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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응도(飛鷹島)
매처럼 높이 날아 미래를 꿈꾸는 섬
요약 : 전라북도 군산시 비응도동에 속한 섬으로 면적 0.534km2, 해안선길이 3.7km이다. 새만금의 첫 동네인 비응도는 새만금 방조제 33.9km가 시작되는 섬이다. 부안군 변산 대항마을에서 군산 비응도를 잇는 새만금 방조제 도로 덕분에 종전 1시간 30분 정도에서 30분으로 단축돼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목차
비응도 개요
새롭게 만들어진 비응도 비응항
비응도 전망대
비응도의 전설과 당산제
돛단배 시절을 추억하며
비응도를 뒤로 하고
비응도 개요
전라북도 군산시 비응도동에 속한 섬으로 면적 0.534km2, 해안선길이 3.7km이다. 새만금의 첫 동네인 비응도는 새만금 방조제 33.9km가 시작되는 섬으로, 길고 긴 방조제는 마치 신기루처럼 바다 한가운데 늘어서 있다. 부안군 변산 대항마을에서 군산 비응도를 잇는 새만금 방조제 도로 덕분에 종전 1시간 30분 정도에서 30분으로 단축돼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내초도, 오식도와 함께 비응도는 군장국가공단 조성사업에 의해 1994년에 방조제로 연륙되어 섬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바다 위에 떠 있던 조그만 섬들이 육지로 편입돼 공장과 건물들이 수도 없이 들어선 내초도, 오식도, 비응도를 보면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그러나 푸르른 바다가 육지로 변했기 때문에 벽해육지(碧海陸地)라고 바꾸어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새롭게 만들어진 비응도 비응항
과거 비응도 근해에서는 봄이면 조기를 비롯하여 대하와 주꾸미, 오징어 등을 많이 잡았다. 고기를 잡는 어선들은 대부분 풍선이었으나 나중에는 소형의 통통배로 바뀌었다. 다른 지방 소속의 어선들도 이곳을 많이 찾아온 이유는 지리적인 장점 때문이었다. 비응도의 왼쪽에는 연도, 오른쪽으로는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있다. 비응도는 금강 어귀에 위치하여 군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그래서 수많은 어선들의 정박지였던 것이다. 1킬로미터 정도인 백사장에는 매년 여름에 피서객이 몰려들었다.
비응도에는 1973년도에 40가구 230명, 초등학생 57명이었다. 그 뒤 인구가 계속적으로 감소했다. 내초도, 오식도, 가도 등과 함께 육지와 연결되어 군장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이것만 해도 커다란 변화인데 다시 한 번 새만금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비응도는 변화의 태풍이 불어닥쳤다. 비응도가 군산 쪽의 새만금 사업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비응도 주민들은 보상을 받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어업 외에는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그들이 받은 보상비로는 도회지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둘씩 다시 고향인 비응도에 모여들었다. 결국 고향을 떠난 주민들 50% 가량이 모여서 다시 고군산열도 해역에서 어부로 살아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마을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주민들은 어선을 가지고 다시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비응도 주민들은 다시 사라진 어촌계를 부활시켜 예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의 비응항은 비응도 앞 바다를 메워서 만든 새로운 군산의 신항구이다. 군산 내항은 지난 1899년 개항 이래 1970년대까지 원목과 사료 등의 수송처였지만, 1990년부터 금강 하구둑이 막히면서 토사 매몰로 인해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금강 하구언은 농업용수 공급과 홍수 및 염해를 방지해 농업 발전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서해로의 물 흐름이 차단되면서 황복과 실뱀장어 등 바닷물과 민물이 혼합된 기수역(汽水域)에 사는 어족자원의 씨가 말랐다. 게다가 금강 하구언 주변에 토사가 쌓이면서 갯벌 생태계가 변하고 군산내항과 장항항이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새롭게 개발된 항구가 군산 외항과 신항 그리고 비응항이다. 비응항은 이런 배경 아래 만들어졌다. 군산 내항의 기능 상실과 하제포구를 비롯하여 조그마한 여러 개의 포구가 새만금 사업으로 기능이 정지되면서 대체 어항으로 이용하기 위함이다.
수백 척의 어선들이 고기를 잡아 가지고 1시간 정도 군산 내항의 위판장까지 들어와야 하는데 육로 교통이 편리한 비응항이 건설되면서 유류비 절감을 위해 가까운 항구를 이용한다.
비응도 전망대
비응도에는 해수욕장이 하나 있어 일제 강점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던 여름철 휴양지였다. 이곳 해안에는 조개 무덤이 있는데 머리가 없는 6인의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다. 조개에 포함된 석회석 성분 때문에 보존상태가 양호했다고 한다. 머리가 없는 이유는 아마도 싸움 중에 승리한 약탈자가 전리품으로 가져가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
지금의 비응도는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다. 1993년 군장 산업단지 개발과 새만금방조제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비응도 북쪽의 바닷가에는 풍력발전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거대한 프로펠러들이 바람의 힘으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이 거대한 풍경은 비응도 팔각정 전망대에 올라가면 자세히 볼 수 있다. 풍력 발전기는 총 10기가 설치돼 있는데 750kw급 6대와 850kw급 4대이다. 전기를 생산해 일반가정에 공급하고 있다.
전망대는 풍력발전소 입구, 군사보호구역 옆의 좁은 길로 올라가면 나온다. 3층으로 건설된 전망대에 올라서면 광활한 서해와 고군산군도의 새만금 방조제, 군산공업단지가 펼쳐진다. 바로 그 옆에는 현대중공업의 조선소가 들어서 있다. 커다란 크레인의 모습이 위용을 자랑하듯이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다. 지리적 여건상 새만금이 시작 되는 섬이다 보니, 주변은 새로 아름다운 항구가 조성되어 고군산도를 오가는 유람선 선착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비응도의 전설과 당산제
비응도의 전설에 의하면, 약 4백 년 전에 정씨 성을 가진 뱃사공이 지금의 군산 내항 부근의 바닷가에서 배를 띄워놓고 잠이 들었다. 이 때 백발노인이 꿈속에 나타나 '신선 2명을 조용한 곳에 태워다 주라'고 당부했다. 잠을 깨보니 신선 차림의 노인 2명이 배에 타고 있어 정씨는 이들을 인근 섬에 태워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노를 저어 금강을 빠져나와 서해로 가던 중 비응도 부근에서 갑자기 돌풍을 만나 피신했다.
비응도에 도착하자 그 2명의 신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조금 후 구렁이 두 마리가 바다에서 나와 비응도를 향해 가다가 역시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정씨는 그때부터 무인도인 비응도 땅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 사이에 비응도는 신령한 섬이며 또한 부를 누릴 수 있는 섬이라고 말한다.
비응도에서는 해마다 당산제가 치러진다.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가장 먼저 음력 정월 보름 안에 제주를 선정한다. 제주가 선정되면 그 사람은 초상집은 물론 궂은일에 일절 참여하면 안 된다. 부정을 타지 않고 제사를 무사히 지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2월 초하루에는 비응도 주민 전체가 참여하여 정성껏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에서 마을의 액운을 물리치고 그해의 풍어를 빌었다.
비응도 마을 입구에는 아주 오래된 노거수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의 역사는 꽤 오래 되어 사람이 섬에 입도하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고목은 비응도 주민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그래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때, 귀항할 때 이 나무에 절을 하면서 항상 무사고를 빌었다고 한다.
다음은 군산 출신인 고은 시인이 6.25 당시 비응도와 선유도를 다녀간 후 남긴 기행문이다.
1951년 1월 군산 째보선창에서 두 폭 돛을 올린 일중선을 타고 부산으로 떠나는 피란길에 올랐다. 아우성을 뒤로한 네 가족이 그 배에 탔다. 판사 두 가족과 대법원 행정처 간부의 가족 그리고 아버지와 중학생인 나였다. 찹쌀가루 한 자루를 비상식량으로 휴대했고 비상금도 옷 속에 넣어 봉했다. 겨울 서북풍은 힘껏 바다 표면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배는 파도 위에 쿵쾅 내던져졌다가 파도 밑 깊숙이 파묻히다가 했다. 심한 멀미를 앓았다. 토하고 토했다. 늘어졌다.
비응도에 닻을 내렸다. 그곳에서 사흘을 머문 뒤 다시 고군산군도로 향했다. 돛폭 하나가 파도 덩어리에 맞아 찢어졌다. 가까스로 선유도 선착장에 내렸다. 그곳에서 난청의 라디오에 귀 기울였다. 중공군은 오산 부근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부산행을 단념하고 떠나는 일행에게 손을 흔들었다.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에야 섬의 피란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의 세월 53년 만에 나는 현재로서의 회한과 과거로서의 추억을 가지고 선유도에 가는 것이다. 지난날에는 며칠 걸려 가던 험한 피란길이었으나 이제 2시간으로 충분한 통통배를 탔으니 뱃전에 나와 가슴 가득히 바다의 기운을 들일 수 있었다.
바다는 생명의 본적지이다. 나는 그 생명 근원의 기억할 수 없는 고향을 어렴풋이 헤아렸다. 마침 바다는 드물게 '신사파도(紳士波濤)'였다. 파도가 있으나 있는 듯 없는 듯했다. 그런 바다를 건너가자 아무런 위엄도 갖추지 않은 조혼(早婚)의 어린 아낙 같은 모습으로 선유도가 거기 있었다.
돛단배 시절을 추억하며
고은 시인이 겪었던 일은 지금부터 65년 전이다. 필자의 서재에는 추억의 돛단배 모형 2척이 놓여 있다. 풍선을 타고 아버지와 형님을 따라서 고기를 잡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섬에서 자라면서 바다를 무척 좋아했고, 특히 저녁 때가 되면 미역과 톳, 김이나 고기를 잡아서 돌아오는 노 젓는 돛단배들의 귀항 모습을 무척 좋아했다.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사춘기를 맞이하여 방황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20톤 정도 크기의 풍선의 하장(밥하는 사람)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한 달만 근무하면 선장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여 주면서 이 시계를 준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배타기가 싫어졌다. 선주 몰래 도망을 친 일이 있다. 그때 대양과 마주하며 바다로 나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 나는 10년 넘게 4.5톤 크기의 탐사선을 가지고 전국의 섬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 배로 전국의 섬들을 여러 번 순회했지만 배가 좀 느리다고 불평을 해 본 적이 없다. 돛단배 시절을 생각하면 감사한 것뿐이고 좀처럼 그 시절의 기억을 훌훌 털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 젓는 돛단배 시절이 결코 호랑이 담배 먹던 때가 아니다. 1960년대 말 뚝섬에선 돛단배들이 한가롭게 떠다녔다. 오래전 동력선이 없었던 시절, 섬사람들은 누구나 풍선을 타고 험난한 바다를 건너 육지를 오갔다. 오직 돛단배가 교통수단으로 전부인 시절에 선조들은 풍선 말고는 달리 육지를 찾아갈 방법이 없었다. 섬사람들이 육지로 가는 뱃길을 열어주는 희망의 통로인 동시에 풍랑이 불면 절망을 안겨 주는 것이 바다이다.
가거도와 홍도에는 대풍리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다. 울릉도의 태하에는 옛날부터 풍선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이 돛단배는 바람이 불어야 운항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람을 기다린다고 해서 대풍령(待風嶺)이라고 불렀다. 육지의 울진에는 관리들이 울릉도에 들어가기 위해 순풍을 기다렸다는 '대풍헌'이란 곳이 있다. 이제 돛단배로 고기를 잡고 운송하던 시절은 다 지나고 통통배가 쾌속선으로 바뀌었다.
이런 근대 선박의 역사는 19세기 말부터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된 시기에 일본 조선업자들이 들어와서 1931년에 50개의 조선소를 설립했다. 1918년에 국내에서 최초로 동력선이 등장했고, 1930년에는 1,000척이 넘는 배가 건조되었다. 그 뒤 6.25전쟁으로 조선업이 중단되었다가 60년부터 서서히 목선에서 동력선으로 교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비응도는 군산에서 서해로 나가는 길목에 있다. 바다로 나가다가 배가 종종 돌풍을 만나면 속수무책인 것은 동 · 남해와 달리 서해는 수심이 얕아 풍랑이 높기 때문이다. 예전에 군산 근해에서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났다. 특히 새만금 1공구인 가력도와 비응도 사이 비안도와 야미도, 십이동파도 앞 해상에서 고려청자를 실은 유물선과 유물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그런 배들은 갑자기 높아진 파도로 인한 희생의 증거들이다. 군산 지역에 박물관이 없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비응도를 뒤로 하고
비응도는 인연이 좀 많은 섬이다. 서해안의 섬들을 누비고 다닐 때 5번 정도 정박하면서 비응항을 이용했다. 1주일 정도 정박할 때는 해경이 등대호를 돌보아 주었다. 매년 말이 되면 해넘이 축제가 성대히 펼쳐지는, 아름다운 낙조를 지닌 섬 비응도가 이제는 새만금의 관문 역할을 하는 중책을 맡았다. 먼 바다에서 만선을 이루어 쉬지 않고 달려온 어선들을 반가이 맞아주고, 외지에서 달려온 여행객의 쉼터가 비응항이다. 비응도-야미도-신시도-가력도-부안 변산반도로 이어지는 서해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10:30~11:00 군산시 비응항 서방파제등대 탐방
[매의 기상이 느껴지는 '비응항 서방파제등대'
글 : 배석환
어업in수산 기사 등록일 : 2024.02.28.
2020년부터 운영 서해안과 비응항 항해 선박 안전 길잡이
해양수산부는 3월 ‘이달의 등대’로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도면에 있는 ‘비응항서방파제등대’를 선정했다.
새만금방조제 북쪽 끝단 비응항에 위치한 이 등대는 2020년부터 운영됐으며 5초 간격으로 불빛을 깜빡이며 서해안과 비응항을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비응항서방파제등대’가 위치한 비응도(飛鷹島)는 지형 생김새가 하늘을 나는 매의 모습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1990년대 석산 개발과 매립을 통해 현재의 모습이 됐다. 비응도의 비응마파지길은 1.8㎞의 해안 산책로와 포토존, 전망대 쉼터가 조성돼 있어 섬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확 트인 서해를 즐길 수 있다.
등대에서 새만금방조제를 따라가면 나오는 신시도에서는 아름답고 수려한 고군산군도의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고군산군도는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섬의 군락으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바 있다. 신시도에서는 무녀도, 대장도, 선유도 등의 섬이 연결되어 해수욕장, 갯벌 체험, 스카이워크 등 다양한 레저활동을 즐길 수 있다.
한편, 해양수산부는 이달의 등대를 방문하거나 여행 후기를 작성한 여행자 중 일부를 연말에 선정하여 예쁜 등대 기념품과 50만 원 상당의 국민관광상품을 증정할 예정이다. 자세한 행사 참여방법 등은 국립등대박물관 누리집(lighthouse-museum.or.kr)의 ‘등대와 바다’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등대 주변 관광정보는 군산시 문화관광 누리집(www.gunsan.go.kr/tour)에 소개돼 있다.
군산시 비응항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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