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0월, 12명의 미결수가 집단 탈주했다.
탈주범들은 8일간 연쇄 인질강도 행각을 벌이며 서울 도심을 휘저어 놓았다.
남가좌동의 한 주택에서 마지막까지 버텼던 주범 지강헌.
그는 인질들에게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보태 17년 썩을 것을 생각하니
아득해서 탈주했다”고 말한 뒤 자기 머리에 권총을 쏘았다.
그가 남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은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1983년 법원 구치감 창문을 뜯고 탈주했던
‘대도(大盜)’ 조세형도 “징역 15년에 추가로 보호감호 10년까지
선고받아 희망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1998년 재심재판에서
“먹방이라 불리는 감호소 독방에서 수갑을 찬 채 몇 달 동안 두들겨
맞으며 지냈다”고 주장했다.
그해 9월 인권단체들이 청송감호소를 직접 찾아갔지만
그가 말한 ‘징벌방’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청송보호감호소는 1983년 문을 열었다.
삼청교육대에 붙잡혀 들어가 악명 높은 훈련과 교육을 받았던
2400명이 감호소에 수용됐다. 그 뒤 지금까지 거쳐간 수감자가 1만5000명.
1980년 제정된 사회보호법에 근거해 재범 위험이 있는 상습범에 대해
징역형과 별도로 강제구금을 해왔다.
‘미래의 범죄’(pre-crime) 가능성에 대한 처벌인 것이다.
보호감호를 선고하는 판사는 공상과학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범죄를 예언해 미리 봉쇄하는 ‘예지자’의 역할을 맡는 셈이다.
‘누범자(累犯者)’가 대상이다 보니 감호처분을 받는
사람의 70% 이상이 절도범이다. 재작년 인권단체 기자회견에
나왔던 40대 남자는 4차례에 걸쳐 20여만원을 훔쳤다가
청송감호소를 포함해 20년8개월을 복역했다고 하소연했다.
인권단체들은 “라면 몇 상자, 쌀 몇 포대를 훔치는 좀도둑이
사회에 무슨 위협이 된다고 곱 징역을 살아야 하느냐”며
보호감호 폐지를 주장해왔다.
‘교정할 수 없는 상습 범죄꾼들로부터 선량한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던
정부도 결국 보호감호제를 없애기로 했다. 법무부는 이미
가출소(假出所) 기준을 크게 완화해 2년 전 1600명이던 수감자가 지금은
260명으로 줄어들었다.
작가 김주영은 “청송 중에서도 감호소가 있는 월전(月田)이라는
동네에서 자랐다”고 했다. 달 뜨면 달빛이 골짜기에 고여 ‘달밭’을
만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첫댓글옛날엔 내 고향이 청송이라면 사람들이 아! 좋은 곳이군 하였는데 감호소가 생기고부터 고약한곳으로 인식되어서 아주 싫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주영은 주로 우리 고향가는 읍 진보라는 곳을 중심으로 글을 쓴것을 읽었기에 더욱 좋아한다 진보 그작은 시장 난전꾼들...
첫댓글 옛날엔 내 고향이 청송이라면 사람들이 아! 좋은 곳이군 하였는데 감호소가 생기고부터 고약한곳으로 인식되어서 아주 싫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주영은 주로 우리 고향가는 읍 진보라는 곳을 중심으로 글을 쓴것을 읽었기에 더욱 좋아한다 진보 그작은 시장 난전꾼들...
보호감을 페지하지말고 금뺏지달고 부페한놈들에게 적용해야 하는데 씨 ~이~ 청송 약수가 밥지어먹어도 참좋고 기냥마셔도 위장병에 좋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