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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말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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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마요TV] 한일커플: 한국인남친을 둔 일본여성이 캄보디아 시골에서 홀로 여행중 길을 헤메다 도움 받은 사람이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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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속한문화] 한류열풍에 한국어도 인기..미 대학생 수강 외국어 10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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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한류 20년 그리고 K-POP 의 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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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국에서 드라마로 제작중인 '설국열차'(Snowpiercer) 예고편 (2020년 봄중 TNT 채널에서 방송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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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국이 살해한 솔레이마니, 한때 미국과 함께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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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 731부대 미공개 사료전.."전세 불리에 세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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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상상도 못할 인공지능 기술을 한국이 세계에 공개/4550조 AI 시장을 한국이 미국과 양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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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F-35A 1대 가격으로 최신 스텔스 드론군단 만들 수 있다/ 스텔스 전투기보다 스텔스 드론이 더 무서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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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中 관광객 13만 명 `춘절에 한국행`.."한한령 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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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시민이 중앙일보 기자들에게 - 최경영의 경제쇼 2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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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카를로스 곤 회장이 경험한 일본 사법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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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제국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1. 정치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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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제국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2. 경제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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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제국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3. 외교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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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제국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4. 군부와 혁신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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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발흥
(포츠머스 강화 조약의 내용에 분개하여 히비야 공원에 운집한 도쿄 시민들)
1905년 러일 전쟁이 종전되려는 가운데 일본 본토에서는 단나슈(旦那衆)라 하는, 중소 상공업자나 자본가 등의 실력 집단과 도시 하층민들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집니다.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일어난 이 사태는 러일 전쟁의 강화 회담(포츠머스 조약) 결과, 일본이 얻어낼 배상금이 없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무리해 가며 전쟁을 치러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집단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규모 전비는 이들에 대한 징세를 통해 충당되었습니다. 청일 전쟁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러일 전쟁기의 어려움도 언젠가 배상금을 얻어내면 정상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확보하지 못했고, 배상금을 얻어내지 못한 채로 강화를 하게 됩니다. 결국 이는 민중의 소요로 발전하여 관공서, 경찰서 등을 불사르고 경찰과 투석을 벌이는 등의 무력 충돌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종래의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정권을 전유해 왔던 기성 정치 세력, 번벌들에 대한 반발 여론과 대항 논리로서의 민본주의(이에 대해선 후술하겠습니다.)가 발흥하게 됩니다. 소위 '전비를 조달한 것은 우리다.'라는 의식이었지요. 도쿄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사회 조직이 결성되고, 이에 우호적인 언론과 변호사 집단 등이 이들을 보호하고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정치 주체로서의 민중의 성장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발생한 1차 헌정 옹호 운동은 민중의 힘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건 중 하나입니다.
(가쓰라 다로 내각의 퇴진을 위해 시위하는 군중)
1910년대 초의 일본은 번벌의 가쓰라 다로(桂 太郎)와 입헌 정우회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가 번갈아가며 집권하는 시기였습니다. 1912년 당시 일본의 총리는 사이온지였는데, 육군 측으로부터 신해 혁명과 군벌들의 난립으로 인해 격변하는 중국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해 달라고 요구받았습니다. 사이온지는 이를 예산 문제로 거부했고, 이에 육군 대신은 직을 사임함으로써 사이온지 내각을 붕괴시킵니다. 당시 일본에는 육·해군 대신을 현역 장성으로만 임명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군의 통수권 독립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제도를 이용해 육군 대신을 사임시키고 후임자를 내지 않음으로써 내각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하여 사이온지를 퇴진시킨 것입니다. 후임 내각으로 가쓰라 다로를 총리로 하는 내각이 성립했습니다.
민중들은 이에 대항하여 헌정 옹호라는 명목하에 시위를 전개하고 가쓰라 내각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민중의 사회 조직과 정치 주체로서의 영향력이 날로 성장하는 가운데 이러한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얼마 안가 내각은 총사퇴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이 1차 헌정 옹호 운동입니다. 민중의 힘으로 기성 정치 세력을 타도하고 새로운 내각 성립을 주도한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이러한 기조는 1919년 입헌 정우회의 하라 다카시(原 敬)를 총리로 하는, 최초로 정당 독자적인 내각을 출범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1920년대 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이 문화 통치로 선회하고, 러일 전쟁 이래 만주 사변에 이르는 기간까지 일본이 전면전을 치르지 않고,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국제 사회와 공조하려 한 외교 기조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데모크라시에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 한계와 민본주의의 종언
(1910~2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민본주의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전술했듯, 정치 주체로서의 민중을 일본 정치의 중심에 등장시켰고, 그동안 정권을 전유해 왔던 번벌들에 경종을 울린 하나의 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국강병, 제국주의 노선을 통해 자국민과 식민지인들, 외국인들에게 억압을 가해 왔던 번벌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19세기 말에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애치슨 라인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도 하라 다카시와 정당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고 한 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보였습니다. 민중과 그를 기반으로 삼은 정당의 도약은 민중의 의식, 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고 자유, 여성 인권을 포함한 인권 등의 정치 사회 담론도 활발하게 논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장밋빛처럼 보이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이미 근본적인 한계가 내재된 사조였습니다. 일본의 데모크라시는 일본의 덴노(天皇)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본은 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가 될 수 없었고, 이에 데모크라시는 정치가 민의(民義)에 따라 이루어지고 민중의 복리를 향해야 한다는 민본주의의 논리로 통용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일본의 데모크라시가 덴노, 추밀원, 육해군, 귀족원 등의 기성 정치 세력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제압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관동 대지진과 대공황이라는 연이은 악재에 따라 단나슈를 비롯한 데모크라시 주동 세력이 기반을 잃자 결국 정권의 주도권은 다시 번벌과 군부로 넘어가게 됩니다.
민본주의자들이 제국주의를 부정하지 않은 것도 데모크라시를 기저에서부터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3·1운동 당시 조선인들의 취지에 공감했던 대표적인 민본주의자 요시노 사쿠조는 1차 대전기 일본이 중국에 강요했던, 21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불평등 조약에 대해서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해 조약에는 중국에 중일 공동으로 경찰을 편성하고, 중국은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고 일본인 고문을 놓는 등의 제국주의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맨 처음 '데모크라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민본주의자 가야하라 카잔도 1차 대전 참전을 지지하며 '중국으로의 진출 계기'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민본주의자들도 더러 있었으나 소수파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민본주의가 1920~30년대의 국내외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군부가 만주와 몽골 지역으로의 팽창과 국가주의를 제창하고 나섰을 때, 민본주의자들과 정당 정치가들은 정권을 제 손으로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기성 정치 세력을 제도적으로 다루는 데 실패했으며, 사상적으로도 팽창주의를 부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후에 기회가 되면 조금 더 세부적으로 다루겠으나, 이러한 측면에서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는 단순 군부의 폭주, 준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당과 민본주의자의 자멸이라는 면모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정치적 배경을 간략히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당대 일본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문헌
야스다 히로시, 『세 천황 이야기』, 역사비평사, 2009.
후지이 조지 외, 『쇼군 천황 국민』, 서해문집, 2012.
마쓰오 다카요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소명, 2012.
나리타 류이치, 『다이쇼 데모크라시』, 어문학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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