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과 천상병 시인
김 난 석
어느 글벗들과 점심 약속이 있어서 인사동엘 들렸다.
지하철 안국역에서 내려 찾아가노라니
작은 골목에 이불이 널려있었다.
장마철에 습습해서 그런 걸까?
먼 생각이 떠올랐다.
천상병 시인이 인사동 거리를 떠도는지라
극작가 신봉승이 자기 집 문간방에 들였다 한다.
천상병은 막걸리를 좋아하지만 하초가 약해
밤마다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는데
그래서 신봉승의 부인이 그걸 내다 말리는 게 일이었단다.
그건 괜찮았지만
신봉승이 어느 날 늦게 들어오는데
천상병이 그의 어린 딸을 앞에 앉혀놓고 희롱하고 있더란다.
술 한 잔 따르게 하고 동전 하나 주고
또 한 잔 따르게 하고 동전 하나 주고...
이걸 본 신봉승이 화가 치밀어 쫓아냈다는데
이건 나의 사부 성춘복 시인이 들려준 이야기지만
성춘복 시인은 천상병시인이 객사했을 때
그의 시를 주워 모아 시집을 내주기도 한 우인(友人)이다.
저 이불은 간밤에 누가 덮고 잤을까?
지도는 없는 걸로 보아
천 시인이 다녀간 건 아닐 테지만
누군가가 꿈은 수놓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이불속에서 발가락 장난하던
먼 먼 그 시절이 그립구나.
꿈을 수놓기 전의 원형 물감을 흘리던 시절이...
불란서의 철학자 들뢰즈에 의하면
인간은 표면으로는 수목형(樹木型)의 사고를 하지만
내면으로는 리좀형(Rhyzome 型) 사고를 한다고 했다.
수목형은 나뭇가지가 하늘 향해 선연하게 갈라져 벗듯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 등을 분명하게 가리지면
내면으론 땅 밑 나무뿌리처럼
이리저리 얽히는 사고를 한다는 거다.
그게 리좀형 사고다.
어린 시절 한 이불을 덮고
얼굴로는 도리(道理)를 이야기하고 챙기면서도
이불속 발가락으론 이것저것 가릴 것도 없이
서로 얽혀 꼬무락거리던 일을 생각해 보면
나의 사고(思考)는 그래서 이중성격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이젠 한가한 날
이불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송보송하게 볕에 말려야겠다.
(2023년 7월 어느 날에)
위 글은 지난날의 단상이다.
세월은 흘러 천상병 시인도 타계하고
신봉승 작가도 타계하고
성춘복 시인도 지난해에 타계했다.
세 분 다 문인이었지만
한 분은 어려운 생활을 하다 객사(客死)했다는 소문까지 났었고(천시인)
또 한분은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했고(신봉승)
다른 한 분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감았다.
한 분에 대해선 타계한 지 20여 년 뒤에
이름 모를 이들이 모여들어 추모제를 올렸고
다른 한 분은 가까운 지인들이 모여 영결식을 했고
또 다른 한 분에 대해선 함께 문학생활해 온 문인들이
추모시집까지 내드렸다.(성춘복)
한 분에 대해선 그를 기리는 대중행사가 있을 뿐이지만
다른 한 분은 사후를 조용히 마무리 했고
또 다른 한 분에 대해선 그를 기리는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이름하여 '성춘 문학상'
삶의 내용에 우열이야 없다지만
경제적으론 생활에 격차가 컸는데
나는 그게 마음이 아프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그게 당사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남은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탄생된 예술작품이
주목을 받는다.
그것도 사후에 말이다.
일반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에겐 박정하다.
경쟁심의 발로가 아닐까...?
허나, 죽으면 연민의 정을 한껏 쏟는다.
경쟁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나만의 졸열한 생각이지만 말이다.
삶의 이야기 방 선남선녀들이시여!
당장 주목받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마시라.
그저 꿋꿋이 살아가면서
선업(善業)을 많이 남기시라.
2025. 2. 24. 도반(道伴)
첫댓글 착하고 티없이 맑은 천상병 시인의 재미있는 이야기 잘읽고 있습니다.
저보다는 연세도 있으시고
아직도 마음에 맑고 순수함을 추구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시인과 예술가는 한시대를 앞서 미리보고 미리알고 미리 말 합니다.
모두가 돈과 물질이 사람보다 더 귀하고 쫓아가는 세상에
자식도 친구도 이웃도 멀어져가는
이시대가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문인들은 대개 어려워요.
문학성보다 마케팅에 능한 분들은 그래도 낫고요.
천시인을 도와준 유일한 분이 신봉승으로 압니다만 그것도 천시인이 차버렸지요.
오늘까지도 천상병시인의 이야기가 이어지네요
참으로 암울한 그 시대였습니다
동백림사건은 국가가 저지른 중범죄입니다
천상병시인은 객사한 것이 아니구요
한 때 행려병자로 오인받아
정신병원에 입원 조치되었으나
살아 나왔지요
이후 목순옥여사를 만나 결혼하고
21년을 더 살다가
1993년에 간경화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의정부 장암동에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고택을 놓고
의정부시가 복원을 주장하지요
고택은 이미 태안 대야도로 이전됐습니다
천상병시인은 객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목순옥 여사는 이미 1985년부터
인사동에서 귀천카페를 운영할 때입니다
2010년 돌아가실 때까지...
맞아요.
한때 객사했다고했지요.ㅎ
위사진 하나가 인사동 그 찻집 앞에서 찍은거고요.
오해할분이있을거같아서 본문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도반(道伴) 맨 위의 이불사진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장의 사진은 보이질 않습니다 ㅜㅜ
@청솔 제 컴에는 보이는데요.ㅎ
@청솔
@도반(道伴) 잘 보았습니다. ^^*
뒷쪽에 천도교회당 수운회관인가요?
@청솔 그럴겁니다.
어릴적
유난히 꿈을 많이꾸던 나는
초등학교삼학년까지
이불에 그림을 그리곤 했지요
늘 중얼거리며
들판의 꽃들과.산속의 나무와
애기하던 아이.
어찌나 심한지.절에가실때 꼭나를
데리고 다녔던.울할머니.주지스님이
나를 뻔히 바라다보며.눈이참크고.이쁘구나. 앞으로 잘살낍니다.
지금 나는 잘살고있지요.사회 생활도
사십년가까이하면서.
늘.상상력으로.긍정의힘을 얻으면서요.
한곳에 집착해.버림받다시피한.그분들을
이해할수는 있지만.
인생한번뿐이니.
타협하고 잘지내는것도 좋으련만.
고호.천상병 시인을 그리며. .
옆에서도 관심을 가져야겠지만 자신을 보존할 최소한의 능력은 있어야겠지요.
여하튼 연민의 정이 많이 가던 시인입니다.
지금도 인사동에
귀천이 있는지요.
예전에 귀천에 갔을때는
목순옥여사의
조카가
운영하고 있다했는데~~~
지금은 없어요.
천 시인을 생각 할때면 한하운 시인이 겹쳐 떠 오릅니다
애처로운 시인님들입니다ㅜㅜ
한하운시인은 한센병 때문에 고생했지요.
몸이 많이 약해지니 소변이 느낌도 없이 나오더군요.
옷과 침대가 젖으면 그때서야 알게됩니다.
유관순님이 고문으로감옥에서
눈을 뜨고도 소변을 흘렸다고 하는데
알콜중독자 천상병 시인도 그랬군요.
저는 시를 싫어하여 몇몇 유명한
시인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요즘 건전한 나태주 시인님 글은 괜찮아요.
그러시군요.
나태주 시인과 함께 찍었네요..ㅎ
사범학교 제 1년 후배인데요.
@도반(道伴) 어머나~~~~
나태주 시인님이 후배시군요!
우리 동네 두 번이나 강연 오셨어요.
그 때마다 가서 강연 들었는데
참으로 소탈 하시고 진정성 있으십니다.
저희집은. 의정부 에스케이 아파트인데요 지은지
17년 되었구요
벽보에는 모두가 천상병님 글과 그림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되니. 흐리해져 갑니다
참 마음이 안타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