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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1-2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에 복음이 전파되는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1절과 2절에 대해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서 1절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
사도들의 서신서를 보면 사도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릅니다. ‘둘로스 예수 크리스토’. 여기서 둘로스는 그냥 종이 아니라 노예라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의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주인의 뜻대로 사용되는 소유물이고, 그 목숨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살아도 주인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인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게 둘로스(노예)입니다.
사도는 그렇게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둘로스로 서신 첫머리에서부터 밝힙니다. 이 말은 단순히 주가 되신 분에게 복종한다는 뜻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된 자로서 나의 육적 자아가 죽었고 주 예수의 다스리심을 받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그리스도인 그 정체성을 보여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와 평안을 증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자유,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평안입니다.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된 그 자유를 사도는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라고 교회에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뿐 아니라 다른 사도들 역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롬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약 1장)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여기서 열두 지파는 교회를 말합니다.
(유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야고보서의 야고보와 유다서의 유다는 예수님의 형제들이에요. 그런데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소개하지요, 예수님의 혈육이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오해했던 그 형제들이에요.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이들도 마침내 예수님의 주 되심, 곧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육적 형제로서의 그 혈통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신분, 자기 정체성을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위치,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까지는 반드시 성령이 임해야 하고 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생명이 나누어지는 성령의 역사가 먼저 있어야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돼요. 예수님과 함께 자란 형제인데도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 몰랐다니까요.
그렇게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가장 먼저 우리의 혈통,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우리의 육적 자아가 먼저 해체되고 죽어 나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도의 본분을 다하기까지 그들에게는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하는 주님의 다스리심과 돌보심이 있게 됩니다. 그게 주님의 동행이에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 그분의 동행과 그분의 보살피심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사도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는 그런 주님의 다스리심과 돌보심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아파요.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자기 부인의 세월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만 살고 싶은데, 성경에서는 우리를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말은 참 쉬운데, 이 말씀이 실제 실행되면 우리는 아파요 많이 아파요. 그래서 때로는 “주님, 내 인생 좀 살게 내버려두세요. 왜 저입니까...” 라는 비명이 터져 나옵니다.
고전 9장 입니다
27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여기서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단어가 ‘둘라고게오’예요. 이건 고대 사회에서 전문적으로 노예들을 쳐서 길들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히 노예로 복종하도록 두들겨 패서라도 복종하게 훈련하는 게 둘라고게오예요. 바울은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모든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서 둘라고게오의 과정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게 우리 신앙생활이에요. 우리 주님과 함께 언약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창세 전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로 이루어졌는지 우리가 반복해서 확인해야 하고 차츰 그 이름 앞에 나의 전 존재가 무릎 꿇게 되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이며 진정한 성화입니다. 성화라고 하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닮아가면서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되는 걸 말하지 않아요. 진짜 성화는 ‘우리 주님의 피 흘리심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그 고백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잖아요. 나는 당신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히 여기심,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그 고백이 성화의 절정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그 처음 자리가 그 자리예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생명력,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그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자리, 그 처음 자리.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종 디모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유다. 여기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한번 불러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 이제 여러분은 큰일 났어요. 인생 종 친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못 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게 진짜 복이에요.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단 말입니다. 대통령이든, 재벌 회장이든 그 누구도 어떤 세상 권력으로도, 억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는 영광스러운 직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직분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에 충성되기 위해서 여러분의 육, 여러분의 옛사람, 육적 자아가 날마다 죽어 나가고 자신을 예수께 온전히 의탁하며 주 예수를 섬기는 일에만 충성하는 종의 모습으로의 변신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예요. 여러분이 맺는 열매가 아니라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란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들, 즉 사랑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필요한 것들이에요. 이 모든 건 나 좋으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사도는 그런 성령의 다스리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흔적이 자신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갈 6장)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스티그마타 투 퀴리오 예수’. 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흔적이에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육적 습관들, 성격, 자존심 등이 주님의 손길 아래서 날마다 무너져 내리고, 죽어 나가고, 해체되어 새 피조물로 새롭게 살아나게 되고, 새 생명으로 살게 되는 그 증거로서 주인의 소유를 표시하는 문신이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새겨지는데, 그 문신, 스티그마타가 그리스도 예수의 소유됨을 증명하는 모든 언약적 사건들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복음의 현실로서 십자가의 현장성이 성도들에게 반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한마디로 본의 아니게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죽음에 넘기우는 자에게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새창조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주님의 돌보심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종 된 영광과 자유를 누리게 하는 신실하신 보살피심인 것을 우리가 알 때, 그때 우리가 비로소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는 없는 평안이에요. 나의 나 됨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밖에 모르는 그 나로부터의 자유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가장 큰 적은 누구입니까? 자식이에요? 돈? 아니죠. 나에게는 내가 가장 큰 적입니다. 그런 나로부터의 자유란 말입니다. 또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별세의 자유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에베소서에 나오잖아요. 우리를 어디로 옮겼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옆으로 옮겨진 자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들만 이 세상의 실체를 볼 수 있어요. 세상 속에 갇혀 있을 때는 세상을 못 봅니다. 세상 밖에서만 이 세상이 보여요. 내 밖에서만 내가 보인다니까요.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계시 된 은혜의 해가 있죠. 희년. 주안에서 누리는 그 행방의 기쁜소식 그 희년의 기쁜 소식이 이제 마침내 우리에게 실행된 것입니다. 해방이에요.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해방, 세상신 맘몬으로부터의 해방, 이런 세상 모든 관계로부터의 해방, 결국 아담에게서 난 그 나로부터의 해방까지가 희년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이렇게 인용하고 선포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이거예요.
여러분, 모든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 같아도 실제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죄의 권세, 세상 신, 마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 사람 아담이 뱀의 말에 속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 말은 첫 사람 아담이 이미 뱀하고 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죄의 지배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긍휼에 있음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롬11:32)
그래서 아담에게서 난 모든 자들의 아비는 마귀예요. 마귀에게 세간 형태로 사로잡혀 있어요.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가구처럼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다니까요. 그렇게 사로잡혀 있는 자들 가운데서 일부를, 즉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들을 예수님이 강한 자 마귀를 결박하고 탈취해서 빼앗아 가시는 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그래서 그 세간들이 마귀에게서 벗어나서 보니 자기가 마귀의 종, 죄의 종이였구나.. 하고 그때야 아는 겁니다 (롬6:6) 그전에는 몰라요. 모두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사는 줄 알아요, 그렇게 열심히 자기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겁니다. 그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성도들은 그들과 다르게 날마다 죽음을 경험해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 산 자가 예수를 위하여 날마다 죽음에 넘기우는 것은 우리 죽을 육체에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성도는 죽음이 낯설지 않아요. 날마다 죽으니까요. 그래서 마침내 마지막에 찾아오는 그 죽음을 아주 반갑게 맞아들입니다. 내가 이제야 육신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구나.. 이제부터 진짜 사는 거구나.. 사망아 문 열어라.. 이게 성도의 죽음이에요.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말씀하신 그 희년이에요. 해방의 날.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 죽겠다고, 악착같이 살아보겠다고, 암 걸려서 기도원 찾아다니고 온갖 것 다 하잖아요. 그건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 이미 내 안에 하늘 소망으로 채워져 있다는 거예요. 내 몸은 여기에 있지만, 나는 이미 하늘로 옮겨진 자다.. 나는 날마다 그 하늘을 바라보면서 산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도 그렇게 기뻐하는 거예요. 이제 드디어 내 목이 잘리는 날이 가까웠구나.. 관제로 부어질 날이 가까웠구나.. 하는 그 설레임. 바울만 아니라 주께서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소망이며 설레임인 거에요.
이렇게 희년의 기쁜 소식이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이미 실행되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말미암아 우리가 포로 된 것에서 풀려나고 모든 눌린 것에서 자유롭게 된 것, 이미 이루어진 그것을 우리 일생 동안 계속 각인시켜 주시는 것으로서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입니다. 너는 내 거야.. 하고 도장을 꽝 찍은 거예요. 그렇게 도장이 찍힌 자들의 삶에는 자기 인생이란 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그 삶에도 연합된 거예요. 세상에 머리둘 곳 없는 자들로 한 몸이라니까요. 그와같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만 교회입니다. 대한예수교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이런 건 없어요. 이미 창세 전에 확정된 십사만 사천, 12×12×1000. 그들만 교회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하나님 나라에서도 성도들을 교회라고 해요. 그들이 지금 이 광야 세상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따르는 반석 예수와 함께.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영적 눈으로 보면 예수님의 피 뿌림이 성도 모두에게 다 있어요.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첫 부분에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의 피 뿌림을 얻은 자들, 흩어진 열두 지파, 모든 교회들에게 편지한다.. 그 피 뿌림이 흔적이에요. 스티그마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사는 삶.
그러므로 사도는 자신에게 주시는 모든 고난까지도 기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나 둘 사이에서만 누리는 기쁨이에요. 이 사랑의 흔적.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또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그리스도의 영광,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사도는 그 예수의 흔적,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그 흔적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와 그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런데, 정말 그 십자가가 자랑할 만한 겁니까? 젊은 청년이 발가벗겨져서 처참하게 못 박혀 죽은 십자가. 구약에서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저주라고 한다니까요. 나무에 매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저주를 주님이 대신해서 한 몸에 다 받으신 그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승리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가 천국의 문인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라고 해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스티그마타 투 퀴리오 예수’를 드러내고 또 훈련받는 자들로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과 평강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라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본문 2절에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에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예수의 흔적, 곧 예수의 죽음과 생명이 나누어진 그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세상 교회에서도 은혜와 평강을 다 말해요.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의 흔적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죠. 예수의 죽음과 생명이 나누어진 그 십자가가 없어요. 자기를 구원한 십자가만 있어요. 그러나 언약의 죽음이 없는 은혜와 평강은 가짜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가장 먼저 은혜와 평강을 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된 자들에게 부어지는 은혜와 평강.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 드리고 첫째 날 강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평강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샬롬,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지요
샬롬은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이에요. 옛날 먹을 게 없던 시절에 우리가 ‘식사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보니 평안한 날이 없어요. 그래서 인사가 ‘샬롬’입니다. 평안하십니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평화, 사도가 말하는 평강은 그런 세상적 평강과는 달라요. 그냥 다툼이 없고 평화롭게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화해 불가능한 상태, 즉 원수들이 서로 화해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그 평강, 그 연합은 누구와의 평강이고 누구와의 연합입니까?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라니까요.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예요. 원수 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한 것, 화목하게 된 것을 평강이라고 해요. 그래서 그 평강에는 반드시 예수의 죽음이 전제됩니다. 언약의 피가 흘러야 해요. 에베소서 1장에 기록된 창세 전에 흘린 그 피가 역사 속에서도 반드시 뿌려져야 해요. 그 피 안에 샬롬이 있고, 그 피가 우리의 의요 그 피가 우리의 거룩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 신 마귀는요 다른 건 다 말하면서 피만 말하지 않아요. 그것만 가려요. 교회에서도 십자가를 한쪽으로 치워버립니다. 그렇게 피 없는 기독교를 무당 잡교라고 합니다. 종교화된 기독교예요. 언약의 피가 없는 기독교는 세상 모든 종교와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불교도 이슬람도 힌두교도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들에게 없는 게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피, 십자가.
아담의 선악과 범죄로 인해서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평화, 화목이 깨진 상태입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어요. 이거 실감하세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 될 만큼 내 안에 거짓되고 악하고 더러운 것들이 우글거리는지를 보게 된 것을 말해요. 구원 불가능의 나부터 들키는 게 성령받은 거에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중 한 무리에게 하나님과 화목 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평강을 빌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예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그들만 하나님과의 화목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에요. 바꾸어 말하면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교회에 평강을 빌어주고 계신 거예요.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1절과 2절에서 연속 나오는 단어가 있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평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평강.
구약에서부터 약속하신 한 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평과 화목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나누어지고 모든 죄와 허물이 사함을 받은 자들에게 이 평강이 주어진 거예요. 예수를 만난 자들의 평안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이 나옵니다. 시므온이 뭐라고 합니까? 이들이 날마다 기다리던 게 메시아였거든요. 마침내 그가 성전에서 그 메시아 아기 예수를 만난 겁니다.
(눅 2장)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이것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평안이에요. 아기 예수라는 평안입니다. 이 시므온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이에요.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란 말이에요. 그 아기 예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실 메시아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이 사람만 기다린 게 아니라 다들 기다렸어요. 그중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고 평안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거창하게 만군 천사를 거느리고 영광 중에 나타나는 메시아였는데, 예수님은 말구유의 아기로 오셨죠. 약속하신 진짜 메시아가 오신 거에요. 시므온은 성전에서 그 아기 예수를 보고 이제 주께서 나를 평안히 놓아주시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 평강입니다.
그래서 사도도 자신이 만난 예수에 대한 고백으로 모든 교회에 그 은혜, 그 평강을 빌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없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있는 은혜와 평강이에요. 세상은 힘 있는 메시아를 원하지만, 진짜 평강은 말구유의 아기로 오시고, 아무 힘 없이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평강이 있음을 사도 바울은 알았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을 모든 편지 서두에서부터 빠지지 않고 빌어준 것입니다. 그것이 ‘둘로스 투 예수 크리스토스’로서 바울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도 바울은 다시 한번 확인 도장을 찍습니다.
(고후 13장)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세상이 합심해서 세상 밖으로 쫓아내어 버린 그 예수 안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다는 것을 너희가 모른다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믿음 안에 있는지,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는 말로 고린도후서가 끝이 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 하나님과의 평화를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떠나서 다른 데서 평화를 찾지 말라는 말이에요. 세상 정치인들이 서로 만나서 회담하고 주고받고 하는 그런 평화는 없어요. 제가 장담하지만 세상 끝 날까지 이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예요.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세상 신이 인간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바울이 말하는 그런 평강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평화, 십자가로만 주어지는 평안은 거부해요. 십자가, 은혜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모든 주체성과 가능성을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은혜 참 좋아하잖아요. 입에 달고 사는 게 은혜인데, 성경이 말하는 은혜를 알고 나면 다들 싫어지는 그런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니까요. 모든 인간은 자기가 계획하고 노력의 결과물도 자기 손에 쥐기를 원하잖아요. 그런데 모든 게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주어졌고,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만 너희는 존재일 수 있다고 하면 기분이 살짝 나빠지는 게 인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듣기 싫은 욕 중의 하나가 ‘거지 같은 놈’이죠. 그렇게 누구도 거지 되는 거 싫어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천국 간 사람 실명으로 한 사람 있어요. 거지 나사로. 팔자도 그런 팔자이 없어요. 부잣집 문 앞에 앉아서 그 집에서 먹고 남은 것을 주면 먹고 안 주면 굶는 거예요. 오죽 세상에 친구가 없으면 개가 와서 핥아주겠어요? 헌데를 핥아주는 개가 유일한 친구예요. 그런데 그 나사로가 천국 갔어요. 나사로가 성경 공부를 많이 해서 성경을 많이 알아서 천국 갔을까요?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했을까요?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나사로는 그 이름 자체가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자라는 뜻이에요. 모든 피조물은 그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가 가능합니다.
구약 선지서를 보면 이스라엘 거짓 선지자들도 평안을 말하는데, 다른 평안을 말해요. 예레미야 6장 14절에 보면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이건 죽을병이 걸린 이스라엘을 보고 율법 지키고 희생 제사 드리면 다 구원받는다고 속이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원 불가능한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의 대속의 은혜를 기다리라는 의미로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이 가리키는 메시아는 외면하고 그냥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흉내만 냈어요. 이게 이스라엘의 실패입니다. 열심히 십일조 하고 열심히 안식일 지키고 열심히 이웃 구제하고.. 그걸 잘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잖아요. 성경을 보면 그들은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하고 토색 불의 간음 한적 없고 저 세리와 같지 않고 어쩌고 그러잖아요. 옆에 있던 세리는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앞에 내어놓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입을 가리고 고개만 숙이고 있어요
희생 제사도 마찬가지예요. 제사의 제물이나 각종 제사 형태나 제사장 이 모든 게 오실 그리스도를 모형 한다는 것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하는 게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에요. 왜 제사를 주고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과 제사가 가리키는 게 누구인가를 이야기해 줘야 하는 게 제사장이고 율법사들이에요. 그런데 그들 자신의 위상과 안위만 생각해서 이스라엘을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고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하는 일을 그들이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율법사 제사장들이 독주에 취해서 비틀거렸다고 합니다. 술을 많이 마셨다는 뜻이 아니에요. 세상 정신에 취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나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런 선지자 보낸 적 없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면서 여전히 범죄하고 하나님의 은혜만 의존하기보다는 자기들의 행위로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했던 게 죽을병에 걸린 이스라엘인 겁니다. 그런데도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잘 가고 있다고, 그거 심각한 병 아니라고, 진통제 몇 알 먹으면 낫는다고, 십일조 잘하고 제사만 잘 지내면 된다고 속였어요.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인본주의에 매몰된 기독교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키에르케고르는 그걸 보고 ‘기독교가 기독교를 박멸하고 있다’고 했어요. 박멸한다는 건 모기나 바퀴벌레에게 에프킬라 확 뿌릴 때 쓰는 말이잖아요. 세상 교회들이 세상 신에게 완전히 짓밟혀 버린 거죠. 보세요 세상 교회들이 뭐라고 합니까? 구원은 은혜로 받고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이거 이단으로 정죄된 알미니안주의 거든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행위가 보태져야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이단 사설이 세상 교회를 온통 장악하고 있어요. 심지어 차등상급론까지,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그 다이루심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악한 말, 다른 복음이 세상 교회를 휩쓸고 있단 말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평안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며 하나님의 주권이고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선물은 달라고 해서 주는 게 아니고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거잖아요. 자기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를 아무리 흔들어도 주시지 않아요. 인간의 열심과 헌신에 따라서 축복도 받고 병도 낫고 고지에 오른다는 그런 거짓 평안을 외치는 자들이 오늘날 교회 강단에 서있는 거짓 삯군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만 그 은혜의 필연성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평강은 그들 말처럼 많은 소유를 가지고 풍족한 환경에서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어도, 그런 것들을 다 빼앗겨도 사라지지 않는 하늘의 보화, 영적 부요함을 말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에이레네, 샬롬입니다.
(마 6장)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이 보물은 어떤 보물입니까? 헌금 많이 하는 거? 착한 일 많이 하는 거? 여러분 이 보물은 여러분 자신을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보물이에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아들딸 손주들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듯이 하나님께는 여러분이 보물이에요. 실감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눈동자처럼 지킨다고 하세요. 그 하나님과의 관계, 아들들이라는 신분, 그 정체성을 알 때 우리는 진짜 평강을 누립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서 받게 되는 반대급부는 부모 자식 사이 관계가 아니잖아요.
부부나 부모와 자식, 가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시려고 주어진 거예요. 여러분이 어떤 잘못을 해도, 설사 연쇄살인범이라고 해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절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에 하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은 보시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니까요.다만 성도에게는 아들만들기라는 하나님의 징계가 따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 예수의 피만 보십니다. 그걸 알 때 우리가 평안을 누립니다. 다른 말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믿음이 등장할 때 항상 행위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아닙니다. 저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나의 의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예수만 나의 의가 되십니다.’ 이 고백을 받아내신단 말이에요.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 있죠? 그도 처음에도 예수님을 욕했어요. 그런데 어느 한순간 그 강도에게 하나님의 성신이 임한 거예요. 그래서 보니 옆에 똑같이 못 박힌 이 사람이 나의 죄를 위해서 언약의 피를 흘리는 하나님이심을 갑자기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분께 자기 전 존재를 의탁합니다. 당신이 낙원에 있을 때 나를 기억해달라는 그 한마디를 하고 천국 갔습니다. 다른 거 없어요.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예요. 나의 전적 부패, 전적 불가능을 알 때 비로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있음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예수가 나의 구원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성도의 인생에는 수많은 말씀의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 고백을 받아내시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에 무릎 꿇게 하시기 위해서...
구약에도 보면 왜 우리가 하나님의 보물인지 보여줍니다. 구약의 제사장들 에봇에 보석 열두 개를 붙여요. 그게 이스라엘 열두 지파거든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열두 성문이 모두 보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새 예루살렘. 그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 어린양의 신부인 여러분 성도들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석들이에요. 하나님이 하늘에 쌓아놓으신 그 보물을 알라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는 녹도 좀도 안 슬고 도둑도 못 훔쳐 간다고 하는 겁니다.
눅 12장보겠습니다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재미있죠?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오시면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인 줄만 알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평화를 주려고 온 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심지어는 가족 안에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그리스도라는 평안을 배우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뜻이에요. 너희가 원하는 평화, 너희가 만들 수 있는 그런 평화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라는 평화입니다.
(요 14장)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건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성도도 세상을 살면서 마음에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일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그런 너희에게 이 세상에는 없는 나의 평안을 줄 터인데, 그 평안으로 인해서 너희는 근심과 두려움을 넉넉히 이기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 근심과 두려움이 너희를 가두어 놓을 수 없다.. 너희는 그런 것들에 갇힐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로 옮겨졌으니까.
이렇게 우리가 누리는 평강은 항상 전쟁을 동반하는 평강입니다. 갈등과 충돌과 두려움과 불안 분리등을 동반하는 평강이에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그 무엇으로도 평안이 없음을, 평안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 문제도 없고, 가정도 평안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그런 게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인해서 분열이 일어나고..빼앗김이 있고.. 이게 참 재미있는 겁니다. 가정 안에서도 성도가 한 사람 있으면 반드시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성경은 세상으로부터 핍박받고 쫓겨남을 당하는 그런 가운데서 누리는 평안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그리스도의 평안, 하나님과의 화목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교보재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기드온이 반석에서 불이 나와서 제물을 태우는 그 자리에서 외칩니다. ‘여호와 샬롬’. 그리고 바로 어디로 갑니까?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찍으러 간다니까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그 평안을 아는 자들만 이 세상이라는 우상, 또 내 안에 있는 우상들을 찍게 된다는 거예요. 전투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세상이 말하는 그런 평화가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평화는 반드시 그런 전투를 거치면서 주어지는 평안이에요.
그렇게 그리스도의 평안은 우리를 그 전장으로 몰아가는 평안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로 인해서 고달프고, 예수로 인해서 빼앗기고, 예수로 인해서 이방인과 나그네가 되는 그런 기쁨과 그런 감사를 성경이 샬롬이라는 하는 거예요. 그 샬롬이에요. 이미 완료된 묵시의 현실을 이 세상 속에서 체감하게 되는 살롬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하늘에 완료된 평화의 나라,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우리 눈이 들리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 것밖에 몰라요. 내 새끼, 내 가정, 내 남편, 남편은 아닌가?(ㅎ).. 우리 눈이 이 세상과 나로부터 하늘로 들리는 그 과정을 고난 인내 연단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평강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평강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평강, 성도들만 누릴 수 있는 평강입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모든 서신의 첫머리에 이 은혜와 평강을 빌어줍니다.
이렇게 시공간에 제한된 물질이나 사건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가 없기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마음에 그냥 새겨버리는 평화입니다. 이것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예요. 하나님이 그냥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새겨버리는 쉼이며 평화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진 상태, 하나님이 마음껏 우리는 사랑하시는 그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된 충만함으로서의 평강.. 참 좋죠? 하나님 것이 다 내 것이라고 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렇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며 그 하나님을 누리는 평안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이 겪으셨던 그 아픔과 슬픔 좌절과 눈물도 공유해야 하겠죠? 그래서 세상은 알지 못하고 세상에는 감추어진 평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서 샬롬. 그래서 예수님도 이스라엘을 향해서 우시면서 평강을 말씀하신 거예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말이 없잖아요 우셨다는 기록만 있어요.
(눅 19장)
37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이렇게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라는 평강을 원하지 않아요. 그들이 원하는 평안은 따로 있어요. 우리끼리 사이좋게 사는 하나님 없는 평화입니다. 그것밖에 모르니까 예수님이 말하는 이 평화를 알아듣지를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그리고 나중에 제자들만 따로 불러서 풀어 주세요. 저희는 몰라도 너희에게는 보여지고 알려졌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하면 어차피 어떤 언어로 어떻게 설명하셔도 세상은 못 알아들을 테니까요.
이와같이 인간의 어떤 노력과 열심으로도 얻을 수 없는 평화, 하늘의 영광스러운 그 평화를 우리는 어떻게 누리게 된 거예요? 믿음 안에서,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미 이루어진 것. 그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 어디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거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라면 정말 목이라도 멜 것 같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와 기쁨을 나누는 그런 기적이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평강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평강이에요.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는 없는 평강이란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입니다.
이사야는 그 평강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 45장)
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샬롬)도 짓고 환난(악)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주시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세상의 악이나 인간들이 정한 의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결코 양보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게 구원이에요.
문제는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게 문제죠. 흔히 구도의 길을 말하고, 또 스스로 고행의 길을 찾기도 하는데 그런 거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찾을 길이 없어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 놓으셨다니까요 (창3:24) 그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안 겁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겁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인간들이 바벨을 쌓고 아무리 기어 올라가도 (이게 종교거든요) 올라가다 보면 다시 미끄러지게 되어 있어요. 육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길로 오셨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구원의 길로 우리를 찾아오신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보니 내가 그 길 위에 있음을 알게 된 겁니다. 그것이 평안이에요.
그렇게 그 길 위에 있는 자들, 하나님이 찾으신 자들은 자기 일을 쉬게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그 쉼, 그게 평안이에요(히4:10) 그들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자기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한 아기로 오셨죠. 그래서 우리의 평강이에요.
(눅 2장)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평화예요. 이 아기가 구약에서부터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되었단 말이에요.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이름이 ‘평강의 왕’이라고 합니다. 평강이 없는 세상에 평강을 주시는 방법이 이 한 아기를 통해서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아기가 곧 우리의 평강입니다. 이 아기는 창세 전 약속대로 이 땅에 언약의 피를 흘리러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 53장)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이 평화입니다.
(엡 2장)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신 화평, 그 평강이 무엇으로 주어졌다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죠.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평강은 예수님의 찔림이 있어서 주어진 것이고 그의 상함이 없었으면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참된 평안은 바로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해방되는 평안이에요. 우리에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과 상관이 없는 평안을 구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죄의 문제,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는 평안이에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평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든 죄를 간과하시는 평안입니다. 간과는 안 보신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성도의 어떤 죄도 안 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을 보면 참 놀라운 게 우리가 있기도 전에, 창세 전에 죄가 먼저 나타나요.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 죄가 먼저 있고 그 죄를 대속하는 아들의 피가 나타나요. 이 말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어떤 행위, 어떤 죄도 이미 묵시 안에서 창세 전에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아는 게 평안이에요. 심지어 이사야서 38장에 보면 우리의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재미있죠? 하나님이 자기 등 뒤로 던지셨단 말입니다. 자기를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창세 전에 확정하셨어요. 이 말은 창세 전에 확정된 그 아들들에서 하나를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의 어떤 종교 행위로도 십사만 사천이라고 하는 (아라비아 숫자 십사만 사천이 아니에요. 구약 열두 지파 곱하기 신약 열두 사도 곱하기 완전수 천 해서 교회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그 교회에서 하나를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심과 그 은혜의 영광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잠시 죄와 사망까지 이 세상에 들여보내신 거예요. 그게 로마서 5장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 온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현실, 복음의 현실 안에서 우리 주님을 누리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그런 참된 평강이 여러분들에게 넘쳐나기를 빕니다. 이번 캠프를 통해서 이 하늘의 평화, 십자가의 화평을 우리가 서로 나누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주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끝으로 골로새서 1장 20절을 함께 읽고 첫날 강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골 1장)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이 화평입니다.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평강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어떤 놀라운 축복인지를 우리가 알아서 한 몸 된 교회의 형제자매들과도 이 평강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주님 저희와 항상 함께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서로에게 평강을 빌어주며 모일 때마다 그 은혜와 그 평강의 기쁨을 함께, 한목소리로 찬송하는 그런 복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캠프 삼 일동안 주님이 저희와 함께하시므로 우리 모두 그 천국의 평화와 그 천국의 희락과 모든 신령한 것들을 다 같이 누리게 되는 그런 묵시의 침노, 하나님 나라의 침노가, 질이 다른 시간이 우리 가운데 흐르게 하시고 그런 저희에게서 주님 홀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