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당시 농촌은 다그러 하였지만.... 저는 어린시절을 참으로 힘들게 보낸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때는 마당백석을 하는 부자였다고 하지만.... 저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끼니를 죽으로 국수로 때우고 으례 학교에 돌아오면 소꼴을 베고 소먹이고 개간밭에서 늦게 돌아오던 부모님을 대신하여 나무를 때어 저녁밥을 짓고 겨울방학이면 어린나이에 지게를 지고 어른들과 같이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강한 체질이 였지만.... 이웃의 어려움을 보면 집안식구들이야 굶어 죽든살든 남의집 먼저 걱정하시고 많은 재산을 어려운 이들에게 빌려주고 돌려 받지도 못하고....
해방공간에서 산패들이 우익청년단장집에 불을질러 새벽 오줌누러 밖에 나오셧다가 앞집에 불난것을보고 불이여 했다고 이튼날 경찰서에끌려가 경찰과 우익청년단 테러집단에게 죽도록 얻어맞어 평생 그 장독으로 농사일을 제대로 못하신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아버지가 양반 부잣집 둘째아들이란 말만 믿고 그당시는 보기드문 미모와 지성을 두루 갖춘 분이신데... 아버지 얼굴도 한번도 못보고 우리집에 시집을 오셨다고 합니다. 일평생 호강은 고사하고 고생만 죽도록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중학교 어린나이에 이미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른 장정들과 대등한 노동력을 갖추어 모내기철에는 일주일간 학교에 안가고 아버지대신 남의집 모내기 손바꿈 품앗이를 해야 했습니다. 선조들은 숙종때 남인천거로 갈암 이현일 할배가 白衣 이조판서로 조정에 나갔습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린것으로 노론들의 괘심죄인 연좌제에 걸려서 이조가 망하는 고종때까지 노론들이 진사초시 벼슬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길을 마지막으로 벼슬길과는 영영 담을쌓고 江湖의 머물면서 부패한 노론과 지배권력에 맞서 양심과 지조를 지키며 사신것 같습니다. 이조때 외적이 쳐들어오면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일제때는 민족, 계급해방 독립운동을 해방후에는 자주정부수립과 이승만단독정부반대..... 위로 형들이 있었지만 그당시 농촌은 예방의학이 안되어서 요즘 같으면 큰병도 아닌데 어릴때 저세상으로 보내야만 하였고 그래서 바로위 누나와는 12살 차이가 납니다. 누나들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버지 농사일을 대신하여 낮에 남이 볼까봐 처녀들이 지게를 질수가 없어서 밤에 볏단을 지게로 져 나르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강하게 자란누나와 동생들이 가난하고 어려운집에 시집가서 자식들 잘키우고 成家해서 잘 사는것을 보면 어릴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닌것 같습니다. 그당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자녀 교육은 요즘사람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남자애들은 다섯살만되면 안방 어머니 곁에서 사랑방 아버지 방으로 사정없이 내쫓아 버립니다. 사내자식이 안방 여자들속에 크면 암사내가 되어 제대로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였습니다. 부부사이라도 합방할 시기가 아니면 부부유별이 엄격했고 유가적법도에 철저했습니다. 누가보든 안보든 행동을 함부로 하지않으시고 아무리 화가나도 어머니에게 욕설은 하지 않으신것 같습니다. 사랑방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글을 읽거나 본인일만 하시면서 집안식구에게는 엄했지만 남에게는 절대 피해를 주지않고 꼿꼿하게 사시다 가셨습니다. 네다섯살 어린나이에 새벽단잠을 깨워 찬물에 세수하고 꿇어앉아 천자문을 외우게 하고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잘못을 하면 예외없이 몽치미 (木枕)위에 종아리를 걷고 올라서랴하고 싸리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리셨습니다. 당시 자식은 속으로 사랑하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것이 전통적 자식교육 방법이였습니다. 늦게 얻은 귀하게 얻은 아들이지만 엄하게 키워야한다는 교육관이 확고한것 같습니다. 자식을 속으로 사랑했는지 몰라도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으신것 같았습니다.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참으로 야속하게 느껴 졌습니다. 지금도 아버지像은 언제나 엄하고 무서운.... 賞罰은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분명 하셨던것 같습니다. 저의 어릴때 기억력은 좋았던것 같습니다. 네 다섯 살때 천자문을 달달외왔으니
지금도 제밑 동생 해산을 큰집 백모님이 와서 도와주는것을 기억하고 어머니 등에 엎혀 시장에 가서 가르쳐주지도 않는 한글과 한자로된 간판을 읽고..... 그때 주위에서는 무슨 큰 난리를 낼줄 알았겠지만.... 어릴때 능력을 찾아서 제대로 키워주지 않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다 그렇고 그런 삶을 살다가 가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제도권학교 공부는 당시 6학년때를 마지막으로 별로 열심히 해본적이 없습니다. 별 중요하지않는 공부를 왜 죽자사자 해야하는지 의문도 들고 해보니 별 재미가 없고 어린나이에도 시시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당시 서울에서 혼자 고학하면서 대학을 마치고 이제 막 직장을 잡아서 어렵게 사는 큰누나가 중학교를 서울에 데려가서 시키겠다는 말만 믿고 공부를 한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이해부족은 어렵게 학교를 마치고 사는 딸에게 학비도 제대로 보태주지 못하면서 짐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서울유학이 중도에 좌절되어 어린마음에 너무나 실망하여 상처가 커서... 성인이 되고도 오래도록 내기억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학교공부는 열심히 해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중학교때 공부가 재미없고 하기도 싫어 놀기만 좋아하던 때 그냥 생각없이 농고를가서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말이 씨가되어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어릴때는 농사가 너무 힘들고 사람대접도 못받아 슬퍼 한적도 있지만... 벌써 10여년전 내하고 싶은것 거의 다하고 나니 농촌에서 농민으로 사는것이 나와남니 다 잘한것 같습니다. 학교공부와 담을 쌓으며 스스로 사물과 세상의 이치와 원리를 스스로 배우며 터득하면서 주류의 길과는 거리가먼 본격적인 江湖의 길로 들어선것 같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집안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이 있습니다. 조상의 제사를 정성껏 받들어 지내고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성껏 모셔서 대접한다는 것입니다. 집안에 兩代 不遷位 제사가 있어 그때가 되면 경향각지에서 종가집에 자손들이 모여서 친목을 다지고 집안에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는 집안내 직접 민주주의장이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이웃과 집안에서 남녀노소의 관계에서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절로 그러하듯이 많이 보고 느끼며 자란것 같습니다. 우리집에 손님이 갑자기 찾아와서 반찬이 없으면 이웃집에 반찬을 빌려서라도 정성껏 대접하고 손이 남기신 반찬을 동생과 서로 먹을려고 했던 기억들이 요즘은 서울서 아주 잘살고 있는 동생과 만나면 웃고 합니다. 좁은 우리집 사랑방에 겨울만 되면 초저녁부터 어른들이 발뒤들 틈도 없이모여 듭니다. 다양한 경험들 일제의 침략시절 해방공간에 우리집은 그야말로 동네 진보적 남정내들이 모여 마음껏 떠들고 토론하는 百花齊放 百家爭鳴 의 직접민주주의 공론의 장이 였습니다.
매케한 담배연기속에 제대로 잠을 잘수가 없어 각자 만주와 일본 해방공간에서 살아온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철없는 어린나이에 비몽사몽간에 어렴풋이 듣고 자라면서 어른들의 이야기속에서 어린나이지만 해방공간과 민족상잔의 현대사를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나름대로 무엇이 옳았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사는것이 사람이 바로 사는것인지 우리가 학교에서 듣고 배운 역사를 거꾸로 어릴때부터 내스스로 터득하며 배우며 자란것 같습니다. 지금도 우리집에는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나는 고등학교 대학,청년시절부터 가난한 우리집에는 전국 각처에서 외국에서 친구와 손님들이 끊어 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가난했지만 어머님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여 정성껏 대접하였고 당시 교육공무원이던 여동생은 오빠친구들이 오는것을 너무나 좋아해서 월급에 상당분분을 말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보탠것 같습니다. 외갓쪽에는 일제때부터 외아저씨들이 유학을하여 선진 사상을 일찌기 받아들여 일제때 이미 사회주의 독립운동사건에 연류되어 많게는 7년 .... 정부 문서보관서에서 기록을 찾아 독립운동 유공신청을 한적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외갓집 식구들은 외할머니를 닮아 기골이 강대하신것 같습니다.
외아저씨 몇분은 해방공간에서 우익집단에게 살해당하고 살길을 찾아 선택의 여지없이 북으로 가신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일제로 부터 완전한 자주독립과 친일파청산을 통한 새나라 건설이 겠지요 그과정에서 몇분은 서울에서 지방에서 우익테러로 돌아가시고 더이상 이곳에 살수가 없어서 살길을 찾아 선택의 여지가 없이 북으로 가신것 같습니다. 그당시 어머님도 지성과 베포가 큰 여장부형이시며 인테리 여성인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삶을 여기다 쓸수도 없고 어렵고 힘든 삶을 격으시다가 바람처럼 살다가셨지만....
세상이 무너져도 당당하게 비굴하지말고 올바로 살어라 그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80년 암울한 군사독제시대 경제활동도 사회운동도 어느것 하나 소홀히 할수없었습니다
기관원과 대공과 형사들이 마치 쥐가 쥐집 드나듯 드나들며 집안을 뒤지다가 어머니께 발각되어 신으신 고무신짝으로 그들 귀싸대기를 사정없이 내리갈기시던 어머니는 언제나 나의 영원한동지이셨고 나의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이제는 땅을 치며 호곡을 해도 영영 만날길이 없습니다. 돌아가시던 그해 가을 콩타작을 도와주시다 폐렴으로 신촌세부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영영 저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나는 80년 자연농법관계로 일본국제자연농법개발쎈타 초청으로 일본에 자주 나갔습니다. 70년대 중반부터 유기자연농법을 한다고 어머니와 리어카로 흙을 파서 토곡을 만들고 유효미생물 배양토를 함께 만들고 자연건강식을 하시는분은 아마 어머니가 이나라 최 선두주자 이실것 같습니다.
그때 어머님이 나도 일본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그말씀이 한달만 더사셔도 마음껏 해드리고 싶었지만.... 영영 기다리시지 않습니다, 일평생 부모님 속만태우고 불효만 하던 내자신이....... 몇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이렇게 비가오는 날이면 어머님에 대한 평생 죄인이된 자식은 가슴과 땅을치고 통곡을해도 다시 만날수 없고 보고싶고 그리운 마음은 영원히 지울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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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린시절 저를 보는듯했습니다 잠시 추억에 빠졌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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