 대원과 함께 마지막 캠프에 도착해서 보니 정상이 눈앞 가까이에 펼쳐지자 1박을 생략한 채 정상공격에 나선다. 저녁 7시 15분 정상등정을 알리는 고상돈 대장의 목소리 "여기는 정상이다. 바람이 너무 세고 추워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사진을 찍고 하산하겠다. 지원해준 여러분들에게 감사한다."를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고상돈대장과 이일교대원의 유해는 고국으로 운구되어 전국산악인장(葬)으로 장례식을 치른다. 이듬해인 1980년 그가 어린 시절 꿈을 키웠던 한라산 1100고지로 이장, 한라산의 품에 안겼다.
▲ 오희준(오희준기념사업회 제공)
지구의 3극점을 밟은 오희준
고상돈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여겨질 무렵 제주에서 새롭게 등장한 산악인이 오희준이다. 오희준은 1999년 초오유(8201m)를 시작으로 2000년도 브로드피크(8047m), 시샤팡마(8027m), 2001년 로체(8516m), K2(8611m), 2002년 안나푸르나(8091m), 2006년 에베레스트(8848m), 가셔브롬2봉(8035m), 가셔브롬1봉(8068m), 마나슬루(8163m)를 연속으로 오른다. 히말라야의 8000m급 14좌 중 10좌를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이 모두를 성공시킨 10전 10승의 놀라운 집중력이다.
이 과정에서 2004년 혹한과 눈보라를 뚫고 1200km 대장정 끝에 44일이란 세계 최단기록으로 남극점을 밟고, 2005년에는 북극점까지 밟았다. 2006년 에베레스트까지 오르며 지구의 3극점을 모두 밟은 3번째 한국인의 기록을 갖게 된다. 세계 기록으로는 17번째다.
▲백록담 서쪽 백록샘 주변에 세운 오희준케른(Cairn)
2007년에는 에베레스트 초등 30주년을 맞아 박영석 대장과 함께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이른바 코리안루트 개척에 나선다. 5월 15일 날씨가 호전된 틈을 타 오희준은 이현조대원과 함께 제2캠프를 출발, 제4캠프 구축을 마쳤다. 계획대로 된다면 16일 8300m에 제5캠프를 구축한 후 17일 정상공격에 나설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에베레스트 정상 근처에 엄청난 폭설이 내린다. 자정을 넘긴 16일 새벽 1시 45분경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눈사태 소리가 들려오자 오희준은 무전으로 탈출을 시도하겠다고 보고한다. 그게 마지막이다. 이후 눈사태가 이들이 머물던 텐트를 덮친 것이다. 훗날 제주의 산악인들은 한라산 백록담 서쪽 백록샘 주변에 오희준케른(Cairn)을 조성했다.
▲ 한라산 1100고지 고상돈 공원의 동상 제막식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지난 2009년 고상돈 30주기를 맞아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그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이 출간된 것을 비롯해 산악인 고상돈 30주기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세미나, 국회 의원회관에서의 '잊혀진 영웅 고상돈' 사진전이 그것이다. 그 기획과 진행과정에 필자가 관여했었다. 당시 기획의도는 단 하나였다. 한라산에 고상돈기념관을 만들자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아직껏 고상돈기념관은 없다. 이보다 앞서 지난 81년 고상돈의 유품은 유족에 의해 제주도로 기증되었는데, 이때의 합의사항으로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 전시실을 확보하기로 약속까지 했었다.
이와 비교되는 사례를 보자. 일본의 산악영웅으로 우에무라 나오미가 있다.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매킨리에서 생을 달리한, 고상돈과 유사한 삶을 살았던 산악인이다. 그의 고향인 효고현과 산악활동을 했던 동경에 모험관이 세워져 그의 도전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존하는 대표적 산악인인 엄홍길의 경우도 그가 세살까지 살았던 경남 고성군에 엄홍길전시관이, 이후 생활터전인 경기도 의정부시에도 전시관이 있다. 특히 고성의 전시관은 50억원 가량의 국비와 지방비가 투입해 조성되고 관리주체도 지방자치단체인 고성군이다.
▲ 서귀포시 토평동 오희준공원에 세워진 오희준 추모탑
최근 제주도에서는 관음사 야영장 서측부지에 5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지하2층 2000여㎡규모의 산악박물관을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역사관과 유물전시관 산악교육관, 문화공간 등이 들어서는데, 고상돈과 오희준 등 제주 출신 산악인들을 소개하는 유물과 국내외 수집가능한 산악인 유물들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요즘 관광에서 스토리텔링이 부각되고 있는데 한라산의 경우 고상돈과 오희준이라는 자랑스러운 자산을 너무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지난해 처음 열린 고상돈로 걷기대회를 연례행사로 개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차제에 고상돈과 오희준의 기념관을 해당 장소에 별도로 조성하고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도 있다. 기회가 된다면 오는 5월 29일 오후 3시30분 1100고지 고상돈공원에서 열리는 고상돈추모제에 참가를 권한다.
*글 강정효 사진작가 2012년 5월 21일 <제민일보>
◀강정효 사진작가
작가 강정효씨는 15년간 한라일보, 뉴시스통신사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4·3과 관련해 발이오름 4·3유해발굴을 시작으로 현의합장묘 유해발굴, 화북가릿당 인근, 별도봉, 정뜨르비행장의 유해 발굴작업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지난 1987년 첫 사진전시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0회의 사진 개인전을 가졌다. 1991년 '제주는 지금'을 시작으로 섬땅의 연가, 화산섬 돌이야기, 한라산, 제주거욱대, 대지예술 제주 등 6권의 저서와 공저로 4·3유해발굴사진집 ‘뼈와 굿’, 한라산 등반개발사, 제주세계자연유산을 빛낸 선각자들, 제주의 돌담,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 제주도서연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