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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염려하다
갈 4:8-20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갈 4:8-20 /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한 걱정] 여러분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의 노예나 다름없었습니다. 9)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또다시 율법을 지켜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그 빈약하고 천한 종교의 노예가 되려고 합니까? 10) 여러분이 특정한 날과 달과 계절과 해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고 있다니 11) 나는 여러분이 걱정스러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온 힘을 쏟은 것이 허사로 돌아갈까봐 애가 탑니다. 12)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 역시 지난날에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율법의 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나처럼 되십시오. 내가 처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때 여러분은 나를 경멸하지 않았습니다. 13)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당시 나는 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14) 여러분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텐데도 여러분은 나를 외면하거나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쫓아내기는커녕 마치 하나님이 보낸 천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처럼 나를 대하며 돌보아주었습니다. 15) 그때 우리가 함께 나눈 그 행복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시절 여러분은 나를 돕는 일이라면 눈이라도 기꺼이 빼어 줄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16) 그런데 지금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하고 있다 해서 나를 원수처럼 여긴단 말입니까? 17) 여러분의 호감을 사려고 거짓 교사들이 열성을 보이는 것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 내서 자기들에게로 관심을 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8) 그들이 선한 동기와 진실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왜 나쁘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내가 여러분과 같이 있을 때뿐 아니라 없을 때도 한결같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더욱 훌륭한 일이겠지요. 19) 오,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면서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산모의 해산의 고통을 다시 한 번 겪고 있습니다. 20) 지금이라도 내가 여러분과 만나서 이런 것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정녕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은 갈라디아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통해 받은 은혜와 자유의 구원을 다시금 율법주의 아래에서 제한당할 위기에 처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8-12) 이전에 갈라디아 성도들은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매여 종 노릇하고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속량하시어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은 갈라디아 사람들 중에 다시 그 유대교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 등에 자신을 가두려 하는 부류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는 은밀히 침투한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까지 그들을 위한 수고가 헛될까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어리석은 행위는 아들의 신분에서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3-18) 바울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몸에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걸림이 될 만한 질병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이것 때문에 그를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주었습니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자기 눈이라도 빼어서 바울에게 주었을 정도로 환대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참된 복음을 전해준다는 이유로 바울을 원수처럼 대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의 이간질로 복음의 진리를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19-20)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주의 형상을 상실해 가는 것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죄와 저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신 그리스도를 잃어버려가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면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그들을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외쳤습니다.
적용: 요요현상처럼 아직도 종의 신분이었던 과거의 습관들과 헛된 것들을 되풀이하는 악습들은 무엇이 있나요? 각자 하나님 아들, 곧 신의 아들답게 살려는 존귀한 품격, 품행들은 무엇이 있는지 서로 나누어보세요.
전 세계의 존경을 받는 남아프리카의 첫 번째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해방 운동을 이끌다 26년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가 석방됐을 때 오랜 감옥살이에 건강을 염려 했는데 우려와는 달리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었습니다. 기자들이 비결을 묻자 만델라는 “나는 감옥에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했습니다.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석방 후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남아프리카의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됐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 설 교 >
그리스찬은 율법 없이 무엇으로 사는가?
갈 4:8-11 / 김광선 목사
지난 토요일 큰 딸 결혼식 잘 마치고 바로 월요일 귀국했습니다.
15년 전 델리 임마누엘교회 개척 멤버인 황종연 장로님 부부, 대사관 상무관이셨던 정수철 집사님 내외를 비롯하여 옛날 성도들, 그리고 최근에 귀국하신 가정들, 마침 한국을 잠시 방문하고 있는 현재 임마누엘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임마누엘 성도들로부터 축하를 받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제 목회와 선교의 열매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근래에 좀처럼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재 하는 결혼식이었다고들 합니다.
원래는 제가 직접 주례를 하려고 했으나 딸로부터 퇴짜 당했습니다.
아빠가 주례해 주는 것은 좋은데 틀림없이 주례하다가 우실 텐데 그러면 하객들에게 누가 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식 당일 날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고 마음이 동하면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고 참았습니다.
그런데 신랑과 신부가 양가 부모님들에게 큰 절을 올리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먼저 절 받고 신랑과 신부를 안아 주고 격려해서 신랑 측으로 보냈습니다.
신랑 부모님 역시 큰 절을 받고 신랑 신부를 안아 주면서 격려하는데 가만 보니 사돈어른이 아들을 안으면서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 울어도 되겠구나” 안심하고 약간 눈물을 흘렸습니다.
양가 아버님들은 눈물을 흘리시는데 양가 어머니들은 뭐가 좋은지 싱긍벙글이에요.
신랑, 신부도 전혀 섭섭한 기색이 없이 시종 일관 싱글벙글 이었습니다.
결혼식을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없고 대책 없이 삽니다만 하나님께서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대책을 세워 주시고 위로를 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4대째 믿는 가정과 사돈을 맺게 되어 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서로 이해하고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신랑 댁에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단, 폐백도 다 생략하고 신랑 반지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사위가 딸에게 프러포즈할 때 간단하게 만든 반지 두 개 있다고 해서 그것 잘 끼고 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서로 생략하면서도 양가가 서로를 축복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은혜였습니다.
사부인이 이스라엘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한국에서 이스라엘 선교를 가장 크게 하고 있는 분이고 사돈은 열심히 돈을 벌어 이스라엘 선교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선교하는 집안이기 때문에 선교사인 저의 가정을 잘 이해하여 모든 것을 생략하자고 했을 때 오히려 더 좋게 받아 들였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가 좋은 신랑 만나고 넉넉한 집안으로 시집을 갈 것을 믿었습니다.
평상시 딸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물질적인 헌신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취직하고 첫 월급 전체를 하나님께 인도 선교비로 드렸습니다.
제가 그 첫 월급 하나님께 드리면서 감사의 눈물도 함께 올렸습니다.
딸이 이렇게 커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직장생활이 신앙생활을 잘 하기에 맞지 않았습니다.
주일날도 근무해야 하는 날이 많아 예배드리고 바로 직장으로 갔습니다.
영상 회사에 다녔는데 영화를 편집하다보면 낯 뜨거운 장면도 많이 나오고 그런 일을 하면서 갈등을 많이 겪어 결국 직장에 사표를 쓰게 되었는데 마지막달 월급 전체를 다니던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때 대학원 입학 허가를 받아 수업료도 내야 되고 혼자서 자취하면서 당장 다음 달 생활비도 없는데 마지막 월급을 다 헌금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대학원 수업료도 내야 되고, 당장 다음 달 생활비도 없는데 월급 전체를 다 헌금해 버리면 어떻하니?”
딸의 대답이 명답이었습니다.
“아빠, 아무런 대책이 없어 다 헌금했어요, 하나님께서 대책을 세워 주시겠죠”
저보다 더 믿음이 좋아요.
딸의 믿음대로 삼일 후에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월급도 훨씬 많고 야간에 대학원에 다닐 수 있도록 일찍 퇴근시켜 주고, 점심 식사까지 회사에서 제공해 준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간 선교사 자녀들이 나가는 교회를 출석했는데 재정적으로 약하다 보니 딸이 물질적으로 많이 섬겼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남달리 하나님께 물질로 심는 딸이 결혼하면 물질에 구해를 받지 않는 넉넉한 집안으로 시집을 갈 것으로 믿었는데 사돈댁이 비교적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넉넉한 집안입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을 지어 제가 하려고 하는 말은 “물질을 심었기 때문에 물질 축복을 받았다” 이것이 아닙니다.
정 반대입니다.
‘심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내가 이만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만큼 축복해 주셨다”고 믿는 성도라면 그는 은혜로, 복음으로 사는 성도가 아니라 아직까지 율법에 메여 사는 성도입니다.
자기의 행위나 공로를 앞세워서 사는 성도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
자기가 잘 나고, 잘 해서 잘 된 것인데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심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스스로 무엇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적 자유의지는 일반 철학에서 말하는 자유의지와 다른 것입니다.
철학적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그 무엇에게도 간섭이나 제재를 받지 않고 본능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유와 방종의 한계를 구별하기 힘이 듭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 종속의지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결론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인간과 인간의 역사를 통치하지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이라는 말 밖에 안 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종속적인 자유의지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엄마의 태속에 있는 아이는 마음대로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하지만 엄마의 태를 통해 산소와 영양과 물을 공급받고 삽니다.
태 안의 아이는 어떠한 제재나 간섭을 느끼지 못하는 완전자유를 가지고 삽니다.
델리에서 인천공항을 갈 때 주로 아시아나를 탑니다.
아시아나 비행기 안에서 무엇을 해도 자유입니다.
잠을 자건, 영화를 보건, 책을 보건, 통로를 걸어 다니든, 화장실을 가든......
완전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 비행기는 인천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는 믿고 있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유인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의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불신자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하게 하시는 은혜’에 의해 사는 사람들이고, 불신자들은 사단의 ‘하게 하는 충동’에 따라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독자적으로 무엇을 결정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공로주의 신앙은 로마 천주교회에서 온 것입니다.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하고 있는 무속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아무런 자격이 없어도, 아무런 한 일이 없어도 그저 베풀어 주시는 은혜 때문에 복 받고 사는 것입니다.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일찍이 이 은혜를 알았습니다.
로마서 4장 6-8절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될 만한 일을 한 일이 없어도 의롭다하심을 받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어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지은 죄가 드러나 인생이 망가지고, 자녀들까지 피해를 입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죄를 지어도 그 죄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가려 주십니다.
분명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죄로 여기시지 아니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안 했기 때문에 내게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
율법에 얶메여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성도는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게 하시는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3장 전체와 4장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으라는 목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이란 예수님 오시기 전 까지만 필요하다는 율법의 유효기간에 대해서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성도는 율법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결론은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율법에 얶메여 사는 삶은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합니다.
하지만 율법에서 해방된 성도들은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믿습니다.
‘예배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봉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봉사합니다.
‘구역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구역장 합니다.
‘헌금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십일조도 하고 감사도 하고, 선교헌금도 합니다.
‘직장생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직장생활 합니다.
‘사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사업을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한 순간 호흡하는 것, 아침에 자고 일어나는 것,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 밖에 나가 공부하고 일해서 돈 버는 것.....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법이라는 것은 사람을 두렵게 하여 행동을 제재하지만 변화 시키지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잘 만든 법이라 할지라도 그 법은 단 한 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변하게 만드는 것은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교인이라면 다 압니다.
은혜 받은 대로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교인이면 다 압니다.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을 교인이면 다 압니다.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을 교인이면 다 압니다.
하지만 왜 알면서도 안하게 됩니까?
‘하게 하시는 은혜’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다면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명의는 환자의 얼굴색만 보아도 어떤 병인지 짐작을 하듯이 목회자는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성도는 그 다음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는지 대강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직분 감당을 잘 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직분을 잘 감당한 대가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그 성도나 가정에 심게 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어느 때 이 ‘하게 하시는 은혜’를 깨닫고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옮기게 될까요?
I.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입니다
8-9절 말씀,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메여 종노릇 하며 살게 됩니다.
돈에 얶메여 살면 돈의 종이 되어 살고, 쾌락에 얶메여 살면 쾌락에 종이 되고, 마약에 얶메여 살면 마약에 종이 되고, 권력에 얶메여 살면 권력의 종이 되는 것이고....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나, 지식 같은 것들이 출세의 지름길인 줄 알고 살인도 불사하면서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그렇게 자기가 세상에 좋은 것이라고 추구했던 권력과 명예, 부, 지식 등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난 후 고난을 당해도 감사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굶어도 감사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매를 맞아도 감사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감옥에 갇혀도 감사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바울에게 보여 줌으로 바울로 하여금 하게끔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죄와 율법의 저주로 인해 영원토록 멸망 받아야 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깨닫게 하심으로 ‘믿음’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스토리는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다음 스토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너무나도 자명한 스토리라서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 온 아들에게 법을 만들어 지키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침에는 몇 시에 일어나야 한다.
하루 몇 시간씩 일해야 한다.
한 달 용돈은 얼마 이상 줄 수 없다....
이제 아버지와 돌아 온 아들 사이에 법이 필요 없습니다.
돌아 온 탕자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오는 아버지의 유산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법이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아버지의 뜻이라면 진심을 다해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심으로 그것을 본 성도들은 더 이상 법이 아닌 인격으로, 사랑으로, 존경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버리고 율법을 그리스찬의 생활윤리로 지키라는 말은 다시 옛날의 탕자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한국교회 안에 유달리 탕자가 많은 이유가 그것입니다.
교회 안에 무수한 탕자들로 인해 오늘날 교회나 성도들이 사회에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1. 율법은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입니다.
본문에 율법을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이라고 했습니다.
왜 율법이 약합니까?
성도 속에서 자유를 빼앗아 가고 믿음에서 떠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 이유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율법과 유대교 전통도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뭔가 지키고 뭔가 행해야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대로 율법을 지키고 유대교 전통을 지켰더니 결과는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빼앗기고 믿음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율법을 그리스찬의 생활윤리로 지키라고 할 때 똑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죄의식과 죄책감, 불안과 공포가 찾아오는 것은 율법에 메여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키려다가 실패하면 자연히 자신을 율법을 어긴 죄인이라 여기게 되고 그 죄인의식이 건전한 자화상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율법을 거울과 같이 죄를 비추어주는 역할만 할 뿐이지 씻어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약한 것’입니다.
율법의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 더럽네, 아 큰일 났네, 어떻하나’....
걱정이 되지만 걱정을 해결해 줄 능력은 없기 때문에 ‘천한 초등학문’인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가면 뭘 배웁니까?
개를 그려 놓고 ‘이것은 개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자를 그려 놓고 ‘이것은 사자’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고등학문은 무엇입니까?
의대생들이 사람을 해부해 놓고 ‘이것이 간이다’ ‘이것이 폐다’ ‘이것이 위다’ 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기관들이 병에 들었을 때 어떻게 치료하고 어떻게 수술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등학문의 수준입니다.
율법이 초등학문이라면 고등학문이 무엇입니까?
이미 강해를 들은 대로,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14절까지 성도가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율법’을 지켜서 된 것이 아님을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비유로 들어 아브라함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 430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5절-22절까지, 성도가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은 창세전에 선언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이지 ‘율법’을 잘 지켜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고 나서 율법을 잘 지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어기고 또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또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고 또 섬겼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고 또 가나안 땅을 주며, 국가를 이루어 통치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의 후손을 통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만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최초의 축복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언하시고 일방적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에 의해서 성도는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 것이고 복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 번 째는 ‘믿음’입니다.
갈라디아 3장 23-29절까지 성도가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율법을 잘 지킨 결과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율법을 잘 지켜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고,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도 없고 믿음도 필요 없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심’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절-7절까지 율법을 잘 지켜서 그 보상으로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유업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 ‘믿음’ ‘하나님의 자녀됨’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고등학문을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알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도 우리를 알 수 없습니다.
고등학문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셔서 기도와 교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2. 종노릇 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율법을 그리스찬의 생활 윤리로 받아들일 때 다시 죄의식, 죄책감,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왜냐면 율법의 두 가지 기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두 가지 기능은 (1) 사람을 심히 죄 되게 하고(롬3:20) (2) 율법으로 인해 죽게 만듭니다(롬7:9)
그러므로 율법을 그리스찬 생활 윤리로 받아 들여 지키려고 할 때 율법의 종이 되게 됩니다.
3. 수고를 헛되게 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매를 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히는 수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의 복음을 포기하고 거짓 교사들이 가르침에 미혹이 되어 복음을 떠나 율법에 다시 얶메인다면 이제까지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의 수고 뿐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도 그들 스스로 헛것으로 만들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헛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으로 삽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율법에서 자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충만히 임하여 ‘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많이 심고, 많이 거두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을 지키려는 해산의 수고
갈 4:8-20 / 김철한 목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바울이 전투적이 되었다. 어조가 강하고 물러설 것 같지 않으며 단호한 사도가 되었다. 이 강한 모습의 바울이 된 이유는 은혜의 복음을 변절시키는 무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외적 도전을 받아서 흔들릴 수 있고 내적 도전을 받아서 흔들릴 수 있다. 여기서 복음을 변절시키는 자들은 거짓 교사들이고 틀린 복음, 다른 복음을 선포했다. 심각한 상태를 예측한 바울은 강력하게 꾸짖는다.
갈1:9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의 언사가 강해졌다. 높아졌다. 교회를 지키려고 칼을 든 사도가 되었다.
그러면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서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가? 갈4:20을 보면 의혹을 제거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사도가 사람을 볼 때, 교인을 볼 때, 또 교인이 교인을 볼 때 의혹은 암덩어리 같은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붙잡고 있는 사람인지,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믿고 있는 사람인지, 서로가 의혹을 품고 생활한다면 교회 생활이 어떻게 행복하겠는가? 선교적 힘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바울은 교회를 의혹의 집단으로 전락시킬 수 없었기에 복음을 지키려 이 편지를 쓴 것이다.
1. 사도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지키려 한다. (갈4:11)
갈4:11을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왜 두려운가? 바울의 수고는 생명과 자유를 주고 거두려는 수고였다. 죄에 매인 영혼들을 살리는 수고였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 사역을 따르던 이들이 미혹자들의 속삭임 앞에서 그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을 수용한다.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가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는 믿음이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가르침은 큰 미혹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갈2:4을 보면 가만히 들어왔다. 그들은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을 엿보고 있었다. 결국 바울의 복음을 따르는 자를 변질시켜 종으로 삼으려 하였다. 저들은 초등학문을 가지고 와서 미혹하였다. 여기 초등학문이란 무엇인가? 갈4:9을 보면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 했는데 이 뜻은 초보 단계란 말이다. 알파벳 쓰기와 같은 미성년 단계의 상태를 뜻한다. 그것을 “약하고 천박하다”라고 한 것은 초등학문이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복음의 영광을 맛본 성도가 다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고 율법과 할례를 행하므로 구원된다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성년이 미성년으로 돌아가고 자유인이 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의 수고는 헛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두려운 것은 선교의 열매를 볼 수 없는 슬픔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참 신앙에서 이탈되는 불신앙의 타락을 보는 슬픔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물러설 수 없다. 어찌하든 자신의 사역의 수고를 지키려 한다.
2. 사랑의 교제를 빼앗기지 않고 지키려 한다. (갈4:14)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었다. 갈4:14 “그리스도께서 ...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것이 우리를 믿게 하는 복음이었다. 이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은 육체의 약함으로 전하였다. 갈4:14을 보면 그런 바울을 갈라디아 성도들이 섬겼다. 뜨겁게 사랑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그리스도가 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믿으면 의로워진다는 이 복음 앞에 성도들은 참 자유를 얻었고 바울을 존경했다. 바울과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는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사랑이 오고 갔다. 그들은 천사를 대접하듯, 예수를 대접하듯 바울을 섬겼고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하였다. 갈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왜, 눈을 빼어서 바울에게 주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안질 때문이다. 갈6:11을 보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였다. 서신이란 모두 자신의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개 구술자가 구술해서 주면 비서가 받아 적었다. 쓰는 것은 모두 돕는 자들의 몫이었다. 이렇게 큰 글자를 쓴 것을 보라는 것은 직접 썼다는 이야기이고 안질을 앓고 있는 약한 바울이 그 고통 가운데서도 손수 썼다는 것이다. 이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대한 특별한 바울의 애정을 나타내준다. 그런데 주의 종의 괴로움이 안질인 줄 알고 눈을 빼서라도 주려는 사람들! 사랑이란 이렇게 놀랍고 아름다운 것이다.
교회의 건축을 위해서 눈을 팔러 간 사람이 있다. 인천 만수교회의 성중경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 이야기를 하셨는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눈을 팔러 갈까?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이래야 한다. 더 주고 싶고 더 되돌리고 싶은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눈이라도 주어서...” 교회는 정말 사랑이 넘쳐 사랑의 교제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다른 소리, 다른 냄새가 나서는 안된다. 병원에 가면 소독 냄새가 나듯, 교회는 칭찬하고 격려하고 배려하는 사랑 냄새가 나야 한다. 그것이 바울의 목회 현장이다.
그런데 다른 복음의 가르침을 받고 잘못된 생각에 오염이 되면 거짓을 쫓는 그들의 마음이 교회의 방향과 갈린다. 사랑이 멀어진다. 배려와 공경과 존경이 식는다. 마음이 복음으로 하나되지 못하니 사랑의 교제는 무너진다. 바울은 교회생활의 최고 가치를 사랑으로 보았다. 그 귀중한 덕목인 사랑을 지키려고 각오했다. 복음을 더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3. 교회의 분열을 막고 하나됨을 지키려고 한다. (갈4:16)
바울과 성도, 그들의 관계는 사랑이었다. 그런데 갈4:16에 오면 분열이 되어 있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참된 말을 한 자는 바울이요, 헛된 말을 한 자는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이다. 그러나 바울이 헛된 말을 한 자처럼 여겨지고 다른 복음에 미혹받은 그들은 자신들이 옳은 줄 안다. 그래서 바울과 성도의 관계는 원수가 되었다.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고 원수가 된다.
대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집단들의 열심이 매력이 있어 보이고 그들의 열심이 진리를 지닌 듯 하다. 그러나 그럴 듯 하게 보이는 것이지 미혹자들의 열심은 자신들의 인간적 목적 달성일 뿐이다. 복음의 영광을 높이는데 있지 않다. 결국 성도와 성도를 나누고 신뢰 관계를 깨뜨리는 악한 열심이다. 열심이라고 다 멋진 것이 아니다. 거짓된 교사들이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려고 발버둥치는 열심을 분별하지 못하면 안된다.
갈4:17을 보라.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이간이다. 교회 안에 충성을 이간시키고 헌신을 이간시키고 순수를 이간시키는 이들은 기초가 잘못되어 있어서 그렇게 된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구속론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는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구원론이다. 그런데 다른 복음의 거짓 교사들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된다고 가르쳤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 된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갈2:21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헛되이 만드는 사탄의 공격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된다는 가짜 복음에 마음을 주면 안된다.
거짓 복음에 속은 사람들은 은혜의 복음을 버리고 결국 바울에게서 멀어지고 거짓된 교사들에 대하여 열렬한 마음을 쏟아 붓게 되었다. 교회는 기초가 흔들리면 안된다. 성도는 믿는 도리가 흔들리면 안된다. 그것이 흔들리면 교회는 사랑이 식고 분열된다. 바울은 갈3:1에서 이 사실을 말하길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들의 열심은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갈라디아 교우들을 이간시켜 자신을 따라오게 만들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여기 이간시킨다는 것은 헬라어로 “에클레이오”란 말이다. 이 말은 복음의 은혜로부터 이간시킨다는 뜻이니 복음을 놓치면 교회와 하나되고 사랑으로 친밀하게 되는 교제의 무리에서 당연히 떨어져 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 갈라디아교회 안에 일어난 이 다른 복음의 도전 앞에서 칼을 든 바울이 된 것이다. 영적 전쟁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 진리의 기를 흔드는 자가 된 것이다. 교회가 분열되면 선교는 끝이다. 전도도 끝이다. 사명도 끝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외친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역은 어떤 면에서 지키기 위한 수고다. 피를 흘리는 각오로 때론 생명을 위협 받으면서도 생명을 낳으려는 해산의 수고이지만 지키기 위한 수고다. 복음이 아닌 것으로부터 교인의 영혼을 지키는 수고다. 매력을 주는 것으로 보이는 미혹으로부터 교회 공동체를 지키는 수고다. 거짓 교사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순전함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키는 수고다. 밖의 도전도 위협적이고 세상의 위협도 무섭지만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탄의 궤계로부터 성도의 신앙을 지키는 수고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되고 복음이 복음되고 사랑이 사랑된다.
우리 모두가 바울처럼 해산의 수고를 각오하자. CM장들이 CM원들을 지키고 성도들이 교회를 지키고 온 교회가 은혜의 복음을 지키려고 희생을 각오한다면 어떤 도전도 공동체된 교회를 이간질할 수 없다.
오목천교회의 100년의 역사! 정말 필요한 것은 바울처럼 복음을 지키기 위해 수고하겠다는 다짐이다. 그간 교회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기에 100년에 이르렀다. 배라헬 권사는 박영숙 권사의 시모다. 그분은 사변 이후 송길섭 목사 재임 시절에 성미 지기였다. 가난의 시절, 쌀통에 성미를 부어 목회자의 식량으로 삼던 때에 항상 배 권사님은 성미통에 쌀이 부어지게 하였다. 쌀을 지키는 것이 목사를 지키는 것이고, 목사를 지키는 것이 교회를 지키는 것이고, 교회를 지키는 것이 주님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수고가 있기에 교회가 지켜졌다. 이 지키려는 사명을 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은혜의 힘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대내외적으로 도전이 많은 21세기다. 여러분과 내가 힘을 다해 교회를 지키고, 복음을 지키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자. 그리하여 복된 교회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자. 우리의 100주년 기념주일 준비예물도 복음을 지키려는 열정이 담기기를 축원한다.
하나님 자녀의 특징
갈라디아서 4:8-20 / 김형익 목사
오늘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잠시 자신의 마음의 이야기를 전하는 부분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 보일 만큼 강한 어조로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갈라디아 사람들과 자신의 좋았던 관계를 회상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바울 사도가 이처럼 흥분해서 편지를 쓰고 있는지 내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토록 바울 사도를 사랑했던 교회였고, 복음의 메시지에 반응했던 교회였으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을 때 그토록 기뻐했던 그들이 유대인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그렇게 순전한 복음에서 이탈하는 것을 보며 바울 사도는 그들의 받은 구원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의심이 간다고 솔직히 말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바울 사도는 참 하나님의 자녀들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아는 자이다(8~11).
A. 기독교는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누구를 아는가이며 누가 우리를 아는가이다(9).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는 신학과 성경 시험에서 100점을 맞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누구를 아느냐 그리고 누가 우리를 아느냐 의 문제입니다. 이 지식은 인격적인 지식이며 관계적 지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Knowing God 이지, knowing about God 이 아닙니다.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갈 4:9a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앞의 8절에서도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라고 했습니다. 비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고,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안다는 것이 경험적인 ‘앎’이라는 것은 우리가 수차례 들었던 말씀입니다. 저는 부시 대통령을 모릅니다. 하지만 제 아내는 압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신 바된 사람입니다.이런 지식은 불분명하고 근거가 불확실한 지식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도록 분명하게 내가 그분을 알고 그분이 나를 아는 지식입니다.
B.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아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는 것이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으실 수도 있으나,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의 선택이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이고, 그러기에 구원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알았고 먼저 선택했다면 아마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베푼 은혜일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설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 설명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것입니다.
고아원의 예를 들어보지요. 고아원에 어떤 부부가 찾아가서 한 어린 아이를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해서 자료들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한동안을 계속 방문해서 그 아이를 경험합니다. 그후에 그 아이는 그 부부에 의해서 입양되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가 그 부부를 부모로 알게 되는 것은 그 이후입니다. 이것을 오직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셨기에 우리가 비로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C.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아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다.
이런 ‘오직 은혜’?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의존?의 교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그 의도가 어떠하든지 정죄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라고 할 수 없으며, 기독교의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표방했던 ‘고상한 기독교 프로그램’(higher life program)이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믿음과 할례’, ‘믿음과 율법의 선한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믿음과 교양’, ‘믿음과 상식’, ‘믿음과 수준’, ‘믿음과 성공’, ‘믿음과 물질적 부’와 같은 것들입니다. 오늘날 가만히 보면 이런 내용의 기독교가 얼마나 깊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믿음에 붙는’ 그 모든 수식들을 다 제거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결코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지도, 누리지도 못할 것이고 여전히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 나는 거지같고, 못났고, 성질도 더럽다. 그런데 그분이 나를 구원하셨다. 그분이 나를 아셨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셨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왜 나같은 놈을 아셨고 왜 나같은 놈을 사랑하셨는지? 하지만 나는 그분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조심하십시오. 마치 나의 인격적 고매함이, 나의 지성이, 나의 도덕적 선함이, 나의 교양이 나의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인양,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태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두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도록 우리가 구원의 부르심을 얻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D. 순종이 은혜를 가져오지 않고(종의 태도), 은혜가 순종을 가져온다(아들의 태도).
그러기에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지, 이런 저런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순종이 은혜를 가져오지 않고, 은혜가 순종을 가져옵니다. 은혜와 사랑을 얻기 위해서 순종을 하고 있다면 그는 종이지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똑같은 순종을 한다고 해도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 순종을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실로 은혜를 아는 아들의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의 삶은 은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얻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겠습니까? 순종하여 사는 자의 얼굴 표정부터 다를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이다(12~16).
두번째 하나님의 자녀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다라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서가 아니라, 바울 사도는 이전에 그들과 너무나 좋던 관계를 회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들(15)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서 기쁨(enjoyment)을 얻습니다. 바울 사도는 15절에서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처음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들었는데, 지금은 너희들의 그 기쁨이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 기쁨을 잃어버렸느냐?’는 질문입니다. 처음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바울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도 그것을 기억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느새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들 안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기쁨은 어느 새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의무로 다 바뀌어버렸습니다. 은혜가 없는 의무입니다. 지금 그들을 돌이키게 하려고 쓰는 바울의 서신에 담겨있는 복음의 메시지, 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기쁨이 되지 않는 자신들을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바울 사도는 그들을 찌르듯이 묻습니다. ‘그 때 그 기쁨이 어디로 갔느냐’고 말입니다.
B. 바울 사도의 육체의 약함: 말라리아(열병, 13), 간질(14), 눈병(15)???
여기에는 바울 사도와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후대의 우리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3절에 언급하는 ‘육체의 약함’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가 수년 후에 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언급했던 ‘육체의 가시’와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추측하게 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처음에 갈라디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그의 병 곧 육체의 약함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서 일부 학자들은 행 13:13에서 바울 사도가 본래 서쪽 방향으로 가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열병(말라리아)에 걸리는 바람에 습지가 아닌 산지인 갈라디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바울 사도의 병이 열병이었는가 아닌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질병으로 바울 사도의 계획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여기서 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계획을 가지고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병들게 하심으로써 그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가심에 있어서 우리의 문제, 우리의 약점도 사용하셔서 그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부적당하고 악조건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 여러분이 어떤 예기치 않은 일로 말미암아 잠시 돌아가야 할때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서 뭔가 다른 일을 계획하시고 그 일로 여러분을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때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그리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것을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바울 사도가 가진 그 육체의 약함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사람의 질병이나 연약함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리이스 로마의 신들을 섬기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단순히 열병이라기 보다는 보다 심각한 간질이 아니었겠는가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 사도를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거절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 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듯이 그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15절에도 육체의 약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힌트가 나오는데 갈라디아 사람들은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주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바울의 약함은 ‘안질’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눈이라도 빼어’라는 표현은 직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으나 비유적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문헌에는 ‘눈을 빼어준다’는 표현이 가장 귀한 것, 마치 생명을 내준다는 식의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말 표현으로 바꾸면, ‘간이라도 빼어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 사도에게 생명이라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에 갔을 때 약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메신저인 바울 자신을 천사처럼 또는 그리스도처럼 극진하게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C.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 사도를 사랑했던 이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 사도를 눈이라도 빼어줄만큼 사랑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종종 목사와 성도의 관계에서 친한 것이 좋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친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관계가 없다면, 참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목사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엮어진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다면 어떻게 목사와 성도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를 그토록 극진히 사랑하고 대접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다면, 그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의 메시지와 메신저인 자신으로부터 돌아섰을 때, 그들이 참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20). 목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유명해지고 성공하도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목사를 판단하실 때, 그 기준은 인격이나 능력이나 외모나 유명함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한 가지 기준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자신을 비롯한 그 시대의 동료와 후배 목사들에게 이런 경고를 하였습니다.
우리 목사들에게 성령님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분이 없는 우리의 직무는 이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속해있는 교회에 대하여 제사장직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옛 시대에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그의 말씀을 선포하고 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대의를 주장하였던 사람들의 후예입니다. 우리가 우리 위에 머무시는 그 선지자들의 영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가 걸치고 있는 가운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거친 껍데기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위에 성령이 임하시지도 않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감히 말하였다는 이유로, 정직한 자들의 무리에서 싫어여김을 당하여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그의 증거를 계속하도록 임명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변인으로 자처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인격과 메시지 위에 언제나 머물렀던 분입니다. 만일 우리 위에 그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과 같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위임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 가운데서 말씀드립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목사로 살다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말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자이다(17~20)
세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는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속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 성령 받고 거듭난 것이 사실이라면,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내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은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직접 하시는가 아니면 다른 도구 가령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가? 물론 하나님은 직접 그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그 일?성화?을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행하십니다. 이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개가 신비주의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화?영적 변화?를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A. 하나님께서 영적 변화를 위해 사람을 사용하신다(19).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영적 변화를 이루신다는 사실이 19절에 나옵니다. 바울 사도는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실제로 영적 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적 성숙?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속에 이루어지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신앙생활하는 것을 배우셨습니까?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통해서 ‘이렇게 기도하는구나’ 혹은 ‘저렇게 기도하는구나’ 하고 배우고, 사람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적 깊이도 도움을 받아 깊어지고 자라갑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를 세우고 직분자들을 세우시는 것은 본질적으로 교회라는 조직을 관리하기 위한 경영자나 관리자들로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즉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4:11~12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에 세움을 받은 지도자들이 이 본분을 놓치게 되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기능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신앙의 성숙이 일어나기 보다는 조직의 비대함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착각하게 됩니다. 조직의 비대함을 교회의 성장이라고, 그것이 신앙의 성숙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가 어떻게 하면 양적으로 숫자적으로 성장을 하느냐가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형제들의 속사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언제나 바울 사도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빌 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의 유일한 관심은 성도들의 속사람이 자라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가는 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댓가도 지불할 용의가 있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힘겨워도 나는 그것을 감당하고 말겠습니다.”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해야 할 때, 힘드니까 포기하겠다고 하는 산모는 없겠지요? 심지어는 죽음의 위협을 받더라도 새 생명의 출산을 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주어서라도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영적 지도자를 둔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런 영적 지도자를 거절하였고 이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 되었고 오히려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그들을 이용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충성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누구를 통해서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고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또 여러분은 어떤 사람의 신앙의 성장과 그리스도 형상이 이루어짐을 위해서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고 있습니까? 사람이 중요합니다.
B. 사도는 자기 제자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17~18).
사도는 자기 제자를 만드는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의 관심은 당연히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17절입니다.
4: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잘못된 양육과 잘못된 제자훈련이 가지게 되는 문제를 바울 사도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열심을 내는 동기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자기들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로 만들려 함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이간 붙이는 일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바울 사도와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바울 사도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 관계를 떨어뜨려놓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들이 좋은 동기로 그런 열심을 낸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질문합니다. 바울 사도가 있을 때나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모든 기독교의 양육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자기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C. 사도는 먼저 그들과 같이 되었다(12).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일,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일은 결코 댓가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사도는 먼저 갈라디아 사람들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서 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12절을 돌아가서 봅니다.
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과 같이 되기를’, 이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가 섬기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형상을 자기와 같이 닮아가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목사의 최대관심은 사람들을 자기처럼 만드는데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먼저 목사는 성도들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처럼 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이 그들과 같이 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같이 되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휩쓸리는 것을 정당화해주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때에도 놓치지 않고 비본질적인 형식에 있어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동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 사도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놀라운 복음의 열매를 가져온 것입니다.
4. 교훈/적용
A. 자기 점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도전하시고 물으시는 바가 분명히 있는 것을 확인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기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들이 여러분 안에 있는지 정직하게 대답하셔야 합니다.
i. 나는 하나님은 아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정말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을 아셨고 선택하시고 사랑하셨기에 여러분들이 그 결과로 그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안다. 나는 그 분께 늘 나아간다. 그분께 나의 마음을 늘 털어놓는다. 그분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분은 나를 아신다.” 바울 사도와 함께 여러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들은 분명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시 정직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그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간절히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으며, 잠시는 속일 수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서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았는지를 확연하게 확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만일 여러분이 이 증거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할 수 없으시다면, 하나님께 정직하게 그 은혜를 구하라고 자비로우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ii.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즐거워하는가?
하나님의 자녀됨의 두번째 증거로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한없이 즐거웠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주일날 즐겁게하는 것은 사람들과 만나 그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입니까? 무엇이 과연 여러분의 가장 큰 즐거움이요, 기쁨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 자녀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인 설교와 가르침을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갈망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솔직하게 이런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 자녀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참 자녀라면 세상적 즐거움을 하나도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그런 육체의 소욕이 분명히 있다고 바울 사도는,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 사역을 기뻐하거나 즐거워할 능력이 없습니다. 결코 이것은 그들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조금 더 이 문제를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단지 설교를 들을 때에 그것이 좋은 말씀이다라고 반응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그런 반응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당신은 영원히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사실?를 여러분이 듣기를 기뻐하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도덕적 교훈을 말하는 것이 되고, 교양과 상식의 전달이 되어가고 있는 세대에서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어도 그런 설교를 듣기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코 복음의 핵심, 우리의 존재를 향한 성경의 지적을 기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기뻐합니까? 여러분은 그 복음을 더 듣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내가 어떤 자였는지를 들으면 믿는 자를 의롭다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찬송하고 싶어지십니까? 여러분은 복음의 핵심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묵상하기를, 듣기를 기뻐하십니까?
혹시 여러분이 예전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느끼십니까? 어디서 떨어졌는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내 영혼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도록 구하기에 앞서서 먼저 회개하십시오.
iii.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하나님 자녀의 세번째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을 경험하십니까? 겉으로의 변화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교회에 출석할 수 있으며, 봉사도 할 수 있고, 결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의 영혼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본래 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뭔가 나의 것이 아니던 어떤 것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끌고 가는 그런 힘을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이 숨쉬고, 움직이고 도약하는 것을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은 자라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없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심각하게 되물어야만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정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가? 살았다고 하지만 죽은 자는 아닌가?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가셔야 합니다. 특별한 은혜를 구하셔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원한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B. 건강한 성경적 교회의 이상: ‘눈을 빼어주는 성도’(15)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 상이 이루도록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목사’(19)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보면서 제 속에 있는 ‘교회, 성경적 교회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이 다시 한 번 불타오르게 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눈을 빼어주는 성도’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도록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목사’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들의 첫 목사인 바울 사도를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간이라도 빼어주려고 할 만큼 그들은 그들의 목사를 사랑했습니다. 바울 사도를 존경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바울 사도의 학식 때문이었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의 사역을 위한 그의 고생 경험 때문이었겠습니까? 인격적 매력 때문이었겠습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해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기뻐받았고 그 말씀으로 구원을 경험했고 그 말씀 안에서 믿음이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성도들을 맺어주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적 사랑이나 정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안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맺어짐이 없는 목사와 교인 관계는 결코 교회를 세워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관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 본질을 떠나지 맙시다.
John Brown은 말하기를 “목사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의 목사를 사랑할 때 그 교회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는데 바로 오늘 본문에 딱 들어맞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John Calvin은 말하기를, “목사는 존경만 받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존경과 사랑 이 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가르침은 달콤한 맛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보여준 모범과 같이, 저도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는 일을 위해서는 어떤 댓가도 지불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생명을 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다소 부담스럽더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면 거리낌없이 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은 목사와 성도의 관계로 묶어주셨습니다. 이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의 관계로 묶어주신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는 오직 사랑의 의무 밖에는 없습니다.
성도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 위해서 어떤 댓가도 치루고, 생명이라도 내어주려는 목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그들의 목사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자기들의 눈이라고 빼어주기를 원하는 성도들, 이것이 죠이선교교회의 현재와 미래가 되기를 주 앞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
갈 4:12-20 / 김광선 목사
오늘 설교 제목이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입니다.
설교 제목만 봐도 오늘 설교 내용이 무엇인가 대강 짐작이 갈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잘 하면 복 받고 목회자에게 잘못하면 벌 받는다’
이것이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오용되고 있는 정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제목으로 설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가 좋아야하는 이유는 교회의 본질적 기능이 잘 되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적 기능은 ‘하나님과의 교통’ ‘성도와의 교통’입니다.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가 좋을 때 교회의 본질적 기능이 잘 유지될 수 있지만 관계가 깨지면 서로 반목 갈등하느라 교회 기능이 마비되게 됩니다.
신앙과 사상은 한 번 물이 들면 여간 고치기가 힘이 듭니다.
교회 초창기에 서울의 모 대학교수가 일 년간 델리에 안식년을 온 적이 있습니다.
잘 알고 지내던 교수 한 분이 소개를 해 주어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연배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해 한 동안 잘 지냈습니다.
부부가 나름대로 믿음이 있어 신앙생활도 잘 하고 여행도 함께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색을 하고 저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목사님이 인도에 진출한 한국기업과 기업에 근무하는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 줍니까?
우리나라 기업들은 총칼만 안 들었지 인도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들어 온 점령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령군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공산주의 사상에 깊이 물든 좌파였습니다.
저는 1989년부터 구 소련 전체를 여러 차례 여행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 역사상 최초의 소련 선교사 13명을 파송하는데 제가 그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수차례 구 소련을 들어가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만들어 놓고 계속해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저는 제 눈으로 공산주의의 결말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빵 하나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 서서 기다리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배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집안의 물건을 가지고 나와 파는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스타킹 하나 들고 거의 온 종일 서 있는 노파를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공산주의의 결말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번 세계경제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우리는 겪고 있습니다.
더 나은 체제로 가는 과정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70년 동안의 공산주의의 실험은 이미 실패로 끝났습니다.
여전히 북한을 옹호하고 남한의 기업들을 인민을 착취하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그 교수의 사상에 어떤 다른 설득의 말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 잘못된 사상에 물들면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결국 그분과는 더 이상 목회자의 성도의 관계가 지속될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편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어디에서 시작하고 무엇을 배웠느냐가 거의 평생을 좌우합니다.
그 패턴을 바꾼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진리탐구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시행착오를 많이 해 보지 않고서 그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방향을 틀 확률은 거의 희박합니다.
지난 주 구르가온 교회의 김진출 안수집사님이 이사를 가서 심방을 했습니다.
구르가온 교회에 출석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데 갈라디아서 강해를 들으면서 비로소 수십 년 동안 정립되지 않았던 신앙이 정립이 되면서 지금은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해가 되어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타이프로 치는데 성경전체를 4번 정도 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해되거나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타자 실력만 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갈라디아서 강해를 들으면서 복음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갈라디아서 강해를 계속하면서 ‘죄와 율법과 은혜’의 관계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강해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절 한 절 해석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이 개입할 틈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지성을 최대한 동원하면서 설교를 듣고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본문의 내용은 율법의 용도와 유효기간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그리스찬은 율법 없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설교를 통해 바울은 초등학문인 율법을 버리고 고등학문인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이 삶은 내 힘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의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말함으로 그리스찬의 교회생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I. 복음 안에서의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12-15절)
1. 복음 안에서 영적으로 일치를 이룹니다(12절)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받고 나서 유대인의 전용물인 율법과 유대교 절기와 전통 지키는 것을 다 버렸습니다.
율법과 유대교 절기는 지키는 것은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으로 그리스찬이 된 갈라디아 교인들이 정 반대로 율법을 지키고, 유대인들의 절기와 전통을 지키는 것을 보고 “유대인인 나도 복음을 알고 나서 율법과 유대교 절기를 버렸는데 어찌 너희가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처럼 되려고 율법과 절기를 지키느냐? 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는 이유는 복음 아래서 영적으로 일치를 이루었던 교인들이 이제 다른 복음에 의해 갈라져 갈등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성도는 한 복음 안에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초교파적으로 모이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는 장로교 교인도 있고, 침례교 교인도 있고, 성결교 교인도 있고, 순복음 교인도 있고.... 다양합니다.
교파가 다르기 때문에 신앙의 강조점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믿는 주님은 같은 주님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하나입니다.
즉 하나의 복음을 믿습니다.
교파에 구분 없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큰 틀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의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 ‘구주를 믿는 믿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됨’ 이것 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근본적인 복음입니다.
‘불 받았다’ ‘꿈을 꾸었다’ ‘환상을 보았다’ ‘방언을 한다’....
이것은 지엽적인 문제들입니다.
지엽적인 문제들이 근본적인 복음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난이 성령역사를 강조하는 교파에서 오신 분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임마누엘교회는 다 좋은데 뭔가 1%가 부족한 것 같다’고 처음에 말을 합니다.
그런 분들이 한 2년 정도 지나면 그런 말이 쑥 들어가고 고개를 숙입니다.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접하고, 성경공부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고, 교회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들을 보면서 달라집니다.
자신들이 신앙 수준이 얼마나 얕은 가를 깨닫고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지난 주 구르가온 교회에 선우라는 어린 아이가 갑자기 밤에 잠을 자기 않게 되었습니다.
불을 끄지 못하게 하고, 밤에 한 시간 정도만 잠을 자고 일어나서 엄마 아빠를 깨워 손을 잡고 방에서 거실로, 또 방으로, 부엌으로 새벽까지 끌고 다니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밥도 잘 먹고 유치원도 다녀오는데 밤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며칠을 잠을 설친 후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프지 않는데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대게 악한 영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다음날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고 악한 영을 추방했습니다.
저는 다른 일이 많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젠가 아이 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예배드린 날부터 아이가 정상적으로 잠을 잘 자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크고 작은 기적들이 많이 일어납니다만 그것이 복음은 아닙니다.
그런 기적들은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 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해서 병이 낫는 경우도 있고, 아이를 못 낳는 가정들이 아이를 갖는 경우도 많습니다.
델리 교회에서만 거의 열 가정 가까이 기도 받고 아이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복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조할 것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산다는 복음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목회자나 교회지도자나 성도들이 이 한 믿음 안에 있을 때 교회는 평안해 지고 믿음이 점점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지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전도자 디엘 무디는 백만 명을 주께 인도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분은 능력을 얻기 위해 남들이 하고 있는 온갖 방법을 다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믿음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온다”(롬10:10)는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믿음을 얻기 위한 모든 노력을 중단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했습니다.
바른 지식을 통해 믿음이 그에게 오게 되었고 그 믿음이 무디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교파는 달라도 커다란 신앙의 틀,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 ’믿음‘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산다는 복음으로 같은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근본적인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대 원칙이 목회자와 성도를 영적으로 하나 되게 합니다.
2. 목회자의 약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성도(13-15절)
바울은 몸이 약했습니다.
13-14절에,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지방은 사도행전 14장에 나오는 이고니온, 루스드라, 비시디아 안디옥 등의 도시들입니다.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할 때 사도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큰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던 바울에게 돌을 던져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깨어나기는 했지만 그 후유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의사 누가가 상시 따라 다닐 정도로 바울은 건강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갈라디아 지역에서 숱한 고생을 해서 육신적으로 많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15절에 말씀에 의하면 바울에게 고질적인 안질이 있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안질 때문에 고생하던 바울에게 갈라디아 성도들이 ‘할 수만 있다면 내 눈을 빼 주고 싶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어찌했든 바울은 육신적으로 많이 약해 있었습니다.
보통 교인들이 생각하는 목회자상은 아파서도 안 되고, 슬프거나 괴로운 일을 당해서도 안 되고, 늘 건강하고, 늘 평안하고, 늘 잘돼야 합니다.
목사가 병에 걸려 있으면서 교인들의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병도 못 고치면서 남의 병을 위해 기도해 준들 낫게 되겠는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목사의 자녀들이 잘못되어 있는데 교인들의 자녀를 위해 축복해 준다면 교인들은 ‘자기 자식들도 저렇게 사는데 남의 자녀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교인들은 영웅적인 모습의 목회자를 원합니다.
목회자의 약한 모습을 보면 실망을 하게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 보다 더 믿음이 항상 좋아야 하고, 항상 축복 받고 살아야 하고, 항상 건강해야 하고, 항상 웃고 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경신교회라는 감리교에서는 비교적 비중 있는 큰 교회가 있습니다.
저도 몇 번 그 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감리교 감독을 지낸 김용주 목사님이 시무하시는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를 목회하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탈진이 되어 불면증과 우울증 때문에 고생을 하다가 미칠 것 같아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그분 교회 성도를 만난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정신과에 치료 받으러 온 것을 안 이 성도는 그 다음 주부터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용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은 항상 밝고 명랑하고, 건강하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 그럴 수 만은 없는 것입니다.
인도에 온 한국 선교사님들은 4년 일하고 1년을 안식년으로 쉽니다.
본부에서 무조건 쉬게 합니다.
선교사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내년이면 인도에 온지 17년이 되고 임마누엘교회를 개척한지는 15주년이 됩니다.
아직도 안식년을 갖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인도 오래 사역하셨으니 안식년을 가지세요”라고 말하는 성도도 없고, 저 역시 몸도 마음도 지치고, 영적으로 충전을 해야 하는데 그런 약한 모습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약한 모습 그대로를 내 보였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렇게 약해 있는 바울을 14절에, “ 너희가 나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예수님처럼 영접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아마 바울의 모습이 업신여김을 받을 정도로 나약했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쓸모없을 정도로 비쳐졌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에 이 정도 되면 당장 제직회 열어 후임목사 선정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쓸모없을 정도로 된 바울을 천사와 같이 또는 예수님을 보듯이 그렇게 영접해 주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받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 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는 줄 믿었습니다.
그 보다 더 좋은 복이 없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 진리를 깨닫게 해 준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주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영접과 격려에 힘입어 바울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의 약함을 업신여기지 않고 복음 때문에 오히려 영접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관계가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변한 것입니다.
II. 율법 아래서의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16-18절)
이렇게 좋은 교인들이 어느 날 변하게 되었습니다.
눈이라도 빼줄 것 같이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의 태도가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런데 사실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단지 갈라디아 사람들이 은혜의 복음을 버리고 다시 율법에 얶메이는 종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타까워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쳐 주었더니 그것을 역겹게 생각한 것입니다.
16절에,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너희와 원수가 되었느냐? 고 했습니다.
역겹게 생각한 정도가 아니라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언약한 성도들은 때로 무슨 말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독이 되는지, 누가 진정으로 자신들을 사랑하는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주일 지켜야 한다, 선교해야 한다,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해야 한다,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이런 당부를 지겹게 생각합니다.
결국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금이 생기게 됩니다.
밥 먹을 때 옆에도 안 와요....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바른 관계는 복음 안에서의 관계이지 다른 복음이나 이단 사상이 들어가면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지고 있는 교인에게 ‘당신이 나가고 있는 교회가 이단이다’고 말해 줄 경우 대부분은 원수가 될 각오를 하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가족과 친척까지도 원수가 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장군의 상급자가 별 넷을 달 기회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부인이 여호와의 증인이고 그 아들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징집을 거부합니다.
차라리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군대를 가지 않습니다.
이 장군의 아들이 징집을 거부했습니다.
장군의 아들이 군대를 거부하는 것은 장군 진급에 결정적인 타격이 될 것이 뻔합니다.
장군은 눈물로 부인과 아들에게 사정을 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 사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부인과 아들은 다른 것은 양보해도 신앙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장군은 별 넷을 앞에 두고 부인과 아들 때문에 군복을 벗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분통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이단에게 물들고, 다른 복음에 물들면 목회자와의 성도의 관계는 절단이 나고 맙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아 눈이라도 빼줄 것 같았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빠진 이후로 바울을 원수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배경이 17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과 성심을 다해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도와주고,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
거짓 교사들은 열심이었습니다.
왜 그런 열심을 내었느냐하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과 이간을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간을 시켜야만 사도 바울이 전하는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말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들의 수하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린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의 인간적인 친절과 도움 때문에 바울이 전한 복음마저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언니 동생 사이로 발전을 하게 되면, 형님 동생 사이로 발전하게 되면 인간적인 정으로 가까워져 교회 안에서 하나의 그룹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가 해외에 살다 보니 한국에서 가져 온 고기도 나누어 먹고 서로 도와 주다 보면 인간적으로 가깝게 됩니다.
언니를 중심으로 형님을 중심으로 모이다보면 이 그룹의 목소리는 담임목사 목소리보다 성경의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 지게 됩니다.
이 소리 때문에 우는 목회자들 많습니다.
갈라지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복음 안에서 언니, 형님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끈끈하고 두터운 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분열은 ‘하나님과의 교통’ ‘성도와의 교통’이라는 본질적인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III. 해산의 수고
본문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통해 복음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낳았습니다.
전에 루스드라,이고니온에서 전도할 때 돌아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 갈라디아 성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유대교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미혹이 되어 그들이 바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애를 써서 얻은 성도들인데, 그렇게 마음을 쓴 성도들인데 거짓 교사들에게 넘어가 자기를 원수로 대하는 교인들에게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겠습니까?
하지만 그 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거짓 교사에 빠진 갈라디아 교인들이 걱정인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이 걱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배반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이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소가 실험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소는 산고를 겪고 낳은 아이들과 진통제를 맞고 무통 분만한 아기들을 자세히 비교 관찰해 보았더니 모자간의 정과 그 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진통이 심할수록 모자간에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의 원천이 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되고, 반대로 산고의 진통이 없으면 그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분만 후 아기들의 행동이 다른데 진통을 겪은 아이들은 곧바로 엄마의 젖을 찾아 안기는데 반해, 무통 분만아들은 엄마를 찾아 더듬거리는 반응을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를 때 “나의 자녀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극한 고난을 통과하면서 영적으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에서 떠난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감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도를 향한 목회자 바울의 열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을 낳고 양육하기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다하고, 여러분들은 연약한 목회자를 이해하고 격려하여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통’ ‘성도와의 교통’이 월활하게 이루어지게 하여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힘 있게 감당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위한 해산의 수고
갈 4:12-20 / 김동호 목사
우리 사람들이 가장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그것은 사랑할 때입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 대상은 동물일 수도 있고, 식물일 수도 있고, 세상일 수도 있고, 어떤 일일 수도 있는데 사랑은 그 대상이 어떠하든 다 우리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이 주는 행복은 사람은 건강하게 합니다. 복되게 합니다.
저는 어려서 교회를 참 사랑했습니다. 교회에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설교 중에 여러번 말씀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비가 오면 교회로 올라가는 언덕 길이 패였습니다.
비만 오면 교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책가방을 들고 교회로 먼저 갔습니다. 그리고 교회 마당의 흙을 퍼다가 패인 언덕길을 메우고 학교를 가곤했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저는 무척 가난했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어렸을적 기억은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적의 기억이 저만큼 밝은 사람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가난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했었다는 것은 제 삶에 아주 건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처럼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받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의 가장 큰 원인이 제가 어렸을 적에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하고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편 122편 6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의 증인이 바로 접니다. 교회 즉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통의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 증인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하늘교회 교인 여러분들이 이 복을 받게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예루살렘은 높은 뜻 하늘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높은 뜻 하늘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식 사랑에 있어서 부와 모가 똑같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보편적으로 엄마의 자식 사랑이 아버지의 자식 사랑보다 깊습니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아마 사람에게만 있는 현상일 겁니다. 동물들에게 있어서 자식 사랑은 거의 어미에게만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동물의 아비는 자식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왜 어미의 자식 사랑이 아비의 자식 사랑보다 큰 걸까요?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어미는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자식을 얻고, 아비는 그와 같은 수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대하여 말씀을 하면서 자신이 교회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갈 4:19)
정말 사도바울은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다 한 사람입니다.
저는 바울이 교회들을 세우고 그 교회들을 돌아보기 위하여 다녔던 길을 차를 타고 돌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산의 위험과 강의 위험이라고 고백하였던 말씀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길을 걸어서 갈 수 있었는지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길만 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매도 맞았고 돌로도 맞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고 결국은 교회를 위하여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였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바울은 정말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행복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기뻐하고 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젊어서 영락교회를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몇몇 교회를 섬겨 보았는데 교인들의 교회 사랑에 있어서 으뜸이었다고 기억되는 교회는 영락교회였습니다.
영락교회는 6.25때 이북에서 피난민들이 내려와 세운 교회입니다. 피난민들이 자기 먹을 것도 없었는데 교회를 세운다고 가락지를 뽑고 비단 이불보를 뜯어 팔아 세운 교회입니다. 돈이 없는 교인들은 실제로 몸으로 건축일을 도왔습니다.
영락교회 예배당은 아주 아름다운 석조건물입니다. 그 돌 하나 하나를 교인들이 물로 씻어서 쌓았답니다. 교인들의 손에서 피가 났었답니다.
제가 부목사로 섬길 때 영락교회는 방대동 쪽으로 교회를 새로 지어 이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인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피난시절 손에서 피가 나면서도 돌 하나 하나를 물로 씻어 예배당을 건축하였던 교인들이 그 예배당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꼭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영락교회 교인들만큼 자기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락교회 교인들이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형제 교회인 높은 뜻 씨앗교회가 지금 천안 땅에 학교를 건축하고 있습니다. 우선 자그맣게 초등학교부터 건축하려고 합니다. 우선 한 학년에 두 학급씩을 운영하려고 합니다.
초등학교를 건축하고 학교 강당에서 교회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건축예산이 약 50억 원 남짓 됩니다. 감사하게도 높은 뜻 형제교회 목사님들이 제가 없을 때 청어람을 팔아 높은 뜻 씨앗학교 건축비를 담당해 주자는 결의를 하였습니다.
청어람 건물은 약 100억 원 정도는 가는 건물입니다. 목사님들이 결정해 준대로 청어람 건물을 팔아 건축을 한다면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회 교인들은 헌금 한 푼 하지 않아도 계획했던 것보다 두 배나 크고 좋은 건물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지으면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청어람 건물을 열매나눔재단에 20억 원에 양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20억 원과 연합선교회에 있는 돈 5억 원을 합해 25억을 지원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나머지 25억 원은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인들이 헌금하여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높은 뜻 교회로서는 씨앗학교 건축에 25억 그리고 열매나눔재단에 약 80억 원을 헌금한 셈이 됩니다. 그것을 팔아 높은 뜻 교회들이 나누어 가졌다면 교회들의 재정에 많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높은 뜻 형제교회들이 그것을 사양하고 씨앗학교와 열매나눔재단에 헌금을 한 셈입니다.
저는 이 결정이 높은 뜻 교회다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회는 주일 장년 예배 출석이 약 450명 정도 됩니다. 450명 출석교인이 25억 원을 헌금하려면 일인당 5-6백만원씩을 헌금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 볼 때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헌금 작정하는 날 제가 한 번 설교를 하고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광고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가 얼마를 헌금하는지 목회자들도 모르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이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회는 이제 2년 조금 넘은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아직 교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와 같은 시점에 25억 원의 건축헌금은 매우 위험한 결정일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교인들이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흩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험이 성공한 것 같습니다. 500명 출석까지 갔다가 한 50명 정도가 줄었습니다. 그리고 450명의 교인들이 말도 없이 그 무거운 짐을 잘 감당해 나가고 있습니다.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회는 틀림없이 좋고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사탄이 이 건축을 방해하려고 출석교인이 5천명 정도 되었을 때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던 학교로부터 내쫒김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보이는 성전건축으로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고 길바닥에서 예배드릴 각오를 하면서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계시던 어떤 분이 자신이 사 놓으셨던 동백의 새 건물 800평을 우리 교회에 기증해 주셨습니다. 인테리어 비용까지도 거의 다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높은 뜻 하늘교회 예배당입니다.우리 높은 뜻 하늘교회는 우리 높은 뜻 교회의 간증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높은 뜻 하늘교회에는 구조적인 취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의 수고와 헌신없이 그냥 공짜로 예배당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카나다를 다녀보면 정말 기름진 땅이 많아 보입니다. 기름진 땅에서 자라는 나무와 식물들은 얼마나 건강하고 크게 잘 자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름진 땅에서 쉽게 자란 나무는 조금만 바람이 세게 불면 뿌리채 뽑힙니다.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뿌리 채 뽑혀진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아름들이 큰 나무들의 뽑혀진 뿌리는 한 아름도 안 되어 보였습니다. 깊게 힘들게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물과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뿌리를 땅 깊숙히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뜻 하늘교회는 작년 연말 담임목사가 갑자기 교회를 사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시작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섬겼던 담임목사가 갑자기 교회를 사임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우리 높은 뜻 하늘교회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잘 지내왔습니다.제가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임시 당회장을 맡아 한 달에 한 번 정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살펴보니 다른 것은 괜찮은데 재정적인 어려움이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 3억 원 정도의 은행 빚이 있었습니다.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담임목사 사택 전세금을 회수하여 빚 일부를 갚았지만 올해 상반기 동안 교회 재정의 수지가 적자입니다.매달 약 2천 만원 정도의 적자가 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재정부장의 보고에 의하면 전세금 뽑은 돈으로 7월까지는 메꿀 수 있지만 그 다음달 부터는 적자가 될 것이랍니다. 그러면 다시 빚이 늘어나게 될 겁니다.
제가 분석해 본 바에 의하면 우리 높은 뜻 하늘교회 교인들의 헌금 생활과 수준은 다른 높은 뜻 교회 교인들보다 높으면 높았지 절대로 낮지 않습니다.
수입보다 지출 예산이 좀 방대한 것 같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줄일 수 있는 예산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 상황으로는 적자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냥 은행에서 빚을 얻어서 해결하고 내년부터 지출예산을 줄여나가면서 수지를 맞추면 몇년이면 큰 무리 없이 해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 부담을 여러분들에게 지게 하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더 간강해 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저로서는 오늘 이후로 이와 같은 설교를 다시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헌금을 독려하는 어떤 광고도 하지 않으렵니다. 높은뜻 씨앗교회가 단 한번 헌금 작정 설교로 부담스런 헌금을 소리 없이 잘 감당하고 있듯이 우리 하늘교회도 오늘 한번 설교하고 끝내렵니다.
여러분들의 헌금은 광고도 하지 않으렵니다. 교회가 처한 크지 않은 어려움이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겠다는 마음으로 여러분 형편대로 특별헌금을 주일헌금 시간에 내주시면 어떨까요?
제 생각에는 한 5억 원 정도 목표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은행 빚도 갚아버리고 예상되는 적자도 피하려면 말입니다. 대신 최선을 다해서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줄여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부터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쁜 마음으로 동참해 주셨으면 싶습니다. 물론 우리 목회하는 사람들이 일을 잘못해서 생긴 어려움이지만 저는 이 정도의 어려움을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숙제로 주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와 우리 교회를 좀 더 건강하게 하려고 하시는 의도가 있는 숙제 말입니다.
5억 원 정도의 헌금을 마련하는 것을 해산의 수고라고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방관하지 않고 무거워도 그 부담을 지겠다는 것을 훈련하고 연습하기에는 딱 좋은 정도의 숙제와 훈련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높은 뜻 하늘교회를 공짜로 얻은 싸구려 교회가 되게하지 말고 우리의 눈물과 수고와 기도로 만들어가는 좋은 교회가 되게 하십시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좋은 교회로 함께 만들어 가십시다.
이런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건강한 교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나와 같이 되라
갈 4:12-20 / 박조준 목사
갈라디아서의 첫 부분에서 느끼는 것은 사도 바울은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또 한 그는 어느 누구의 추종을 불허하는 굉장한 논리를 갖춘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습니다.
사실 그는 그 당시에는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련을 받은 위대한 학자였음에는 틀 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읽는 동안에 사도 바울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바꿔 놓는 것 같 은 느낌이 듭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깊은 정열과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서 너무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3장에서 우리는 사도로서의 바울, 신학자로서의 바울, 신앙의 수호자로서의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 리는 인간미가 넘치는 바울, 목회자로서의 바울, 열성적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바 울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먼저 본문 12절을 읽어보십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 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호소 를 봅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 사도 바울은 왜,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쓰게 되었을까요?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 지금까지 사도 바울의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읽었습니다. 갈라디아 사 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속량해 주신 바 이전의 얽매임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다고 하는 바울의 번민에 찬 탄식에 이어서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으로서의 신앙과 생활 면에서 바울 자신과 같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도하여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이제 와서는 거짓 선 생들에게 영향을 받아 과거의 생활로 되돌아가려 하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얼마나 안타까웠는 지 모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부터, 율법에서부 터 해방시켜 주셔서 얻은 자유에 대해서 사도 바울 자신과 함께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바울 사 도는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과 같이 갈라디아 사람들도 그렇게 되 기를 바랬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8∼2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였습니 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더러 말하기를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 는도다 라고 말할 때 바울은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당신이 나와 같이 죄수의 몸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그의 해방과 구원의 기 쁨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시자들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 믿어 죄에서 자유함 얻고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는 일만은 다 같아지기를 원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처럼 가난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처럼 병들어 약한 것 외에는 나와 같 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처럼 무식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 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 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갔을 때 그는 사도라고 해서 거리감을 가지거나 자 신의 위엄만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갈라디아 사람 들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갈라디아 사람, 이방인처럼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0∼22절에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 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 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 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 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 을 구원코자 함이니. 이것이 바울의 원칙입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 원칙은 목회자나 선교사나 그밖에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려고 할 때 그 사람들을 우리와 같게 만드는 것이 우리 의 목표라면, 먼저 우리가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이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들 이 우리와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과 경험의 일치를 보게 되려면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 인의 동정으로써 그들과 더불어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할 때 사도 바울 은 너무 위대합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 이 얼마나 귀한 말씀 입니까? 누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목회자, 전도자로서의 훌 륭한 바울의 모습을 엿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목회자와 교인, 목사와 그의 성도 사이에 정립되어야 할 올바른 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2절 하반에서 16절까지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를 대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태도를 봅니다. 1 2절 하반에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을 대하던 그들의 자세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평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때 그들의 행동은 모범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이 처음에 갈라디 아를 방문했을 때는 육체의 연약함을 인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우 리는 바울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 바울이 갈라디아를 방문하게 된 원인이 된 질병이 무엇이었는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추측대로 하면 그가 어떤 만성병에 걸려 있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가 갈라디아로 가는 도중에 전염병에 걸려서 그를 그곳에 머물게 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여간 그 병명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고 린도후서 12장 7절에 바울 자신이 말한 대로 가시 와 같은 것으로서 그의 몸 안의 허약함이었음 이 틀림없습니다. 밤빌리아 연안의 늪지대에는 모기가 창궐하기 때문에 바울이 말라리아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 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이 그만 용기를 잃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사도행전 13장 13절을 풀이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북쪽으로 올라가 산이 많고 공기 맑은 갈라디아 고원 지대로 가려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열병에 사로잡힌 것은 오히려 그가 갈라디아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글쎄 그 병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병명을 확실 히 모르지만 그 병은 보기에 딱한 증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 15절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 면 바울의 병은 그의 시력을 상하게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할 수만 있었다 면 그들 자신의 눈이라도 뽑아내어 그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을 통해 볼 때 바울 은 일종의 안과 계통의 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동안 눈병이라고는 앓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눈을 앓는 것이 얼마나 고통이라는 것을 자세히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 난 수요일 오후에 오른쪽 눈에 모래알이 한 줌 들어간 것처럼 아프고 쑤셔서 지난 삼일기도회 때 성경 강해를 간신히 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병원에 갔더니 바이러스 균에 의해서 생기는 결막염이라고 해서 전염될 우려가 많으니까 조심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목요일 저녁부터 청주에 내려가기로 약속이 되었는데 안 갈 수도 없고 가자니 고통스럽고, 그 런데 그날 밤이 되니까 양쪽 눈이 다 부어서 뜨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첫날 저녁은 눈을 감고 설교를 했습니다. 물론 밤시간만 설교를 하고 낮에는 쉬었는데 다음 주일 설교 준비가 큰 걱정 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내더러 책을 온종일 읽어달라고 부탁하고 저는 그저 누워서 온종일 듣기만 했습니다.
다행히 토요일에는 눈을 좀 뜰 수가 있어서 설교를 준비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설교를 실감 있게 준비시키려고 제게 고통스러운 눈병을 주셨던 것 같습니 다. 감사합니다. 하여간 사도 바울의 신체적인 허약이나 외모상의 보기에 거북함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커다 란 걱정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사실 목회자가 몸이 약하면 온 교회의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나 14절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되 하였는데 영어개역 표준판에는 나의 상태가 너희 에게 걱정거리가 되었다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라이트훗이 말한 것처럼 그를 경멸하거나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의 몸의 연약함을 멸시하거나 혐오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나를 영접하였다 라고 말합니 다. 본문 14절에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하나! 사랑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육체적인 약점이 있는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이처럼 아름답고 이처럼 귀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리웁니다. 사랑 없는 눈으로 교역자를 보면 어떻습니까? 몸이 튼튼하고 좋으면 저 목사는 그저 돼지처럼 먹기만 하는 모양이야 라고 말합니다. 몸이 약하면 저 목사는 얼마나 은혜가 없으면 저렇게 빼 빼 말랐나?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목사의 몸이 좋으면 우리 목사님 은 은혜가 풍성해서 저렇게 몸이 좋으셔. 보기만 해도 은혜가 돼. 몸이 약하면 우리 목사님은 우리 양떼를 위해 애쓰셔서 살도 오르지 못해. 우리가 속 썩여 드려서 그렇지 합니다. 사람은 사랑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예수님처럼 대했습니다. 이렇게 갈라디아 사람이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본 문 15절에 보세요. 그런데 그때의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그때에 그들은 바울이 자신들 과 함께 있게 된 것이 그렇게 즐겁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들이 얼마나 바울 사도를 사랑했었습니까? 바울 사도가 눈이 불편해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가슴아파 했습니까? 내 눈이라도 뽑아 저 어른에게 줄 수 있다면 더 힘있게 일하실 수 있을 텐데 라면서 얼마나 안타까 워했었습니까? 이것이 참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완전히 역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울 사도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님처 럼 영접했었는데 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은 바울 사도를 원수처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단지 갈라디아 사람들이 은혜의 복음을 버리고 다시 속박 가운데로 되 돌아간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이것을 지적했더니 그것이 역겹게 받아들여졌습니다. 16절에 뭐랬어요?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너희와 원수가 되었느냐? 했습니 다. 여기에 중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 었을 때에는 그를 천사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대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울의 메시 지를 버리고 난 후에는 그와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어떤 종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 때는 그를 천사같이 존경하고, 그의 교훈하는 바가 싫어 질 때는 자기 마음에 드는 말만 받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를 원수같이 미워하고 배반하는 일 은 있어서 안됩니다. 이제 갈라디아 사람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거짓 선생들의 태도와 자신의 태도를 대조해서 말합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17절). 거짓 선생들 은 자신들의 변질된 복음에 그들을 끌어넣기 위해 그들 앞에서 아양을 떨거나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어서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언제든지 좋으니라 (18 절) 하였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한 헌신은 순수한 의미의 헌신이 아니었습 니다. 그들의 의도는 오직 그들을 이간 붙이는 것 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을 그리스도로 부터,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 곧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거짓 선생들의 태도와는 너무 다릅니다. 19절 말씀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들 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그들 을 자신의 휘하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한 바울 자신의 해산의 고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머무시는 것 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을, 다시 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되는 것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보기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 신의 그러한 아픔을 해산의 고통과 비교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 거짓 선생들의 차이는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 사 람들을 지배하려고 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갈라디아 사람들 속에 형성되기를 원 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그들 스스로의 권위와 지위를 노리는 이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 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산고를 겪을 각오, 자신을 그들 을 위하여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말해서 교역자와 교인들의 관계를 배웠습니다. 먼저 성경이 가르 치는, 교역자에 대한 교인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교인은 교역자의 인간적 외모를 보고 말하지 말 것입니다. 구전에 의하면 바울은 못생긴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교역자는 그처럼 못생길 수도 있고 잘생길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수도 있고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의 바울처럼 병에 걸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인격이 호감을 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재간 이 많을 수도 있고 재간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외모를 통해 오는 시 험을 이겼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신학의 주장에 따라 교역자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원수가 된 것은 단지 그들이 바울이 가르치는 참다운 진리를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 문입니다. 자신의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교리에 준하여 교역자를 평가하는 것은 퍽 위험한 일입 니다. 흔히 현대 교인을 사로잡는 대부분의 설교자는 그 기교, 태도, 음성, 지식 같은 것으로 비판하고 분석합니다. 사실 설교자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려고 힘쓰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에 대한 교역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칼빈은 만일 훌륭한 목사가 되 기를 원하면 그 목회자는 자기 교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라 고 말했습니다. 그리 스도의 일꾼들은 유대주의자들을 닮을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닮아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 익을 돌보는 것보다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역자는 성도들을 자기의 이익을 위한 어떤 도구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존 브라운은 그런 목회자들이 많아지면 교회는 번성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문제삼을 것은 목사의 외모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그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한 목회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교인들의 호감이 나 인기가 아니라 얼마나 성도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설교자의 말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성도가 필요하고, 성도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수고하는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목회자와 성도가 다 함께 그리 스도를 향해 그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 그들 서로의 관계는 건전하고 유익하게, 그리고 전능 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계로 지속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교회, 목회 자, 성도들이 되십시다.
해산의 수고
갈 4:19 / 김영대 목사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짐승들에게도 해산의 고통이 있지만 사람이 겪는 고통에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범죄한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형벌로 해산의 고통을 크게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해산하기까지의 임신 기간도 무척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곧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이 7-8명 계신데 이 분들을 보면 '참 힘들겠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임신을 하게되면 입덧이 심한 사람은 제대로 먹질 못해 눈도 안보이고 마비까지 오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화장품도 바르질 못하고, 심지어 세수 비누로 세수도 못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정점은 역시 출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산모가 아기를 낳으려고 분만실에 들어가면서 신을 벗을 때 '이 신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생명을 탄생하는 과정이 그 만큼 위험스럽고 또한 고통이 심하다는 말입니다. 네! 한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눈물을 쏟고 땀을 쏟고 피를 쏟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저의 집사람이 워낙 유명하게 입덧을 하고 몸이 약해서 아이들 둘 다 제 날짜를 못 채우고 일찍 낳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집사람 전공이 성악 아닙니까? 그것도 소프라노! 몸집은 작아도 한번 소리지르면 머리가 쭈뼛해지도록 높이 올라가는 소프라노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은 겁도 많고 옴살 또한 많았습니다. 그런 제 아내가 아이를 낳으러 분만실에 들어가더니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그 소리가 큰지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론 좀 창피한 생각도 들었고, 또 한편으론 은근히! 아니, 상당히 겁이 나더라구요. '저러다가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한 생명을 세상에 출생시키는데는 큰 해산의 수고가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해산의 수고라는 말은 여자들에게만 사용되지만 영적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적인 생명의 출산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영적인 생명의 잉태와 출산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 지방에 가서 전도해서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 '전도의 과정'을 '해산의 수고'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의 자녀 하나 출산하는데도 그렇게 많은 고생과 어려움이 따른다면 죄와 마귀에게 사로잡힌 영혼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구원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따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도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으로 실망하지 마십시오. 또 핍박과 괴로움이 있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한 생명의 탄생에는 언제나 해산의 고통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과학과 의학 기술의 발달로 옛날보다는 산모들의 진통이 좀 가볍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태아가 자라나는 10개월이라는 시간을 단축시키지는 못합니다. 사람을 탄생시키는데 식물과 같이 속성재배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시험관 아기! 시험관 아기! 하지만 그 역시 초기 임신과정의 한 단계일 뿐 생명은 어머니의 태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어도 한 생명의 탄생에는 마땅히 해산의 고통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해산의 고통을 줄이려고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됩니다만 실상 이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만 부모와 자식간에 사랑이 더 깊어진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아기를 낳으러 산실에 들어간 며느리의 진통이 심하면, 시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효자 하나 나오누먼!"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해산의 진통이 크면 클수록 모자간의 정도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생각과 경험은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소가 실험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소는 산고를 겪고 낳은 아이들과 진통제를 맞고 무통 분만한 아기들을 자세히 비교 관찰해 보았더니 모자간의 정과 그 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진통이 심할 수록 모자간에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의 원천이 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되고, 반대로 산고의 진통이 없으면 그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분만 후 아기들의 행동이 다른데 진통을 겪은 아이들은 곧바로 엄마의 젖을 찾아 안기는데 반해, 무통 분만아들은 엄마를 찾아 더듬거리는 반응을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연구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증명해 주는 것일 뿐 아니라, 산고를 통한 출산이 산모나 신생아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영적 출생에도 해산의 고통이 따라야 더욱 귀하고 또한 확실한 믿음의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한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10개월의 시간과 어마어마한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영적 생명을 낳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여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는 한 생명을 출생시키는 수고가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산모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까지 쏟아야 한 생명이 탄생되듯이, 한 생명을 교회에 나오도록 하고 구원받게 하기까지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하고, 땀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희생의 피까지 쏟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는 반드시 해산의 고통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의 대가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즉, 해산의 수고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산의 고통을 피하지 말고 기쁨으로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해산의 수고를 하지 않고도 많은 자녀를 거느린 가정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을 보면 아이들이 여럿인데 자기가 힘들여 낳은 아이는 하나도 없고 모두가 양자로 데려온 아이들입니다. 미혼모의 아이, 버려진 아이,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입양하여 자녀로 훌륭하게 키워내는 사람들을 보면 참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들어 젊은이들 사이에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않는 풍조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최근 뉴스를 통해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저조한 나라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들으신 줄 압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이유가 건강이나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취와 일을 위해서 아이한테 매이고 싶지 않다.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려면 아이를 낳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나라가 구조적으로 탁아와 육아를 위한 기반시설이 부족하여 직업과 육아의 양립이 힘들어 자녀 갖기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을 일종의 고정관념이라고 치부하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저 '나 하나 행복하게 살다 가면 그만이다. 필요하면 나중에 입양하면 된다'하는 생각은 결국 고독과 허무라는 결과만을 얻게 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도시의 많은 교회들이 임신의 과정이나 해산의 수고 없이 그저 기성 교인들을 모아서 부흥시키고 있습니다. 교인 수는 많은데 그 교회가 전도해서 힘들여 낳은 영적인 자녀가 아니라, 전부 농어촌 교회나 개척교회가 낳은 자녀들을 힘들이지 않고 양자로 데려다가 입적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개척한지 1년만에 500명, 1000명이 모인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부흥이 아닙니다. 인간 편에서는 그 교회가 부흥했다고 할 수 있으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전혀 부흥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간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부흥은 불신자 믿게 하고, 낙심자를 회복시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영적인 자녀를 출산하는 진정한 부흥, 하나님 나라 확장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자녀를 낳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첫째 남편에게 미안하고, 양가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기다리는 남편이나 부모님에게 얼마나 송구스럽겠습니까? 더군다나 자녀가 귀한 가정에 시집온 여자가 자녀를 낳지 못한다면 잔뜩 기대하는 분들에게 죽을죄를 지은 것 같은 부담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정말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는 라헬이었습니다. 실은 그녀를 위하여 14년간이나 종살이를 해서 얻은 아내입니다. 라헬은 아주 아리따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친언니이며 야곱의 다른 부인인 레아, 그는 네 아들을 낳았습니다. 언니의 네 아들들이 함께 뛰노는 것을 볼 때마다 라헬은 자식 없는 서러움과 수치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남편 야곱에게 가서 외쳤습니다.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사람들이 자녀 없는 그녀를 손가락질 한 것도 아니고, 비웃은 것도 아니지만, 그녀 스스로 자식을 낳지 못한 수치와 슬픔으로 실성할 정도의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또, 사무엘서를 보면 한나라고하는 여인이 나오는데 이 여인 또한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무척 사랑하였지만, 자식을 둔 또 다른 아내 부닌나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한나를 멸시하고 비웃어 그의 마음을 뒤집어 놓곤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남편의 갑절의 사랑도 한나에게 결코 위안이 되질 못했습니다. 늘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으로 슬픔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자식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육신의 자식을 낳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이 마음을 영적으로는 내 삶에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전도 하지 못해도, 나로 인하여 예수 믿게 된 사람이 하나도 없어도 전혀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갖지 않는 성도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나 하나 잘 믿으면 됐지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적 자녀가 출산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나로 인하여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에 대한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되었다면, 예수님과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하고도 마땅하게 영적인 자녀를 잉태하고 낳아야하는 것입니다. 새 신자를 자꾸 생산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해산의 수고를 통해 새 생명들이 교회 앞으로 나오고, 세례를 받고 거듭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인 자녀를 낳지 못하고 불임증에 걸려 있다고 하면, 우리들은 직분을 자랑하거나, 교회를 아름답게 지은 것으로 자랑을 삼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요람에는 영적인 아기가 없는데 교회의 외모만 잘 꾸민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영적인 자녀를 낳지 못하는 교회는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 된 우리 성도가 영적 자녀를 낳지 못한다면 먼저 신랑 되신 예수님께 부끄럽고, 진리로 우리를 낳아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뵐 면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리로 우리를 낳아 주실 때에는 너희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잔뜩 열매 맺기를 기대하시는데 열매가 없다면 얼마나 송구스럽겠습니까?
옛말에 되는 집에서는 세 가지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이 울음소리, 글 읽는 소리, 베틀 소리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아이 울음소리는 전도하여 새로운 생명출산으로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것이요, 글 읽는 소리는 성경말씀을 읽어 성숙한 믿음,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요, 베틀 소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섬김과 봉사의 일을 하는 소리로 가득 찬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을 스스로 점검해 볼 때 영적으로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임증에 걸린 자라면 이에 대한 수치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한나가 주님 앞에 무릎꿇고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하여 사무엘을 낳았듯이 나도 전도하여 영적인 자녀를 낳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성도 여러분들이 영적인 자녀 출산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하고 소망스러운 것은 자녀를 낳지 못한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 모두 잉태와 해산의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라헬은 자식 낳지 못함으로 인하여 부르짖어 기도하다가 기도의 응답으로 민족을 구원하는 요셉을 낳았습니다. 한나도 마음이 괴로워 여호와께 그 심정을 통하는 기도를 드려 마침내 탁월한 선지자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라헬에게 요셉, 한나에게 사무엘은 단지 아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상급이요, 소망이요, 자랑이었습니다.
이사야 66:9에서 하나님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영혼구원에 기쁘게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라헬이나 한나가 자식 없는 것을 수치로 알지 못하고 간절히 소망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요셉이나 사무엘을 낳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들은 자녀를 못 낳는 것을 수치로 알고 기도하여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영적인 자녀를 낳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영적 자녀 출산의 경험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이들과 같이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벌써 5년, 10년이 지났는데도 영적 자녀를 하나도 낳지 못했다면 우리는 마땅히 수치심을 느껴야 하며, 영적인 부담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녀를 낳아 잘 키우면 부모에게 영광이요, 상급이 됩니다. 하물며 영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를 낳고 믿음으로 잘 양육하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19에서 자기가 전도하여 예수 믿게 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나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바로 너희들이 아니냐!" 예! 그렇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낳은 자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광이요, 상급이요, 자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세상에서도 아이를 출산하면 대우가 달라집니다. 아니 임신만 해도 그저 부인이 시키는 대로합니다. 달라는 대로 갖다 줍니다. 밤중에도 없는 것도 어떻하든지 구해다 줍니다. 저도 저의 집사람이 아이를 가졌을 때 밤중에도 뭐 먹고싶다고 하면 오토바이 타고 덕산 읍내에 가서 오이지도 사다주고, 칼국수도 사다주고, 문 잠근 순대집 문 두드려서 순대도 사다 줬습니다. 그 결과 자랑스런 아들 길동이를 낳았습니다.
영적인 자녀를 낳는 것은 참으로 수고로운 일이지만 거기에 따르는 행복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으며, 영원한 상급이 되며, 진정 복된 일인 것입니다. 요16:21을 보면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치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산의 진통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해산을 하고 나면 그 고통보다 훨씬 큰 자녀 얻은 기쁨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결국 해산의 고통마저 잊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웃초청주일'이 다음 주일로 다가왔습니다. '구원 얻게 할 영적인 자녀를 데려올 수 있을까?'하는 염려와 근심이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십시오. 성령께서 함께 역사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전도와 초청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필설로 다 표현 못할 놀라운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 모든 성도님들 한 분도 빠짐없이 이러한 기쁨과 감격을 다 맛볼 수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갈 4:19-20 / 손샹률 목사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어린아이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1:25). 이는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고전 13:11)의 수준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을 감싸고 이해하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부모에게는 어린아이가 꿈이요 희망입니다. 배속에 품는 순간부터 거기에다 정성을 쏟게되고 이를 낳아서 기를 때는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수고라기 보다 오히려 즐거움과 보람으로 여기며 희생을 자원합니다.
본문 말씀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여 저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신앙고백을 하는 과정을 일컬어 해산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믿음이 자라고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열심히 헌신하며 봉사하는 것으로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갈 4:15).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완전한 요소가 있어서 한 순간 시험을 당할 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신앙이 무너지고 원점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이 다시 해산하는 수고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장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다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과정을 해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 인격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게되는 과정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중생(重生)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과정이지만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게 하는 성화의 과정은 일평생 꾸준한 노력과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 나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인내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이상형입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학식과 교양을 갖추고 엄격한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라도 인간은 누구나 죄악된 속성이 있기 때문에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는 허점이 나타나고 맙니다. 로마서 3:10-12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완전하신 인격자입니다. 성경은 죄로 인하여 파괴된 인간의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1) 창조의 원형입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본래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생명의 근원자라고 하였습니다(요 1:1-4).
누가복음 2:52에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요 또한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 본성의 모습이 드러남에 따라 하나님에게도 사랑을 받으시고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의 모델로 하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 인격의 완성을 기대한다면 물론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18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성화(聖化)의 모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삼 년 동안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으로 교훈 하시고 몸소 실천하여 본을 보이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였습니다(요 13:15). 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였습니다(마 11:29).
성도가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지식적으로나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까지 철저하게 예수님의 모습으로 그 인격이 닮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빌 2;5). 이러한 일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3) 그리스도와 신령한 연합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령한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일체된 관계임을 설명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4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온갖 불완전한 요소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하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도저히 되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우리의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바뀌어지면서 신령한 연합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관계를 이상적인 부부의 관계로 표현하였고(고후 11:2),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3:14).
Ⅱ.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여기서 사도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를 말한 것은 그리스도교 복음운동과 관련된 적절한 비유입니다. 그는 전도를 통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되는 일을 해산하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15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여 자식을 낳는 산모의 심정을 비유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신비로운 축복과 또한 죽음을 각오하는 고통의 의미를 다같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6:21).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의 강조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데 비중을 두고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완성되어 가도록 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며 고통을 감수하는 부모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신령한 자양분을 공급하여야 됩니다.
히브리서 13:9에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적절한 자양분을 공급해 주어야 됩니다. 육신의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2).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우 처음 바울이 전한 순수한 복음을 받았을 때 신앙이 자라고 주님께 대단한 열심을 다해 봉사를 다짐했으나(갈 4:15), 거짓 선생들의 잘못 된 교훈을 받아들여 탈선하는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갈 3:1-3). 시편 1:1-2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하였습니다.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합니다.
에베소서 4:22-24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라도 그 속에는 육신의 사람과 성령의 사람이 공존한다고 하였습니다(롬 7:21-23). 그 중에도 육신의 성품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유혹이나 자기 속에서 발동하는 정욕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도록 작용합니다. 이것을 억제하며 하나님과 더욱 밀착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로마서 8:7-9에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4에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26에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적극적인 훈련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우선하지만 여기에는 우리들 스스로 예수를 닮아가기 위한 피나는 훈련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해산하는 수고」라고 하였습니다. 곧 죽음을 통과하는 것 같은 자기와의 싸움을 하여야만 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6:6-7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였다가 다시 옛 사람의 자리로 떨어져 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죄의 종노릇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불행한 것인가를 알 것입니다(히 6:4-6).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해산하는 고통을 반복하면서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Ⅲ. 해산하는 수고를 담당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과 인간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새 생명을 얻는 일의 경우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것이 은혜로 되는 것이라면 해산하는 수고는 사람이 담당하여야될 부분입니다. 더욱이 세상에 난 생명이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성된 인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많은 수고가 투입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싸인에 따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피나는 훈련을 거듭하여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기 못지 않게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가 담당하야 될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1) 신앙적인 가정교육입니다.
잠언 22:6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4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고 하였습니다(신 6:4-9).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자녀로 선물하시고(시 127:3),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꾸도록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디모데의 집안은 모범적인 신앙 교육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후서 1:5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하였습니다.
(2) 건전한 교회의 역할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예배적 인격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도와주는 인화 협동적인 인격자가 되게 하며 더 나아가서 자기의 존재 가치와 목적을 바로 알아 자기의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므로써 문화적 인격자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 교육의 요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종교단체나 사회의 교육 기관에서는 그 나름대로 지식이나 과학이나 도덕을 가르쳐서 교양을 시키고 있지만, 사람의 근본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시대나 환경에 구별 없이 건전한 교회는 인력과 재정을 투입하고 모든 행정력을 기울여서 성경 중심의 신앙 교육에 주력하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3) 밝은 사회의 토양을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6에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무책임한 가정이나 타락한 사회가 자라나는 세대로 하여금 죄악에 오염되고 탈선하게 하는 요인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창 1:2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타락한 세상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망가뜨리데 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소금과 빛의 사명을 수행하며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를 시급하게 이루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대에 주님께서는 자기의 교회로 하여금 해산의 수고와 같은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일에 그 사명을 다하도록 분부하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일이 진정 그리스도의 이상을 이루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