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지애와 태양이의 과거 이야기♡ part.5]
믿기 싫은 말을 들으면 부정하면 그만이고, 믿기 힘든 말을 들으면 안 믿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게 현실일 때는 얘기
가 달라진다. 아무리 부정하고 믿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하는 것. 그게 우리가 남매라는 사실이다.
집에 윤 회장이 다녀가고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몇날 며칠 하루 웬 종일 내가 작업하는 방에만 쳐박혀서 여태까지
그렸던 지애의 그림들을 내 손으로 다 찢었다. 그러다 보고 싶으면 또 그리고, 그리다가 이럼 안 되지란 생각이 들면 또 찢
고... 그러다 또 그리워지면 이번엔 내 머리 속에 그리고, 그리다가 슬퍼지면 다 말라버린 목소리로 울어버리고....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밥도 먹지 않고 그리고 지우는 일만 계속 반복하다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렇게 울었는데도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지, 지애 목소리 들으니까 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쯤하면 이제 안
울고 목소리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화한 건데. 병신.... 도대체 얼마나 더 울어야해 김태양. 도대체 얼마나 더 아파야
정신 차릴래 너.
-태양아! 김태양!! 어? 얘 왜 말이 없어. 여보세요??
"...뭐해."
-어?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완전 우리 할아버지 목소린데??
할아버지...? 피식. 우리 할아버지라는 말에 태양인 그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피식 웃는다. 지애가 친할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친할아버지가 아니였고, 지애가 친아빠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친아빠가 아니였다. 만약... 만약 엄마가 이혼하
지 않고 잘 살았으면, 어쩌면 자신도 지애 아빠에게 '아빠' 라고 부르며 살았을 거지 같은 현실. 지애는 평생 몰라야 할 슬
픈 현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냥 감기."
-쯧쯧... 약 먹었어?
"응."
-아, 나 심심했었는데~ 너 감기면 나랑 못 놀아주겠네!?
"응... 나중에."
-히유... 어쩔 수 없지 뭐. 몸조리 잘 해!
"응..."
언제나처럼 지애가 먼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끊어진 전화기에 대고 길게 입을 맞추는 태양이. 이게 마지막이였
다. 살아서 지애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지애를 그리워하는 것도.... 며칠동안 어렵게 구한 약들을 손바닥 위로 쏟아부으며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수 많은 약들이 아프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에도, 마지막으로 눈물 한방울이 흐르는 순간에도..
어김없이 떠오르는 건 오직 지애 얼굴 뿐이여서, 더 슬프게 눈을 감는다.
.
.
.
"너 또 어디 갔다와."
"...."
"김태양!!"
첫 번째 자살시도 후, 병원에서 퇴원한지도 벌써 일주일. 밤마다 밖에 나갔다 오는 태양이가 어딜 갔다오는지 안 봐도 너무
뻔해서 요즘 신경이 날카로워진 수란은 화난 목소리로 태양일 붙잡고 늘어진다. 예전처럼 살갑지도 않고, 집에선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렇게 살아도 죽은 것처럼 행동하는 아들이 너무 걱정 되지만,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너무 너무 아프지만 엄마라
는 이름으로 어쩔 수 없이 자꾸 닥달하게 되는 수란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아들을 잃을 순 없으니까...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엄마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태양인 일주일만에 처음으로,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엄마..... 나 죽고 싶어."
근데 세상이 날 놓아주지 않아. 그럴거면 버리지라도 말지, 비겁하게 놓아주지도 않아.
"너... 그게 엄마 앞에서 할 소리야? 제발 정신 차려!!"
"정신 차려도 안 되는 걸 어떡해. 눈 감아도 보이는 걸 어떡해. 안 보려고 하는데, 잊어버리려고 하는데. 자꾸... 생각나
는 걸 어떡해."
잊으려다가, 지우려다가. 그게 안 되서 죽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되면 난 어떡해. 안 보면 살 수가 없는데, 보지도 못하
게 하면 난 어떻게 살아. 멀리서 보기만 하는 건.... 괜찮잖아. 몰래 숨어서 보는 건, 상관 없잖아.
"너희 남매야."
"...알아."
"세상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고 싶어!?"
"...상관 없어."
'짜악-!!'
처음이였다. 그동안 한 번도 아들의 뺨을 때린 적이 없던 수란이, 오늘 처음으로 아들의 뺨을 때렸다. 제발 정신 차리라고,
미친 소리 그만 하라고, 나약해지지 말라고.
"잊어. 무조건 잊어! 그리고 살아. 지애 없이도... 예전처럼 살아."
"못해."
"너 진짜..!!"
"엄마도 못 했잖아!! 아빠 못 잊어서 지애 아빠랑 이혼하고 다시 아빠한테 온 거잖아. 엄마는 못하는 걸 왜 나한테 하라고
해? 내 사랑도 사랑인데, 왜 엄마 사랑만 사랑이라고 하냐고!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나도 잊고 싶은데, 그
만 하고 싶은데!! 안 되는 걸 어떡해. 평생을 남인 줄 알고 살았는데, 이제와서 누나라고 하면... 뭐가 달라져? 사랑해도
되는 줄 알고 사랑했는데, 이제와서 안 된다고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엄만 그럴 수 있어? 바로 포기할 수 있어?"
울면서 소리치는 태양이의 말에, 수란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안아줄 수도 없었고, 예전처럼 편을 들어줄
수도 없었다.
"난 못해.... 절대 못해."
"...."
"나도 힘들어. 진짜 죽을 만큼 힘들다고.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내버려둬."
나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안 되는 거니까, 제발.
"오빠.... 우리 그냥 가자."
"...."
또 3주가 흘렀다. 태양이가 처음 자살 시도를 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주가 흐르고 그 짧는 시간 동안 태양인 자살 시
도를 두 번이나 했다. 처음에 약을 먹었을 땐, 지애의 환영이 떠나는 태양일 붙잡았고. 두 번째 손목을 그었을 땐, 지애의
환청이 점점 희미해지는 태양이 숨 소리를 붙잡았다. 그래서... 또 이렇게 살아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남매라는 사실을 알아버린지 겨우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날. 영혼을 잃은 얼굴로 까만 정장을 입은
채 부유층 사람들이 북적이는 연회장에 와있는 태양이. 미니 드레스를 입은 햇살이가 태양이의 손을 잡고 그냥 가자며 계속
보채지만, 어쩐일인지 그 자리에 서서 꿈쩍도 안 하는 태양이다.
한편 지애는, 무릎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하얀색 쉬폰 드레스를 입고서 아빠의 손을 잡고 태양이가 있는 연회장 안으로 들
어오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한쪽 볼에 왕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서, 이런 곳 분위기는 익숙하다는 듯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 곳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난 그냥 시간만 떼우다 갈 거야."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싫어!"
"자꾸 철 없이 굴래?"
"따라와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
"너 이제 애 엄마야. 라희가 뭘 보고 배우겠어?"
"....쳇. 나 화장실."
"아빠 먼저 들어가 있을께. 딸~"
"흥."
오늘도 역시 오기 싫은 자리에 억지로 온 걸 티내 듯이 콧방귀를 뀌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지애. 그래도 오늘은 어쩐일
인지 평소보다 덜 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준수였다. 어쨌든 요조숙녀처럼 차려입고 말괄량이 같은 걸음걸이로 화장실에
들어가다가, 이제 막 반대로 화장실을 빠져나오는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고.
"어...? 안녕하세요!"
태양이의 엄말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좀 의외긴 했지만, 오랜만이라 반가운 듯 곧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지애. 그리고
그런 지애를 보고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는 걸 티 안나게 몰래 훔치며 조금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주고 급하게 화장실을 빠
져나가는 수란. 왠지 자길 보고 당황하는 것 같은 태양이의 엄마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다
시 로비로 나오는 지애다.
그리고, 바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혼자 비상구 계단에 앉아서 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 기다리며 시간을 떼우다가.
왕사탕이 입 안에서 다녹아 사라진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우리 별이, 예쁘게 잘 키워줘서 고마워... 이름이 지애라고 했나?"
계단을 내려가던 지애 귀에 정확하게 들리는 너무 익숙한 목소리. 괜히 불안한 심장을 졸이며 천천히 문 뒤로 귀를 기울이
던 지애는 살짝 벌어진 문틈 사이로 아빠와 태양이 엄마의 모습이 보이자 얼른 두 손으로 입을 가린다. 쿵. 쿵. 갑자기 미
친듯이 떨리는 심장.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지...? 저건 또 무슨 소리야. 갑자기 멍해지는 정신에 다른 대화 소리는 다 놓쳐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세개 저으며 다시 문 밖의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지애.
"이미 다 지난 일인데 미안할 게 뭐있어. 근데...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랑 화해했어."
"회장님이랑?"
"응... 언제까지 천륜을 끊고 살 순 없잖아."
서로 격식이 없는 말투를 봐선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처음에 우연히 들었던 말 빼곤 조금도 이상한 내용의 대
화가 없는 것 같았는데, 천륜이란 말에 갑자기 머리가 멍- 해지는 느낌.
지애는 엄마를 단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지만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은 다 알았다. 하지만 지애가 알고 있
는 건 잘못 된 정보가 많았다. 어린 나이에 정략 결혼을 해서 거의 1년만에 집을 나가고, 그 이혼으로 인해 친정에선 버림
받고, 쌍둥이 중 자신만 버리고 간 책임감 없는 여자. 적어도 지애는 자신의 엄마라는 존재를 딱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빠.... 별이가 누구야?"
"지애야!"
"....혹시 그거, 나야?"
바로 코 앞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는데만 10초는 걸린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지만, 두
분 다 놀래는 걸 보니 아마 내가 생각하는게 맞나보다. 하... 실성한 사람처럼 피식 피식 어이없는 실소가 터지고, 갑자기
떠오르는 태양이 얼굴에 눈물이 주욱- 흘렀다.
"....태양이도 알아요?"
원래는 엄마를 만나면, 나 왜 버렸냐고 그게 제일 먼저 따지고 싶었다. 나 말고 다른 애도 있었다면서 왜 하필 나였는지 그
게 제일 궁금했다. 아빠 말로는 그게 다 나를 위한 것이였다고 했지만, 이유야 어쨌건 날 버린 그 사람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평생 미워하고 가슴 아파하던 엄마라는 사람이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남자의 엄마였다니. 내
가 그렇게 좋아하던 남자가 같은 배를 타고 나온 쌍둥이 동생이였다니.... 너무 기가 막혀서 눈물 밖에 안 났다.
태양이랑은 다르게, 적어도 자신이 쌍둥이였다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던 지애는. 나머지 쌍둥이 동생이 태양이라는 걸 알
고 점점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자신은 이렇게 알았어도 태양인 절대 몰랐으면 하는 바램이 너무 간절했다. 지애의 눈이 너
무 간절해 보여서일까, 태양인 아직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는 수란의 눈에 또 눈물이 고여간다.
왠지 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만 같아서. 못난 엄마 하나 때문에 두 자식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준 것
같아서 도저히 울지 않곤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연회장 구석 자리에 아무 표정 없이 앉아있던 태양인.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에 지애 번호가 뜨는 걸
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핸드폰을 귀에대고 연회장 밖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건물 입구에 등을 돌리고 서있는 지애
의 뒷모습을 보고 우뚝 자리에 멈춰선다. 거의 한 달만에 보는 지애였지만, 뒷모습만 봐도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태양아.... 나 노래 불러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달라고 말하는 지애. 절대 노래나 부르고 있을 기분 따위가 아니였음에도 불
구하고, 축 쳐진 지애의 뒷모습을 보니 노래를 불러서라도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었다.
"무슨 노래?"
-그냥, 아무거나...
바로 20미터 뒤에 있는데도, 지애는 태양이가 있는 줄 모르고. 태양인 지애가 뒤돌아보지 않길 바라며 그 자리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노랠 부른다.
"곰 세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
-....뭐야 그게~
아무리 아무 노래나 불러달라고 하긴 했지만, 뜬금 없이 동요를 불러주는 태양이 때문에 울다가 웃어버리는 지애. 귀여운
곰 세마리라는 노래가 이렇게 슬프게 들릴 순 없었다.
-태양아...
"응."
-내가... 옛날 얘기 해줄까?
"...옛날 얘기?"
-응...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옛날 얘기.
너는 끝까지 몰라야 할, 너와 나의 슬픈 이야기....
-옛날에 불쌍한 천사가 있었는데. 그 불쌍한 천사가 악마를 사랑하게 된 거야.... 그리고 어쩌다가 악마도 천사를 사랑하
게 됐는데, 둘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대. 정말 정말 사랑했는데.... 너무 많이 사랑했는데. 절대... 만날 수가 없었대.
"왜...?"
-하늘이 노해서 천사는 해가 되고, 악마는 별이 되버렸으니까.
"...."
'왜' 라고 묻기 전 이미 이유를 알아버려서.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했던 옛날 이야기가 자신들의 얘기인 걸 알아버려서
조용히 눈물을 삼키는 태양이. 어떻게 알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지애의 우는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들려와 가
슴이 에이는 듯한 아픔을 느끼는 태양이다. 넌... 절대 모르길 바랬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조금씩 흔들리는 지애의 어깨를 얼른 가서 안아주고 싶었지만, 한 걸음 다가가다 곧 멈춰버리고는 애꿎은
주먹만 꽉 쥐며 피가 나도록 자신의 아랫 입술을 세개 깨문다. 입 안에서 비릿한 향이 느껴지지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지금 바로 달려가서 예전처럼 안아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었다.
"우린... 어차피 안 되는 거 였어."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축 늘어트리며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는 지애. 자신은 이미 끝나버렸지만 아직 태
양인 끝나지 않은 걸 알기에.. 그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이제 다시 되 돌릴 수 없고, 서로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우린 절대
안 된다는 걸 이제 알기에 괜히 자신이 더 미안하고 미안한 지애였다.
만약, 둘이 남매라는 사실을 태양이가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이 힘들어할 게 너무 뻔해서. 그 아픔이 자신에게까지 모
두 전해지는 것만 같아서, 아픈 가슴을 움켜 잡으며 눈물을 짜내는 지애다. 그런데 사실은..... 아무리 모르고 한 사랑이라
지만, 자신이 친 동생과 사랑을 했다는 것도 생각보다 견디기 힘든 일이였다. 이미 지난 사랑이기에 망정이지, 만약 아직까
지 진행중인 사랑이였다면. 아마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단 생각까지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을만큼 사랑해....'
얼마 전 놀이공원을 갔다오던 날, 태양이가 몰래 했던 고백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그럴 수록 더 아프게만 느껴지는 첫사
랑의 기억. 태양이의 사랑.. 점점 목이 메이고, 눈물이 앞을 가리고, 호흡이 가빠지는 느낌. 조금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젠
엇박자로 뛰기 시작하면서, 점점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쓰러질듯 말듯 위태로운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며 선뜻 다가가지 못하던 태양인 더이상 안 되겠는지 다시 한 발짝 걸
음을 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온 몸을 축 늘어트린 채 툭- 힘 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지애를 보고 한 번 멈칫 했다가 바
로 달려가는 태양이. 순식간에 연회장 앞은 어수선해지고, 그렇게 병원으로 옮겨진 지애는 이틀 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기억을 잃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기억 모두를 잃었다.
.
.
.
지애가 쓰러지고 또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지애가 무너지는 걸 본 태양인 한 번
더 자살시도를 했었고 또 기적처럼 살아났지만, 그 후 얼마 안 돼 태양이의 부모님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옆에서 그 모든 걸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어린 햇살인 미치지 않은게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충격의 연속이였다.
그리고 그나마 다행이였던 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조금은 정신을 차린 것 같은 태양이. 그 어린게 장례식장에서 오열을 하
다 실신해서 쓰러지고, 밤마다 오빠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잠도 못잘 만큼 많이 약해진 동생을 보고 더이상은 미친놈처럼
살아선 안 된다고 생각 했다. 하나뿐인 동생 햇살이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정신을 차려야 했다.
"누나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야.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 해."
"없으니까 그냥 가요."
"태양아..."
"가시라구요 그냥."
얼마 전 파리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서린이가 짐가방을 들고 태양이 집으로 왔다. 아니, 유학인 줄 알았지만 알고보면
파리에 있는 지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이번에 다시 디자인 팀장으로 한국에 돌아 온 것이라고 해야 맞겠다. 어릴 때는
누나 누나 하면서 제법 잘 따랐었는데, 윤 회장이 외할아버지라는 걸 안 순간부터 속았다는 생각에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줄 알았던 자신의 인생이 윤 회장의 등장부터 꼬이기 시작했고, 밑도 끝도
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자신을 평범하게 보이게 만들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하나뿐인 이모와 그의 딸 서린이였다. 사
실은 전혀 평범하지 않으면서 평범한 척 했던 사람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 이모가 숨기고 싶어 하셨어."
준수와 이혼을 하고 집을 나가면서부터 부모와 천륜을 끊었던 수란. 그렇게 몇 년은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살다가. 언니였던 서린이 엄마가 수소문을 해서 찾아내, 딱 그때부터 다시 연락도 하고 왕래도 하며 살았던 자매였
다. 물론 내다버린 자식이라고 막내 딸의 얘긴 한 번도 꺼내시지 않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가며.
부모님 앞에 당당해질 수 없으니 자식들한테 떳떳해질 수도 없었다. 버림 받은 주제에 니 할아버지가 한성그룹 윤 회장님이
라고 말 해줄 수도 없었고, 사실은 엄마가 한성그룹 막내 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그래서 숨긴 것 뿐인데, 이
유를 다 알면서도 삐딱하게만 대하는 태양이다.
"그래서요."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받은 상처가 많았는지, 마음의 문이 닫힌 듯 행동하는 태양일 그저 안타깝게 바라보는 서린이.
"오빠, 하지마.... 나 언니랑 같이 살래."
"...."
그래도 햇살이 말이라면 자기가 싫어도 무조건 져주는 태양이였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버리고, 그렇게 누워서 핸드폰만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보고싶다...]
같은 글귀를 썼다 지웠다 수없이 반복하는 태양이다. 결국 자신의 번호를 지우고 '0113' 이라는 숫자 네개만 입력한 채 문
자 메세지를 발송하려다가, 또 그냥 폴더를 닫아버린다.
"하아...."
아직도.... 니가 너무 그리워. 안 되는 거 알면서도.... 니가 너무 그리워.
.
.
.
"아 진짜! 내가 던진 거 아니거든? 놔 이거!"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니가 던진 것도 아닌데 왜 도망을 가실까?"
"아 글쎄. 놓고 얘기해!! 아씨 내 가방.. 야!!!!"
그 일이 있은지 거의 6개월만이였다. 이제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제자리로 돌아가려는데, 그런 태양이 앞에 필연 같은 우연
으로 다시 나타난 지애. 물론 너무나도 지극히 우연한 일이였지만, 이렇게 6개월만에 보는 지애의 모습이 너무 꿈만 같아서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어쩐일인지 지애를 괴롭히고 있는 박상혁을 향해 말했다.
"박상혁. 그 손 놓지?"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그건 니가 알 거 없고. 얘한테 더 볼 일 있냐?"
"...."
"꺼져."
꺼지라는 말에 정말 그냥 꺼져버리는 박상혁을 보고 어이없어하다가, 곧 뒤로 돌아 자신을 도와준 정체모를 남자에게 고마
움의 표시를 하는 지애.
"저기. 고...!!!"
그리고 태양인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려는 지애를 그대로 와락 안아버린다. 얼마나 그리웠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집 앞에 찾아가 몰래 어딘가 숨어서 지켜보던 그 얼굴. 정말... 하나도 안 변했다. 날 못 알아보는 것 빼
곤, 정말 하나도 안 변했다. 여전히 예쁘다 홍지애.
"미안.. 놀랬지."
기억도 못하는데, 내가 얼마나 미친 놈처럼 보였을까.
"응? 아니야. 아깐 고마웠어."
정말 잔인하다. 난 하나도 잊지 못했는데, 넌.... 정말 잔인하도록 깨끗히 잊어버렸구나. 그렇게 힘들었어? 차라리 다 잊어
버리고 싶을 만큼, 기억을 다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그렇게 많이 힘들었어? 그럼 난. 난 어떡하라고... 난 아직도 니가 이
렇게 좋은데. 이 미친놈의 심장이 아직도 너만 사랑한다는데!! 니가 나 말려줘야지... 더럽다고, 짜증난다고, 그만 하라고.
니가 나 말려줘야지. 그렇게 혼자 도망가버리면 난 어떡해.
"왜 그렇게 쳐다 봐?"
"너무 예뻐서."
"헐..."
나도 모르게 계속 너만 보고 있었나보다. 예쁘다는 말에 민망해서 고개를 숙이고 발로 땅을 차며 몸을 베베 꼬는 니 행동이
처음 나랑 사귈 때와 같아서, 또 너무 그립다.
"꼴통!"
애꿎은 땅만 계속 발로 차다가 뒤에서 자길 부르는 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고 그쪽으로 달려간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반
가운듯 바로 달려가는 널 보고 내 가슴은 또 한 번 무너진다. 기억을 잃었어도 여전히 넌 그 사람 곁에 있고, 난... 아직도
제자리.
"갖고 싶어.... 미치도록."
그렇게 난 또 한 번 사랑을 시작한다. 여태껏 한 번도 포기한 적 없던, 내 불쌍하고 위험한 사랑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드디어 번외가 끝났네요. 쓰다보니 번외가 너무 길어져서 뒤로 갈 수록 빼먹은게 많아 아쉽긴 하지만.
이정도로 만족할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현실에서 동떨어져있었던 듯 ㅠㅠ
업쪽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에 숫자 붙여주세용 ♡
으아악. 그래도 그냥 다 봐주시지 ㅋㅋㅋㅋ 나중에 혹시라도, 그런게 언제 나왔었나 하면 안 되잖아요 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