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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긴 겨울은 세상에 다신 없을 것이다. 나는 결국 오빠와 찍은 스티커 사진을 버리지 못 했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베개에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눈물에 젖은 베개가 축축해 다른 베개를 꺼내 와야 할 때도 있었다. 흐르는 눈물만큼 잊혀질 거라고, 사랑도 희미해질 거라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흐르는 눈물만큼 사랑의 깊이는 더해졌고 오빠의 모습은 선명해졌다. 그 끔찍한 겨울을 나는 집에 가끔 찾아오는 지희를 말벗 삼아, 두꺼운 책과 시를 대들보로 삼아 겨우 버텼다.
그리고 봄, 나는 대학생이 됐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내가 단 한 줄의 글도 써내려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글은 늘 서론에서 그쳤고 내 머리 속을 맴돌던 인물들도 입을 굳게 다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내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부모님은 마지못해 유학행을 결정하셨고 나도 그 결정에 동의했다. 더 이상 오빠가 있는 한국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눈물은 발작적으로 쏟아졌다. 나는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의 물가는 살인적이었다. 매달 들어오는 인세와 부모님이 보내주신 돈으로는 생활이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조그만 생쥐와 같이 생활하는 날들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점점 찾을 수 있었다. 글도 조금씩 쓸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뉴욕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고 결국 생활고에 못 이겨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게 됐다. 나는 우리 빌라의 주인인 케이슨 부인의 양아들의 한국말을 가르치게 됐다. 케이슨 부인은 갈색 머리를 가진 50대 여성으로 후덕한 인상이었지만 그만큼 마음씨가 고왔다. 그녀는 한국인 양아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한국말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두 번의 파양 끝에 겨우 케이슨 부인을 만나 정착한 양아들은 몹시 거칠다고 말했다. 그녀는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앞으로 들어 올 인세와 내야 할 학비를 가늠한 뒤, 얼른 대답했다. 물론이죠 부인!
그렇게 시작한 케이슨 부인의 한국인 양아들 존과의 첫 수업.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세상에나, 새빨간 머리를 왁스를 발라 모조리 세워 마치 성게같은 머리의 아이가 책상에 검은색 부츠를 신은 발을 올려놓고 나를 맞이했다. 눈에는 반항기가 가득했고 귀뿐 아니라 눈썹, 코까지 피어싱을 해서 인상이 험악했다. 존은 내가 들어왔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어폰을 뺀 뒤,
"Can't you speak Korean a little?(조금이라도 한국말 할 줄 알아?)"
라고 물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뭐, 케이슨 부인이 원래부터 낯선 사람에겐 적의감으로 가득 차 말을 잘 걸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정도야 각오하지만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으니 좀 난감하다.
나는 한국어 교재를 펴고 앉았다. 그리고 나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존은 그런 나를 변함없이 적의감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Hmm.........Let's start study. I will teach 가나다라song. It's like 알파벳song
It's easy. You just follow me. ok?(흠, 공부를 시작하자. 내가 가나다라송 가르쳐 줄게. 이건 알파벳송과 같아. 쉬워. 넌 그냥 날 따라하기만 하면 돼. 알겠지?"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
"아 자 차 카 파 타 하 "
"......."
"It's easy.(쉬워)"
내내 말없이 나를 쳐다보던 그 애가 한 첫마디는,
"키스할래?"
였다.
"..............뭐?"
이, 이.........이..........이 애 한국말 할 줄 알잖아!!!!!!
존은 혀를 쭉 내밀어 혀에 있는 피어싱을 가리키며
"이 피어씽은 키스 하는데 문제없어요."
라고 말한 뒤 웃었다. 나는 놀라 지금이라도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또라이"
"what?(뭐라고?)"
"You are freak(너 완전 돌았다고!)"
"I always heard that. (난 언제나 그런 말을 듣지)
나 한국말 전나 잘해. 그러니까 너 필요 없어요."
한국말을 누가 가르쳐줬는지 몰라도 이 애 얼굴뿐 아니라 입도 거칠었다. 나는 입을 앙 다물고 존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싫든 좋든 앞으로 난 너를 가르쳐야해. 왜냐면 케이슨 부인에게 이미 선금을 받았고 그 선금은 벌써 내가 월세로 내버렸거든."
"what is 썬금? and 워얼쎄?"
"You need me.(넌 내가 필요해)"
조니의 형편없는 한국어 실력은 그와 같이 다니는 한국인 친구가 가르쳐 준 것이라고 했다. 조니는 나를 향해 계속해서,
"전나 당신 못생겼어요. 이 춘녀."
이렇게 말하거나 아니면 (그 빌어먹을 한국인 친구에게 새로 배운 듯한)
"꺼져. 전나 싫어. 전나 구려. 우웩. 토 나옴."
라고 말했다. 내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언어순환부터 시켜야겠구나. 나는 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 했다.
"이제부터 '전나'라는 말은 하면 안돼."
"싫어."
"전나라는 말은 아주 나쁜 뜻이야. 절대 쓰면 안 되는 말이라구."
"난 나쁜말이 좋아."
존은 태연하게 말했다.
"앞으로 전나란말 쓸 때마다 네 피어씽 하나씩 압수할거야."
"what is 압수?"
"뺏을 거라고!"
"No way!!(안돼!)"
"그럼 전나란말 쓰지마."
소중한 듯 자신의 피어씽을 하나씩 하나씩 만지는 조니. 귀가 아주 제 수명을 다해 가는 걸레마냥 구멍이 뿅뿅뿅. 개성 강한 뉴요커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수준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전나 짱나."
나는 끓어오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 하고 존의 눈썹에 있던 피어씽을 가차 없이 빼버렸다.
"악!!!!!! what the hell are you doing??!!(너 뭐하는 짓이야?)"
존은 아픈지 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쳤다.
"쓰지 말라고 했잖아. 나중에 시험 봐서 통과하면 돌려줄게."
"전나 아프다고!"
나는 존이 눈썹을 신경 쓰는 사이에 귀에 있던 피어씽 하나를 또 뺐다.
"악!!!! You........You........."
"날 물로 봤다간 오산이야. 애송이."
***
"안녕? 조니 수업시간인데 잠자고 있으면 어떻게 하니?"
".........get out.(나가) 나 밤 샜어.........."
조니는 마스카라에 아이 라이너까지 그린 채로 말했다. 저 예쁘장한 꼴로 클럽에 가서 분명 여자 애들이나 신나게 꼬시며 밤을 샜겠지. 조니는 내가 있든 말든 잠에 곯아떨어졌다. 나는 이때다 싶어 곤히 잠든 조니의 귀에서 피어씽 및 귀걸이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뺐다. 케이슨 부인에게 1회용 위생장갑을 빌려 코에 있던 피어씽도 뺐다.(조니가 움직여서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내가 책을 한 권정도 다 읽을 무렵에서야 조니는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피어씽 타령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귀를 여 러차례 만지는 조니. 코도 한 번 만져보더니 사태를 파악한 듯 나에게 말을 건넨다.
".........내 피어씽 어딨어?"
나는 주머니에서 피어씽 한 움쿰을 꺼내 웃으며 조니에게 보여주었다. 인상을 쓰며 뺏으려고 했지만 나는 다시 주머니에 피어씽과 귀걸이를 넣었다. 감히 17살 애송이가 22살 누나를 건드려? 그것도 천하의 이진서를?
"나중에 시험 봐서 합격하면 돌려줄게."
"내놔."
"안돼."
"내놓으라고."
"합격하면 줄게."
"what is 합격?"
"pass."
".......OK."
좋았어!!
"But......."
"??"
"초록색은 돌려줘."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는걸 보니 중요한 귀걸이임에 틀림없다. 초록색 귀걸이는 다른 무채색 피어씽에 비해 오래된 것 같다고 나도 느꼈다. 하지만 쉽게 돌려줄 수는 없었다. 그건 우리의 유치한 싸움에서 조니에게 유리한 고지를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돼."
"못된 여자!"
조니는 소리쳤다.
"응. 난 원래 못된 여자야. 첫 번째 시험에 합격하면 줄게. 이 검은색 피어씽."
"........역시 못된 여자."
그 뒤로 조니는 첫 번째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다. 내가 내준 숙제들도 꽤 열심히 풀어 왔다. 어떤 날은 또 짙은 화장을 하고 클럽에 가서 밤을 새기도 했지만 그래도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수업을 듣곤 했다.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파 타 하!"
"가 나 다 리 마 버우 아 타 파 차"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으 이"
"너무 어려요!!!"
'어려워요'란 뜻이다.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주면서 읽어주었다.
"아 야"
"아야........아야? 아야 means 'It's hurt!' 바보여자."
피어씽을 밖으로 던지려는 제스쳐를 취하자 그제서야 따라한다.
"어 여."
"어 여 "
"오 요"
"오 요. 나 이거 알아. milk!"
"............."
앞으로 갈 길이 멀구나 이진서. 흑.
***
조니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준 그 빌어먹을 한국인 녀석을 드디어 만났다. 같이 밤을 샜는지 곤드레 만드레 다정하게 취해서 조니를 부둥껴 안고 같이 자고 있는 것이다. 이 애 역시 처음 만났을 때의 조니처럼 귀며 코며 눈썹이며 심지어는 입술까지 피어씽을 했는데, 나는 또 한 번 위생장갑을 꼈다. 후훗.
"뭐야?!"
그 아이는 거울을 보며 하늘이 두 쪽이라도 난 듯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뭐긴 뭐야. 너도 이리 와. 한국말 수업 좀 같이 하자."
"영어 배우러 왔는데 한국말은 왜 배워! 아 빌어먹을 존나 짜증나네."
나는 피어씽을 흔들며 느긋하게 말했다.
"한국말도 잘 못 하는 애가 무슨 영어를 배운다고 그러니. 너 영어도 한국말도 잘 못 하지? 딱 보니까 조기유학 실패 사례 같은데."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남자애는 몹시 화가 나서 내게 성큼 다가왔다.
"뭐 실패?"
"I think you are not good at English, right? You have to learn English. cause You are parents doesn't know that. I'm good at English also Korean.(내 생각에 너 영어 못 하는 거 같은데, 맞지? 너 영어 배워야해. 왜냐하면 너희 부모님은 네가 영어를 못 하는 사실을 모르시니까. 난 영어도 잘 하고 한국어도 잘 해.)"
"매튜. 그 여자 못된 여자."
조니가 내 독설에 덧붙여 말했다.
"어때? 너도 조용히 내 수업 듣는 게? 물론 세상에 공짜란 없어. 수업 듣고 싶으면 그 때마다 거품을 잔뜩 낸 카푸치노 한 잔씩 사와. 아, 위에 시나몬 가루는 빼고. 난 그 향 싫더라."
매튜라는 아이는 화가 날 때로 나서 다시는 웃지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조니의 방을 박차고 나갔다. 조니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못된 여자."
그리고 15분 뒤, 매튜는 카푸치노를 사왔다. 나는 매튜를 바라보며 유유히 웃으며 카푸치노를 마셨다.
"흐응. 근데 이거 시나몬 가루 뿌려 있잖아. 빼달라고 말했어야지."
매튜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빼달라고 어떻게 말하는지 몰라."
"알겠어. 가르쳐줄게. 둘 다 앉아. 수업 시작하자."
영어 이름은 매튜. 한국이름은 손준호. 둘 다 피어씽을 빼고 나니 말끔한 얼굴의 소년들이었다. 특히 조니는 찬찬히 뜯어보면 안 예쁜 구석이 없을 정도로 미남이었다. 특히 반항적인 눈매는 날카롭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천연의 매력이 숨겨져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둘은 현재 뉴욕에서 현직 모델로 활동 중이었다. 그래서 뉴욕 패션 위크가 다가오는 지금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얼굴을 알리기 위해 파티에 참가해서 밤을 보낸 뒤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것이었다. 조니는 슬림한 몸매와 날카로운 눈매로 디자이너에게 러브콜을 꽤 많이 받는 모델인데 번 돈을 모조리 저축하고 있다고 매튜가 귀뜸해 주었다. 둘은 죽이 잘 맞아 어린애처럼 장난을 잘 쳤다. 귀여운 녀석들이었다.
***
"김치찌개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따라 해봐."
"너무 쉽잖아."
"그래? 그럼.......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목이 긴 기린 그림이고 네가 그린 기린 그림은
목이 짧은 기린 그림이다. 목이 짧은 기린 그림이면 어떻게 목이 긴 기린 그림이면
어떠냐 모두 똑같은 기린 그림인데."
"........김치찌개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임니다..."
귀여운 조니.
"아주 맛이 좋습니다."
"아주 마시가 좋습니다."
"마시가 아니라 맛!"
"마시가 아니라 맛!"
"아니 맛만 따라해야지."
수업은 즐겁게 진행 됐다. 매튜는 중학생 국어 교과서로 드디어 영어 공부와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조니는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국어 교과서를 읽기 시작했다. 겉모습만 무서웠지 둘 다 속은 어린 소년티가 많이 났다. 특히 매튜는 장난끼가 많았고 조니는 의외로 다정다감했다. 겉으론 케이슨 부인에게 무뚝뚝하게 굴었지만 어찌나 케이슨 부인을 챙기는지 마음이 짠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케이슨 부인이 누군가 부딪혀 넘어졌는데 화가 잔뜩 나서 그 사람을 찾겠다고 나서는 걸 매튜와 내가 뜯어말렸다. 그리고 조니는 케이슨 부인을 업고 응급실까지 뛰어갔다. 응급실 간호사는 물론 이 작은 상처로 응급실을 쓸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케이슨 부인은 그런 존이 귀여워서 씩씩 거리는 존에게 침착하고 약국에 가서 반창고나 사오라 그랬다. 케이슨 부인과 나는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었다. 물론 심각해 하는 조니 몰래.
패션 위크가 끝난 2주 뒤 우리는 드디어 첫 시험을 보게 됐다.
"첫번째 문제. 다음 질문을 잘 듣고 영희의 나이가 몇 살인지 맞춰주세요.
영희의 부모님은 결혼한지 3년 만에 영희를 낳았습니다.
영희의 부모님이 결혼식을 올린 년도는 1995년입니다. 지금이 2006년이라고 할 때 영희는 몇 살일까요?"
"매튜! 매튜! 매튜! 매튜! 매튜!"
"매튜 말해주세요."
"10살!!!!!!"
"틀렸습니다."
"아 Why!!! 허니문 베이비일지 어떻게 알아요!!"
"영희 부모님은 피임을 아주 잘하셔서 결혼한지 3년 만에 영희를 낳았답니다."
"아, 피임 뭘로 했는데?!"
"닥쳐주세요."
"조니"
"네 조니군."
"8살......?"
"축하합니다! 노란 피어씽 여기 있어요."
그렇게 첫 번째 시험, 두 번째 시험, 세 번째 시험, 네 번째 시험이 끝나고 두 녀석이 모두 고등학교 수준의 국어(매튜에겐 영어까지)를 습득해서 꽤 능숙하게 한국말을 구사했다. 나도 제법 분위기가 밝아져 괜한 괴리감에 눈에 잘 안 읽히던 소설책도 읽을 수 있게 됐다. 단어 공부를 틈틈이 할 수 있었고 새로운 글도 구상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셋은 아주 친해져 뉴욕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가끔은 내가 싼 도시락을 들고(재료는 물론 케이슨 부인의 냉장고에서) 센트럴 파크에서 잔잔한 햇살을 즐기기도 했다.
그날도 센트럴 파크에서 피크닉을 즐기기로 했는데 매튜는 새로 사귄 여자친구에게 이번에는 열성적이어서 빠졌고 케이슨 부인은 십자수 모임에 간다고 빠져 조니와 나, 단 둘이 센트럴 파크에 오게 됐다. 우리는 돗자리를 폈다. 조니는 요새 내가 추천해준 한국어 소설책에 푹 파져 책을 읽고 있었고 나 또한 과제를 하고 있었다.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가 마침내 내게 또 다시 찾아 온 것이다. 길고 긴 겨울을 지나.
나는 과제를 하다 새근거리는 조니의 숨결 소리에 조니를 쳐다보았다. 조니는 책을 읽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초록색 귀걸이를 제외한 모든 피어씽을 말끔히 뺀 조니의 얼굴을 너무나도 고왔다.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무려 5cm 자란 키에(거의 190cm에 달했다. 하지만 얼굴이 너무 작아서 거의 9등신은 되는 것 같았다) 얼굴에도 이제는 성숙한 티가 났다. 그런데 매튜가 걸어 왔다. 나는 매튜에게 조니가 자니 조용히 하라고 했다. 매튜는 데이트에 실패했는지 털썩 주저앉아 쓸데없이 잔디를 뜯었다 다시 심었다 했다.
"얌전히 좀 있어 매튜. 잔디가 무슨 잘못이야."
"난 조니처럼 얌전히 못 있어. 여자가 뭐 한 둘인가? 나더러 남자답게 입으라잖아. 그 여자 취향에 맞게 내가 왜 바뀌어야 하지? 난 나를
그대로 사랑해 주는 여자를 찾겠어."
"호오. 그래. 하지만 사랑은 때론 사람을 저절로 바꾸는 힘이 있기도 하지."
"그런 것 같아. 조니를 봐. 피어씽 매니아가 순식간에 단정한 놈이 됐어."
"무슨 말이야?"
"진서가 싫어하니까 초록색 귀걸이 빼고는 안 하잖아. 바보같이. 나같으면 더 뚫어 버리겠어."
"내가 싫어해서 귀걸이를 안 한다고? 그럼 초록색 귀걸이는 왜 해? 하려면 다 빼지."
"그건........"
"그건 우리 엄마가 준거야. 생모가."
조니가 일어나서 말했다. 조니는 일어나자마자 매튜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내가 말하지 말라 그랬지."
"악! 조니! 나도 모르게 그만! 너도 알잖아! 나 비밀 같은 거 못 지키는 거. 그리고 다 안 말했어."
나는 열심히 매튜에게 헤드락을 거는 조니를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조니가 물어왔다.
"뭘 그렇게 봐?"
"그냥. 조니가 새삼 잘 생겼다고 느껴서. 조니는 학교에서 인기 없어?"
"없어."
조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조니의 팔에 묶여서 켁켁 거리면서도 매튜가 말을 했다.
"얘 인기 많아."
귀찮은지 쑥스러운지 더욱 더 세게 매튜에게 장난을 치는 조니였다. 내 마음도 햇살을 따라 잔잔하고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한동안 그런 적이 없었는데 조니가 술에 잔뜩 취해서 매튜에게 업혀 내 방으로 들이닥쳤다. 매튜는 자신이 찜한 데이트 상대가 밖에 기다린다고 조니를 놓고 얼른 나가 버렸다. 조니는 내 침대에 누워 뭐라고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헌데 조니가 울고 있었다. 그렇게 심지가 굳은 아이가. 자존심이 센 아이가. 남에게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아이가. 눈에서 눈물을 하염없이 떨어뜨렸다.
"조니, 왜 그래?"
"I'm so missing my damm mother.(나는 빌어먹을 내 엄마가 그리워.)"
나는 조니를 안아주었다. 조니는 두 번이나 파양을 당했다. 친부모에게까지 합하면 모두 3번의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조니는 남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매튜 외에는 거의 친구도 없는 듯 했다. 나는 조니가 그들 특히, 그를 미국으로 입양 보낸 생모를 원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그리워 이렇게 울었을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한국말도 배운 게 틀림없다.
조니의 긴 속눈썹이 눈물로 젖었다. 나도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껴안은 채 한참을 울었고 그러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늦게 일어나 보니 조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매튜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조니의 웃음을 보고도 같이 웃을 수 없었다. 문득 너무 많은 슬픔을 간직한 저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매튜가 또 다른 여자가 생겨 데이트를 나가고 케이슨 부인이 어김없이 십자수 모임에 나간 토요일 오후 나와 조니는 같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조니 무릎에 누워 최근에 구상한 소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시나몬 시럽을 뺀 따뜻한 카푸치노 두 잔이 있었다. 조용한 시간을 깨고 조니가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선 사랑 고백 어떻게 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조금 초조해졌다. 이 녀석에게도 드디어 매튜처럼 여자가 생긴 걸까. 그럼 난 토요일 오후에 심심해서 어떻게 하지. 아무튼 나는 초조함을 감추고 최대한 심드렁하게 말했다.
"여기랑 다를 거 없어. 나 너 좋아해. 이렇게 말하지. 사실 나도 잘 몰라. 어떻게 하는지."
"나 너 좋아해."
"응 아마 그런 표정으로 할 거야."
조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져서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시 소설을 구상하는 척 했다. 웬지 설레였기 때문이었다. 조니는 내 공책을 뺏은 뒤 한 차례 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너 좋아해."
"그래 그렇게 하는거래두."
"나 너 좋아해. 몇 번 말해야 알아 듣냐? 바보여자."
"........"
"나 조니가 너 바보여자 좋아해"
"........"
"키스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이 아이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를까 무섭다. 나는 이 아이가 우는 게 싫다. 무섭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한 느낌이 어떠한지 알기에 그를 거부할 자신이 없다. 게다가 나는 조니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조니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나는 도저히 이 애를 밀쳐낼 수가 없다는 걸. 날 닮은 이 아이를.
***
"진서야."
"누나라고 불러. 한국말 다시 배울래? 존댓말 몰라? 가르쳐 줬잖아!"
"이리 와봐."
"너가 와 임마!!"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길. 난 양손에 물건을 들고 있는데 조니는 빈손이다.
이 자식, 좋아한다 어쩐다 할 때는 어쩌고.
"힛"
"웃지 마!"
뒤뚱뒤뚱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데 쪼르르 달려와서 앞을 가로 막는다. 째려봐도 실실 웃는다. 그러더니 나를 꼭 안는다.
"너무 작아."
"숨 막혀 임마"
"키도 작고 몸도 작고."
"그래 너 키 커서 좋겠다."
".........자꾸 안아주고 싶어."
"..........."
"키스한다."
키스하려는 녀석의 손에 짐을 지어주었다.
"다 들고 오면."
녀석은 아파트까지 실실 웃으며 나를 따라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리도 자기가 한다.
나는 안심하고 노트북을 켰다. 아, 졸업을 위해 정리할 프레젠테이션하며 읽어야할 책하며
골치가 아프다. 한참 노트북으로 졸업논문을 작성하고 수정하길 반복하는데 조니가 노트북을 뺏어간다.
"이 달 안으로 해야 하는 거 알잖아, 조니. 얼른 줘."
조니는 장난스레 웃는다. 저 자식이 저렇게 웃으면 요새는 불안해 죽겠다.
날 번쩍 들어 침실로 데리고 간다.
"조오오오온!! 제발......."
"놀자."
"........나중에"
"지난 주에도 식사하다 스터디 모임 깜빡 했다고 그냥 나간 거 잊었어?"
"아니......."
조니는 침대에 날 안은 채 누웠다. 그리고 아빠가 애기 비행기를 태우는 듯 들었다, 올렸다 장난을 친다.
"무거워서 추락할 것 같습니다. 휘융 다시 올라가네요."
"풋 이게 뭐야 조니."
"어어어어어어 역시 진서 비행기 오늘 과식했는지 무게가 돼지 같습니다. 다리가 부러질 것 같아요. 네에 그래도 우리의 조니군 잘 버팁니다."
쪽
"진서돼지의 뽀뽀로 힘이 좀 나지만 부족합니다."
조니는 자기의 이마에 내 입술을 착륙시켰다.
쪽
이번에는 볼이었다.
"볼에 하는 것도 좀 부족합니다. 그럼 어디에다 해야 할까요?"
"키스까지 앞으로 3초. 3, 2, 1 키스한다!"
언제나 부드러운 조니의 키스. 외모와는 달리 정말 신사다운 키스다. 나 변녀일까?
혈기왕성한 조니가 키스를 할 때면 조니보다 내가 더 조바심이 난다. 키스를 하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 허락하는 내가 밉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드러운 조니의 키스를 거절할 수가 없기도 했다.
"안전하게 착륙했습니다."
조니는 나를 자신의 품에 안아주었다. 조니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빠르게 뛰는 사랑소리가 들린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조니"
"응?"
"왜 키스이상 안 해?"
"I'm waiting.......until you forgetting him.(난 네가 그를 잊을 때 까지 기다릴 거야.)"
"기다리지 마"
벌떡 일어난 조니.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있다. 아이처럼 기뻐하는 게 보인다. 나는 그런 그에게 아픈 말을 해야만 했다.
".......나.......그 사람 평생.......잊을 수 없을지도 몰라......."
난 고개를 숙였다. 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오빠가 좋다. 내게 한 번도 웃음을 보여주지 않았던 그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좋다. 사랑한다. 그와 보냈던 3년간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축제 때 부끄러운 표정으로 나와 찍은 스티커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나를 안아준 그를, 한 사람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빛났던 그를, 그 따뜻한 손을, 바래다 주던 골목에서의 긴 그림자를, 다정함을, 잊을 자신이 없다. 첫사랑은 그렇게 길고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
"........아니 평생 잊을 수 없어........그런 거 기다리지마......."
조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화가 나 있을까?
".......그치만.......그치만......네가 계속 내 곁에만 있어준다면
바보같이 투정만 부리고 너한테 잘해주는 거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착한 네가 있어주면........나.......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용기를 내어 진심을 말했다. 이기적인 마음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오빠를 잊을 수 없으면서도 나는 조니가 내 곁에 있어줬으면 했다. 가끔은 조니가 있어주면 오빠를 지울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도 같았다.
"I'm bad guy........so.......(난 나쁜 남자야 그러니까)"
눈물이 울컥하고 쏟아지려고 한다. 이기적인 나, 조니의 마음을 계속 받아주지 않았으면서
계속 내 곁에 있길 바라다니. 내 자신이 끔찍하다.
"네가 나 싫다고 해도 나 너 그 새끼한테 안 보내. 묶어서라도 너 내 곁에 둘 거야. 아무데도 못가."
조니는 고개 숙인 나에게 키스를 했다. 꽤 거친 키스다........우린 오랫동안 키스를 했고(사실 조니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거나 다름없지만) 난 조니의 능숙한 그의 키스에 머리가 아찔해져 왔다. 매튜가 말한 대로 조니는 정말 굿 키서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그때 조니의 손이 내 등쪽 상의 속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정말 위험하다.......그리고 조니는 미성년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솜씨로 내 속옷의 버클을 클렀다. 나는 조니를 간신히 밀쳐냈다.
"못된 여자."
".........늑대"
조니는 일어났다. 그리고 손으로 무언가를 돌리고 있었다. 내 속옷이었다. 그때야 나는 가슴 언저리가 허전한 것을 느꼈다.
"야!!!!"
나는 양손으로 얼른 가슴을 가렸다.
"흐음......."
조니는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내 속옷을 돌린다. 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이 자식!"
"좋아한다고 말해주면 돌려주지."
"됐어! 다른 거 입고 올 거야."
"흐음.......티셔츠도 벗길 거야."
"야!!"
"할 수 있어."
"........씨......."
"좋아한다고 말해줘."
"싫어"
".........사랑한다도 아니잖아"
순간 아픔이 언뜻 조니의 얼굴에서 지나갔다. 나는 물론 조니가 좋다. 굳이 이렇게 짖궂은 장난을 치지 않아도 조니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조니는 이기적으로 구는 나를 이렇게 놀림으로써 그냥 이 상황을 넘기고 싶은 것이었다. 나도 그의 그런 맘을 알지만, 그렇지만 이런 바보같은 상태로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해......."
"안 들려."
"좋아한다구........."
"누굴?"
"너........."
".......너가 누군데?"
"조니, 조니 너! 조니 너 좋아한다구!!"
"누가?"
"........씽........나 이 못된 여자가 조니 널 좋아해."
"OK"
조니는 그제야 웃으면서 내 속옷을 돌려주었다.
***
바늘구멍 같았던 졸업논문도 겨우 통과가 되고 졸업만 남겨 둔 어느 날, 나와 조니는 매튜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향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백화점 안을 구경했다. 백화점 안은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볐으므로 조니는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다시피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선물을 고르고 있는데 나는, 보았다.
민서은을.
민서은 옆에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른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사람은 시우오빠가 아니었다. 나는 조니의 품에서 빠져 나와 민서은에게 달려갔다. 민서은은 나를 알아보지 못 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5년 전 딱 한 번 만났을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시우 오빠 옆에서 웃던 저 여자를, 시우 오빠를 돌려달라고 울먹이던 저 여자를, 내가 잊을 리 없다.
"시우오빠. 나 기억 안 나요? 그때 나 고등학생 이었는데. 그러니까, 시우오빠."
민서은은 시우라는 말을 듣고 표정이 금새 어두워졌다.
"헤어졌어요."
"뭐라구요? 당신, 당신, 미쳤어요! 당신이 돌려 달라 그랬잖아!"
나는 목소리가 커졌고 많은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어느새 조니가 옆에 다가왔다.
"옛날 이야기로 미련하게 이러지 말아요. 벌써 5년 전 일이에요."
"뭐라구요?"
"시우랑 나랑 5년 전에 헤어졌다구요. 나는 그게 더 놀랍네요. 당신이 여태 그걸 몰랐다니. 이제 구질구질하게 아는 척은 그만하죠. 내 남편에게 실례같네요. 그럼."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니가 무어라 무어라 말을 걸어왔지만 단 한 마디도 내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
매튜의 생일 파티에는 결국 가지 못 했다. 나는 침대에 무릎을 안고 앉아 가만히 5년 전에 찍어 색이 흐려지는 스티커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웃지 않는 시우 오빠 옆에 찰싹 붙어 환하게 웃고 있는 19살의 나. 나는 시우오빠와 보냈던 시간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리 선명하지는 않았다. 내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시우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민서은의 말대로라면 시우 오빠는 5년 전에 민서은이 아닌 나를 택했었다. 하지만 어째서 나를 붙잡지 않았을까? 나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다시 생각했다. 조니를. 그리고 시우 오빠를. 옛사랑에게 다시 돌아가느냐, 지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정착하느냐. 나는 하나도 모르겠다. 시우 오빠는 그때 나에게 미안하다고 그랬다. 그리고 조니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조니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시우 오빠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겠다. 달빛은 새파랗게 질려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일주일 뒤 아침. 모든 게 여느 날 처럼 평범한 일상과도 같았다. 나는 전해주지 못 했던 매튜의 생일 선물을 매튜에게 주었고 매튜는 생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 단단히 삐져있던 것을 조금 풀게 됐다. 오늘은 지희가 뉴욕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라 일찍 자리를 떠야 했다. 조니는 일주일 내내 아무 일 없는 듯이 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뉴욕 JFK 공항>
나는 지희를 반갑게 맞았다. 지희는 몰라지게 예뻐져 있었다. 먼저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면 그녀를 지나칠 뻔 했다.
"넌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지희의 핀잔. 나는 지희를 안았다. 지희도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지희에게 이곳저곳 관광을 시켜줄 계획이었지만 지희는 촌스럽게 무슨 관광지냐며 그냥 너희 집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나 하자고 그랬다. 역시 지희였다.
지희와 나는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란히 누웠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 하고 결국 물었다.
"지희야. 시우 오빠랑 연락해?"
지희는 천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
"나 최근에 민서은 봤다. 뉴욕에서. 결혼도 했더라. 그리고 5년 전에 시우 오빠랑은 끝났었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 시
우 오빠가 날 선택했던 걸까? 그렇다면 왜 내게 오지 않았던 걸까?"
지희는 계속 천장을 보며 대답했다.
"네가 가서 직접 물어 봐. 두 사람 사랑놀음이지 타인이 관여할 바 아니잖아."
"내가 메일 보냈잖아. 나 좋아해 주는 사람 있는 거. 나랑 너무 닮은 아이야."
"네가 알아서 해."
"어휴. 매정한 년! 안 바뀐 건 너다 이 년아!"
그때 문을 열고 매튜와 조니가 들어왔다. 지희와 매튜의 눈이 부딪쳤다. 매튜는 지희가 아주 흥미롭다는 듯 쳐다봤고 지희는 금방이라도 "뭘 꼬라 봐 꼬맹이"라고 할 기세였다. 아무튼 우리 넷은 식사를 같이 했다. 매튜는 지희를 꼬시려고 온갖 수를 다 썼다. 하지만 지희는 정석을 풀 때처럼 산같이 꼼짝도 않았다. 조니와 나는 조용히 식사만 했다.
지희가 돌아가고 또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여권을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조니를 봐야만 한다.
"조니, 나 한국.....가게 됐어."
"가게 된 거야........가는 거야........?"
한국말에 완전히 능숙해진 조니.
난 우물쭈물 거리며 조니 앞에 섰다.
차마 이 애의 눈을 바라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여버렸다.
"........가는 거야."
"...........OK."
너무도 쉽게 오케이라고 말하는 조니.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기적인 내가 밉다.
20살의 나처럼.......조니도.......조니도.........얼마나.........
"흑........"
"why are you crying?(왜 울어)?"
"Beacuse I'm so sorry........and It's so hard that I'm letting you.(왜냐면 네게 너무 미안해. 그리고 널 떠나보내는 게 너무 힘들어)"
"why? you haven't loved me........always.(왜? 넌 날 사랑하지 않았어. 언제나.)"
나는 더 이상 울 수도 없었다. 내가 우는 건 조니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
<한국>
축제 때 사진이었다. 그곳엔 어떤 여자를 안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여자의 모습은 뒷모습만 찍혔다. 익숙한 얼굴이었고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그건 분명 시우오빠의 얼굴이었고 내 고등학교 3학년 때 축제 때 사진이었다. 나는 앨범을 놓고 그제야 울 수 있었다. 5년 동안 참은 울음이 굵게 흘러내렸다. 슬픔과 기쁨이 뒤엉켜 복잡한 실타래를 만들었다. 그 작은 사진 속에서 시우오빠는 나를 안고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반했던 그 미소 그대로.
"야! 이진서! 어디 가!"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시우 오빠와 내가 자주 가던 카페에 갔다. 카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카페 창가에........시우 오빠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카페로 뛰어 갔다.
".......오빠"
시우 오빠다. 오빠다. 오빠는 웃었다.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7년간의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
오빠와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는 두서없었지만 전과 다름없이 즐거웠다. 달라진 게 있었다면 이제 나도 커피와 술을 마실 수 있게 됐다는 거였다. 오빠는 나를 볼 때 마다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변함없는 미소에 나는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너무 울렁거려 오빠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오빠는 수줍어하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순간 나를 안으면 티는 안 내려고 노력해도 언제나 귓불이 빨개지던 조니가 생각났다. 나는 도리질을 했다. 내가 기다리던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 생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오빠는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집 앞에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입술이 부딪치려는 순간,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또 조니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은 떨렸다. 나는 헷갈렸다. 오빠는 내가 키스를 거절했음에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사랑한 미소. 내가 늘 갈구하던 미소. 근데 나는 왜 자꾸 조니가 생각나고 헷갈리는 기분이 드는 걸까.
나의 의구심을 불식하듯 오빠와 나 사이는 예전과 같았다. 여전히 키스는 할 수 없었지만. 오빠에게 급한 일이 생겨 집 앞까지 차로 태워다 주고 헤어졌다. 그런데 집 앞에 누군가 있었다. 나는 그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조니였다.
조니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나를 안았다. 나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난 너와 달라. 이진서."
".......여긴 어떻게........"
"넌 정시우를 잡을 용기가 없었지만 난 아냐. 넌 그냥 울기만 했지만, 난 너 죽어도 안 보내. 내 곁에 있어. 늘 웃게 만들어 줄게. 나 잘 생겼잖아. 물론 그걸로 부족한 거 알아. 그래서 나 네가 없는 동안 카푸치노 만드는 법도 배웠어. 카푸치노도 맨날 만들어 줄게. 공짜로."
"조니......."
"계속 들어. 지희씨한테 들었어. 그 자식 변호사라며. 난 지금은 그냥 모델이지만 꼭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네가 일 안 해도 집에서 글만 쓰게 해줄게. 네가 우리 엄마처럼 나 버리고 가도 좋아. 난 항상 널 이렇게 사랑할 거니까. 그 자식은 그런 거 못 하잖아. 나는 할 수 있어. 또.......또.......그냥 키스하면 안돼?"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모르겠다. 내가 왜 우는지. 그렇게 사랑한 오빠가 내 곁에 있는데, 겨우 나를 향해 웃게 만들었는데, 조니 얼굴을 보니 반가워 미칠 것 같다.
처음 이 애가 나에게 키스할 때처럼 난 도저히 이 애를 밀어낼 용기가 없다. 사랑인지 그 무엇인지 알 순 없지만 지금 내 곁에 와 있는 이 애가 반갑고, 고맙고, 사랑스럽다. 조니는 내게 키스하려고 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미안해........"
조니는 나를 꽉 안았다. 나도 온 힘을 다해 조니를 안았다.
"바보처럼 울지 마. 네가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어. 기다릴 거야. 돌아와. 분명히 말했어. 돌아와."
***
나는 시우 오빠 앞에 마주 섰다. 내 얼굴에 서린 비장함에 오빠도 긴장을 했다. 하지만 곧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빠가 웃는다. 너무 사랑한 그 미소 그대로. 나는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랑 있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너무 세게 뛰어서 가끔은 그게 아파와요.
그런데 조니랑 있으면 말이에요.
오빠랑 있을 때처럼 두근거리진 않지만
마음이 따뜻해져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웃고 있어요.
어떤 게 사랑이에요? 제발 가르쳐줘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요."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내가 5년 전에 서은이에게 한 말이야. 그때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더라.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지. 네가 아니면 언제부턴가는 웃을 수가 없더라. 이게 나는 너에 대한 미안한 감정인줄 알았어. 헷갈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 내가 기다리던 서은이가 내곁에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지. 근데 네가 아니면 정말로 웃을 수가 없더라.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한국 떠나던 날 나 공항에 갔어."
"아.......흑.......왜.......왜 안 붙잡았어요!........왜! 왜 나 그냥 가게 내버려 둔거에요? 왜 5년이나 찾아오지 않았어요?"
"작은 새를 꽁꽁 묶어서라도 내 곁에 두고 싶었지만, 몇 번이나 울어도 또 다시 일어나던 작은 새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나는 아직까지 확신이 없어서 널 잡을 수 없었지. 널 사랑한다는 확신이 든 건 2년 뒤였어. 너무 늦었지? 하지만 네가 날 여전히 사랑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 그래서 뉴욕에도 갔어. 그리고 센트럴 파크에서 너를 봤지. 너에겐 새 남자가 있었어."
"그땐 아니에요. 나는 언제나........오빠를.......기다렸다구요!"
"알아. 네가 힘들어 한다는 거 언제나 지희씨가 알려줬으니까. 하지만 진서야. 너는 몰랐겠지만 너 그 날 참 예쁘게 웃더라. 네가 그렇게 예뻐 보인 적이 없을 정도로. 내가 없어도 너를 웃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었고 너는 그 아이 곁에서 웃었어. 마치 내가 은서 없이도 네 옆에서 웃었던 것처럼."
".........흑........"
"사실 나도 아직까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너와 마찬가지로 헷갈려. 선택권은 이제 너한테 있어. 난 여전히 널 사랑해.
"........아.........난........모르겠어.
내 사랑이 무언지.........오빠........오빠가 나 잡아주면 나 안 갈게요."
오빤 고개를 저었다.
".......5년 전 그 날 넌 내게서 날아 간 거야. 미안하다. 너를 사랑한단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서."
그리고 웃었다. 내가 지독히 사랑했던........사랑했던........그 웃음.
***
<파리 밀라노>
화려한 조명아래, 검은 벨벳 정장을 입고 무대에서 걸어 나오는 조니.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로 달려갔다. 나를 저지하는 안전요원들. 나는 비대한 안전요원들 사이를 최대한 비집고 무대로 달려가 런웨이에서 워킹하는 조니에게 소리쳤다.
"조니!!!! 존!!!!"
존이 턴 하려는 순간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환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리는 안전 요원들 틈에서 안감힘을 쓰고 있는 나를 봤다. 패션쇼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조니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진서......?"
조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무대 아래로 손을 뻗어 달려오는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조니에게 속삭였다.
"너야, 너! 조니 네가 내........마지막이야."
무대 위로 안전요원들이 올라오려 하지만 비대한 몸집 때문인지 쉽지가 않아 보였다.
조니는 나를 안아 올린 뒤 속삭인 뒤 키스했다.
여기저기서 플래쉬가 터진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가득하다. 드디어 올라온 안전요원들 무대 끝에 있던 디자이너의 손짓에 다시 내려갔다.
***
[천재 소설가 이진서, 탑 모델과의 화려한 입맞춤]
스포츠 신문 1면의 헤드라인을 읽다 신문을 조용히 반으로 접는 시우. 5년 전 그 날을 회상한다.
".......미안해 서은아 아무래도 나.......진서 잡으러 가야 겠어"
"뭐?"
".........내가.........사랑하는 것 같아........진서를......."
"시우야! 시우야!"
시우는 부질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저은 뒤 회사업무에 몰두해보려 노력한다.
***
"아무튼 지희랑 매튜 또 헤어졌대. 걔네는 도대체 몇 번을 헤어지는 거야. 어차피 몇 주 뒤에 또 실실 웃으면서 팔짱 끼고 나타나겠지?"
"아마도."
조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각났다.
"그 때 나한테 뭐라고 했어?"
"언제?"
"내가 너한테 뛰어든 날.
나한테 뭐라고는 한 것 같은데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렸어."
"안 말해 줄 거야."
"뭐야?! 말해 줘."
"결혼식 첫날밤 말해 줄게."
"아 지금 말해 줘!"
조니는 대답 대신 키스를 했고 나는 정말로 우리의 결혼식 첫날밤에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진서.......넌 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그리고 나는 드디어 두 번째 소설을 출간했다. <처음과 마지막 사이> 소설은 물론 베스트 셀러에 올랐다.
첫댓글 이번편도잘읽고갑니다!전 본편보다 훨씬마음에들어요♡
홍연님 감사합니당♥ ㅎㅎ 사실 장편이었는데 압축하다 보니까 ㅎㅎ 조니와의 달달한 러브씬이 많이 삭제 됐어용 ;ㅁ;
으잉 보고싶어요 보고싶어 본편에선 시우가 너무 멍청해보여서 속상했는데 이런 조.니 등장이후로 급하강^^..시우 넌 그냥 안녕ㅋㅋㅋ 새로 단편하나 또 만들어주세요!저를위해서!조니의 이야기라던지 결혼후 이야기라던지..으잉 두근두근거려요!
..우와 이어질줄알았는데 뜻밖의 인물과 이어지네요~~~~잘보고 갑니다 !다음소설도 기대되요ㅠㅠ
ㅋ술취한소녀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아무래도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그리다 보니 시우랑은 이어지질 않았네용 ㅎㅎ 다음 소설도 열심히 써서 기대에 부흥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
삭제된 댓글 입니다.
흔들고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넹ㅎㅎ 예상 밖의 인물인 조니 ㅎㅎ 근데 처음부터 저는 조니와의 사랑을 염두해두고 쓴 거라 ㅎㅎㅎ 제목처럼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주인공의 사랑 고민에 대해 그린 소설인데 잘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 앞으로도 열심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당ㅎ
오예!번외완전기다렸는데 드디어 오늘 나왔내요~!!!얼마나기다린줄 몰라요~~!!!잘읽고가요 ^^
반듸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ㅎㅎ > _ <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단편 더 많이, 더 열심히 쓰도록 노력할게요 ^_^
제목에 이끌려서 한번 읽어봤는데 번외편이였군요! 그전편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약간에 반전이 있어보이면서도 문체도 좋았습니다.
MayBe ! 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게다가 문체까지 칭찬해주시니 너무 황공하네용 ;ㅁ; 더 더 더 열심히 글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주가 까칠하면서도 귀엽네요 여주는 선생님다운 지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번외편이라고 하는데 전 안읽어봐서 모르겠네요 죄송 __합니다
Love11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_^ 읽어주시고 이렇게 댓글도 달아주셨는데 죄송하다니용!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글쓰겠습니당ㅎㅎ
조니 너무 귀여워요ㅠㅠ
꿀너따위가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 _ < 새로운 남자 주인공이 마음에 드셨다니 저도 좀 한시름이 놓이네용ㅎㅎ 중장편을 압축하다보니 조니의 매력이 조금 떨어질까 걱정했는데ㅎㅎ 앞으로 더더 열심히 글쓰겠습니다
번외를이제서야보게됫어요!기대햇는데!기대한만큼보기잘햇다는생각이듭니다!^^
핫. 개강한 뒤로 과제가 쏟아져서 며칠 동안 못 들어 왔는데 왠지아프네님 읽어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당♥
과제과 수습되면ㅎㅎ 좀 더 나은 단편으로 돌아올 게요 ^_^
팬 됐습니다^^
헐퀴. 감사합니당♡ 여름방학도 시작 되고 이제 슬슬 다시 연재하려구요. 그때 꼭 읽어주세요!
잘봤습니다