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서울 정토회관에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서울 공동체 대중과 함께 새벽 예불을 정성껏 한 후 스님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은 평화재단으로 이동해 종교인 분들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목사님, 신부님, 주교님, 교무님, 교령님이 차례대로 평화재단에 도착하자, 평화재단 실무자들은 스님이 직접 농사지은 채소를 만든 밥상을 정성껏 차려 내었습니다.
얼마 전에 구룡마을에 수해 복구를 다녀왔던 모습을 종교인 분들에게 보여준 후 평소처럼 김명혁 목사님의 기도와 함께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비록 서로 종교도 다르고 자라 온 배경도 다르지만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한 마음 한 뜻이 되도록 해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서 달려갈 수 있도록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드립니다.”
“아멘!”
스님도 큰 목소리로 아멘을 외친 후 오늘 특별히 모임에 참석한 북한전문가 두 분을 소개했습니다.
두 분은 우리나라에서 북한 전문가로 유명한 분인데, 스님의 요청으로 특별히 종교인 모임에 참석해서 북한의 코로나 사태, 김정은 정권의 전략 변화,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깊이 있게 분석한 결과를 발표해 주었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종교인 분들의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왜 남북 관계가 계속 악화되는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지 여러 가지 요인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남북 관계가 쉽게 풀리기는 어려울 것임을 예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오늘 북한 전문가를 초청해 이렇게 정세를 분석해보는 자리를 가진 이유는 남북 관계가 왜 단절되었는지, 북한 주민의 식량 상황은 어느 정도 어려운지, 인도적 지원 통로는 없는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북한은 완전히 국경이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바늘구멍만 한 대화의 창구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남북 간의 대화를 비롯해 그 어떤 인도적 지원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도 목사님께서 꼭 가고 싶다면 무단으로 휴전선을 넘어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연세가 많으셔서 철조망을 넘기가 힘드시잖아요. (웃음) 중국 국경을 통해서 가는 방법 역시 중국조차 입국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오늘 대화에서 북한 전문가분들이 제기해 주신 것처럼, 남북문제를 풀고 통일의 희망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북 봉쇄 정책을 취할 게 아니라 대화의 문을 여는 쪽으로 인도적 지원을 먼저 해나가야 한다는 건 올바른 지적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앞으로 남북 관계는 갈수록 긴장이 더욱 고조될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특히 북한이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에 경제적, 군사적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는 더욱 악화되는 국면으로 갈 확률이 더 높다는 점을 우리가 예측하고 대응을 해나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러나 너무 절망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다 또 대화의 기회가 급격히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남북 관계와 국제 정세의 현황을 파악하는 정도로 하고, 다음 달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모임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오전 내내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연이어 미팅을 했습니다.
페미니즘을 넘어 휴머니즘으로
오후 1시부터는 평화재단 연구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오늘은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등을 출간한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이영희 님을 초청해서 ‘페미니즘을 넘어 휴머니즘으로’를 주제로 강의를 듣고 토론을 했습니다. 강사님은 먼저 세계 여성운동의 약 2백 년 간 역사와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여성운동의 성과와 급진적 페미니즘에 따른 부작용도 짚었습니다.
“저는 이제 페미니즘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남녀 갈등, 세대갈등이 심각합니다. 이러한 갈등을 뛰어넘어야 한국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시간 동안 강의를 마치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토론을 통해 여전히 성평등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과 개선해나가야 할 문제점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 남성 여성 간 혐오로 이어지는 부작용 사례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시간 동안 토론을 하고 마지막으로 스님이 닫는 말씀을 했습니다.
“저는 현재 일어나는 성평등을 둘러싼 이슈들이 기본적으로는 지난 5천 년간 억압받아온 여성들이 해방을 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크게 보면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이라고 봅니다. 어떤 혁명이든 혁명의 과정에서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 운동을 하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 역시 줄여갈 필요가 있습니다. 애꿎은 피해가 지나치다 싶은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피해를 줄일 수 있을지도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한편 아직까지도 남성들이 무의식적으로 성범죄 수준의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 자각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으로 뿌리가 워낙 깊고 오래되다 보니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잖아요. 이런 문제는 어쨌든 우리가 개선해나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곧바로 오후 4시부터는 평화재단 기획위원들과 정기 회의를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가 되어 회의를 마쳤습니다.
다시 서울 정토회관으로 이동한 스님은 저녁 7시 30분이 되자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는 날입니다.
먼저 지난 주말에 으뜸절에서는 어떤 활동들이 있었는지, 스님은 지난주에 어떤 농사일을 하였는지,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이 끝나자 스님은 요즘 근황을 이야기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무더위 가운데서도 가을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 주 월요일에 한국을 출발해 인도에서 2주가량 머물다가 방글라데시에 가서 로힝야 난민들에게 가스레인지 10만 개를 전달하고, 추석날 한국에 돌아왔다가, 또 바로 그날 필리핀 민다나오에 가서 원주민 마을 지원사업 현황을 일주일간 둘러보고 돌아올 예정입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가을 정토불교대학 입학식에 참석하고요. (웃음)
제가 이렇게 인도, 방글라데시, 필리핀을 다녀오면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어서 수확할 때가 다 되어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네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파요
“저는 싫은 소리를 들으면 얼굴과 행동에 너무 표시가 많이 납니다. 좋은 게 아닌 줄은 알지만, 나쁜 말을 들으면 바로 얼굴이 굳어져요. 3초에서 5초 정도 지나면 ‘왜’라고 자꾸 따져 묻고, 제가 생각해서 그 말에 수긍이 안 되면 뒤끝이 작렬하더라고요. 또 남이 잘 되면 손뼉 쳐 줄 마음이나 따뜻한 마음이 안 생기고, 저를 포함해서 우리 가족이 잘 되면 ‘아, 행복하다. 좋다!’ 이런 마음이 듭니다.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욕심과 질투심, 미운 마음이 들어요.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일까요?”
“본인이 이미 잘 알고 있네요. 맞아요. 그러나 그게 뭐 특별한 병은 아니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러고 살아요. 안 그런 사람이 드물죠. 그래도 괜찮아요. 그렇게 질투하고 시기하고 시비하면서 괴롭게 인생을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런 인생이 힘들어서 벗어나고 싶다면 시기를 안 해야 하고 질투를 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없다고 한다면 질투도 하고 시기도 하고 배도 아파하면서 살면 되는 거예요.
옛날부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잖아요. 대부분 남이 잘 되는 꼬라지는 보기 싫고, 남이야 죽든지 살든지 나만 잘 되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특별한 사람이나 안 그럴까, 대다수는 다 그래요. 그게 조금 심하냐 덜 심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러니 질문자도 괜찮아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배 아파하면서 그렇게 지내세요.”
“너무 배가 아프면 안 되니까 조금 더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알고 싶어요.”
“이것은 발전이란 개념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에요. 배가 너무 아프면 시기, 질투를 덜 하면 되고, 배가 덜 아프면 해도 되는 거예요. 이것은 발전이라고 볼 게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봐야 합니다. 그 사람이 잘 된 걸 보고 내 배가 아프면 나만 손해잖아요. 내가 배 아파한다고 해서 내가 잘 된다면 배가 아파도 좋겠지만, 내가 배 아파해봐야 내 배만 아프죠. (웃음)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게 없잖아요.
‘배 아파하면 나만 손해구나.’
이걸 자각하면 됩니다. 배 아파봤자 내 손해지, 누구 손해겠어요?”
“제 손해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나쁜 게 아니라 바보 같은 거예요. 자식이나 배우자가 죽거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계속 울고 있다면 그건 바보예요. 운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운다고 나한테 뭔가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울잖아요. 남이 땅을 샀을 때 내가 배 아파한다고 해서 나한테 땅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상대의 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배 아파한다면 나만 손해라는 거예요. 이처럼 내가 나에게 손해 끼치는 것을 바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리석다고 해요. 그래서 중생을 어리석다고 하지요.
질문자는 어리석은 정도가 좀 심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니까요.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어요? 남을 괴롭히면 ‘너는 나쁜 놈이다’ 이러지만,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면 ‘어리석다’라고 합니다. 남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자기가 자기를 죽이면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살인자라고 처벌을 하려고 해도 대상이 없어진 거예요. 죽이는 행위를 저지른 당사자가 죽어버렸으니까요. 남의 뺨을 때리면 나쁜 사람이지만, 자기가 자기 뺨을 때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남의 재산을 훔치면 나쁜 사람이에요. 그러나 자기 돈을 자기가 갖다 버리면 그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질문자도 직접 배를 아파볼 만큼 아파보고 본인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면 돼요.
‘이렇게 해서 나한테 뭐가 이익이지? 그래 봤자 내 배만 아프구나. 화내 봐야 나만 괴롭구나. 내가 화낸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구나. 아, 내가 어리석구나.’
어리석다는 말은 내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내가 나를 해치고, 내가 나를 괴롭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어리석다고 하는 거예요. 남이 나를 해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어요.
아까 외모 때문에 고민하는 질문자도 눈도 보이고 귀도 들리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손발도 다 있는데 외모에 대해서 자기가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아무도 그 사람을 안 괴롭히는데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잖아요. 사람들이 ‘너는 뚱뚱하다’, ‘너는 홀쭉하네’, ‘너는 왜 그렇게 빼빼 말랐어’ 이러는 건 그냥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하는 것뿐이에요. 스스로 열등의식이 있으니까 그 말을 진짜로 받아들여서 자기를 하찮게 보고 괴로워하는 겁니다.
이런 것을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부중생(凡夫衆生)은 ‘어리석은 중생’이라는 뜻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이가 없으면 아이가 없다고 한탄하고, 있으면 아이가 있다고 한탄합니다. 시부모가 살아 있으면 시부모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고, 시부모가 안 계시면 또 효도할 대상이 없어서 문제라고 합니다. 젊을 때는 내내 빨리 나이 들고 싶어 하고, 늙어서는 또 젊은 시절을 그리워해요. 이런 걸 경상도 사투리로 ‘디비쫀다’라고 해요. 젊을 땐 젊어서 좋고, 늙으면 늙어서 좋은 거예요. 이렇게 관점을 갖는 게 수행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해도 괜찮아요. 다만 배가 심하게 아프면 ‘이래 봐야 나만 손해네’ 이렇게 자기를 보면 됩니다. 여기서 어떤 게 더 좋다는 건 없어요.
‘결혼해서 사는 게 좋습니까, 스님이 되는 게 좋습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많은데, 스님이 되는 게 좋다거나 결혼하는 게 좋다는 것은 없어요. 문제는 자기가 어느 쪽에 만족하느냐는 거예요. 결혼해서 살면서 혼자 사는 스님을 부러워하면 그건 바보죠. 혼자 살면서 결혼한 사람을 부러워하면 그것도 바보고요. 모두 자기를 괴롭히고 있잖아요. 혼자 사는 사람은 혼자 사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같이 사는 사람은 같이 사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해요. 어리석은 자는 항상 혼자 살면 외로워서 힘들다고 한탄하고, 같이 살면 귀찮아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바보 같은 짓이에요. 이러면 아무 해결책이 없습니다.
지금 질문자가 이야기한 마음들이 다 가장 대표적인 범부중생의 마음가짐입니다. 범부중생은 그런 마음을 갖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세상 사람 대다수가 그렇게 삽니다. 그러니 너무 자기를 비하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살아도 되거든 그렇게 사세요.
그런데 이렇게 사니 너무 힘들다고 한다면 그러면 자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누가 나를 괴롭혔을까? 내가 나를 괴롭히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나를 괴롭힐 이유가 뭐가 있지? 그 사람이 잘 되는 것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런데 그 사람이 돈을 번 게 정말로 잘된 일인지, 잘된 일이 아닌지를 과연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보면 남편이 돈을 많이 벌면 마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남자가 돈을 많이 벌면 바람을 피우거나 다른 사고를 치는 경우도 종종 보잖아요. 이처럼 어떤 것이 진짜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는데도 자꾸 ‘이게 좋다’, ‘저게 좋다’ 하니까 세상살이가 피곤한 거예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세상 사람이 대부분 질문자 같은 마음으로 살아요. 그래서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게 피곤하다고 생각한다면 ‘아, 내가 나를 괴롭히는구나. 그 사람이 땅을 샀는데 내가 괴로워한다고 해서 나한테 이익되는 게 하나도 없지 않느냐’ 이렇게 내가 나에게 손해 끼치는 생각을 버리면 돼요. 인생은 어떤 게 잘 산다, 못 산다 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것일 뿐입니다.
저한테 물으면 저는 ‘그래 봐야 당신 배가 아프지, 누구 배가 아프겠어요?’ 이러고 말죠. 계속 배 아파하세요.” (웃음)
“안 해야겠어요.”
“계속 더 배 아파해 보세요.”
“아닙니다.” (웃음)
“배가 아플 때 자꾸 ‘내가 잘못됐다. 수행이 안 됐다’ 이렇게 평가하지 말고 이렇게 자기를 보세요.
‘이래 봐야 누가 손해냐? 내 손해네. 그럼 내가 나에게 손해 끼치는 게 뭘까? 바보다.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 내가 어리석게 살아서 이렇구나.’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일까요? 손해 안 나게 하는 게 지혜로운 거예요. ‘남이 땅 사는데 어떻게 배가 안 아파요!’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 저도 ‘배 아파하세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배 아파해봐야 결국 내 손해니까 ‘그 사람이 뭘 사든 지 말든지 그건 자기 일이고 나는 내 인생을 산다’ 이런 관점을 갖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퉁명스럽게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웃음)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점은 이거예요. 남을 해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 그러나 내가 나를 해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바보 같은 사람이에요.
남을 해치면 반드시 손실이 따릅니다. 비난이나 다른 과보가 따라요. 그런 손해를 입어가면서도 할 만하다면 그렇게 하면 돼요. 그런데 손해가 크다면 멈춰야 하겠죠.
자기를 해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나를 해치는 것이니까 아무도 뭐라고 말할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내가 돌아봤을 때 ‘내가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나’ 이런 생각이 든다면 그만 두면 돼요. 그냥 생긴 대로 사세요. 받아들이는 것도 수행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못 받아들이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자기가 해놓고 자기가 못 받아들이니까 괴롭죠. 손해를 봤으면 다음에는 안 하든지, 했으면 손해를 감수하면 되지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요. 둘 다 수행이에요. 돈을 빌렸으면 이자까지 쳐서 갚든지, 갚기 싫으면 아무리 궁해도 안 빌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둘이 사는 게 귀찮으면 혼자 살고, 외로운 게 힘들면 둘이 살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외롭다고 둘이 살다가, 귀찮다고 헤어져서 또 혼자 살다가, 또 외롭다고 둘이 사는 걸 반복해요. 이런 것을 ‘방황’이라고 합니다. 같이 살려면 서로 맞춰야 해요. 혼자 살려면 약간 외로움을 감수해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세상살이에 왕도는 없어요. 그냥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것뿐입니다. 남이 뭐라 그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임금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게 잘 사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한국에서 대통령 된 사람 중에 이제까지 뒤끝이 괜찮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 불행해요. 그렇다고 해서 시골에서 농사짓는 게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 제 나름대로 살다가 죽는 거예요. 수행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만족하고 괴로움이 없이 사느냐, 아니면 괴로워하면서 사느냐를 가지고 평가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지위가 뭐냐, 얼굴이 어떠냐, 얼마나 오래 살았냐, 이런 걸로 평가하는 게 아닙니다. 괴롭게 살았냐, 자유롭게 살았냐, 이 기준으로만 평가하는 게 수행이에요. 부처님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음식은 얻어먹고 나무 밑에서 자면서도 본인이 행복하고 남에게 도움 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높이 평가하는 거예요. 역대 임금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 대궐 같은 큰 집에서, 수많은 미인을 데리고 살아도 괴롭게 살다 죽기 때문에 우리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겁니다.
질문자도 자기를 잘 살펴보세요. ‘어떤 게 더 좋은 인생이냐’ 이렇게 따지지 말고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거냐? 괴롭게 살 거냐, 괴롭지 않게 살 거냐?’ 괴롭지 않게 살려면 어떻게 살면 되느냐?’를 생각해보세요. 이런 관점을 가지는 게 수행입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스님은 이번 주말에 있는 정토회 1차 만일결사의 마지막 백일기도 입재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법회를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오니 밤 9시가 훌쩍 넘어 있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한 후 하루 종일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