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 이야기
방금 전에 화분이야기를 쓰고 났더니
갑자기 우리 장모님 이야기가 쓰고 싶어졌다
연세도 있으시고 이제 가실 날이 머지 않은 거 같다
환갑도 드시지 못하고 가신 우리 아버지
7순을 드시고 그 해 가을에 가신 우리 어머니
그 두 분을 생각하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장모님은 올해로 98세가 되셨다
나와 같은 용띠시다. 내가 74세다.
내가 처음 장모님을 뵌 것이 1981년 3월29일이었다
아는 집안 내 할머니의 중매로 플라자호텔에서 만났다
내가 30세 되던 해였는데 참 어렵게 만났다
중매를 하셨던 할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나가던 중
여의도 한 가운데에서 버스가 고장이 났다
찬 바람이 부는데 5.16광장에 서서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콩나물시루같은 버스를 타고 시청앞까지 갔다
플라자호텔이 당시 중매장소로 아주 인기가 높았다
거기서 만나면 성사될 확률이 높다고 소문이 나서
주간지에도 소개가 되고 그랬었다
역시나 커피숖에 자리가 없었다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여 겨우 자리를 마련했다
지하1층에 있는 다과점에 자리를 하나 맡아놓고
다시 로비로 뛰어 올라와 장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집사람을 데리고 그리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 바로 옆 자리였다
자리도 몇 개 없었다. 간이 테이블이었다
그렇게 처음 장모님을 만나뵙게 되었다
첫 인상이 아주 좋았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어머님이란 호칭을 하였다
나도 모르게 그런 호칭이 나왔던 듯하다
장모님도 미소띤 얼굴로 내게 아주 잘 대해 주셨다
나중에 집사람이 언제 봤다고 어머니냐고 핀잔을 줬다
나더러 조금 뻔뻔한 면이 있다며 장난을 친다
내가 그런다. "그럼 아주머니라고 하냐?"
장모님은 참 인정이 많은 분이시다
집안 내 대소사도 두루 살피시고 많이 베푸신다
누구라도 세배를 온다거나 인사를 오면
절대로 그냥 보내시는 법이 없다. 꼭 봉투를 주신다
요즘 손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들과 딸, 사위, 며느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전에 가끔씩 바람을 쐬어 드리고 나면
꼭 내리시고 난 차 뒷자리에 봉투를 놓고 가신다
딱 내가 대접해 드린 식당의 비용만큼이 들어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는 배려다
외국에 가서 사는 손녀딸이나 손주들이 귀국하면
비행기값에 보태라고 또 봉투를 주신다고 들었다
밀린 세뱃돈이라고 하며 봉투를 주신다고 한다
2009년도에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지금까지 쭉 혼자 지내고 계신다
자손들이 한다고 하지만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절대로 내색을 하시는 법이 없다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을 나오셨다
피난 전에는 연백에서 아주 부농으로 잘 사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형제신데 모두 작은 마나님들이 계셨다
작은 할아버지네는 작은 할머니쪽 자손들이
큰 할머니쪽 자손들보다 훨씬 더 번성했다
큰 할머니 오빠가 모 은행 은행장을 하셔서
작은할아버지가 그 은행의 지점장을 하셨다
장모님 위로 오빠가 한 분 아래로 남동생들이 세 분
그렇게 해서 4남 1녀인데 바로 위 오빠와 바로 아래 남동생
두 분은 돌아 가셨고 그 아래 두 분은 아직 생존해 계신다
막내 외삼촌은 평생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내셨다
밀림개발의 선두주자로 나가셔서 애를 많이 쓰셨다
무슨 산업훈장도 받고 그러셨다
장모님은 아직도 활발하게 집안 대소사에도 다 다니시고
여기저기 전화통화도 하시면서 잘 지내고 계신다
집안 내 돌아가는 걸 훤하게 다 꿰고 계신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과는 생신이 같은 날이었다
그 바람에 제대로 된 생신을 잘 못 찾아 드셨다
내가 장남이라 우선 어머님 생신을 챙겨 드리느라고 그랬다
그래도 우리 어머님 생신에 자주 오셨다
당신의 생신날 사돈 생신 축하한다고 오셨어도
티 하나 내지 않으시고 잘 놀다가 가셨다
지금도 너무 죄송하고 고맙기 짝이 없다
수시로 어머님 보약도 해 들고 오셨다
1996년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부터
겨우 장모님 생신을 제대로 차려 드렸다
올해도 얼마 전에 생신이 지났다
사람은 첫 인상이 아주 중요한 거 같다
장모님을 처음 뵙고나서 참 인상이 좋았다
이런 분이라면 딸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딸을 알려면 장모를 보라는 말이 있다
그 말대로 우리 집사람도 아주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남들에게 베푸는 걸 아주 좋아한다. 나와는 좀 다르다.
주위에 사람들이 아주 많다. 동네일도 많이 한다
장모님의 모습에서 집사람의 모습이 묻어난다
44년 전에 처음 뵈었던 장모님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은 그 때 비하면 많이 늙으셨다
그래도 오래오래 사셨으면 하고 바란다
부디 100세까지라도 사실 수 있기를 바란다
첫댓글 아주 담담하고 정갈한 글로 장모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셨네요. 장모님을 중심으로 한 가족사까지...
감사합니다
강화도 교동도로 피난 나오셔서
초년엔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장인어른이 한의사 자격증 따실 때까지
결혼 후에도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하구요
그래도 늘 후한 마음으로 사신 걸 보면
심성은 타고나는 거 같습니다
나하나님 말씀대로
우리 장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
존경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다
감사히 잘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제나
가족 모두 건강하고
더 많이 행복해지세요.
응원합니다.
김옥춘 올림
네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우리 장모님 참 좋은 분이십니다
김옥춘님 댁에도
늘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시길
두 손 모아 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고령의 연세에도 아직까지 건강하신게 얼마나
다행밉니까? 그 연세시면 대부분 돌아 가셨던지
요양원에 계십니다. 참 현명하시고 인정이 많으신 어른 이십니다. 부인께서도 인성부터 배움으로 충분히 내조와 어른으로서 역활을 충분히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저의 94세된 장모는 잔정이
없으셔서 애틋한 기억이 없고, 처가를 가면 오히려 장인 어른이 잘 챙겨 주셨던 기억만 있습니다.
정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네 아직은 잘 버티고 계십니다
그래도 늘 걱정이 됩니다
연세가 연세다 보니까요
네 모전여전인 듯합니다
보고 배운다고 하지요
따뜻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
훌륭하신 장모님을 두셔서 부럽습니나.
저는 장모님의 살가운 사랑을 못받아서요.
그러셨군요
우리 장모님이 참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어머님보다 더 가깝게 지냈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제 남동생을 이뻐하셨습니다
자식들이 여럿이다 보면
더 정이 가는 자식이 있는 듯합니다
특히 저는 아버님과 장인어른이
같은 황해도 평산의 이웃 면 출신이시고
서로 아는 집안이라서요
저의 할머님이 하양허씨이시고
우리 처가가 하양허씨입니다
족보를 펼쳐보면 가까운 페이지에
양가가 기재돼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하양허씨네 족보에
올라가 있드라구요
그 덕을 좀 본 셈이지요 ^^*
마음이 넉넉하니
장수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푸시는 걸 좋아하고 긍정적이니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집안에 福이 들어오지요.
그러게요
그래도 연세가 있으셔서 늘 걱정입니다
장모님 베푸심으로 복이 온다는 말씀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디서 본듯한 모습입니다.
98세이신데 혼자 사시다니
신체와 정신이 건강하신 분이시네요.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도움을 주려고 하시는 장모님
진정 이 시대의 멋진 어르신이십니다.
사위에게 존경 받는 장모들은
별로 없는것 같은데 인품 좋으신
장모님과 엄마를 닮은 아내를 만난
청솔님께서 복이 많으신것이십니다.^^
네 정신도 말짱하시고
몸은 많이 빠지셨는데
아직은 그만그만 하십니다
네 뭔가 남들에게 베푸시는 모습
저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주위에 싫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지만
그건 제 욕심이겠지요
100까지 채우고 가셨으면
하고 바래 봅니다
감사합니다
옛말 에도
마누라가 이쁘면 처가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구요 ㅋ
부인께서도 모전여전 으로
후덕하시리라 짐작 가네요
잘 해드리셔유
그런가요? ^^*
네 그런 거 같습니다
처갓집 말뚝에 절은 못 하드라도
늘 감사하며 삽니다
집사람은 장모님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저보다 훨씬 너그럽지요
네 앞으로 더 잘 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따뜻한 가족사글 잘 보았습니다.저의 장모님 돌아가신지 10년정도 되는데
처음 장모님께 인사드리러 갔을때 첫마디로 결혼거절을 당했습니다.사실 제가 내세울게 하나도 없고 인물도 별로거든요.그래도 나 특유의 순발력으로 결혼에 골인했죠.ㅎㅎ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저는 반대였습니다
집사람이 제 눈매가 너무 날카롭다고
트집을 잡았다는데 장모님께서
남자는 그래야 제 구실한다고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