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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북부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들녘소리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님의 제사를 모시고 나서(경신학교 홈페이지에 보낸 글)
저는 1999년 까지 30여년을 경신학교 에서 역사를 가르쳤던 홍갑표 선생입니다.명퇴 후 지금은 디지털말 객원기자, 24반무예협회 경당의 고문, 그리고 민족문제 연구소 경기북부 지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실 김상덕 동문에 대하여 제 재직시에도 잘 몰랐습니다. 창피한 일이었습니다.스스로 반성하면서 이 글을 통하여 우리 제자들에게 보답코저 합니다.
진난 4월26일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한승아파트 102동 206호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님의 유일 아드님인 김정육 선생님 댁에서 ‘새로 찾은 제삿날에’ 민족문제 연구소 부천지부와 경기북부지부 회원 5명이 제사에 참여했다. 부천지부에서는 김상덕 석고 조각상응 제작한 조월희 씨 와 사무장 박상래씨가 경기북부지부에서는 지부장 장이근씨와 사무장 김재민씨 그리고 자문위원인 필자 홍갑표가 참여했다.
'반민특위'란 '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 약자다.
1948년 7월 제헌국회 소장파인 김웅진의 발의로 "반민족 행위 처벌자 특별법"초안이 마련되고 이어 10월23일 역사적인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이후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중앙청 205호실에서 본격적인 특위활동에 들어간다그러나 반민특위가 구성되었을즈음인 1948년 10월하순 당시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사찰과 부과장 홍택희,중부경찰서장 박경림,전임수사과장 노덕술 등이 공모한 반민특위 요원들의 암살음모 사건이 있었다 이사건은 당시 이들의 사주를 받았던 살인청부업자인 백민태가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그 진상이 백일하에 들어나기도 했다.반민특위를 와해시키려고 당시 기득권층이 얼마나 부심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암살대상자 명단에는 김웅진, 노일환,신익희,유진산,이철승,김두한,장홍염,김상덕,김상돈,김병로,권승렬,서순영,오택빈,홍순옥,최국현,서용길,서성달,곽상훈,김장렬 등으로서 반민특위 요원 혹은 이를 지지하는 강경론자들이었다.그후 반민특위는 정부의 집요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특위활동을 해나가는데화신 백화점 사장인 박흥식을 시작으로 드디어 검거에 들어간다 이어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최린,이광수,최남선 등이 연이어 체포된다
그러나 1949년 6월26일 반민특위의 정신적 지주이자 지지자였던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로 인해 사실상 반민특위는 급전직하 하게된다.그전에 이미 대한 정치공작대사건(국회프락치 사건)으로 특위 위원들의 대부분이 구속되었고 무장경관 50여명의 반민특위 급습 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이미 그힘을 상실하고 있었다.결국 반민특위는 공소시효를 1950년 6월20일에서 1949년 8월31일로 단축하고1949년 9월5일 반민특위 활동 종결 이어 9월22일 완전 폐지된다.
[반민특위 활동]1. 총조사건 682건,특별검찰부 기소 280건2. 영장발부 408건,검거 305건3. 특별검찰재판부송치 570건,재판종결 40건,실형언도 12건 (실형이 언도된 자들은 1950년 6.25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전원 풀려남)*. 외국 사례1. 프랑스 - 친나치주의자 사형2071건,징역 39900건
2. 벨기에 - 상동(上同) 55000건3. 네덜란드 - 50000건4. 일본 - 군국주의자 21만명 추방[ 참고 자료 ]1. 1960년 3월 제1공화국 말기까지 경찰계는 총경 70%,경감 40%,경위 15%,사복경찰 20%,정복경찰 10% 가 일경출신2. 광복군,독립군 출신들은 창군작업에서 배제됨
3. 일석 최능진(해방직후 경무부 부국장,독립운동가) 선생의 말" 한국경찰의 8할 이상이 친일파라면 백성의 8할 이상은 좌익이 된다"
4. 당시 주미대사 문정관이었던 그레고리 핸드슨의 증언"대한 정치공작대 사건 피고인 전원은 1949년 11월7일 첫공판일까지독방에 감금 심한 고문을 당하였고 이들중 2명은 유죄가 인정돼나그외에는 전혀 공산주의자들과 아무런 접촉도 없었다"
5. 반민특위 검찰관 서용길,반민특위 위원 장홍염은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은친일파들의 음모라 주장함
김상덕 위원장이 모교인 서울 경신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 중 6.25 전쟁 때 납북된 후 아드님인 김정육선생이 색깔론의 후유증과 생존을 위해서 시설을 전전하는 중에 삼천포 고등학교와 순조로운 대학생활이 아닌 어려운 상황에서 대학 공부를 마치고 결혼하기 까지 부친의 생사와 기일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민족21’에 게재된 재북 인사 묘역에 유해가 모셔져 있고 묘역 전경과 선생님의 묘소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부친의 기일을 모른 채 ‘음력 9월9일’을 골라 제사를 모시다가 기일이 4월 26일인 것도 확인 되었다.
< 재북 인사 묘역에 안치된 62명-묘역 앞줄부터-평양)>(강욱중 김경배 이구수 정인보 김옥주 황윤호 박윤원 김병회 송호성 이문원 안재홍 배중혁 원세훈 유기수 김효석 박철규 신석빈 김약수 조종승 박보렴 이만근 백상규 양재하 조헌영 김칠성 박승호 명제세 현상윤 김종원 백관수 허영호 박 렬 구덕환 이춘호 신성균 신상봉 설민호 권태희 김용무 김상덕 이광수 이상경 백승일 박영태 김장렬 오정방 김헌식 장연송 김의환 장현식 김종선 김동원 이종성 노일환 정인식 김이식 김구홍 이순택 김한규 고명우 신용훈 박성우)
미군정과 친미 이승만의 사주를 받고 하루아침에 친일 부일에서 친미 부미로 둔갑한 친일 부일 반민족 매국노들에 의하여 반민특위가 백주에 테러를 당하고 해산 당함으로써 이 땅에서 반민 배족 행위자들이 권력과 경제를 장악하고 반자주 반민족 반통일 및 ‘미국 은인론’의 세뇌 교육기능까지를 장악함으로써 그 뿌리와 현실적 우위를 오늘까지 영위해 오고 있다.
반민특위의 강제 해산은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이어지면서 국회마저 반민족 세력의 복마전이 되고 민족 자주성 파괴라는 천추의 한을 남겼다.
2차 대전 후 프랑스에서 꼴라보(친독 협력자)들이 ‘내재된 신념’으로 나치 독일의 앞잡이 노릇을 착실히 했는지 아니면 강요되었는지를 불문하고 사형에서 무기 기타 엄중한 처벌을 받음으로써 반국가 배족자들에 대한 응징을 철저히 수행하였다. 이는 꼴라보 숙청이 드골 대통령의 확고한 숙청 의지와, 좌우익의 당리당략을 초월한 협력과, 시민들의 집요한 요구로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조국의 암울한 피점령 시절(1940년∼1944년)에 나치독일 병사들과 희희낙락 놀아난 여자들은 해방 후 길거리에 앉혀놓고 그 아름다운 머리털을 빡빡 깎아버릴 정도였다.
공산 중국도 일제 침략 시 일본을 위해 간첩행위를 하거나 부일배들인 한간(漢間-친청, 친영, 친일 한인)들을 철저히 숙청하였으며 북한 역시 반자주 사대 민족반역 친일 부일배들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아직도 이 땅을 ‘광복’이나 ‘해방’이라 부를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 ‘민족문제 연구소’를 ‘제2의 반민특위’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 가고 있다.]
5월 11일 11시에 인천북성동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양키추방 공대위,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연방통추), 주한미국철수 운동동본부(주미철본), 민족정기 구현회, 사회개혁운동연합회 등이 통일관련(분단 60년)식민지 청산을 목적으로 집회를 열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집회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날은 집회 후 동상으로 진출이 기도 되었으나 집회허가에서 약속한 동상에서 좀 떨어진 광장에서 집회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다. 오히려 술이 좀 과했다고 생각되는 몇몇 중년 남녀가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은데 대해 경찰이 집회자들을 보호해 줄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본격적인 충돌은 지난 7월17일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등 일부 시민 단체가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인천 북성동 자유공원에서 동상 철거집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맥아더는 우리나라를 분단시킨 점령군 사령관" "국민들이 양키에게 속아서 거짓된 현대사를 배우고 가르쳐 왔다" 등을 주장한데 대해 재향군인회, 이북오도민연합회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이들을 ''빨갱이''로 규정하며 집회장 진입을 가로 막았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55주년을 맞은 가운데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 증폭되고 운동권 단체의 동상 철거 시위에 우익 단체가 물리력으로 대응하면서 격화 되었다. 해병대전우회 등 우익단체들은 이날 오후 인천 북송동 자유공원에서 ''맥아더동상 사수집회''를 갖고 최근 좌익 단체들의 연이은 동상철거 시도를 규탄했다. 약 2만명이 모인 집회에서 이들은 "맥아더 동상 철거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부인하는 친북.반미세력의 국가전복 음모"라며 "나라를 지키는 마음으로 동상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일부 극렬 단체간 충돌 정도로 여겨지던 이 사건은 지난달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한 인터넷 매체에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 라는 칼럼을 기고하면서 사회적 논란거리로 부상했다. 글에서 6.25를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 규정한 강 교수는 "집안싸움인 이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 끝났을 테고, 우리가 실제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강 교수 주장에 대한 네티즌들의 평가는 ''할 말을 했다''에서 ''지식인도 아니다''까지 극과 극으로 갈렸다.
고조되던 긴장은 지난 11일 좌우익 단체가 함께 모인 자유공원 집회에서 대규모 폭력사태로 비화했다. 이날 전국민중연대, 통일연대, 한총련 등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 4000여명은 길이 2~3m 길이의 죽봉을 휘두르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고 시위대와 경찰 수십 명이 부상했다. 대립이 격화되자 미국을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13일 교포 간담회에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동상은 우리의 역사다. 동상을 그대로 두고 역사로서 존중하고 나쁜 건 나쁜 대로 기억하고, 좋은 것은 좋은 대로 기억해야한다”며 상황정리를 시도했다.
이러한 상황은 전개는 그 근거가 ‘반 사대 자주적 통일론’과 ‘미국 은인 론’에 근거한다. ‘미국은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주고 6.25전쟁 때 우리를 구해준 은인이다.’. 라는 주장이 ‘미국은 조국 분단의 주범이고 아직까지도 정치 경제 군사 제 방면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라는 견해와 충돌한 것이다.
미국 은인 론은 미국으로부터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주장이고 그 반대의견은 미국으로부터 피해를 본 사람들의 주장일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민중들은 그 주장들을 가슴에 담아두거나 매카시 적 빨갱이 논리에 은연 중 세뇌되어 단순 가담하는 상태라 본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은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은 냉전 사고와 논리가 아직도 유일한 분단국인 이 땅을 짓이기며 사람들마저 짓이기고 있다.
그러나 민족 양심으로 판단 해 볼 때 몇 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었거나 그릇된 내재적 신념에 의하여 역사의 올바른 수레바퀴를 역회전 시키려는 안간힘에 불과한 것이다.
경술국치 95주년이 되는 8월 29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 홀에서 열린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1차 명단 발표 기자회견'에서 주요인물의 3,000여명의 명단을 발표 했다. 워낙 방대한 양이고 부족한 인력과 시간의 촉박으로 다소 틀린 기재와 인원수의 변경 가능성 때문에 3,000여명으로 잡은 것이다. 이 집회에서 박정희를 지지하는 모임에서 두 사람이 회견장 밖에서 민족문제 연구소 해체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렸다.
그 들은 백범선생 살해범 안두희를 끝까지 추적하고 그 배후를 규명하는데 신명을 바쳐온 권중희 선생과 칠순을 훨씬 넘긴 노익장의 민족문제 연구소 경기 남부 지부장 신용승 선생의 강성 준엄한 질책에도 불구하고 묵묵부답하는 침착성을 잃지 않는 대담성도 보였다.
또 국민행동본부, 자유수호국민운동 등 보수우익단체들이 31일 오후 정동 세실 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족문제연구소 해체를 주장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속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명단은 특정 인사를 표적으로 한 인민재판식 마구잡이 선정발표로 민족문제의 해결이 아닌 민족분열 책동에 불과하다." 국민행동본부, 자유수호국민운동, 대한민국 HID청년동지회 등 보수우익단체들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 발표에 반발하며, 민족문제연구소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31일 오후 서울 정동 세실 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신력 있는 기준 없이 자신들만의 좌파 이념적 잣대로 과거를 인질 삼아 살아있는 후손들의 가족들을 인격살인하고 민족분열을 조장한 민족문제연구소는 해체돼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청산과 아무상관 없는 <조선일보> 반대운동, 박정희 기념관 건립저지, 여중생 사망 추모 촛불집회 등에 앞장서고 반미운동의 중심에 서 있으며, 친북인사들이 이끄는 좌파단체의 총본부이다"고 못 박았다.
이어 "민족문제연구소는 29일 발표한 친일파 명단에 일제경찰 특무, 오장을 지낸 신기남·김희선·이미경 열린우리당 의원 부친들이 해외에서 활동했거나 계급이 낮다는 이유로 명단에서 누락시키는 편파성을 드러냈다"며 "2007년 최종 명단을 발표하겠다는 것은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적 죽이기 술수"라고 비난했다.
또한 이들은 "과거사를 들춰내는 것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친북세력을 막아내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며 "김정일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친북인사 명단을 수집 중에 있으며 곧 '친북·김일성 부자 하수인 명단'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는 "김정일 독재 정권을 지속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북한 인권에 대해 침묵하는 자들이 누구인가"라고 반문한 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노무현 대통령의 장인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신 대표는 "친북 인사들의 1차 명단을 조만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오마이뉴스)
9월9일 오후 1시 10분경 연구소 앞 인도에서 '새로운물결21' 등 박정희 지지모임 대표와 회원 약 10여명이 집회를 갖고 연구소 사무국장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한 뒤 두 시간여 만에 자진 해산했다. 이들은 임헌영 소장과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직접 면담을 요구하며 사무실 진입을 시도했으나 연구소 직원과 건물관리인 등의 만류로 진입하지 못하고 약 10여 분간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이 집회를 벌이는 동안 이들이 동원한 소형트럭에서 연이어 군가가 흘러나와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졌으며 흥분한 박정희 지지자들로 인해 잠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이들은 또 관할 경찰서인 청량리경찰서에 1개월간 집회를 갖겠다고 신고했으며 개정 집시법에 따라 집회만료시점에서 또다시 집회연장신고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련의 이러한 신친일파의 출현은 ‘박정희 경제개발 공적 론과 일본 우방 론’에 기인한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공적 론은 그 공적 론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시기에 개발 독재론이 아닌 다른 대안은 없었겠는가 이고 그의 잔인무도한 군사 독재와 친일 행적의 죄과를 과연 상쇄할 수 있는가이다.
인간의 삶이 먹고 마시는 일이 인간의 고귀한 사람다운 삶과 고귀한 도덕성을 넘어설 수 있느냐는 본질적 문제가 있다. 황금만능과 폭력으로 목걸이를 차고 주인의 발등에서 던져주는 먹이 몇 쪽으로 행복을 운위하는 쉐퍼드의 생존이 과연 바람직 한 것인지? 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공산주의 국가 소련과 중국을 겨냥하고 한반도를 분할하였으며 반공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적국이었던 일본을 동맹국으로 묶을 수밖에 없었다.
그 틈새에서 우리는 분단되었고 식민지의 연장선상에서 민족의 원수 일본이 ‘우방’으로 둔갑하고 6.25전쟁으로 군수 특수를 누린 미일 경제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미국 은인론이고 일본 우방론이다. 이제 4차 6자 회담에서 어느 정도 북미의 협상의 물꼬를 텄으며 11월에 있을 5차 회담에 기대를 걸면서 살얼음을 딛는 듯한 긴장감을 숨길 수 없다.
우리가 단결된 힘을 보여줄 때이다. 앞으로 불어 닥칠 ‘북한인권법’과 관련되고 부대 추가되는 엄청난 미국 돈의 위력이 미국 은인론자들의 손에서 어떻게 요리될 것인가는 미지수다.
김상덕 위원장님 아드님인 김정육 선생은 현재 좁은 아파트 방에서 부인의 지병을 치료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노인이다. 그는 일본과 만주를 누비며 싸워왔고 반민특위 위원장으로서 악전고투하신 아버님의 공적에 비해 그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아버님이 반민특위 해체를 반대하며 수차례 압력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시니까 늦은 밤인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 보니 이승만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우리 집을 방문 중이었어요. 그러나 계속 굽히지 않으시니까 테러와 권력으로 강제해산 시킨거죠’.라고 속 얘기를 해주었다.
<김정육(70·경기도 양주시)씨는 “전쟁이 터지고 무척 덥던 여름날”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위원장이었던 아버지 김상덕(1892~1956·1990년 독립장 서훈) 선생은 서울 혜화동에 살던 먼 친척 집에,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김씨는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가 있던 서울 중구 필동3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건강이 염려됐던 아버지는 1950년 8월께 집에 들렀는데, 지프를 타고 온 청년 2명이 “남에서 훌륭한 일을 하셨으니 이제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하며 아버지를 데려갔다.
반세기 동안 김씨는 부친의 기일을 모른 채 ‘음력 9월9일’을 골라 제사를 모셔야 했다. 그는 “아버님 묘소를 찾아 큰절 한번 올리고, 술 한잔 따르는 게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 사업회(회장 김자동)가 광복 60돌을 맞아 해방 정국의 혼란과 뒤이은 전쟁 통에 북으로 옮겨가 숨을 거둔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 유가족들의 방북 참배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북에 모셔진 ‘남쪽 인사’들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8기, ‘재북인사들의 묘’에 62기 등 모두 70여기다. 이들은 남북한 양쪽 모두가 외면한 ‘경계인’으로, 광복 전 독립운동의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으로 쓸쓸히 사라져 갔다. 55년만에 접촉승인 났으나 남북대화 끊겨 성사 불투명“죽기전 마지막 소원이오…” 참배 대상으로 정해진 임정 인사들은 김규식 학무총장, 김붕준 의정원 의장, 김상덕 문화부장, 김의한 비서, 손정도 의정원 의장, 송호성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엄항섭 선전부장, 유동열 참모총장, 윤기섭 의정원 의장, 조소앙 외무부장, 최동오 법무부장(가나다순) 등 11명이다. 기념사업회 쪽에서는 지난해 12월 북한 접촉 승인을 받는 등 통일부의 협조 아래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왔지만, 북의 ‘핵무기 보유 발언’ 이후 대화가 끊기는 바람에 사업 성사 여부를 놓고 애를 태우고 있다. (한겨레신문).
이번 김정육씨의 8.15방북이 내년인 2006년으로 미루어 졌다고 본인인 전해주었다. . 현재 모교이며 교장으로 재직한 경신학교(혜화동 소재)역사관에 그 분의 관한 기록과 사진이 걸려 있지만 그 사진이 동료들과 같이 찍은 희미한 흑백 사진을 오려 내어 확대 한 것이어서 아쉽다. 김상덕 위원장 흉상제작 작가 조월희 선생과 경신 중학교 교장을 지낸 고춘섭 선생 과 김정육 선생 그리고 필자가 참석하는 자리를 가졌고 기록과 사진 및 각 급 학교 역사교사 국어교사 사회교사 등에게 교안에 반영할 반민특위 자료와 김상덕 위원장님에 대한 소개 자료를 준비하고 김상덕 위원장님 기념 사업회 설립추진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사실상 방대한 일이어서 제2의 반민특위라 할 수 있는 민족문제 연구소나 디지털말, 민중의소리, 오마이뉴스 등 언론기관에서 추진에 협조할 것을 기대한다.
<붙침> 1. 김상덕 위원장 소개(사전) 2.KBS인물 현대사 김상덕(KBS1TV)
<붙친> 1.[金尙德, 1891.12.10~(납북)] <요약>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별칭 일명 영주, 상철, 재두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경북 고령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90) <본문> 이명(異名)은 영주(令州), 상철(相徹), 재두(在斗)이다. 1891년 경상북도 고령(高靈)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3월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東京]에 유학하였다.
1919년 1월 재일 유학생 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최팔용(崔八鏞)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 2월 8일 도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독립선언식을 거행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그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동방혁명대표자대회(東方革命代表者大會)에 참가하였고,
1923년 2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改造派)의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에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반석현(磐石縣)에서 조직된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의 중앙집행위원 책임비서로 선임되어 기관지인 《농보(農報)》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2년 한국독립군 참모, 1935년 7월 한국독립당 재건파(再建派)가 창당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1937년 중국에서 결성된 민족해방운동단체의 하나. 상해임시정부의 좌익정당이다.
1931년 이후 일본군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에 있던 항일운동가들은 분열상태의 해외운동진영을 통일하고자 1932년 10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동맹은 김원봉(金元鳳)의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 등 9개 단체가 합동하여 결성한 조직이었다.
1935년 이 동맹을 기초로 하여 다시 <한국민족혁명당>이 태동하였고 이로써 김구(金九) 일파를 제외한 단일당이 형성되어 종래의 각 민족혁명단체의 분열은 해소된 듯했다. 그러나 한국민족혁명당의 지도부는 군사부장에 지청천(池靑天), 특무부장에 이범석(李範奭), 당무부장에 김원봉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김원봉파와 지청천파 사이의 상호 반목이 심하였다.
1937년 전당대표대회를 개최하여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하였으나 2개월 후 지청천파가 이탈, 독립하여 <조선혁명당>을 결성함으로써 종래의 한국민족혁명당은 김원봉파의 조선민족혁명당과 지청천파의 조선혁명당으로 분열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의열단을 중심으로 1937년 조직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 조선의용대를 별도로 결성, 중국의 항일투쟁대열에 함께 참가하였다. 이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이 최창익(崔昌益)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같이 조직한 실질적인 항일무장투쟁부대였다.
후에 이들 중 최창익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용대 일부가 무정(武亭)의 연안계 항일무력과 합동하여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로 통합되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여 그 안에서 명실상부한 제1야당이 되었으나, 임시정부 내부에서 좌우의 파벌싸움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파국 직전까지 몰고 갔다.
1946년 6월에 김원봉을 위원장으로 하는 <인민공화국>으로 개칭, 통일전선기구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하였다.)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2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참여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또 1943년 4월에는 임시정부에서 구성한 선전위원회 위원이 되어 '조선민족혁명당창립경과급기약사(朝鮮民族革命黨創立經過及其略史)'를 쓰기도 하였으며, 1944년 4월부터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과 문화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 제1차 임시정부 귀국단으로 귀국,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의 대의원과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의 총무부장을 지냈고, 1948년 5월 민족통일총본부 소속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KBS1TV 현대인물사 김상덕 ‘다시보기’를 참작할 것. 녹화테입 구입가능.
<붙침> 2, KBS 인물현대사 KBS Home >1TV >시사교양 >인물현대사 >다시보기 “미완의 역사, 친일청산” - 반민특위 김상덕 방송일 : 11월 12일(금) 22:00∼23:00 /KBS 1TV 연출 : 김정중PD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그는 1919년 일본 유학생 시절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이 일로 옥고를 치르고 그는 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김상덕은 1944년 임시정부의 문화부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1948년 제헌국회 때 고향인 경북 고령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구성되었고 친일파의 처단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과정이었다. 김상덕은 반민특위의 위원장으로 선출돼 해방 직후 민족의 과제였던 친일 청산의 과업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반민특위의 수난과 좌절 반민특위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시작으로 친일 문학인 이광수, 33인의 한 사람 최린의 체포 등 여론의 주목을 받으며 역사적 과제를 이루어나간다.
하지만 반민특위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친일파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특위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으며, 국무회의에서 체포된 친일파의 석방을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의 관사를 방문해 직접적인 관여를 하기도 했다. 색깔 공세도 이어졌다. 친일세력은 공산당과 싸우는 투사로 변신했다.
반공투사인 자신들을 잡아넣는 반민특위는 공산당이라는 논리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친일청산에 적극적이던 소장의원들이 체포되는 상황도 연출된다. 무산 되어버린 친일파 청산 친일 경찰 노덕술의 체포는 반민특위의 험난한 앞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앞장 섰던 친일경찰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노덕술의 체포는 경찰 전체의 위기로 다가왔으며 경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의 특경대원을 체포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힘을 잃기 시작했고 친일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 역시 무산되고 만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계속되는 압력과 탄압에 민족의 과제였던 친일 청산을 이루지 못하고 사퇴하고 만다.
독립운동의 커다란 상징이며 친일세력 청산의 커다란 후원자였던 백범 김구마저 암살되면서 친일청산의 목소리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체포됐던 친일파들은 하나둘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민특위 관계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피해 숨어 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체포됐던 친일파들은 하나둘 풀려나고 민족정기는 회복되지 못한다.
이들은 다시 권력과 결탁하고 이제 더 이상 친일청산을 언급 조차할 수 없게 됐다. 다시 친일파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루어져야 하는 친일파 청산의 꿈 김상덕 역시 반민특위의 역사와 함께 그렇게 잊혀졌다. 친일경력자가 독립운동가를 국가유공자로 심사하고 때로는 스스로 독립운동가였음을 자처하던 시대. 김상덕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1990년에서야 겨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납북인사였기 때문이었다.
김상덕의 독립운동은 복권이 되었지만 실패와 좌절로 끝난 반민특위 활동은 아직 복권되지 않았다. 이제 김상덕은 우리에게 자신이 못 다한 친일청산의 역사를 다시 복권시켜달라 말하고 있다. 친일파들은 일제시대 때는 전 국민이 친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리고 지식인인 자기들에게 올 수밖에 없는 수난이었다고 변명한다.
60년이 지난 지금,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을 제정해 다시한번 친일 역사 청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처럼 진상규명에 대한 논란들이 벌어지고 있고 여전히 친일파들은 그때와 같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실패로 끝난 반민특위와 김상덕 위원장을 통해 반복되는 오늘의 현실을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