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 제국(大英帝國, British Empire)-제국주의 시기(1815∼1914)
1815년부터 1914년까지는 영국 역사에서 “제국의 세기”라고 부르는 기간으로, 약 2천6백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와 당시 세계 인구의 1/4에 해당되는 약 4억 명의 인구가 대영 제국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다. 나폴레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영국에 있어서는 경쟁국이 러시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특히 바다에서 도전받은 적은 절대 없었다. 영국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처하였는데, 훗날 이때를 가리켜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라고 불렀다. 영국은 식민지 곳곳에 표면적인 지배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세계 무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는데, 이는 남아메리카, 중국, 시암과 같이 일부 역사학자들이 “비공식 제국령”으로 묘사한 많은 명의상 독립국의 경제를 사실상 통제했다는 것을 뜻한다. 1915년 갈리폴리 반도에서 오스만 튀르크(터키)에게 패하면서 쇠퇴하였다.
동인도 회사와 아시아
19세기 동안 영국의 대(對)아시아 정책은 인도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주변으로 확대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영국은 인도를 많은 주요 식민지들과 그 밖의 아시아 식민지들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관문으로 인식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대영 제국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동인도 회사의 군대는 7년 전쟁 동안 영국 해군과 힘을 합쳤으며, 이집트에서 나폴레옹 축출(1799), 네덜란드로부터 자바 탈취(1811), 싱가포르(1819)와 말라카(1824) 획득, 버마 격퇴(1826) 등 인도 밖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가면서까지 협력을 이어갔다.
1876년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가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의 여황제로 추대한 사건에 대한 정치 풍자화.
동인도 회사의 종식은 1857년에 세포이들이 동물기름으로 바른 소총 탄약통을 받으라는 영국인 지휘관들의 명령에 맞서 폭동을 일으킴으로써 앞당겨졌다. 탄약통을 받는 것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종교적 믿음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포이 반란이 일어난 원인은 단순히 탄약통 수령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인도인들의 문화와 종교는 영국인들의 꾸준한 잠식에 직면하여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인도인들의 불만이 폭발했던 것이다. 결국, 폭동은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양측 다 큰 손실을 보았다. 폭동을 진압한 후, 영국 정부는 인도를 직접 식민 통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여왕 빅토리아가 인도의 여황제를 겸임하고, 인도를 다스리는 일을 담당하는 연방 총독이 임명되면서 영국령 인도의 시대가 찾아왔다. 동인도 회사는 다음해인 1858년에 해산되었다.
한편, 동인도 회사는 인도를 기점으로 173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 무역은 1729년 청 왕조가 아편 금지령을 내린 이후 불법화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은 중국에 대량의 은을 내면서까지 홍차를 수입함에 따라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러한 무역 불균형은 오히려 영국에 역으로 도움이 되었다. 1839년, 중국 당국이 광저우에서 영국 상인들로부터 아편 상자 20,000개를 압류 조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국이 중국을 공격해 승전하였으며(제1차 아편 전쟁),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 섬을 전리품으로 할양받았다.
러시아와의 경쟁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제국, 청나라가 기울어 가면서 생긴 공백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였다. 유라시아에서의 이 경쟁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러시아∼페르시아 전쟁과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페르시아와 오스만을 상대로 차례차례 패배시키면서 자국의 야심과 가능성을 과시하자, 영국은 언젠가 러시아가 육로를 통해 인도를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1839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러시아보다 먼저 차지하기 위한 침공 작전을 위해 군대를 움직였다. 그러나 제1차 영국∼아프간 전쟁은 영국에 있어 큰 실패작이었다. 1853년 러시아가 오스만의 발칸 제도를 침공하자, 지중해와 중동이 러시아의 손아귀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 해군의 가능성을 파괴하고자 크림 반도로 쳐들어갔다. 그 결과 일어난 크림 전쟁(1854∼1856)에서는 근대 전쟁의 새로운 전술이 많이 선보였다. 이 전쟁은 “팍스 브리타니카” 동안 영국과 또 다른 제국주의 나라 간에 벌어진 유일한 세계 전쟁으로, 러시아의 대패로 끝이 났다. 이처럼 중앙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갈등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이 지역의 정세는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
그 후 두 나라 간에 한 차례 전쟁이 더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 닥쳤지만, 1878년 중앙아시아에서 두 나라가 차지하는 각 영역에 대한 협정을 이루었다. 1907년에 영러 협약을 체결하면서 그레이트 게임은 종식되었다.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
로도스의 거상-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 다리를 걸친 모습으로 풍자된 세실 존 로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동인도에 있는 식민지들로 항해하는 선박들의 기항지가 필요함에 따라 1652년에 아프리카의 남쪽 끝에 케이프 식민지를 설립하였다. 1795년에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침공을 받자 영국은 케이프 식민지가 프랑스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을 방해하려고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하였으며, 1806년에 케이프 식민지와 그곳에 사는 대다수 보어인(또는 아프리카너) 주민들을 자국의 세력권으로 정식 편입하였다. 영국에서 온 이민자 수는 1820년 후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통치에 분개한 수천 명의 보어인은 1830년대 후반과 1840년대 초반에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나라를 세우고자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북쪽으로 대이주하였다. 그 과정에서 보어트레커들은 소토족과 줄루족 나라들을 포함한 몇몇 아프리카 나라들과 동시에 남아프리카에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영국과 계속 충돌을 빚게 되었다. 결국, 보어인들은 트란스발 공화국(1852∼1877; 1881∼1902)과 오라녜 자유국(1854∼1902) 등 두 나라를 건설하였다. 1899년∼1902년, 제2차 보어 전쟁 후에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공화국과 조약을 맺음으로써 1902년에 두 보어인 공화국들에 대한 군사 점령을 끝마쳤다.
1869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를 개통하였다. 영국인들은 처음엔 운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지만, 이내 운하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보았다. 1875년,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는 사치로 빚에 시달리던 이집트 부왕 이스마일 파샤를 상대로 4백만 파운드로 수에즈 운하의 44% 소유주를 사들였다. 그리하여 영국 본토에서 인도에 이르는 뱃길로써 전략상으로 중요한 운하의 경영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 의해 6년 일찍 개통하였다. 이집트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재무 장악은 1882년 영국이 완전히 장악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여전히 주주(株主)의 대다수였던 프랑스인들은 영국의 입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으나, 188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을 통해 타협으로 해결을 지었다. 운하를 중립적인 지역으로 만든다는 내용의 이 조약은 1904년에 효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1954년까지 운하를 차지한 영국인들이 사실상 통치력을 행사하였다.
프랑스와 벨기에, 포르투갈이 콩고 강 하류에서 활동하며 아프리카 열대지방을 뿌리부터 차례로 세력을 침투함에 따라 유럽 강대국 간에 일어난 경쟁을 조정하고자 1884년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토 팽창정책을 억제하고자 “유효한 점유”로 특징 되는 “아프리카 분할” 협의가 이뤄졌는데, 이는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한 국제적 공인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은 189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며, 1885년에 영국이 수단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결정을 재고한 것의 근거가 되었다. 영국-이집트 연합군은 1896년에 마디분리주의자들을 쳐부수었으며, 1898년에는 파쇼다 침입을 기도한 프랑스를 저지하였다. 수단은 영국과 이집트가 공동으로 보호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보호국은 명의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세실 존 로즈는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를 주장하며 영국이 아프리카의 남쪽에서 북쪽에 걸쳐 신속히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영국은 전략상의 요지인 수에즈 운하와 연결된 철도를 통해 광물이 풍부한 남부 지방을 관리하였다. 이를 종단 정책이라고 부른다. 1888년 로즈는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를 개인 회사로 소유하였으며, 점유한 영토들을 합병한 다음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라고 이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